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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복음 - 리처드 로어 신부 강론 |╂ 오늘의 복음

은가루리나 2017. 11. 22. 23:26


단순(單純)[]|리처드 로어 신부 강론




단순한 삶으로 가는 영성의 길

 



지난 4년 세월을 나는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에서 보냈는데

그곳은 미국의 가장 가난한 주(洲)면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요.

또한 중요한 군사지역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멕시코와 접경지대라 많은 라틴 아메리카 난민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어요.

나는 4년 전 이곳에 ‘행동과 묵상을 위한 센터’를 세웠고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정의의 영성(a spirituality of social justice)을 교육하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사막 중앙에 위치한 알뷰퀘크 시는 여러 원주민 부족들로 에워싸여 있지요.

그래서 삶의 지혜를 구하려는 사람한테는 아주 놀라운 장소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는 곳이면 그만큼 부정적인 에너지도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인 것 같아요.



원주민들이 수 세기 동안 기도처로 삼아온 바로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대량살상무기가 개발되었거든요. (이곳에서 원자탄이 발명되었음.)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그곳을 방문해서 복음의 참 뜻을 헤아리고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분별지를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제부터 단순한 삶(simple life)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말해봅시다.



여기에서 나는 완전 다른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루어볼 생각이에요.

물론 예수가 세상을 단순하게 그리고 가난하게 살라고 가르치신 본문들을 찾아서

루가복음, 마르코복음, 사도행전을 차례로 읽어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다보면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설교를 늘어놓고 말 것 같은데,

20년 넘도록 설교자로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말하면 설교라든가 영감어린 강론들이

그런대로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 효과는 별로 오래 지속되지 않더군요.

우리는 진실을 ‘진짜로’ 찾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우리는 사람들에게 죄의식과 두려움을 심어주려고 애써왔어요.

그래서 늘 이렇게 말했지요. “너는 이런 일 저런 일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이 너를 사랑하지 않으실 테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는 인간으로 만들면서 우리에게 머리와 가슴과 아랫배를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함께 활용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무능력한 피동성, 적개심, 적극적 공격성을 띠게 되었고

불행하게도 그것을 많은 그리스도인들한테서 보고 있는 게 딱한 현실이에요.



우리는 그들에게 “새로 지으심 받을”(갈라디아서 6, 15) 시간을 주지 않았고,

이래라 저래라 명을 내리고 그대로 못하면 수치심을 안겨주었지요.

아무리 봐도 이건 구원이 아니고 깨우침도 아닙니다.



주인공 자체가 바뀌지 않았으니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거예요.

누가 누구를 어디로 인도하려면 자기가 먼저 가봤어야 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2천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살아왔는데

그분이 그토록 명백하게 가르치신 것들을 모조리, 그것도 아주 효과적으로, 외면할 수 있는 걸까요?



이는 모든 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에요.

예를 들면, 우리 모두가 거의 예외 없이 예수의 산상설교를 외면하고,

가난에 대한 그분의 분명한 가르침을 외면하고, 비폭력에 대한 명백한 지침을 외면하고,

원수 사랑에 대한 그분의 교의(敎義)를 외면하고 있다는 얘기올시다.



예수는 우리에게 너무 큰 분이에요.

그분 앞에서 오늘의 교회는 십대 아이들 집단입니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복음이 우리에게 직접 말할 기회를 제공할 준비를

우리가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분명한 대답들을 원했지요.

인생의 초기단계에서는 확신(certainty)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예수는 우리에게 그 어떤 확신도 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신앙의 여정(journey of faith)을 권하시지요.

예수는 우리에게 많은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바른 질문인지,

그리스도와 진리를 만나기 위하여 어떤 질문과 씨름할 것인지를 말씀하시지요.



우리의 질문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고 발견할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대답들은 너무 빨리 힘을 행사해요.



그래서 우리의 언어를, 누군가를 반대하는 데 쓰는 탄약으로 바꿔버리지요.

그리고 대답들은 신뢰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고, 경청(傾聽)을 없어도 되는 것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천박한 것으로 만듭니다.



나에게 답이 있으면 내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필요할 까닭이 없는 거예요.

내 머리, 내 확신, 내 결론이 있으면 되는 겁니다.



모두가 사적인 거예요.

