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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이미 ‘머무는 바없음’을 설했다. ● 내맡김영성 관련글

은가루리나 2017. 3. 9. 09:19


해오름 등급변경▼ 조회 312 추천 1 2016.07.06. 09:43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장7~8절)



마술 같은 소리다. 

청하면 받는다니, 찾기만 해도 얻는다니, 문을 두드리기만 해도 열린다니 말이다. 

한 마디로 ‘도깨비 방망이’다. 

“금 나와라! 뚝딱!”땅바닥만 두드려도 나온다. 

“은 나와라! 뚝딱!’ 내려치기만 해도 ‘우수수’ 쏟아진다. 

그런 종교라면 “믿습니다!” 한 마디에 온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갈 터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위험하다. 

‘왜곡의 지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라.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얻을 수 있다. 

네가 하는 사업도 번창할 것이고, 자식의 대입 수능도 문제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를 ‘강력한 기복 종교’로 탈바꿈시키는 성경적 근거로 작동하기도 한다. 

실제 그렇게 설교하는 목회자도 있고, 그렇게 믿는 신자들도 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고개 들지 않을 욕망이 있을까. 

이 말을 듣고서 청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청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앞에서 내 안의 욕망을 청한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물음이 올라온다.



‘그리스도교는 영성의 종교인가, 아니면 욕망의 종교인가.’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한쪽은 에고를 키우는 길이고, 다른쪽은 에고를 줄이는 길이다.

한쪽은 ‘나의 뜻’을 따르는 길이고, 

다른쪽은 나의 뜻이 무너진 곳으로 드러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길이다.


예수는 후자를 따랐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채 그 길을 따랐다.


예수가 설한 그리스도교는 ‘욕망의 종교’가 아니라 ‘영성의 종교’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길이 싫은 걸까. 자꾸만 거꾸로 가고 싶을까. 

‘영성의 종교’가 아니라 ‘욕망의 종교’를 따라가고 싶은 걸까.


‘욕망의 눈’으로 보면 성경 전체가 ‘도깨비 방망이’다. 

그 눈을 허물고 보면 다르다. 

성경은 과학이다. 

나와 인간과 세상과 우주의 존재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깊은 과학이다. 

예수는 온갖 비유를 들어 그 속에 흐르는 이치를 풀어놓았다.


다만 그런 비유들이 우리가 가진 ‘욕망의 눈’을 관통하며 왜곡될 때가 문제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던 예수의 기도가 

우리의 눈을 통과하면서

“아버지 뜻대로 마시고 내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가 되고 만다.




2000년 전에도 숱한 이들이 예수를 찾아왔다. 

몸이 아픈 이들도 있고, 마음이 아픈 이들도 있었다. 

삶에 대한 물음을 도무지 풀지 못해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는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게 아니다”라며

‘기복적 태도’를 신랄하게 공격했던 예수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예수가 말한 청함과 두드림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는 걸까.




불교의 『금강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구절이 있다.

‘마땅히 머무는 바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여기서 ‘머무름’은 집착을 말한다.


가령 어제 점심때 억울하고 불쾌한 일을 당했다고 하자. 

하루가 지났지만 자꾸만 생각난다.

어제 일은 시간과 함께 이미 흘러가 버렸는데도 자꾸만 떠오른다.


왜 그럴까. 내 마음이 ‘그 일’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끈적끈적한 집착제를 바른 채 ‘그 일’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마음이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머문다.

무언가 청하는 일. 무언가 찾는 일. 간절하게 문을 두드리는 일. 

그 모두가 ‘마음을 내는 일(生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신의 마음을 향해 내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다. 

그렇게 일으킨 마음이 신의 마음으로 흘러가길 바라는 일이다.

그게 기도다.


우리는 그렇게 청하고, 그렇게 찾고, 그렇게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기도할 때 ‘착(着)이 생기면 어찌 될까. 

애착이든 집착이든 말이다. 

그럼 브레이크가 걸린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일으켜도 ‘접착제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붓다는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다.



빗방울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서 하늘로 떨어지지 않는다. 

강물도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아래에서 위로 흐르지 않는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낙엽이 진다. 그게 이치다.


인간과 세상과 우주를 관통하는 신의 섭리다. 

마찬가지다. 

들고 있으면 마음이 흐를 수가 없다. 

붙들지 않을 때 내 마음이 흘러간다. 

그렇게 흘러야 건너갈 수 있다. 

내 마음에서 신의 마음으로 건너갈 수 있다. 

마음이 통할 때 기도도 통한다.



예수는 우리가 기도할 때 

생선을 청하면 어찌 하느님께서 뱀을 주시겠느냐고 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더 자세하게 일러준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누가복음 11장11~13절)


아무리 악한 사람도 자식에게는 잘한다. 

왜 그럴까. 나와 자식을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자녀를 그렇게 본다.

둘로 보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선을 청할 때 생선을 준다. 뱀을 주지 않는다. 

달걀을 청할 때 달걀을 준다. 독을 품은 전갈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가 청할 때, 우리가 찾을 때, 우리가 두드릴 때가 문제다. 

