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아버지와 주님의 기도

하느님의 이름은 '아버지'입니다 이렇게 해 보세요 2016.05.20. 09:36

은가루리나 2016. 6. 20. 23:40






나비야 가사

나비야 나비냐 이리나라 오너라 ~~

노랑 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

봄바람에  꽃잎도 빙긋빙긋 웃으며

참새도 짹짹짹 노래하며 춤춘다 ~~​




제가 오래 전부터


"아버지"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들어간


"아버지"에 대한 화살기도 성가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처럼)







moowee16.05.18. 11:28



구약과 신약의 최대 분수령은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성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름도 부를 수 없던 엄위하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 주신 일,


즉 우주 만물의 창조주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게 해 주신 것,

그 사실을 신.구약의 최고 분수령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인류 구원역사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해욱프란치스코61 16.04.16. 22:17



<부족한 제 안에서 당신 마음껏 지고하신 뜻의 나라의 경계를 확장하소서>



"지고하신 뜻의 나라의 경계를 확장하소서"


최근 제가 올리는 글들에 <하느님의 호칭>의 변화를 느끼셨는지요?

최근의 저의 하느님에 대한 호칭이, 

<주님>에서 하느님 아버지 또는 아버지 하느님 아니면 

아예  아버지로 바뀐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느낀 느낌인데,

제가 처음 모든 것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저의 가슴 깊이 다가온 단어가 피조물이었고  그 다음으로 하느님 아버지였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아버지이신 사실을 온 존재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뜨거운 눈물로 하느님 아버지를 얼마나 외쳐 불러댔던지 모름니다.ㅠㅠ



최근에 다시 그 하느님 아버지 아니,

아버지라는 호칭이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또 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라 부르면서 저의 내맡김의 삶의 경계(지경)가 더 확장되고,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꼭 아버지라 부르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따라쟁이 이기 때문입니다.




{19-38,19 내 뜻의 나라는 그 경계가 없을 만큼 무한하지만 

피조물은 유한해서 이 나라 전체를 소유할 능력이 없으므로,

피조물이 소유하는 정도에 따라 나라가 확장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완죤~~~히 100%를 다 내맡기고

그분의 모든 이끄심에 완전한 확신을 갖고 따라가는 하내영들은 이제,

하느님에 대한 호칭을 <主님>에서 아버지로 비꾸어 부르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부르는 호칭은 서로의 관계를 증명해 줍니다.

<主님>이라는 호칭과 아버지라는 호칭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주종적인 관계에서 주로 사용하지만,

아버지라는 호칭은 가족적인 관계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수도원장을 <아빠스=아빠=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구약시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신약시대에 와서 벌어진 일이 바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던 일이며,

그 일을 예수님께서 벌리셨던 것입니다.


사실, 그 일(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라가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라는 호칭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엄청난 신분상승을 가져다 준

참으로 거룩하고 은혜로운 말(단어)입니다.

다시말해,

{피조물이 소유하는 정도에 따라 나라가 확장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피조물)에게 하느님 뜻의 나라를 확장시켜 줄 호칭인 것입니다.


저는 요즘 주로 아버지를 <끊임없이 화살기도>하려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실 때 <하느님 아버지>라는 화살기도 성가를 만들 생각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화살기도 성가를 아버지께 맡기오니 이끌어주소서!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하느님~~




<시편75,2>


저희가 당신을 찬송합니다, 하느님, 찬송합니다.

당신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당신의 기적들을 이야기합니다.








-이해욱프란치스코61 16.05.20. 10:11- 



아버지의 이끄심입니다.


<저는 5월 22일 삼위일체대축일부터(21일 자정까지) 

다른 모든 화살기도를 내려놓고 능구 3개월(100일) 기도에 들어가겠습니다.


저와 함께 이 번 <100일기도>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하내영만 

아래의 댓글에 자신의 이름(이해욱프란치스코61)을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하루라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자발적 참여입니다.


<나비야>노래의 가사에 <아버지>를 대입시켜 부르시면 됩니다.