하지만 예수는 우리에게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가난한 삶의 진정한 의미는 철저하게 누군가를 의존하여 살아야 한다는,

따라서 아무도 필요 없는 상태로는 살 수 없다는 겁니다.

혼자서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게 우리거든요.



여기서 몇 가지 피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너무 쉽게 일반화시키는 겁니다.

필요한 과정을 착실하게 밟으려 하지 않고 너무 서둘러서 답을 얻으려 하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이렇게 저렇게 했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이런 질문으로 쉽게 일반화하지 맙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주 백일몽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고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의 진지한 명을 질식시켜버리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비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말할 때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러니까 시방 우리한테, 누가 총을 들고 나타나서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거요?”



이런 엉터리 주장들이 생겨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그동안 실제로 소수 엘리트 그룹에 의하여 복음이 해석된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엘리트 그룹은 먼저 구미에서 그리고 나중에 남미에서 이른바 교육받은 남자들로 형성되었지요.

그들에 반대하여 만들어진 어떤 세력들도 없었어요. 나도 물론 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오래 전횡(專橫)을 부렸어요.

세상에는 다른 생각을 지닌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 거예요.

백인들은 먼저 힘과 통제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하여 제기하는 질문들이 언제나 이런 편파성에서 나오는 것들이지요.

우리가 교회에서 비폭력에 대한 질문을 거의 듣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죽이는 것을 합리화할 필요가 있었지요.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 대한 질문 자체를 교회에서 들을 수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와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가 진정한 보편성(universal)을 띠게 된 거예요.



복음이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읽히고 재발견되고

그 과정에서 전혀 다른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는 겁니다.



새로운 독자들이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복음에 접근하여 완전 다른 답들을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백인 남자들조차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동안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




루가복음 19장에 기록된 금화 한 닢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가톨릭 주일학교에서 신부님들은 이 본문으로

우리에게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 학생이 되라고 강론하셨지요.



우리는 학교에서 A학점 아니면 적어도 B학점을 받아야 했어요. C학점은 안 됩니다.

이 비유의 첫 번째 종이나 두 번째 종이 돼야지 세 번째 종은 안 되는 거예요.

이제 나는 이 비유에 접근하는 다른 길은 없는지 그걸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아래의 해석은 중앙아메리카 기초공동체의 단순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

스스로 신학에서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거예요.



하지만 이 해석은 미국 본토에 진출하였고,

훌륭한 신학자들이 시방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학자들이,

우리가 마침내 이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 가까이 온 것을 보면

드디어 하느님 나라가 코앞에 닥쳤나보다고 생각하였다.(19, 11). 여기가 출발점이에요.

사람들은 단순하고 의심할 것 없는 권력의 이동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스스로에게 말하지요,

내가 이들한테로 가서 닿아야(reach) 한다고.

그들은 자기네가 지불해야 할 값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어떤 값을 치러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려주셨다.

한 귀족이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다른 훌륭한 설교자들처럼 그분도 기억나는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듣는 사람들이 알게 하는 거지요.

예수가 말하는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 길을 떠나는 귀족은 헤로데의 아들

아켈라오스를 가리킵니다.


예수 당시 사람들은 헤로데가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3년 동안 로마에 파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지요.



그 ‘귀족’은 길을 떠나기 전에 열 명의 종들을 불러놓고 각자에게 금화 한 닢씩을 주면서 말합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해라.역사에서는

아켈라오스가 로마로 가기 전에 부관들(副官, viceroys)을 임명하면서 자기처럼

그들도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기를 기대하지요.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라고 했던 거예요.

게다가 당시 그 나라 주민들이 대표를 로마에 보내어

아켈라오스에게 돌아오지 말고 그곳에 있으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도 역사적 사실로서,

예수의 말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였으므로 대표들을 뒤따라 보내어,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자기네 뜻을 전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을 거절하는 무슨 그런 얘기가 아니라,

정치와 억압이라는 구체적 현실에 연관된 거예요. 얘기는 계속됩니다.



귀족이 왕위를 받아서 돌아오는 길로 돈 맡겼던 종들을 불러

각자 얼마를 벌었는지 보고하라고 하였다.

첫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금화 한 닢으로 열 닢을 남겼습니다.라고 말하자

주인이 에게 이르기를,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을 맡아서 다스리도록 하여라.하였다. 그러니까 이 부관은

아켈라오스 자신과 똑같이 흉악한 살인자(cutthroat)였던 거예요.



