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아버지와 주님의 기도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유 -하느님을 '아버지' 라 부르셨기 때문이다.

은가루리나 2016. 6. 21. 01:19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유

 

 

 

<하느님을 '아버지' 라 부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내 아버지" 라고 부른다.

그리고 "내 아버지께서 계속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는 이 말씀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마음을 먹는다.

안식일 규정을 어겼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 라 불렀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이고,

아버지께서 죄를 용서하시듯  아들도 죄를용서하는 권한이 있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부활시키듯이  아들도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부활시킨다고 말씀하셨다.(요한 5장 참조)

 

예수님은 여러 차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다는 이유로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잘 아시면서도

계속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뿐이며,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나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다.(요한 16,27 이하 참조)

만약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다는 이유로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일 마음을 품고 있는 줄 아시고, 

그 말을 취소하셨거나

더 이상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침묵하셨다면  죽음은 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해서 

하느님을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계시하시지 않았거나  그 말을 취소하셨더라면 

지금쯤 우리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가장 큰 신비는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다고 해서  예수님은 죽음에 처해지셨다.

예수님이 하느님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당신 안에 있다고 하셨다.

유다인으로 태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 성녀도

자신이 가톨릭으로 전향한 것 때문에  유다교에 믿음이 깊은 경건한 어머니와 갈등을 빚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왜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을까? 그 말만 하지 않았다면

그런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 않고 좋은 예언자로 남았을 텐데......" 라고 질문했다.

에디트 슈타인 성녀는 그 신비를 알고 있었으나 침묵으로 응답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똑같이 말하면 내가 거짓말쟁이가 될 것" 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것이 진리이기에 죽을 줄 잘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신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예수님이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셨으니 하느님께 돌아가신다 치지만,

우리는 분명 땅에서 태어났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조상들이 본 것은 땅에 관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베어 있음을 느끼며 살고 있다.

아무도 설명해 주거나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특히 우리 조상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컸기에

책만 보고도 그 진리를 깨달아 학문에서 바로 신앙으로 넘어갈 수가 있었다.

하느님이 당신 모상을 우리 영혼 속에 심어 두셨기에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숨은 갈망, 이 씨앗을 예수님께서 계시로써 터뜨려 주시지 않았다면

계속 숨겨진 채 꽃피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은 첫마디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게 하신다.

성녀 데레사는 여기서 마음이 녹아 버린다.

"기도 끝에 '우리 아버지' 를 부르게 하시었어도 막중한 은혜였을 것을......

처음부터 당신은 우리 아름이 벅차게시리 막중한 은혜를 내리시니......"(완덕의 길 27,1).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바로 내 아버지라고 알아듣는 그 자체가 이미 완전한 관상이다.

관상기도는 어떤 방법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인 사촌 언니가 감격 어린 눈물에 젖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기도를 시작하면, 그 말 한 마디에 많은 아픔과 격정들이 다 사라지고 간장이 다 녹아 한두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당신 사랑의 은총에 녹아

당신 사랑을 바라보기를 원하심을 깨닫는다.

왜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실까?

그 것은 당신 사랑을 느낄 때 우리가 무한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원하신다.

그래서 다른 기도는 할 줄 모르는 무지한 할머니나 문맹인도

'주님의 기도' 하나로 완전한 관상에 잠길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 후 막달레나에게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고 말씀하시면서 당신과 우리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으셨다.

내 아버지요 너희의 아버지, 내 하느님이요 너희의 하느님.

이렇게 엄청난 축복과 은총을 계시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죽여버렸다.

사실 하느님이 내 아버지임을 정말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지고 싶을 것이며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품위와 자유를 지니고 사셨고,

우리 역시 그렇게 자유롭고 기쁘게 살기를 원하신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네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유다인들은 이 말을 듣고 돌로 치려 하였다.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요한 10,33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신이고 하느님의 아들' 이라고,

당신 혼자만 하느님과 하나인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신' 이며 '지존하신 이의 아들' 이라고

시편 82를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요한 10,34 참조).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9-12).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신이고 하느님의 아들' 이라고,

하느님은 '사랑 자체' 이시니 너희 역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랑을 지니고 살라고

참된 우리의 모습을 알려주신다.

 

이를 우리가 막연히 실천하려고 하면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방법도 알려주신다.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러 그 계명을 지키셨듯이

우리도 먼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그러면 그 계명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사실 관상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이 사랑 안에 잠겨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의 힘이 내 안에 충만히 넘치게 되면,

내 안에 충전된 하느님 사랑 자체의 힘으로 계명을 실천하게 된다.

성녀 데레사는 자서전을 통해 관상 은총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계명을 실천하는데

더 쉬운 방법이기에, 또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약해서 관상 은총이 없이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이 은총을 주셨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씩씩하고 늠름한 대장부들이 관상 은총을 안 주신다고 투덜대는 것을

성녀 데레사는 못마땅해한다.

하느님은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실천할 힘을

그들에게 주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적 사랑 안에 잠겨 있노라면 이 사랑이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이 '사랑' 속에 더 깊이 잠겨 하나가 될수록 자신이 더욱 성화되어 감을 느낀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영원한 생명이란 참되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아는 것, 그리고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너희는 내 아들들이고 내 외아들과 함께 너희는 하느님들이다.

내 외아들이 하느님인 것처럼......

