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머튼의 고독과 침묵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
벌써 우리 현대 영성가 토마스 머튼에 대한 방송이 벌써 12회차를 맞았네요.
작으나마 이것들이 여러분들의 영적인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입니다.
오늘은 토마스 머튼의 고독과 침묵, 그리고 그분이 바라본 고독과 침묵을 통해서
어떻게 영적인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전통적으로 영적인 생활안에서 광야, 사막은 아주 필수 조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의 삶을 통해서 약속된 땅, 또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처럼 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지내셨던 것처럼,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처럼, 영적인 삶에서의 여정안에서의 어떤 사막과 같은 시간
무미건조하고 그리고 뭔가 내가 할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하느님께만
온전히 의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 그런 체험들이 영적으로 더욱 더 우리를 성장시켜 나가고 또 거듭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처럼, 우리 영적인 삶
안에서도 그런 광야가 필요하고 또 광야을 통해서 우리는 거듭 성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 안에서도, 또 영적인 삶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도
우리는 어떤 고독과 외로움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외적인 그런 고독을 넘어서, 내적인 고독을 통해서 진정 예수님의 사랑을 깨우쳤던
토마스 머튼의 고독과 침묵에 대한 그런 이해를 통해서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을
예수님의 고독과 사랑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준비됐나요? 네.
먼저 그럼 토마스 머튼의 고독과 세상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소개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고독 속의 명상>이란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기계적 힘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비인격적인 무리와 함께할 때
그들의 참된 인간성, 성실성, 사랑할 능력, 결단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회가 내적인 고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성될 때
그 사회는 더 이상 사랑으로 결합하지 못한다."
토마스 머튼이 방금 이야기한 내적 고독이란 무엇일까요?
토마스 머튼은 왜 내적 고독을 사랑과 연결시켰을까요?
다시 말해서 고독하다는 것은 홀로 있다는 것인데, 이 홀로 있는 것이
어떻게 세상을 향한 사랑과 또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것일까요?
머튼 신부님은 같은 책에서 이렇게 이어서 말합니다.
"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영적인 암처럼 물질주의 사회의 생명기관을 좀먹는
증오를 치유할 수는 없다. 유일한 치료 방법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해 아무리 말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이 귀는 어떤 내적인 고독과 침묵에 잠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렇다면
토마스 머튼이 말하는 내적인 고독과 세상이 말하는 고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내적인 고독을 그토록 강조했을까요?
제가 고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 국어사전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있었어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이런 의미는 외로움이나 고독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제가 책을 읽었는데 이러한 구절이 있었어요.
'혼자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서 혼자 있는 것을 고독이라 하고,
혼자 있는 것을 느끼면서 혼자 있는 것은 외로움이다.' 참 재미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통 대개의 경우 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고독, 외로움은 수동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도 찾아와 주는 사람이 없어서 혹은 또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멀리 만들기도 하지요.
그래서 외로움은 느끼지만 사실은 그 외로움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아, 사랑받고 싶다. 아, 외롭다. 뒤에는 아, 사랑하고 싶다. 혼자인 것이 싫다.'
이런 표현도 같이 감추어져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쩔수 없이 외로운거죠.
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내적인 고독은 굉장히 자발적이고 또 능동적입니다.