예수는 시방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있는 겁니다.

그대들이 그들의 게임에 놀아나면 그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해줄 것이다.

세상은 자기를 돌보게 마련이니까.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금화 한 닢으로 다섯 닢을 남겼습니다.라고 말하자

주인이 그에게 이르기를, 너도 다섯 고을을 맡아서 다스려라.하였다.



그동안 나는 처음 두 종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에 물든 편견이었어요.

사실인즉 그 둘은 조연들이고 세 번째 종이 주인공인 겁니다.



다른 종이 와서, 주인님의 금화가 여기 고스란히 있습니다.

수건으로 잘 싸 두었습지요.

주인님은 넣지 않은 데서 꺼내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빈틈없는 분이신지라 겁이 나서 그랬습니다.라고 말하자…”

이것이 바로 세상에 대한 예수의 판단입니다.

세상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고 하지요.



주인이 그에게 이르기를,

이 고얀 놈아,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하마.

나를 넣지 않은 데서 꺼내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빈틈없는 사람인 줄로 알았다고?

그런데 어째서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이자까지 붙여서 원금을 돌려받지 않겠느냐?하고서…”

하지만 세 번째 종은 자기 신념의 결과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시민 불복종이라고 부르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는 더 깊은 진실(deeper truth)에 부응하고 있다.

그리고 ‘더 깊은’ 진실은 언제나 우리를

‘피상적인’(superficial) 진실과의 갈등과 투쟁으로 인도한다.”

피상적인 진실은 말하지요.

저 자의 금화 한 닢을 금화 열 닢 가진 종에게 주어라.



그런데 우리는 갑자기 한 옆에서 더듬거리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주인님, 그에게는 금화 열 닢이 있는데요?세상은 저 자신을 돌본다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시스템에 따라서 놀아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루가복음에 기록된 마지막 비유예요.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직전에 들려주신 이야기란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진실을 살고자 할진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해요.



때로는 사회개혁을 위한 예수의 유일한 대책이

비(非)협동(non-cooperation)과 비(非)우상숭배(non-idolatry)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거야말로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사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지요.




교회역사 초기 3백 년 동안은 기본적으로 (배타적은 아니지만)

중산층이나 상위층 아닌 하층계급에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믿고 그대로 살고자 한 사람들은 언제나 비천한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세우자

하룻밤 사이에 패자가 승자로 바뀌었지요.



5세기에 성 힐라리온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 대신 오늘 우리는 더 위험한 박해자,

우리에게 아첨하는 적, 막강한 로마제국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우리 등을 물어뜯지 않는다.


그 대신 가슴에 메달을 걸어준다.


우리 재산을 몰수하지 않는다. 반대로 선물을 준다.


우리를 옥에 가둠으로써 참 자유를 맛보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 궁전에서 우리를 존대함으로써 우리를 종으로 만든다.


제 재물로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우리 가슴 속 재물을 약탈한다.


제 칼로 우리 머리를 자르지 않고 황금으로 우리 영혼을 죽인다.


공마당의 화형(火刑)으로 위협하는 대신 우리 속에 은밀한 지옥 불을 놓는다.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숭상하여(adores)

그로 하여금 거리낌 없이 우리 위에 군림하도록 만든다.



말로는 그리스도를 굳게 세우면서 실질로는 그를 부인한다.

통일을 선포하면서 진정한 공동체의 교제를 가로막는다.




우리는 우리의 본디 낮은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는 스스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가난한 사람만이 그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증명하거나 지켜야 할 무엇이 없어요.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해요.

어떤 점에서 우리는 부자인가?

우리에게 지켜야 할 무엇이 있는가? 우

리에게 입증해야 할 무슨 원리가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가난한 자, 열린 자로 존재치 못하게 하는가?



문제는 원천적으로 물질적 재산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재산–나의 에고, 나의 명예, 나의 자아상(像), 옳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성

공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그리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있습니다.

이것들이 안드레아스 에버트와 내가 ‘애니어그램 발견’에서 설명코자 한

자본주의 죄(capital sins)예요.



복음은 우리에게 자기–충족의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라고 하지요.



우리에게 “당신 말씀이 저한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고백을 실천하며 살라고 합니다.

우리의 상처를 열어놓아 그리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지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놔버려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에요.

우리가 자기 자신한테서 자유로워지기 전에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거예요.