<민수 6>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이해욱프란치스코61 16.05.21. 22:23-



<합동 기도, 능구 3개월(100일) 아버지 호칭 화살기도>참여 신청 댓글을 오늘로 마감합니다, 


아직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호칭 화살기도 성가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셔서 

독일민요 번안곡인 소위 <나비야>를 '임시 화살기도 성가'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가사이지만 그 가사도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이미 얼마 전부터  나비야의 노래에  계속 아버지라는 호칭을 반복하여 불러왔지만

이 합동기도를 제안하던 아침에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하느님>이라는 가사를 첨부하게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마태 18>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 번에 아버지께서 

부족한 저를 통하여 이끌어주신 이유는 

아마도 우리 부족하고 죄스런 내맡긴 영혼들을 통하여

지고하신 뜻의 나라의 경계를 확장시켜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기도의 목적은 우리 자신의 어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느님 아버자의 뜻이 지금보다 더욱 확장되기를 원하는 지향 으로

돌아오는 8월 29일까지 100일 동안,

다른 모든 화살기도와 다른 지향의 기도들을 내려놓으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집중몰입하며 

함께 기쁜 마음으로 합동화살기도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기회에 참여자 모두 함께 <아버지를 힘차게 외쳐봅시다.(로마8, 15)>!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로마 8>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4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5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6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7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이해욱프란치스코61 16.05.22. 06:57-




<마태 25>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




<노자 도덕경 5장>



天地不仁(천지불인) 以萬物爲芻狗(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성인불인) 以百姓爲芻狗(이백성위추구)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천지는 보편적이어서,

마치 사람들이 지푸라기로 엮은 개를 대하듯이 만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오.

성인은 비인격적이어서,

마치 지푸라기로 엮은 개를 대하듯이 사람들에 대하여 무심하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天地;시공간. 仁; 어질다,인자하다. 以; 써,~부터,닮다. 萬物 ; 삼라만상

爲; 여기다, 행하다,하다. 芻狗; 짚이나 풀로 만든 강아지.


天地는 하늘과 땅이라고 번역이 되지만, 

여기서는 그런 현상적으로 나타난 구체적 사물이 아니라, 

기본적인 자연자체, 즉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읍니다.


仁이란 사람이 갖이고 있는 人情,즉 인간적인 자애심을 말하죠.


그런데 仁자를 破字해 보면 사람人자에 둘二자이니깐,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인간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죠.


여기서 不仁이란 인간적인 면이 없다는 것이죠.


즉, 인간의 마음이 희로애락(喜怒哀樂)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



무심한 상태를 말하며, 보편적인 우주적 의식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연자체는 사람의 마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죠.

그래서 번역해 보면 <자연은 보편적이어서>이렇게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以萬物爲芻狗-마치 만물을 추구(풀강아지)처럼 여긴다.- 이렇게 직역할 수 있읍니다.


여기서 추구(풀강아지)란 

옛날 중국에서 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 제삿상에 형식적으로 올려 놓는 제숫물로 

제사가 끝나면 길에다 내 버린다고 합니다. 


마도 그 이전 원시시대에는 실제로 개를 잡어서 신에게 올렸는데, 

세월이 가면서 점차 형식화되어 풀로 개모양으로 만들어 신에게 올리는 시늉만 한 것이겠죠. 

이렇게 제사가 끝나고 길에 내다 버린 풀강아지는  누구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하찮은 물건이죠. 

자연은 모든 만물을 그렇게 하찮게 본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연의 작용이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쌀쌀하게 인정머리없이 보이겠지만,

자연은 "있는 그대로" 저절로, 무위적으로 흐를 뿐이죠.


이렇게 해서 두문장을 합쳐 말을 꾸며 보면,

<자연은 보편적이어서, 마치 사람들이 짚으로 엮은 개 보듯이, 만물을 무관심하게 대한다>


여기서 번역상으로  -천지가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라고 그대로 직역해 버리면

천지가 직접 그렇게 여기는 것도 좀 어색한 말이 되고,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일 뿐이죠. 

그래서 위와 같이 번역을 했읍니다.



다른 번역서들의 해석을 들여다 보겠읍니다.


-천지는 사사로운 정을 품지 않으니 만물을 풀강아지로 여기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심하게 바라 볼 뿐이고,-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대하고-

-하늘과 땅은 인하지 않으니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버려둔다-



聖人不仁 以百性爲芻狗


위의 문장과 동일하므로 그대로 해석하겠읍니다.