그러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내 아들이 너희를 위해 보여준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이 사랑이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

 

그라나 만일 하느님이 외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바

- 너희는 하느님이고 너희는 하느님의 아들임-

를 믿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이미 자신을 단죄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한하고 영원한 본성을 믿지 않고 한갓 동물로 머물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큰 죄는 바로 예수님이 계시한 이 말씀

- 너희는 하느님의 아들임- 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에 반해 참된 회개는 이 복된 소식을 믿는 것이고(마르 1,15)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감사하게 받고 이 기쁨을 찬미하면서

거저 받았기에 거저 나눌 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의 신비는 움켜지고 악착같이 모으는 대신,

주시는 선물이 얼마나 큰지 깨닫고 이 선물을 받기 위해 쥐고 있던 손을 펴는 것이며

이 큰 선물을 잘 받기 위해 부질없는 것으로 채우려는 마음을 비우는 데 있다.

 

인간은 자신의 참된 본성을 알게 되면 두려움과 불신이 없어지고

한없는 신뢰와 사랑이 싹터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불교의 선승들은 20-30년 동안 자신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 고되고 뼈를 깍는 수행을 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되지만 수행자 모두가 이 깨달음(부처)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수도자 중 초보자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아직도 닦아야 할 것이 많고 결점이 많음에도 

오랜 세월 수행을 하고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수행자보다

훨씬 더 큰 자유와 기쁨 속에서 거니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얼마나 우리의 수련을 단축해 주시고 또 초보자들도 완성된 자가 누리는 것과

똑같은 하느님다운 자유와 기쁨을 지니고 거닐게 하시는지 놀랍기만 하다.

 

가톨릭 수도자들 모두가 모든 선교활동에 앞서 이 말씀에 몰두 할 줄 안다면

얼마나 큰 자유와 기쁨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될까?

하느님 나라는 바로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는 것, 자신이 하느님임을 알고 하느님처럼 사는 것,

우리 각자가 이렇게 살 때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고 하느님 뜻이 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지리라.

우리가 '주님의 기도' 에서 비는 것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안다면!

 

 

수도자들의 가장 시급하고 큰 과제는 기본 진리(교리)를 자신이 깊이 묵상하고,

그 생명을 자신이 살고, 생생한 언어로 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따분한 교리 시간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감명 깊은 시간,

즉 '생명의 시간' 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돕는 데에 관상 수도자의 책임이 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생명이 담긴 메시지를 전하러 좋으신 아버지의 품을 떠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다 죽음을 당하셨고, 수도자는 그 사랑에 매료되어 모든 것을 초개같이 여기고 예수님이 전파하신 진리를 전하고, 또 삶으로 살겠다고 응답한 이들이다.

하지만 수도 생활을 하다보니 순서가 뒤바뀔 때가 많다.

수도원을 짓고, 불쌍한 노인들을 위해 양로원을 짓고, 기도를 가르칠 장소가 없으니

영성센터를 마련한는 것이 더 급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 모든 활동이 다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쁜이다."

그러나 이는 관상 수도자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상황으로 봐서는 정말 필요하고 다급했을 것이라 본다.

손님은 밀려오는데 아직 그릇과 숟가락, 젓가락도 안 놓았으니 속이 탈 것이다.

이럴 때 가정이든, 수도원이든, 어디에서든지 마리아 타입은

마르타 타입으로부터 독촉을 받고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거룩한 열정을 지닌 여인에게 안달하고 초조해 하지 말고

순수한 사랑으로 일하라고 하신다.

 

아마도 마리아는 이때 마르타를 도우러 일어섰으리라.

그러나 마음은 사랑하는 분을 향하여 있고 또 그분이 하신 말씀에 잠겨

그 신비를 관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 말씀은 이런 마음으로 일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까? 사랑하면 할 수 있다.

사랑하면 진종일 그 사랑하는 상대만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엄마를 보라! 밖에서 일하면서도 방 안에 있는 아기에게 온통 마음이 가 있다.

그래서 보지 않고도 아기의 낌새를 다 알아채고 울기 전에 가서 그 요구를 다 채워 준다.

사랑하는 마음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신 말씀이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먼 하늘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지상으로 내려오신

그 큰 사랑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어떻게 우리를 떠나실 수 있겠는가? 우리의 행복과 기쁨만을 원하시는 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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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우리 안에 머물고 싶어하심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하나이듯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고 싶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의 기쁨과 영광이 우리 안에 넘치게 하고 싶으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이기에 스스로 하느님이 될 수 없다.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써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을 우리는 '하느님의 양자' 라 부른다.

그렇다 해도 하느님보다 못한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요한 17,22)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물론 자기 용랑대로이지만 예수님과 같은 영광을 함께 받아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영광을 체험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당신 신부를 마치 당신처럼 대하신다.

하느님은 결코 당신보다 우리를 낮게 대하지 못하신다.

마치 피조물이 하느님인 양 당신이 하인인 양 우리를 높여 주신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아주 분명하다.

'너희도 모두 내 외아들 성자 예수와 함께 내 아들이 되고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어,

내 아들에게 준 그 영광에 너희도 참여하고, 나와 내 아들과 같이 너희도 하느님이 되어

내 무한한 행복과 기쁨을 영원하 누리라.' 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 될 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실 것이다.

우리가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이뜻을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이고,

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충만하게 이루어질 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고생하고 돌아가신 보람의 열매를 내 안에서 성취하시는 셈이고,

그렇게 될 때 그 기쁨은 감출 수 없어

예수님은 길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기뻐하는 목자처럼

천사와 성인들 앞에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기도의 스승 성녀 데레사와 함께하는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로 관상까지> 중에서   -부르고스 가르멜 수녀원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