내가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시리즈 ‘빼기의 영성’은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는 말했어요, 영성생활은 더하기보다 빼기에 더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지만 자본주의 서구에서 우리는 어떻게든지 성공의 사다리를 더 높이 오르려 하고,

빼기보다 더하기의 요령을 복음서에서 얻으려고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때 하느님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고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쉽게 환영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중요시합니다.



한 인간인 나는 전체 피조물의 부분이고

하느님 영광의 극히 작은 부분을 비추는 한 조각 파편일 따름이에요.



그렇게 간단한 겁니다.

이 연관성을 경험하여 우리 자신이 거대한 불꽃의 한 부분일 뿐임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자기‒충족을 위해서 더 많은 사물들을 끊임없이 쌓고 또 쌓겠지요.

물론 이것은 거대한 영적 착각이에요.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있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예수 다음으로 나를 가르친 위대한 스승이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이에요.

그분은 한평생 더 작은 사람, ‘밑바닥 사람들의 형제’가 되려고 애쓰셨지요.



그분은 우리에게 밑바닥에서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진실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변두리에서 살지 말고 중심에서 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가장자리에서도 얼마든지 만족하며 살 수 있음을 믿고 받아들이려면

아주 큰 신앙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실제로 보고 들은 진실입니다.

나는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을 가보았는데,

그곳의 가난한 이들이 대부분의 우리 서양인들보다 더욱 행복하게 사는 것을

거의 예외 없이 보았어요.

그들은 자기한테 없는 것을 욕심내는 대신 이미 자기한테 있는 것으로 즐기며 살 줄 압니다.



가난한 이들은 외부의 사물들이

자기네를 충족시켜 주리라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지요.



그들은 그것들과 처음부터 인연이 없고

따라서 더 깊고 즉흥적이고 간단한 생활방식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그들에게는 진실을 깨치는 데 우선권이 있어요.



아마도 그래서 예수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이 있다.”는 말로 산상설교를 시작했을 겁니다.



필리핀에서 온 한 여성이 나에게 말했지요.

“신부님, 우리한테는 하느님과 공동체 말고 아무것도 없답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복음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믿어요. 그

것은 하느님께로 가는 길과 서로에게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지요.



그런데, 복음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안전을 결코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안전을 원합니다.



예수도 이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 대신 진실 안에서 살라고 하셨지요.



태초 이래로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이 불안전한 현실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불안전에서 우리를 제외시킬 수 없고

동시에 하느님께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려 놓을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의존, 개방, ‘갈망과 목마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에만 진실에 닿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 남자들은 꼭대기에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덫의 바닥에 있어요.

얼핏 보면 우리가 시스템의 승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희생물입니다.

우리는 여자들보다 훨씬 덜 자유로워요.



미국에서 우리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십오 년쯤 의식이 앞서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그만큼 시스템의 거짓에 덜 넘어가고

그래서 그만큼 경쟁과 성공의 덫에 덜 걸려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여자들이, 같은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지 않는 한,

남자들보다 더 깊은 지혜에 자유로이 의존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교가 감히

하느님을 ‘어린양’(lamb)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종교인 것은

진실로 놀라운 일이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어린양의 나약함을 외면하면서 2천 년 세월을 보냈지요.

바울로는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내가 약할 때, 그때에 내가 강하다.”(고린도후서 12, 10).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런 힘을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힘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요.



하지만, 실인즉 그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유일한 힘인 걸 어쩝니까?

세상은 그런 힘에 대해서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진정한 교회로 존재하려면.

그리고 그 교회가 세상에 신용이 있으려면.

우리가 만일 다음 세기에도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적 뿌리를 재발견하고,

신비와 정치의 연관성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가 통째로 잊힐지 모른다고 칼 라너는 말했어요.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교가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문제를 일으키는 쪽으로 존재하게 될 테니까요.



영성과 신앙은 더하기보다 빼기,

더 많아지기보다 더 적어지기에 깊은 연관이 있는 겁니다.



먼저 우리는 ‘과거’(past)를 놔버려야 해요.

우리 모두 지나치게 무거운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지요.

사람이면 누구나 지난날에 무엇을 하지 않았거나 무엇을 잘못했을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에 대한 죄책감이 우리를 에고의 함정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 못한 나에 대하여 오랜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았어요.



