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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신부님 하느님의 뜻 영성 제2차 피정 강의

은가루리나 2016. 12. 30. 08:54




 카를로스신부님 정릉4동 성당 제8강의  (2013. 4. 평신도 피정 셋째 날 오후)





8. 하느님 뜻 안에서 우리의 활동, 기도, 영성체




우리는 이제 집에 있습니다. 

우리는 태양 속으로 녹아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시계 속의 제일 큰 톱니바퀴 안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기도와 영성체를 행하도록 

우리가 초대된 내용에 관련하여 

제3장의 내용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의 활동과 관계된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은 일상생활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번 이것을 알고 나면 모든 것에서 떠나서, 

자신의 모든 사업을 집어치우고 산으로 가서 

루이사의 글들을 읽는 데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 남편과 함께 살면서 이런 것들을 하기는 어려우므로 

차라리 내가 남편을 떠나서 이것과 함께 혼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이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라면, 

이제 나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에 나의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모든 것에서 떠나서 나의 모든 것을 여기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하느님 뜻 안에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이런 삶 안에서는 예수께서 왕이시고 성모님께서 여왕이십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평범하면서도 “숨은” 일상생활을 하셨습니다. 

이 “숨은” 생활이란 것은 마을에서 떨어져서 몰래 숨어 사셨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들도 일을 하시면서, 기도하시면서 그 마을의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의미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경우를 더 알아보지 않더라도, 

하느님 뜻의 왕국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도구인 루이사의 경우를 보아도 

이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루이사는 보통 여자였고 평신도였습니다. 

65년 동안 침대 위에서만 살았지만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언제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행복한 여자였습니다. 

루이사는 예수님의 수난에 신비적으로 65년 동안이나 참여하였습니다. 

루이사의 일상생활은 자기 집에서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고 매일 영성체를 했고, 

순명으로 하루 한번 조금 먹었으며, 매일 기도했고 

그리고 애들에게 수놓는 것을 침대 위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다음에는 

여동생 안젤리나와 함께 제대포를 만들어서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예수님, 성모님, 루이사 모두 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의 최고의 모델이지만 

모두 다 평범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 뜻을 완전히 이루면서 

평범한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을 꼭 해야 됩니다. 

매일 우리의 작은 행위들을 예수님의 행위 안에 녹여 넣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 모든 행위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와 우리에게 수천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나와 함께 하고 내 뜻 안에서 해라.”

이것이 하느님 뜻을 행하는 것과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것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에는, 

여러분은 거절하지 않고, 

여러분과 함께 가서 함께 행동하자고 예수님께 청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상점에 가서 코카콜라를 사오라고 명령하시면 

여러분은 그 명령에 순명하여 상점에 가서 코카콜라를 사서 예수님께 가져다 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순명하면서 

가게에 코카콜라 사러 갈 때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뜻으로 갑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은 

여러분이 코카콜라를 사러 상점에 갈 때에 

예수님과 함께 가서 하느님 뜻에 의해서 여러분의 그 행위가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바로 일상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우리의 활동, 기도, 성체성사 안에서의 일치입니다.


다시 책 내용을 계속하겠습니다.



11권 62장 1913년 9월 21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든 것은 

그분과 같은 특성, 같은 생명, 같은 가치를 얻는다.


1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오늘 아침에는 형용할 수 없도록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뭔가 그분께 매우 소중하고 내게는 아주 놀라운 것에 대해 말씀하시려나 보았다.


2 “사랑하는 딸아, 영혼이 나의 뜻 안에서 나와 함께하는 모든 것, 

곧 기도, 행동, 발걸음 등등은 나와 같은 특성, 같은 생명, 같은 가치를 얻는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 하고 그분의 뜻 안에서 하면 

우리의 행동들이 

예수님의 행동과 동일한 품격과 동일한 생명과 동일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삶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 뜻을 행할 때에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게에 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명령에 순명하여 여러분 혼자 코카콜라를 사러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수고에 대하여 1달러의 수고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가게에 가시면, 

그리고 영원한 하느님의 뜻이 코카콜라를 사러 여러분과 동행하시면 

여러분은 그분께 얼마를 지불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값으로 계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값을 치를만한 돈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무한하고 셀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고 

값으로 따질 수가 없는 무한한 것입니다. 