더 깊은 무언가를 찾고 갈망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깊은 하느님의 고독,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 또 성모님의 외로움과 만나서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준비하고 기다리고, 또 그 깊은 일치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로써 토마스 머튼은
이런 관상의 내적인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번잡한 생각들, 또 자기중심적인 생각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오롯이 하느님께로 집중하기 위해서 지리적인 그런 고독, 또 내적인 고독을 추구했던 것이
바로 토마스 머튼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누구나 다 외로움의 시간,
또 홀로 있는 시간, 또 정말 벗어나고 싶은 그런 시간들이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저 같은 경우에도 어린시절 부모님을 떠나서 홀로 있는 시간, 굉장히 외롭고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왜 부모님과 같이 살지 못하는가, 그런 외로움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런 외로움의 시간, 또 홀로 있던 시간이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함께 하고 싶고,
안정적인 공간을 찾고자 하는 그런 열망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저의 수도 성소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 제 삶 속에서 홀로 있고, 내적인 고독을 찾지 못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일 중심으로 살아가고 마치 일에 중독된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던,
그 토론토로 유학가기 전의 시간들은 내적인 고독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깊이 있는 하느님과의 대화도 할 수 없었었고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쓰러지는 영적인 그런 어둠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근데 오히려 그런 어둠의 시간들이 다른 하느님을 찾게 만들어주는, 갈망하게 만들어 주었고,
신비롭게 하느님의 섭리로 토마스 머튼을 만나게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외적인 고독, 또 내적인 고독 이런 것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서
어떤 새로운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어주는 그런 도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토마스 머튼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어떤 깊은 하느님과의 고독의 시간,
또 하느님과의 일치의 시간을 통해서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고 또 세상의 고독과 만나고
하느님의 고독과 만났던 게 아니었죠.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이게 아마 첫째 시간에 했기 때문에 물론 여러분들은 다 처음부터 잘 들으셨고,
또 기억도 많이 나실거란 생각도 많이 듭니다.
그렇지만 처음 이 방송을 보는 분들은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거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토마스 머튼이 처음에 부모님과 특히 어머님을 6살 때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리고 아버지는 몇 살때였죠? 네, 16살 때였죠.
아버지께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때 제가 토마스 머튼의 그 비참한 심정을
표현했던 구절도 떠오르실 겁니다.
'"정말 가족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교회도 없고, 하느님도 없고
나는 너무 외롭게 홀로 방에 한구석에 앉아 있다."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왕따의 체험도 당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외롭고 또 부모님과의 어떤 사별을 통해서 더 홀로 있는 시간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홀로 있을때의 공허감, 외로움, 비어있는 듯한 그런 마음들을 채우기 위해서
어쩌면 학창시절에 방탕한 생활, 뭐 술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런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들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아주 기묘한 섭리로
좋은 사람들, 또 좋은 책들을 접하면서 토마스 머튼은 깊이있게 하느님을 만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죠. 그러니까 세상에서의 외로움, 세상에서의 어떤 그런 외로움을 채우고자 했던
그런 것들이 충만하게 토마스 머튼을 채우지 못했던거죠.
그래서 더 영적인 갈망이 더해졌었고, 그런 영적인 갈망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대한 부르심으로
이어졌던거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그런 외적인 외로움, 고독 또 좌절, 절망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또 영적인 갈망으로 이어질 수 있었었고, 또 그런 영적인 갈망에 대한 것들이 더 깊은 고독인
내적인 고독,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수도원이라는 그런 특별한 공간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오롯이 하느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들을 불러 일으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간에 토마스 머튼이 처음 이제 수도원에 들어와서 느꼈던 그런 고독은
후기에 표현하는 고독과 좀 다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고독에 대한 생각은 대체적으로
한 네 부분 정도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에 입회해서 1940년대겠죠.
그 시대에는 지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어떤 고독을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그런 고독, 그러니까 홀로 말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특별한 공간 안에 있을 때 그런 고독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죠.
근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이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그래서 1950년대에는 조금씩 형제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 또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들,
기도하는 시간들, 또 찾아오는 사람들 만나는 시간들, 이런 시간들 안에서 좀 더 이제 고독의 개념이 확장되어가기 시작하고, 또 여러가지 사상의 영향을 받는데 실존주의라든지, 인격주의,
또 이 당시에 토마스 머튼이 굉장히 갈망하고 갈등하고 있었던게 있었는데 뭔지 기억나세요?
하나는 글쓰기와 관상가가 되는 거에 대한 거였죠.