스스로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놔버리자

그동안 나의 죄책감이 오히려 나의 에고를 방어하는 데 이바지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별것 아닌 사소한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씨름하는 척하면서 정작 중요한 일을 외면했던 거예요.



앞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는 우리에게,

중산층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하는 온실 속의 덕목들보다 훨씬 무겁고 절박한 문제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현대 교회는 너무 사적이고 너무 개인적이에요.

자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골몰하여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 모두 과거의 모자란 ‘나’를 떠올리면서 쓸데없는 죄책감의 악순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놔버리는 것만으로는 전부가 아니에요.

우리는 ‘미래’(future)도 놔버려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안전에 대한 지나친 염려를 놔버려야 해요.

끝으로 우리는 ‘현재’(present)도,

지금 여기에서 중요한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놔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놔버리기 어려운 것들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든 가치 있는 존재로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에요.



스스로 만든 자아상(像)이 크고 훌륭할수록 그만큼 위험하지요.

더 많이 경건할수록 더 위험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프로 그리스도인(professional Christian)이 되겠다는 거예요.

예수를 죽인 건 자기네 신학을 지켜야만 했던 당시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었어요.



그들의 신학으로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요.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가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흔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겁니다.



현재를 놔버린다는 건 자아상(像), 타이틀, 위신을 포기한다는 뜻이에요.

나는 이것이 “내 앞에 우상을 두지 말라”는 첫째 계명의 많은 의미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금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짓 형상들뿐 아니라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아상도 포함되지요.

우리가 마땅히 신앙의 자리로, 자기–망각의 자리로, 무(無)의 자리로 가야 한다고

많은 성인들이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싶습니다.



칼 융이 늙었을 때 제자 하나가 존 번연의 ‘순례자 여정’(천로역정)을 읽고서 그에게 물었어요.

“선생님의 순례 여정은 무엇이었습니까?”



융이 대답했지요.

“내 여정은 천 칸의 사다리를 밟고 내려와서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 자신인 차갑고 작은 흙 한 줌에 우정의 손을 내밀 수 있게 된 것이라네.” 이게 바로

자유인이올시다.



‘사람’(휴먼, human)이라는 말 자체가 흙을 의미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에서 왔어요.

사람으로 된다는 말은 자기가 흙으로 만들어졌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안다는 뜻이에요.



겨우 몇 십 년 우리는 생의 무대에서 춤을 추며

하느님 영광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흘낏 훔쳐보는 기회를 얻을 따름이지요.



우리는 의식(意識)할 수 있게 된 흙(earth)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이 능력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알면,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왔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우리는 이 진실을 논리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강론도 여러분 가운데 누구로 하여금 이 진실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을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 그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자기 여정을 걸어야 하고 자기 길을 밟아야 해요.



우리가 뉴멕시코에 세운 센터 이름을 ‘행동과 묵상을 위한 센터’로 지은 까닭도 여기에 있어요.

행동하면서 묵상할 때에만 복음의 진정한 바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하신 일이 정확하게 그 일이에요.

그분은 비어있음(emptiness)의 장소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40일간 금식하시는데 그렇게 당신을 철저히 비우셨다는 말씀이지요.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사탄과 예수의 대화를 조금 각색해보겠습니다.



사탄이 먼저 예수에게 말합니다. “너는 성공해야 한다.” 예수가 답하십니다.

“아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사탄이 그를 정상에 세우고 (성경까지 인용하면서!) 말합니다.

“너는 바른 종교적 행로(religious track)를 밟아야 한다.” 예수가 답하십니다.

“그렇지 않다. 난 그런 게임 필요치 않다.”



사탄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말합니다.

“너는 힘의 도구(tools of power)를 써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그 힘을 쓰려면 값으로 사탄에게 굴복해야 하지요.



우리의 길 또한 광야로 향해 있고 거기서 같은 악마의 세 가지 유혹,

성공해야 하고 바른 종교를 믿어야 하고 힘을 갖추어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유혹에 직면하리라는 전제 아래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을 똑바로 응시하여

그것들을 물리치기 전에는 광야 밖으로 나와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고작 자기 자신의 왕국을 선포할 따름이지요.