<성인은 비인격적(보편적)이므로, 마치 짚으로 엮은 개 보듯이, 모든 사람들을 무심으로 대한다.>


위의 천지의 경우에는 - 보편적-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을, 

성인의 경우에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비인격적이다-라는 단어로 바꾸었읍니다. 

두단어는 의미가 동일한 단어입니다.


여기서 백성이란 '온갖사람들' 을 의미하는 것이지, 

성인이 한 나라의 왕의 입장에서 말하는 '백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죠.

성인은 의식을 초월한 도인입니다.

따라서 사사로운 인간성에 좌우되는 마음이 사라졌읍니다.



마음은 인간적인 의식이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 인간적인 마음을 버리는 것이죠.

깨달은 각자(覺者)는 한인간이라기 보다, 보편적 존재이며, 

자연처럼 무심(無心)하고 무위적으로 살아 갑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자비심이 중생의 입장에서 볼때는 넓은 자애심으로 여기지만,

엄밀히 말해서 부처에게는 그런 감성적 자비심이 아니라, 

자연과 일체가 된 일체심을 자비심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깨달은 성인은 사사로운 情에는 무심합니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드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읍니다.

죽음과 탄생을 넘어서 있어서, 오히려 육체의 죽음을 반기는 것이 성인들이죠.



왜냐하면 육체때문에 의식이 생겼고, 

모든 고통은 이 의식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며,

육체의 죽음으로 인해 개인적인 의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되죠.


그러나 육체가 살아 있을 때에 자신이 죽음을 넘어서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쳐야죠.

그것을 불교에서는 니르바나,즉 열반이라고 하죠. 


성인들에게는 육체가 살아 있으면서, 이육체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는 일,

이 열반이 인간에게 가장 축복받는 일이라고 말씀들 하십니다.

그래서 성인은 의식 넘어에 있는 비인격적인 보편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들이죠.



다른 번역서들의 내용,


-성인은 사사로운 정을 품지 않으니 백성을 풀강아지로 여기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성인도 인하지 않으니 백성들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버려둔다-

-성인도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




<신비의 혀>라는 책을 읽다가 

천지불인이라는 말이 나와 Daum을 검색하여 찾아본 내용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한 없이 자비로우시며 또한 냉정(不仁)하십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의 법 안에서

그분의 <냉정(不仁)하심>도 인정하고 또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마태 25>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번 <아버지 호칭 100일 화살기도>를 통하여

늘 깨어 있는 하내영이 되시길 바라며 또 그런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하내영이 하느님을 향한 외골수가 되시길 빕니다.








-이해욱프란치스코61 16.05.24. 00:16-



<마태 10>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으리는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으로

우리의 배우자, 자녀, 재산 그밖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긴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긴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에 <不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겼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의 모가지를 하느님 앞에 다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해욱프란치스코61 16.05.22. 12:12-



지금까지 내맡김의 종합 ♣♣ 내맡김의 영성 ♣♣ 


언젠가 TV에서 리어카꾼의 말이 제 마음에 와 닿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 리어카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제가 저 리어카로 좋은 집도 사고, 

우리 애들 몇 명씩을 다 대학에 보낸 아주 훌륭한 리어캅니다!" 라는 말이 말입니다.




말 배우는 아이들이나 부르는 <나비야>는 

우리나라 민요 <아리랑>보다 더 세계적으로 더 많이 알려진 독일의 민요이며,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 입에서 불려지고 사랑받고 있는 매우 유명한 곡입니다.


이 곡에 

위대하시고 놀라우시며 참으로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름인 <아버지>를 가사 붙인

이 화살기도 성가는 참으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합동기도에 참여하신 하내영께서는 

8월 29일까지 <온 致誠>을 다 드려 머리로 입으로 마음으로 노래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100%의 거룩한 내맡김의 굳은 결심을 했다 해도,

능구 3개월 화살기도에 <치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증명이 바로,

누구누구들처럼 <불순명>하고 이곳에서 떨어져 나간 하내영들일 것입니다.


지극한 정성 없는 기도는 그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