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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67.[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은총에 이끌린 삶 3 / 보이지 않는 은총을 뒤늦게 깨닫는 것은 당연한 일

은가루리나 2020. 3. 14. 01:51



Re:Re:67.[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은총에 이끌린 삶 3 / 

보이지 않는 은총을 뒤늦게 깨닫는 것은 당연한 일  ━민범식 신부의



리처드 로어 신부가 말하는 그냥 바라보기 <벌거벗은 지금>

★벌거벗은 지금

무심 등급변경▼ 조회 372 추천 0 2017.09.25. 22:45



머리말


나는 왜 이책을 쓰는가?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코헬 1,8)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진 세대들 간에 태어나
다양한 문화들을 겪으며 여러 종교를 봐온 사람이지만
그래도 역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현재 내가 보는 걸 사랑한다.
지금 보이는 대로의 인생은 나를 흥분시킨다.
물론 나는 여전히 보고 들을 것이 많고, 알고 행할 것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본다는 행위는 또한 고통스럽기도 하다.
개중에는 보고 싶지 않거나 알고 싶지 않던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 중부 아메리카의 중앙인 캔자스에서
뿌리 깊은 독일계 보수주의의 가톨릭 농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960년대에 급속도로 바뀌면서
새로워진 휠씬 큰 세상으로 보내어져 거기서 교육울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를,
치료 운동therapeutic movement은 인간의 정신을,
가난과의 전쟁과 시민평등권 운동과 반전 운동은
미국을 개혁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이것도 저것도both-and'로 (또는 '반대들의 충돌'로) 보려는
고정관념이 내게 있다는 말을 듣곤 했다.

마치 천성이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저지른 가장 고약한 실수들은 자기 균형을 이루지 못한 데서 온다.

당신이 별자리를 믿는다면,
나는 예수부활대축일이 가장 늦은 해에 겨울에서 봄 사이 어느 날,
두 마리 물고기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물고기자리에서 태어났다.


나는 늘 부활대축일을 기다리는데, 해마다 기대감도 대단하다.
캔자스 주 토피카 시의 스톤스 폴리 유적지에서
1900년에 사람들이 처음 방언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로부터 70년 뒤에 그곳의 한 가톨릭교회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언제나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에 만족했지만
나는 개신교와 오순절 교회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게 많있다.

나는 사람들의 앎에 서로 다른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다.
언어는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 and or'으로 갈라놓았지만
내 삶의 경험은 언제나 '이것도 저것도both-and'였다.


나는 내 생각과 다른 이들의 생각 대부분을 시인하면서 동시에 부인하는,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치는 보수, 과정은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하겠다.

나는 정의, 진실, 끝까지 성실함, 정직함,
개인적이고 재정적인 책임, 충실한 사랑, 겸손을 믿는다.

(이 모두가 매우 전통적인 가치들이다.
하지만 내 견해로는 이런 가치들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면서 살려면
상상력이 있어야 하고 급진적이고 대화에 익숙하고
심지어 반문화적일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교회나 정치판에서 보수 진영도 진보 진영도 이 일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
양쪽 모두지나치게 이원적이다.)

그들은 신비주의자들처럼 생각하거나 보지 못한다.



나는 좋든 나쁘든 20세기 미국 문화와 가톨릭 신학,
그리고 원주민 종교와 세계 종교들의 지혜로운 전통들,
특히 주로 좋은 영향을 준 프란치스코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나는 이 책에서 발달심리학, 신학, 철학, 역사,
많은 종교의 신비가들에 의거한 통찰뿐 아니라,
공동체 건설과 영적 지도의 경험에서 오는 통찰에 의지하고,
특히 올더스 헉슬리가 '영원의 철학'이라고 부른 것에 의지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여기에서 왜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잘 볼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정직하게, 겸손하게,
그리고 도움 되는 방향으로 읽지 못하게 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그토록 자기 자신의 감옥에 갇힌 자들로 보이는 것인가?
(이점은 교회와 교육계와 정부의 고위층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어째서 세계의 종교들이
사람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본디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것인가?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1코린 2,9)
하느님이 하고 계시는데.
어째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체험하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나는 앞에서 언급한 자료들에 덧붙여
나 자신이 거쳐온 여정에도 의지하고자 한다.

그것은 나 자신과 세상을 정직하게, 좀 더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리고 더 넓고 덜 자기중심적인 틀로 보고자 한 여정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의 허물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실패, 범죄, 몰락, 그리고 그늘진 행위들은
우리가 허용하기만 하면 모두 훌륭한 교사들이다.

나는 자기성찰, 이야기, 어록, 히브리 성경과 그리스도교 성경에 대한 해석,
그리고 구체적 실습 등 여러 방식을 동원하여
이 책의 중심과제를 풀어보려고 한다.