자기를 안락의좌에 앉히려고 복음을 이용할 때 우리 내면의 길과 외부의 길이 서로 어긋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내적 진실의 길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과 부끄럽게 하는 것, 우리 안에 있는 풍요로움과 가난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그것을 두고

“우리 안에 있는 나병환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우리 안에 있는 가난한 자를 사랑할 줄 알게 될 때 우리는 ‘밖’에 있는 사람들,

우리와 다른 사람들,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자비의 방이 우리 안에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진실로 ‘덜’이 ‘더’예요(Less really is more).



입증하고 지켜야 할 무엇이 없는 사람,

자기 내면의 온갖 것들을 받아들일 충분한 공간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듣고 보는 법 배우기

 

나의 가장 큰 목적은

‘하느님 통치’(the Reign of God)의 위대한 전망을 선포하는 거예요.



이런 맥락에서 나는 순수하게 잘 듣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여기서는 무슨 내용을 듣느냐보다 듣는 행위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복음을 믿어야 해요.

예수는 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걸까요?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어쩌면 그것도 물론 좋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겁나는 사람들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그래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회심시키려던 자들에 의하여 회심당하는 그런 분들이 많이 있더군요.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의 유일한 언급이 마태오복음 2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명료한 신학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잘 듣고 잘 보고 잘 응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지요.

그들은 말하자면 두 손으로 하느님을 붙잡을 수 있어요.



최후심판에 대한 언급에서 예수는 우리 모두 십계명을 잘 지켰느냐

또는 우리가 속한 교단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느냐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느냐 여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회심이에요.

만일 우리가 복음을 근사한 도그마 시리즈 속에 밀어 넣는다면

그것을 지키는 데 남은 생을 바쳐야 하겠지요.

 



공동체 삶의 목적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물건을 함께 쓰는 완전 공동체를 이루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사는 것이 문제를 풀기보다 일으키는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하지만 당시 공동체 식구들은 서로를 보충해주는 창조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깊은 차원에서 삶을 나누며 서로를 신뢰했으니까요.

여자들은 자녀들을 함께 돌보았고

남자들은 연장을 나눠 쓰며 난민들을 함께 도와주었지요.



뉴멕시코에서 우리는 공동생활을 실제로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하지요.

신시내티에서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적지 않은 공을 들였어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고

세상을 섬기는 새로운 방식을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같은 목적을 다른 방법으로 이룰 수도 있는 거예요.

정의와 선교에 대한 공동의 비전을 가진 남자와 여자들을 불러 모으는 겁니다.

그럴 때 공동체는 말하자면 부산물(副産物)이 되지요. 공동체 자체가 목적은 아닌 거예요.



4년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이것이 현대 상황에 더 맞아 떨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난민과 노숙자 문제, 교도소 개혁, 핵무장 해제 등 오늘의 관심 주제는 너무나 크고 복잡해요.



복음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실현할 때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돌볼 것인지 그 방법을 찾는 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개인’을 출발점으로 삼은 까닭에

우리가 복음을 묽게 희석시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기술공학과의 만남

 

수세기 전만 해도 우리는 기술공학과 순수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어요.

그래서 기술은 발전했는데 우리의 지혜는 그러지 못했지요.



우리는 세계를 둘로 나누어 한쪽은 종교로 다른 쪽은 속세로 채웠습니다.

덕분에 교회는 세속사회와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없었고

우리는 닫힌 그리스도교 안으로 몸을 사렸지요.

서로 견해가 같은 사람들하고만 대화가 가능했으니까요.



오늘날 돈이 만사에 우선권을 행사하는 이유도

우리가 돈하고 진지한 대화를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달리 말하면 언제 어디서나 돈만 발언을 하고

우리는 그 앞에서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돈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요.

기술공학도 같은 방식으로 우리 앞에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제발 여러분의 남은 생을 교회 안에서만 보내지 마십시오.

이 세상 시스템을 비(非)우상화하는 데 진실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경험을 활용하세요.

여러분이 지닌 신앙의 바탕에서 비판적 질문들을 제기하는 데 그 경험들을 사용하시란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사물을 써서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여러분도 나도 오랜 세월 사람들을 써서 사물을 사랑해왔지요.

이렇게 삶이 거꾸로 뒤집어진 까닭은 우리가 신앙과 세속을 조화롭게 연결 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우리는 원자력 연구소 정문에서 기도회를 가지는데

그곳의 노동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아요.



다만 신앙에 바탕을 둔 질문들을 포스터에 적어 들고 서 있는 겁니다.