두 번째는 그렇죠. 카르투시오회라든지, 가말돌리회같은 더 고독한 삶, 홀로 살아가는
그 삶을 추구하는 곳으로 옮길려고 했었죠.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고독에 대한 그런 갈망도
더 엄격하고 더 철저하고 더 어떤 깊이있는 그런 고독, 실제로 홀로 있는 고독,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1958년 물론 1950년대 후반부터 앞에 말씀드렸던 두 가지 고민이 해결되면서
1950년대 후반 넘어가면서 그리고 1958년에 무슨 일이 있었죠? 아주 결정적인 일이 있었는데?
네, 1958년 3월 18일에 토마스 머튼이 루이빌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단 말씀 제가 드렸죠. 기억나실 겁니다.
그래서 점점 이제 고독이 지리적인 장소에서 점점 더 사람들을 향해서 나아가는 고독,
또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일치하면서 사람들안에 있는 고독들을 발견하면서
고독이 점점 더 영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1950년대를 지나서 1960년대는 토마스 머튼의 삶이 어땠습니까?
그렇죠. 굉장히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또 세상의 어떤 어려움을 위해서 의식을 변화시킬려고
노력을 하고 그죠? 그래서 많은 글을 쓰고 사회참여를 하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그 고독이 군중들, 다른 사람들의 고독, 세상의 고독과 세상의 많은
소외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에게 정말 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그런 방향으로
고독에 대한 이해가 점점 확장되어 가는거죠.
그리고 1965년 무슨 일이 있었죠? 네, 기억나실 겁니다.
처음으로 미국인 최초로 트라피스트 수도자로서 은둔처에서 홀로 사는 수도자가 되었죠.
그래서 그 은둔처에서 생활을 하면서 점점 홀로 있으면서도
보편적인 그런 신앙관,
보편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신앙과 만나면서
더 확장된 그런 어떤 고독의 개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점점 더 다른 종교의 어떤 그런 고독을 찾는 사람들과의 유대, 또 영적인
유대를 많이 갖게 되죠. 그래서 종교간 대화, 물론 그전부터도 있었지만 더 활성화되어서
1968년에는 실제로 아시아에서 그 은둔처에서 고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티벳 불교의
림포체라든지 라마라든지 그 다음에 여러 분류의 승려들을 만나고 이슬람의 수피들도
만나고 그렇게 해서 다른 종교의 고독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도 대화하고 함께 하는
그런 시간도 갖게 됩니다.
점점 공간적인 그런 지리적인 고독에서 내적인 고독으로,
그리고 또 어떤 깊은 하느님과의 고독의 영적인 유대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타인에게 나아가죠.
그리고 점점 더 나아가서 다른 종교,
또 이제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고독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어 가서
그 고독을 통해서 오히려 더 큰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토마스 머튼의 그런 고독에 대한 이해의 확장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고독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지금까지 괜찮으세요? 왜 그럼 고독을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고독에 도달할 수 있는건지 조금 더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이 고독은 고독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고독은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죠.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죠? 물론 이제 어쩔 수 없는
홀로있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영적인 의미가 더 깊은거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추구하는 고독은 하나의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방법이었죠,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의 일치에로 나아가기 위해서 고독은 자기비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하고 싶은 여러가지
활동들을 하는 것을 멈추고 하느님께로 내 시간을, 또 나의 공간을 맡겨드리는거죠.
내 마음도 맡겨드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고독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자기비움이라는건 도대체 뭔가 의문을 갖는 분도 계실 겁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들 마음을 비워야지, 마음을 비워야지 하는데 마음을 비운다는게 과연 뭘까요?
제가 예전에 토론토에 있을 때 여러 수도원들을 많이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
그리스 정교회의 수녀원을 여러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계시는 수녀님들께서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가 바로 'obedience' '순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여러가지 수도생활의 어떤 덕이 있을텐데 왜 하필 순명, 순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을까라고 돌아와서 고요히 혼자서 생각하던 중에 아, 이게 바로 자기비움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모님께서, 다음 시간에 우리가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도 할텐데,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라고 응답하셨죠.