인간이 한 모든 행동은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완전하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그 무게가 있고, 수치로 나타낼 수 있고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을 행하느라고 여러분이 어떤 행동을 하고 기도를 하고 고통을 받을 때에는 

그것들은 가치를 따질 수 있고, 수치로 나타낼 수 있고 또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일생이 끝날 때에 그 가치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일생이 끝날 때에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여러분에게 

아니다. 지금까지의 그 모든 행동은 전부 나의 행동이었다. 

너희는 나에게 얼마를 보상해 주겠느냐?’ 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얼마를 보상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모든 행동이 자신의 행동이었다고 주장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보상하시겠습니까? 

그 보상은 무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순명하는 것을 계속해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게에 가서 코카콜라를 사라고 명령하시면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혼자서 가면 그 가치는 아주 적지만, 

여러분은 무한한 가치를 원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주님께 여러분 혼자서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간단하고 쉽다. 

그렇지만 그 가치는 한없이 크다. 

그런데 너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므로 믿음이 꼭 필요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서도 아무것도 보지를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대로 살아야 됩니다. 

아주 쉬운 일이지만 동시에 한없는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 해서 

이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시리아에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래서 시리아의 왕이 자기 장군 나아만에게 편지를 주어서 

이스라엘 왕에게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장군을 보러 나오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서 

“나아만에게 가서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면 몸이 나을 것이라고 전하여라.” 

라고만 하였습니다. 

나아만이 너무 화가 났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무엇인가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를 치료해서 병이 낫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시리아로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아만의 하인 하나가 

“주인님, 다행히도 장군님께 어려운 것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아주 쉬운 것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냥 해보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목욕을 했고 치유가 됐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이스라엘에 정말 하느님께서 계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열왕 5, 1-15 참조)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굉장히 간단하고도 쉬운 일인데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면 그 결과는 굉장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작은 행동 즉, 

여러분의 걸음걸이, 보는 것, 여러분의 기도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같은 가치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이 모든 행위를 예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 내가 지상 생활 동안 행한 모든 것을 보아라. 

그 기도와 고통과 행적이 이를 원하는 사람의 선익을 위해서 

지금도 고스란히 수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아주 쉽지만 결과는 아주 굉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걸음을 걸을 때에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뜻 안에서 하면 

이 걸음은 그게 영원히 현존하고 하느님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


아담이 태초에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계속해서 

온 우주에서 하느님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말하는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과 여러분의 걸음, 여러분이 바치는 기도에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4 나의 행위는 피조물의 행위와 다르다. 

나는 내 안에 창조력을 지니고 있어서 내가 말하면 창조가 일어난다. 

이는 어느 날 내가 말로 해를 창조한 것과 같다.


5 이 해는 또한 언제나 빛과 열이 가득하다. 

마치 나로부터 계속적인 창조를 받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줄어들 줄 모르는 빛과 열을 준다. 



이것이 하느님의 무한한 힘의 특성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번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6 그러한 것이 내가 지상에서 행한 일이었다. 

내 안에 창조 능력이 있어서 기도며 발걸음이며 내가 행한 일들과 흘린 피가, 

해가 계속 빛을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여전히 기도와 활동과 걸음을 옮기는 등의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7 그러므로 나의 기도는 계속되고 있다. 

영혼들을 구하려고 뒤쫓아 다니는 나의 걸음도 여전히 늘 계속되고 있고, 

여타 모든 것도 계속되고 있다.