처음엔 야유하는 몸짓과 고함소리가 적잖게 우리를 에워쌌지요.

하지만 3개월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어요.



우리가 자기네 적이 아니고

다만 형제자매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지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일 따름인 줄을 노동자들이 알게 된 거예요.



지난 재(災)의 수요일에는 그들이 우리를 자기네 숙소로 초대하여

거기서 함께 미사를 드리기도 했지요.

그들 가운데 “당신들이 초대한 저 친구들은 우리의 적이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교회당은 만원을 이루었고 예배를 마치고 몇 사람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지금 우리는 매월 대화모임을 가지는데

나는 이런 식으로 얼마나 더 대화가 지속될 것인지에 대한 우려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악당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들이 개인적으로 우리만큼 선하고 어쩌면 더 선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지요. 그



들이 참여하고 있는 시스템은 악해도 각 개인들은 선하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개인과 구조적 악 사이의 연결고리를 무시해왔어요.

‘개인’의 죄를 문제 삼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바빴던 거지요.

하지만 세계의 불의에 우선 책임이 있는 것은 ‘조직화된 죄’(institutional sin)입니다.



때로 우리보다 더 슬기로운 단순한 사람들이 있어요.

뉴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에는 핵시설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기에서 원자탄이 처음 만들어졌지요.

이 지역에는 세 개의 가톨릭 원주민 부족이 흩어져 살고 있어요.

자기네 전통 종교를 여전히 신봉하는 부족들 속에 가톨릭이 섞여 들어간 거예요.



5년 전,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핵억제 독트린을 악한 것으로 봐야 하느냐는 문제로

주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이곳 원주민들은

로스 알라모스에서 악귀를 추방하는 ‘엑소시즘’을 조용하게 시작했지요.



그들의 이른바 원시적 지혜에 따르면

이곳에서 세계적 파괴가 준비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과연 어디에 진정한 지혜가 있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너무나 크신 분이라 아무 두려워할 것이 없는 그런 분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과학과 심리학, 역사와 신학, 인류학과 사회학을 통섭하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해요.

그 무엇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우리의 중심을 발견하면 그때부터 울타리를 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경계를 세우고 그것을 지켜야 했어요.



나는 묵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만이 우리를 중심으로 데려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권면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릴까 해요.

여러분, 기도의 은밀한 내적 오솔길로 철두철미 들어가십시오.



여러분에게 가장 내밀한 곳이,

바로 그곳이 실제로 가장 보편적이고 글로벌한 지역이에요.

거기서 여러분은 자유롭게 과학과 기술을 만나고 신앙과 도덕으로 그것들을 연결 짓게 될 겁니다.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

 

25년 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주교들이 놀라운 문서들을 작성했는데

그 중 하나가 그리스도교 아닌 종교들(Nostra Aetate)과의 관계에 대한 거예요.



그 문서는 이런 말로 시작하지요.

“모든 사람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의 근원을 지닌다.

…하나(One)는 그들의 최종 목표이자 하느님(God)이다.

그분의 섭리, 그분의 선하심 그리고 그분의 구원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no. 1).



두 번째 단락에서 문서는 다른 종교들도 그

리스도인들이 안고 씨름하는 것과 같은 신비를 안고 씨름한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이들 종교 안에 있는 진실하고 거룩한 것을 가톨릭교회는 배척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는 비록 여러 가지 특수한 면에서 그 가르침과 펼치는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깨우치는 진리에 한 줄기 빛을 비추는 그들의 방식을

진지하게 존중한다.”



1965년에 이 문서가 처음 발표된 뒤로

그 용감한 지혜로 인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어요.



짧지만 거듭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예언적 문서입니다.

그와 같은 자유에 이르려고 역사는 수천 년을 기다려야 했지요.



여러분 모두 상당한 영적 성숙에 이르렀다고 나는 봅니다.

그런데 여기는 바람직한 출발점이 아니에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신앙의 여정을 보수주의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요.

견고한 보수주의에 신앙의 뿌리를 내려야 해요.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걸어야 하고 그래야만 우주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전선(前線)을 고집스럽게 방어할 필요가 없어지고

세계의 다른 종교들 안에서도 진리가 발견될 수 있음을 볼 수 있지요.



아직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나도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어요.



하지만 왜 예수가 그토록 여러 번

겁내지 말라고,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겁을 먹고 있더군요.



