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42 추천 0 2014.12.26. 04:12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질 하느님 뜻의 나라
천상의 책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와 그 본연의 위치와 창조된 목적에로 돌아오게 하시는 부르심
17-26
1924년 12월 8일
모태에서부터 평생 겪으신 예수님의 죽음 고통.
강생과 더불어 당신 자신을 피조물의 손에 맡기시다.
사랑에서도 활동에서도 흔들림 없는 신적 굳건함.
1 한층 더 고통스러운 나날이다.
다정하신 예수님의 부재에서 오는 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분의 부재가 마치 치명적인 무기처럼 내 머리 위쪽에 드리워진 채
끊임없이 나를 죽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끝장내기 위한 마지막 일격만은 보류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는 마치 구조를 기다리듯 이 마지막 치명타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야 내 예수님께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허탕이다!
2 내 변변찮은 영혼은 그러므로
내 본성과 아울러 타들어 가면서 완전히 녹아내리고 있는 느낌이다.
아! 나는 큰 죄들 때문에 죽을 자격도 없나 보다!
얼마나 큰 고통인지! 얼마나 긴 단말마인지!
저의 예수님, 부디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오직 당신만이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상태인지를 알고 계시니,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저를 저 자신의 손에 맡기지 마십시오.
3 그런 상태로 있다가 보니 나 자신의 바깥에 나가 있었다.
매우 맑은 빛 안에 있었는데,
이 빛 안에서 여왕이신 엄마와 그 순결한 태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 세상에! 사랑하올 아기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에 놓여 계시던지!
4 그분의 조그만 인성이,
그 조그만 손발이 옴짝달싹 못하도록 갇혀, 눈을 뜨거나 숨을 편히 쉴 여지도 없어 보였고,
어찌나 심각한 부동 상태인지 살아 있으나 죽은 듯한 모습이셨다.
나는 마음속으로 '예수님께서 이런 상태로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계시는지 누가 알랴?
그분의 사랑하올 엄마는 또 얼마나 괴로우실까!
아기 예수님이 당신 태중에서 이처럼 옴짝달싹 못하시는 것을 보실 터이니!' 하고 생각하였다.
5 그런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
그 조그만 아기 예수님께서 흐느껴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딸아,
내 엄마의 이 동정 모태 안에서 내가 겪은 고통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한데 내가 잉태의 첫 행위를 하면서 겪은 최초의 고통으로서
일생 내내 지속된 고통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죽음의 고통이었다.
6 내 신성은 물론
어떤 고통도 죽음도 범접할 수 없는, 완전히 행복한 상태로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나는 내 작은 인성이
피조물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과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자,
죽음의 고통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꼈다.
내 신성의 능력이 기적적으로 나를 지탱해 주면서
죽음의 고통과 삶의 지속성을 함께 느끼게 해 주지 않았다면,
순전히 그 고통 때문에 실제로 죽었을 것이다.
7 내게는 항상 그 죽음의 고통이 있었으니,
죄라는 죽음과 피조물 안에서 죽는 선의 죽음 및 그들의 자연적 죽음도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생토록 내게 얼마나 잔인한 고문이 되었는지!
생명을 내포하며 생명 자체의 절대적 주인인 내가 죽음 고통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8 내 작은 인성이
사랑하올 엄마의 태 안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죽지 않는 고통이 얼마나 혹독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인지를
네 내면으로 겪고 있지 않느냐?
딸아, 그것은
네가 내 뜻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인성의 그 지속적인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9 그러므로 나는 거의 오전 내내,
어머니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 곁에서 지내면서
죽어가다가 다시 살아나고 다시 죽어가기를 반복하시는 그분을 지켜보았다.
그런 상태에 놓여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는 것은 이만저만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