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즈에게 내린 첫 번째 경고(7,1-9)
7,1-2 :
유다 임금 아하즈는 기원전 735년부터 715년까지 다스렸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아시리아에 대항해 연합전선을 펼치며
유다임금 아하즈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유다가 거절하자
이들 연합군이 유다를 먼저 공격하기로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에브라임 전쟁이라고 한다(2열왕16장, 2역대 28장)
다급해진 유다가 아시리아에 원군을 청하는데,
이 때 이사야가 경고하는 내용이 7-8장에 담겨있다(2열왕 16장 배경).
아브라임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유다를 쳤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볼 때 이 전쟁은 유다의 패배로 마쳤다.
아람은 유다로부터 엘랏을 빼앗았고(2열왕16장),
이스라엘의 베가도 유다의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또한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갔다(2역대28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아람이 유다를 “능히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은 이 전쟁 자체의 승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장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아람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승리가 계속 되지는 않았다.
이 전쟁이 있은 얼마 후 두 나라 모두 멸망했다.
그래서 하느님은 두 나라를 “장작 끄터머리(7:4)”로 비유하신 것이다.
7,3-9 :
유다가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하느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유다에게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해 주셨다.
왜냐하면 이들은 장작끄터머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아람을 장작끄터머리라고 한 것은 그들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아하스가 생각하고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들은 강했다.
그래서 그들은 유다와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장작끄터머리에 비유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도모를 이루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목적을 이룰 수 없는 힘이라면 그 힘이 어떤 것일지라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하느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강한 자들을 무력하게도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7,8-9절 예언의 말씀은 아람과 르신이 곧 망할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두 번째 경고: 임마누엘의 표징(7,10-17)
또한 임마누엘의 표징을 주시며, 메시아의 시대를 예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7,14)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므로 신약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느님은 전쟁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아하스의 믿음을 굳게 해 주시기 원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과 아람을 두려워하고 있었을 때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그들의 도모를 이루지 못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하스가 말씀을 신뢰하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징조를 구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하스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은혜를 거절했다.
그러자 이사야는 아하스의 불신앙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7,13).”
실제로 아하스의 삶을 통하여 그의 불신앙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아하스는 요담을 계승하여 26세에 유다 왕이 되었다.
그는 다윗의 길로 가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이방 신을 숭배하였고 또한 이방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유다 왕들 가운데 최초로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였다.
이 의식은 몰렉에게 아들을 희생하는 제사 의식이었다.
하느님은 아하스의 반역 행위로 인하여 유다에 진노하심으로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의 손에 붙이셨고,
그들이 돌아간 후에는 에돔 사람들로 하여금
유다를 침략하고 그들을 사로잡아가도록 하셨다.
아하스는 이와 같이 국가적 재난을 계속 만났지만
하느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앗시리아를 의지했다.
또한 아하스는 아람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방문하여 그들이 섬기는
신이야말로 그 나라에 승리를 가져다 준 신이라고 믿고 자신도 그 신을 숭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아람에서 그들이 신에게 제사할 때 사용하는 제단을
유다로 가지고 와서 예루살렘 성전 중앙에 있는 놋단으로 옮기고
그 곳에 아람 신을 제사하는 제단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성전은 훼손 되었고 유다 구석구석에는 우상들로 가득하였다(2열왕 16장).
이처럼 아하스는 예언자의 권고를 받고도 하느님을 배반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유다에게 한 징조를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이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게 될 때, 그는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다(7,14-15).”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 예언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마태오 복음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한 것을 알려 줄 때
이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마리아의 잉태가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였다는 의미다.
예언자는 메시아 예언으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현실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7,16-17절).
그때에 아하스가 미워하던 두 나라가 멸망할 것이다.
여기 “두 나라”란 아람과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아람과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한다.
'그날'에 일어날 멸망과 구원(7,18-25)
7,18-19 :
유다 아하스가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으로 보기에 강한
앗시리아를 의지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앗시리아를 통치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강한 나라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그 말씀에 따라 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만유의 주재로서 세계 모든 나라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 이집트와 앗시리아는 당시 강한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들 나라를 파리와 벌로 묘사하고
이들의 통치하심을 “불러오시다”라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부르실 때에 이들은 그 부르심에 따라 행할 수밖에 없다.
아하스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앗시리아를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7,20-25 :
20절은 하느님께서 유다가 의지하던 앗시리아를 통하여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때 유다의 황폐함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게 될 것인데
이것은 짐승의 떼를 가져야 할 자들이 얼마나 궁핍하게 살게 될 것인지 말해 준다.
이들은 가지고 있는 적은 수의 짐승으로부터 얻은 젖으로 만족해야 했다.
또한 그 날에는 포도원과 온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덮이리라.
이것은 땅의 황폐함을 의미한다.
하느님을 배반한 사람과 나라는 이처럼 황폐해 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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