마치 하느님이 당신의 신성한 진리를 옹호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네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에요.



실제로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의 알파요 오메가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대신

자기 주머니에 담을 수 있는 작은 예수(a little Jesus)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영적 은사의 의미

 

두뇌의 통제센터에서 거리를 두게 되면,

자기 신학에서 자유로워지게 되면,

자기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즉시로 초월자가 우리에게 와서 닿을 수 있지요.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이성(理性)의 신화,

과학의 신화에 사로잡히지 않고 은총, 초월자,

불타는 떨기나무 같은 비(非)이성적 세계에 문을 여는 겁니다.

그것들은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눈을 떠서 보는 문제예요.



나는 하느님이 세상에 초대받지 않고서도

또는 세상이 기대하거나 원하지 않는데도 가끔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많은 사람이 영적 치유, 방언, 용서의 은사를 받고

우리는 그들을 통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게 되거니와,

그것들은 우리가 성스러움을 맛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지요.



서구 그리스도교에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

“그 앞에 무릎 꿇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별로 만날 수 없음은 분명 슬픈 일이에요.

그런 경험이 없으면 종교가 아주 빠르게 메마르고 단단해질 수 있거든요.



반면에 우리는 초월적이거나 감정적인 신앙 체험을 무턱대고 갈망해서도 안 돼요.

그것들이 진정한 신앙을 대신하는 값싼 대용품으로 쉽게 바뀔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신앙은 결국 신앙입니다.



경험 없이, 느낌 없이, 알고 믿게 되는 그것이 신앙이란 말이에요.

우리는 빛에 대한 아주 작은 경험을 회상하면서 평생토록 어둠속을 걸어갈 수도 있는 거예요.



가장 널리 알려진 은사인 ‘방언’에 대하여 얘기해볼까요?

방언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가장 작은(least) 것이지만 그래도 매우 중요한 겁니다.



우리 지역의 어떤 원주민들은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훌륭한 묵상기도를 바칠 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말하지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동쪽 창문을 열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환영하는 몸짓을 하여라.”



특별히 고상한 몸짓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그토록 성스러움에 민감한 이유가 그 조용하고 은밀한 몸짓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세상으로 모실 준비가 되어 있어요.

초월자에 대하여 이렇게 자기 자신을 열어놓지 않을 때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신앙과 감정

 

영성생활에서 감정(emotion)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지요.

그러나 그것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 자체를 위하여 감정을 갈망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순결해지고,

그래서 자기 느낌에 집착하거나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감정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어요.



우리는 그것들을 놔버릴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진정으로 위대한 감정,

우리를 전혀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순수 정념(passion)이 빛을 보게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이 성숙할수록 그만큼 감정적인 경험을 덜하게 돼요.

순결한 영혼을 위한 어두운 밤에 관하여 놀라운 글을 쓰신 아빌라의 테레사는

단 한 번의 감정적 위로도 경험하지 못한 채 18년을 사셨지요.



하지만 그 기간을 보내고 나서 그분은 참으로 깊은 황홀경을 경험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감정적인 흥분을 맛보는 것 같아요.



감동적인 영화도 많고 음악도 많고,

그래서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회심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감정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어쩌면 그래서 ‘금식’이 우리에게 중요한 경험일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순절의 본디 의미가 거기에 있거든요.

 



마침내 도달한 고향 집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만들 수 없어요.

그것은 우리한테서 일어나는 무엇, 우리한테 ‘떨어지는’ 무엇이라고 나는 자주 말하지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거예요.



아첨하는 말에 속았다가 고생을 많이 해본 사람은 그런 말이 들릴 때 곧이듣지 않겠지요.

우리를 치료해주는 유일한 말은 사심 없이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말입니다.



여자 친구의 키스를 받는 게임을 한다면

그렇게 해서 받은 키스가 자연스럽게 진심으로 해주는 키스만큼 달콤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회심을 통해서

더 이상 자신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옹호할 이유가 없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과장된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이 아니라 순수한 묵상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자아상(像)도 필요치 않게 되지요.



이 말이 지나치게 심원한 말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것은 진정한 기도를 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우리가 침묵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판단에 휘둘리지 않을 때,

남들의 에너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더 이상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때,

그때 우리한테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있는 그대로 우리예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더 깊은 곳으로 내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해요.



그때 맛보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따라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화지요.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상으로 받는 평화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