성모님께선 자신을 온전히 자기 뜻을 비우고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셨고
또 응답을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뜻을 비워낼 때, 야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내 마음은 비워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움, 케노시스에 온전히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를 비운다 라는 표현을 쓸 때,
아, 내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한다 그런 마음으로 자기비움을 이해하시면
자그나마 (작으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또 토마스 머튼이 이해하는 고독은 자기 초월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독에 참여할 때,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나를 넘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나를 넘어간다는 자기초월이라는게 도대체 뭔가 하는 그런 의문이 생기실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제가, 이건 물론 교리시간에 많이 배우셨겠지만 토마스 머튼이 워낙 이
' Self-transcenedence' (자기초월)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 시간에 자기초월에 대한 개념을
조금 설명해드리면 앞으로 영적인 성장부분에 이야기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조금
나누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하느님, 그리고 우리 인간,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분이시죠.
그리고 우리 인간은 자연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은 하느님한테 바로 갈 수가 없어요 그죠?
그래서 어떤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그럼 그 매개체가 누구신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근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걸까요?
제가 어느 이콘을 통해서 설명해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화면에 보이시죠?
이 이콘은 가타리나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는 6세기경에 제작된 이콘인데,
왼쪽 오른쪽이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드시지 않으세요? 네, 그렇죠. 화면에 볼 때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오른쪽의 모습하고 왼쪽의 모습이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이 들겁니다.
이 이콘에서 오른쪽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눈 모양도
굉장히 좀 신비롭죠.
그리고 반대편으로 보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시죠. 그래서 이 손모양을 보면 요렇게 되어
있을텐데, 제가 표시하기가 좀 어려운데, 이 부분이 뭐냐면 이 위에 있는 두 손은
검지와 엄지는 하늘과 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밑에 있는 세 부분은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죠.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분,
그게 바로 당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쪽 편에 오른쪽 끝에 보면 태양 모양으로 종 위에 8개의 모양이 있는데
하필 왜 8개의 빛 모양이 있을까요? 그건 바로 제 8일째 되는 때, 야훼 하느님께서
6일까지 창조를 하시고, 7일째는 뭐하셨죠? 쉬셨죠, 안식일이라고 그러죠.
그리고 8일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죠. 그래서 이 8번째 이날은 바로 우리식으로 말하면
8번째날이 주님의 날, 예수님이 부활한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8개의 빛 모양이 생겨난 겁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8번째날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인성과 신성이 아주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 인성. 우리 인간은 인간이니까
인성을 가지고 있죠.
근데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토마스 머튼 영성의 핵심이라고 그랬죠. 뭐였죠? 기억나시죠?
'이제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해 있을 때 우리는 동시에 예수님의 신성과 만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제 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으로써 인간의 기본적인 한계를 지닐수 밖에 없지만
'초월(transcenedence),
자기초월(Self-transcenedence)'은 뭐냐면 인간으로서의 이 모습을 넘어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신성,
그래서 이것을 정교회 신학에서는 'Divinization'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화'라고 번역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신성에 함께 하고
또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할 수 있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자기초월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제 토마스 머튼이 자기초월에 대한 이야기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인성에 참여한다는 것, 인성에 참여하는 방법이 뭘까요? 가장 탁월한 방법?
다 아시면서...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요한1서 4장에 보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나를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온전한 그 사랑에 참여할 때,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과 연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같은 겁니다. 그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사랑 덩어리라고 그러잖아요.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초월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고독과 자기초월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철저하게 고독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 특히 십자가 아래에서. 그래서 케노시스(Kenosis), 자기비하, 자기비움,
그 대목 필립비서 2장 5절 이하에 나오잖아요. 그죠?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신 그 고독,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고독,
십자가 위에서의 그 고독, 그 고독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로 인도해주신거죠.