왜 그럴까.


우리는 머물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하느님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의 메시지 앞에는 거대한 괄호가 생략돼 있다.

그 괄호 속에 들어갈 말이 ‘머무는 바없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들 메시지 앞에머무는 바없이’가 생략돼 있다.


그걸 넣으면 이렇게 된다.

"머무는 바없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머무는 바없이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머무는 바없이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왜 불교 경전 구절을 그리스도교 성경에다 갖다 붙이느냐?”고 따진다. 

그건 문자만 보기 때문이다. 

문자 속에 담긴 이치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를 통해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손가락이 아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다. 

그 달이 우리의 삶을 평안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는머무는 바없이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을까. 

이런 구절은 불교의 『금강경』에만 있는 대목일까. 아니다.


예수는 이미 ‘머무는 바없음을 설했다. 

성경의 곳곳에서 숱하게 ‘머물지 마라’고 강조했다.



그게 뭘까.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걸 뭐라고 표현했을까. 


‘내맡김이다..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내맡김. 

게 바로 ‘머무는 바없음’이다.



겟세마네 바위에서 기도할 때 예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다. 

제자들을 데리고 얼른 달아나면 예루살렘을 벗어날 수도 있었다. 

십자가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피로에 절어서 잠에 떨어진 제자들을 뒤로 한 채 

예수는 홀로 엎드려 기도했다. 

“가능하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그랬다.


예수는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을 비켜가길 바랬다. 

그게 예수의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나의 뜻’에 접착제를 바르지 않았다.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집착을 허물고 머무는 바없이 기도를 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그렇게 기도를 했다. 

머무는 바없을 때 기도가 통한다. 그럴 때 문이 열린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자식이 대입 수능시험을 치를 때는 어떡해야 하나.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나.


” 자식의 수능시험뿐만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온갖 파도들. 높고 낮은 파도들, 

크고 작은 파도들 앞에서 우리는 기도를 한다.


그때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까.

어떻게 기도해야 문이 열릴까.



먼저 나의 기도에 손가락을 대봐야 한다.

끈적끈적한 접착제가 묻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 아이가 대학 입시에 절대 떨어져서는 안 돼.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합격해야 해. 

떨어지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하느님. 꼭 합격하게 해주세요”라며 

마음을 꽉 움켜쥐고 기도를 한다면 어찌 될까. 

그런 기도가 과연 ‘출항의 뱃고동’을 울릴 수 있을까. 

신을 향해 떠나려는 기도를 스스로 붙들고 마는 셈이다.



가령 하얀 도화지가 있다. 그걸 신의 속성이라고 하자. 

그 위에 검정 잉크가 한 방울 떨어졌다.

그게 나의 집착이다. 

집착할 때, 나는 잉크 속에 잠긴다.


거기서 기도를 한다. 절절하게 기도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기도는 멀리 가지 못한다. 

까만 잉크 안에서 계속 맴돌 뿐이다.


왜 그럴까. 

나의 기도에 내가 접착제를 발랐기 때문이다.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는 기도는 다르다. 

집착하지 않는다.

그럼 잉크가 지워진다. 

잉크가 지워질 때 바탕에 있던 도화지가 드러난다.


그때 기도를 한다. 

그럼 도화지 위에서, 신의 속성 안에서 기도를 하게 된다.


잉크의 기도가 도화지에 잘 전달될까, 

도화지의 기도가 도화지에 잘 전달될까. 

무엇이든 속성이 같을 때 서로 통한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머무는 기도와 머물지 않는 기도는 다르다.


밧줄로 묶인 채 항구에서 뱃고동만 울리는 배는 출항할 수 없다. 

바다로 갈 수 없다. 신의 속성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럼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자식의 대학 입시를 위해서 말이다.


“주님, 저희 아이가 차분한 마음으로 시험을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이의 시험을 위해 제가 지혜롭게 뒷바라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집착이나 욕심으로 인해 아이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떠한 결과든 아이와 제가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듯 

기꺼이 수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만약 이런 식의 기도라면 어떨까. 

여기에는 ‘머무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려 놓음’이 보인다. 

머물지 않는 기도는 항구를 떠난다. 

바다를 향해, 신의 속성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눈을 감고 예수의 어록을 다시 묵상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장7~8절)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내가 집착을 내려놓고 기도를 하는지, 아니면 집착을 안고서 기도를 하는지 

어떻게 아나? 그걸 누가 아나?” 

답은 간단하다. 자신이 안다. 

내가 움켜쥐고 기도를 하는지, 내가 내려놓고 기도를 하는지 자신이 안다. 

다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본능적으로 자신이 안다. 

자신의 내면을 보기만 하면 안다.


그럼 기도는 단순히 욕망의 투영일까. 예수의 기도는 달랐다. 

십자가였다. 스스로 짊어지는 ‘자기 십자가’였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기도를 통해 ‘나의 뜻’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런 방식으로 청했고, 

그런 방식으로 찾았고, 

런 방식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머물지 않았다.



그러니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는 

거대한 괄호가 숨어 있다. 

그 괄호 속에 ‘십자가’를 넣어 본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출처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