8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의 행위와 성인들의 행위 사이에 어떤 큰 차이가 있겠느냐?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주 작고 한계가 있는 모든 행동을 이 신비 안에 녹여 넣어서 

영원히 그 안에 함께 있도록 여러분과 저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해야, 생겨나라.” 라고 하셨더니 

계속해서 모든 사람에게 빛과 열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기도하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면, 

그것은 영원히 머물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성, 자신의 몸, 자신의 피,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뜻 안에서, 영원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바쳤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좋은 것이었고, 

그리고 2,000년 전에 예수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좋은 것이었고,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그 사람까지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하느님 뜻 안에서, 영원한 하느님 영 안에서 행하시고, 고통 받으시고 

자신의 모든 인성을 녹여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영혼과 여러분 인성의 정배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정배이십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당신을 닮고 당신의 모상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반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한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코카콜라 사러 상점에 같이 갑시다. 

그리고 예수님 

당신이 일생동안 사셨듯이 그렇게 하느님 뜻 안에서 저와 함께 해주세요.” 라고 

말씀드리면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하려는 일이 영원히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고, 

온 우주의 모든 이들에게도 선한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장(章)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9 이제, 딸아, 들어 보아라,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일 - 아직까지 어떤 피조물도 깨닫지 못한 일이 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는 아주 단순하신데 우리는 아주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리아의 나아만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는 항상 굉장한 노력을 해서 겨우 얻을 수 있는 그런 대단한 것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아주 간단한 것을 청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은 이런 어린이들에게서 나온다. 

어린이들은 천국에 속해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단순하고 죄가 없고 모든 것을 믿는 어린이들과 닮았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어린이에게 

‘창문으로 가서 보아라. 코끼리가 날아간다.’고 하면 

그 애는 바로 창문으로 갈 것입니다. 

어린이는 순진하고 단순해서 여러분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름답고 굉장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10 이는 영혼이 나와 함께, 내 뜻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나의 것임과 마찬가지로 

그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1 나의 뜻과 결속하여 나와 함께하는 행위는 

나와 똑같은 창조 능력에도 참여하는 까닭이다." 


12 그 말씀에 나는 넋이 빠진 듯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면서, 

“오 예수님, 이 모든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고 외쳤다.



13 그러자 그분께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하셨다. 

그리고 모습을 감추셨다.


14 하지만 나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기야, 그분께서 내게 알아듣게 하신 것을 누가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매양 근처에도 못 간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의 요점은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인성과 신성과 함께 모든 것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기도를 합니다. 

루이사가 쓴 기도문도 있고, 또 여러분들이 기도문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리고 또 여러분들이 루이사의 책들에서 

어떤 장(章)이나 아니면 어떤 문단에서 뽑아내셔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매일 매일 이런 것을 여러분의 삶에서 실천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장(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불러라. 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나와 함께 하자.”

그러므로 

“예수님, 제가 이제 애들을 위해서 이것저것 사러 시장에 가야 합니다. 

예수님, 저와 함께 가주세요.” 라고 말씀드리면 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님께 부탁을 드릴 때에는 

나자렛의 예수님, 십자가 위의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보게 되고, 

그래서 여러분의 모든 행동을 

예수님의 인성과 결합해서 함께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 꼭 알아야 하는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단지 그냥 

완전한 인간이시고, 교회의 정배이시고, 우주의 왕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하느님이시고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성령과 성부와 함께 하느님이신 성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인성 뒤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바로 하느님의 에쎈스(정수(精髓))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께 가게에 같이 가자고 청할 때에는 

여러분은 예수님의 인성을 청한 것입니다만, 

아울러 여러분은 예수님의 신성도 함께 청하는 것이 됩니다. 

즉 여러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모든 속성과 모든 행위를 여러분과 함께 가게에 가자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여러분이 항상 기억하고 묵상해야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은 “예수님, 오셔서 저와 함께 가게에 가 주십시오.” 라고 

간단하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변화 때에 일어나는 일과도 같습니다. 

신부님은 아주 간단한 몇 마디의 말을 합니다. 

그러면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의 몸, 영혼, 빛, 하느님의 신성과 같은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적은 말만을 합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살기 위해서도 아주 짧게 표현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시여, 숨 쉬기 위하여 제 숨 안으로 오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바칠 때에는 

‘하느님 뜻이시여 오소서. 저의 발걸음 안에서 함께 일하소서.’ 라는 몇 마디 말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모든 우주가 그 안에 있고, 하느님의 모든 신비가 그 안에 있고 

하느님의 영원한 뜻과 모든 속성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수천 개의 면이 있는  다이아몬드의 각기 다른 하나의 면만을 보여 주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 뜻이시여, 보시기 위하여 제 눈 안으로 오소서.’ 