그래서 우리가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에 참여한다는 것, 이걸 이해해야 됩니다.
그 고독에 참여하면 자연스럽게 자기를 넘어서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는 거죠. 이제 이해되셨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고독은 하느님과의 깊은 영적인 유대를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고독에 참여함으로써
더 깊이있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또 예수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만난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1960년에 쓴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항상 홀로 있는 이 내면의 '나'는 항상 보편적입니다.
그래서 이 가장 깊은 '나' 안에서 저 자신의 고독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고독과 하느님의 고독과 만납니다.
이러한 '나'는 제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안에 살게 됩니다."
이제 저 대목이 이해되죠 그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만날 뿐만 아니라 누구?
네, 다른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는거죠.
다른 사람의 고독과 만나는 것,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점점 더 고독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게 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만나면서요. 이렇게 표현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느님 앞에 말없이 내어 보여드리는 것이 바로 고독이다."
나의 죄, 나의 가난함, 나의 어떤 그런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내어보여드리면서
그 안에서, 얼마나 부끄러워요 그죠, 나의 죄를 하느님께 말씀드렸을 때,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어보여드렸을 때 너무 힘들고 좀 불편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어떤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를 만난다는 거죠.
또 그리고 고독은 인간의 시간 안에서 하늘의 시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그런 방법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독한 시간, 고독한 공간 안에서 우리는 또 새로운 시간을 만난다는 거죠.
하늘의 시간! 제가 지난시간에 말씀드렸었죠.
하느님은 과거, 현재, 미래 이런 우리 인간의 시간 개념과 다르다고 말씀드렸죠.
초월속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독 속에서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과 만날 때,
하늘의 시간과 연결되는 겁니다.
그리고 고독은 또한 초자연을 향한 갈망이다. 제가 아까 하느님은 초자연에 계신
분이라고 말씀드렸죠. 그에 대한 갈망이 바로 고독으로 표현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고독은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얻기위한 방법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어드리는 그 시간,
그게 바로 고독이라는거죠.
그래서 고독은 기도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느님 앞에 홀로 있는 나는 바로 기도하고 있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독은 하느님과의 만남이면서 동시에 또 앞으로 이 세상 삶이 끝나고 난 다음에
완성될 하느님과의 그 만남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독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만나고 또 미리 체험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독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고 고독은 하느님을 만나는 도구
라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고독안에는 사실 토마스 머튼은 이 '거짓 고독'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고독한 척 하는거죠. 고독한 척 하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척 하지만 실제로
이 '거짓 고독'과 '참된 고독'은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거짓 고독을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만의 피난처이고 끝없는 궁핍이다."
홀로 이제 스스로 남을 배척하거나, 혹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마음, 그래서 홀로 있을 때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자기자신을 궁문안에 가두는거죠. 그래서 자기자신을 도피시키는 거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스스로 축척한 하찮은 생각들에 빠져있는 경우, 이런 경우도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경우도 이제 거짓 고독이라고 토마스 머튼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다른 이와 분리시켜서 참된 고독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배려하는 반면에 거짓 고독에 휩싸인 사람들은 사랑을 주고
받을 줄도 모르고 항상 영적으로 공허하기 때문에 또 반작용으로 필사적으로 사람을
찾고자 하는 경향도 띠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척 합니다.
그렇지만 그 내면 안에는 계속해서 사랑에 집착하고 사랑을 소유할려고 드는 그런 경향도
띠게 됩니다.
하지만 참된 고독을 누리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또 배려할 줄 알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홀로 있지만 외롭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것이죠.
오늘 참된 고독과 거짓 고독을 이야기하면서 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고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러분들과 나누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나누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그리고 성모님의 영성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홀로 있지만 여러분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께 마음의 문을 열 때 여러분들은 고독 속에서 진정으로 사랑을 체험하고
또 홀로 있으면서 진정으로 참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혼자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