이 책을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읽을 수도 있지만,
한 번에 한 장씩 읽고
그 메시지가 당신 안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각 장 제목을 보고 마음에 끌리는 것을 읽어도 좋다.

대부분의 글이 독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말한 모든 주제들이
이 책을 관통하는 다음 메시지로 나를 이끌었다.

모든 말saying이 말 없음unsaying으로 균형을 이루고,
앎은 모름으로 겸손해져야 한다.

이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종교는
틀림없이 공격적이고 배타적이고 심지어 난폭하다.


모든 빛이 어둠에 의해,
모든 성공이 고통에 의해 채워져야informed한다.

그것을 십자가의 성요한은 밝은 어둠이라 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파스카 신비 또는 불가피한 과월절이라 하였고,
가톨릭은 성체성사 때마다 신앙의 신비로 선포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중심원리로 자리 잡는 일는 매우 드물다.


일찌감치 배워서 익숙한 이원적 사유思惟
우리를 한쪽으로만 멀리까지 데려갈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성숙한 차원의 모든 종교가
죽음, 사랑, 무한, 고통, 하느님 같은 큰 질문들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다른 소프트웨어를 발견한 것인데,
많은 이가 그것을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라고 부른다.

순간을 비이원적으로 보는 것이다.
본디 그 말은 단순히 '기도'를 뜻하는 말이었다.


현재 순간의 성사聖事, sacrament'를 벌거벗은 지금에 살아내야만,
우리는 경험이 좋든 나쁘든 추하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그를 통해 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써 순간을 어김없이 나눠놓고,
순수 현존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



당신이 현재에 존재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참된 현존Real Presence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진실임을 당신에게 약속한다.


그것은 거의 그토록 간단한 것이다.





Re:67.[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은총에 이끌린 삶 3 / 

보이지 않는 은총을 뒤늦게 깨닫는 것은 당연한 일 ━민범식 신부의


moowee|등급변경▼|조회 110|추천 0|2018.06.26.



12.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3)| ■ 내맡김 영성 ■


moowee|등급변경▼|조회 1536|추천 2|2010.01.04. 11:16



12.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3)




moowee 18.06.26. 23:48    


그 가르치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
영혼은 그저 '탄복의 탄복'만을 되풀이 할 뿐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영적 경험 안에서 우리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앞서의 감각 경험에서처럼 우리 능력과 연관된 감정이 아니라, 

★ 경탄의 감정 ★입니다.

‘아, 그렇구나! 바로 이거였구나!’


막연하게 찾아 헤매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데서 오는 

★기쁨과 놀라움의 감정 ★인 것입니다. >



탄복의 탄복,
날이 갈수록 < 경탄의 감정 >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감히~~~
100%를 내맡기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언 >하고 싶습니다, 

저의 지난 9년의 경험을 통해!!!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봉헌한 하내영이
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다 100% 내맡길 수 있기를 원하며,
그것마저도 아버지께 내맡깁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탄복의 탄복,
날이 갈수록 < 경탄의 감정 >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감히~~~
100%를 내맡기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언 >하고 싶습니다, 

저의 지난 9년의 경험을 통해!!!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봉헌한 하내영이
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다 100% 내맡길 수 있기를 원하며,
그것마저도 아버지께 내맡깁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무화 18.06.27. 00:13    


아멘~ 아멘!


moowee 11.04.03. 07:45


백 날, 천 날, 만 날을 수도(修道)를 해도
하느님이 당신을 알려 주시고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허당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걸 내맡긴 사람에게는 당신을 알려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내맡김으로 그 사람이 하느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알려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과정은
각 사람에게 맞게 

"하나 하나", "나날이 조금씩 조금씩", 

"때로는 엄청나게" 알려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입에서 감탄이 떠나지 않게 됩니다.

"아휴, 하느님! 어휴 하느님!" 소리만 연발하게 됩니다, 정말입니다.^ ^



앗, 참!
참으로 중요한 것은,
당신을 알려 주실 수록 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無限"하신 분이시며,
또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앎은 끝이 없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또한 그러하기에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날이 갈수록 끝없이 빠져드는 모양입니다.


이상은 내맡김 영성의 "왕초보"의 한 견해였음을 잊지 않아 주시기 바랍니당~~~




moowee 18.06.27. 00:40


< 앗, 참!
참으로 중요한 것은,
당신을 알려 주실 수록 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無限"하신 분이시며,
또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앎은 끝이 없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



《 *하나*는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애쓰며 살지~》 크으~~~ ^-^



< 하느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앎을 알게 해 주시는 데 있어서

★ 모든 것을 다 도구로 쓰신다. ★ >



모~~~든 것을 !!!

사랑은, 하느님은 언제나 그자리에 계십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모~~~든 자리에!!!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우리의 하느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냥 벌거벗고 계십니다, 벌거벗으시고 지금, 우리를 위하여!


★벌거벗은 지금|리처드 로어 신부가 말하는 그냥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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