라고 간단한 기도를 바칠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동과 시력(봄)을 예수님의 행동과 시력(보심)에 녹여 넣는 것입니다.  

이럴 때의 나의 시력(봄)은 축성된 시력(보심)과 같은 것이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모든 신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은 성체성사의 연장과 같은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대신에 여러분의 걸음과 행동과 생각이 축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성사적인 축성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적 축성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께서 실제로 계시는 것처럼 그런 식의 똑같은 방법은 아닙니다. 

이것도 실제이지만 성체성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렇게 행위를 하면 

신비적인 축성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모든 요소는 다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은 성체성사의 신비의 계속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의 작은 인간적인 행동을 축성해 주시고, 

또한 하느님의 뜻 자신과 하느님의 모든 신비를 

이 작은 행동 안에 녹여 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살아 있는 성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에 맞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을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초대할 때에는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의 몸, 팔과 눈과 입, 예수님의 고통과 눈물과 정신을 생각하고, 

여러분 자신을 예수님의 인성 안에 녹여 넣으십시오.


그런 다음에 여러분은, 거대한 수영장에 뛰어 들어가듯이, 

'여러분이 녹아 들어간 예수님과 함께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 뜻이라는 바다로 던지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이제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이 병원에 있는 환자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함께 병원을 방문하려고 예수님을 초대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십시오. 

그리고 이때에 여러분은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소서. 나는 당신의 뜻 안에서 방문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뜻으로 인해 생명력을 가지고 방문하고 싶습니다.” 라고 

예수님과 함께 말하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할 때도 이렇게 하고 영성체할 때에도 이렇게 하고 

집안에서 일할 때, 직장에서 일할 때도 이렇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도,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 중에도, 

집에서 쉴 때도, 또 여러분이 고통스러울 때에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고통이더라도 

여러분 자신과 그 고통을 예수님의 인성과 합치고, 여러분의 

모든 것을 예수님의 뜻 안에 녹여 넣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여러분의 생활 안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삶 안에 있는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완벽하고도 완전한 영광과 완전한 사랑, 완전한 찬미와 모든 완전한 것들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여러분 각자 이름뿐만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피조물이 바치는 감사도 함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은 우리가 이런 상태에 도달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어떻게 모든 것을 준비를 해 주시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러 가면 

축성 후에 우리가 예수님을 성부께 봉헌하는 기도를 합니다. 

지상의 교황을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드리는 그 기도의 끝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 그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모든 것을 그분을 통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그리고 성령과의 일치 안에서 한다면, 

같은 의미의 말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인성과 일치하여 모든 것을 나와 함께 하자.” 라는 말인데, 

이것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성령과 일치하여 내 뜻 안에서 내 뜻으로 하는 모든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께 무한하고 영원한 영광을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성령과 일치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면, 

그것은 2,000년 전부터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영원한 영광을 드릴 수 있는지를 

교회가 말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새로운 게 아닙니다. 

미사는 하느님의 영광과 신앙의 완전한 행위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예수님의 모든 신비를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완전한 영광과 영예와 보속을 드립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완전한 영광을 드리는 방법을 

교회 안에서 2,000년 전부터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똑같은 것을 루이사를 통해서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성부께 완전한 영광, 완전한 영예를 바치고 온전한 의탁을 드리고 싶으냐? 

너의 기도와 너의 행동이 나의 기도와 나의 행동처럼 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나의 인성을 초대해라. 

그리고 너의 행동을 영원한 하느님의 뜻인 나의 뜻 안에 녹여 넣어라. 

모든 것을 성령과의 일치 안에서 행하여라. 

그러면 너의 하늘의 성부님께 완전하고 영원한 영광을 바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린 아이들처럼 간단하고 단순하고 그리고 무한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