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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06 ‘내맡기다’는 말의 한자나 영어의 의미는? / [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45) ‘기투’(棄投, Abandon)

은가루리나 2020. 2. 8. 15:11


[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45)
언제나 ‘예!’라고 말하기 ③


발행일2009-01-18 [제2632호]



하느님 뜻에 나를 온전히 맡겨라 


오늘은 조금 어려운 용어가 등장한다.

기투’(棄投, Abandon)라는 말이 있다.
어렵게 보이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棄)는

‘버리다’ ‘그만두다’라는 뜻,
▲투(投)는 

‘던지다’ ‘뛰어들다’ ‘가담하다’ ‘의탁하다’ ‘의지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투
‘모든 것을 버리고 투신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의탁하다’는 뜻이다.


아기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기투된 존재다.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며, 

기투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나간다.

하지만
아기는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갖고 어머니에게 기투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저 자신의 생명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어머니가 없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기투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하면서 점차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스스로 의지를 갖고 인생을 설계, 계획하고 살아간다.
아무것도 모른 채 기투하던 존재에서,
스스로 알고 계획하고 기투하는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서 또 중요한 문제에 부딪힌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가족, 직장에서 주위 사람과 의견이 충돌할 때
자신의 주장을 굽힐 줄도 알아야 하고,
내 뜻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가족이 행복하고, 직장이 원만히 돌아간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늘 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사회 안에서 동화되어 살아간다.

이렇게 인간은
나의 뜻과 사회의 뜻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간다.



자! 이제 생각해 보자.
나의 뜻과 사회의 뜻 말고도 또다른 뜻이 있다.
하느님의 뜻이 그것이다.

나의 뜻과 사회의 뜻과 하느님 뜻 중에서 어느 뜻이 가장 높은가.
결국 나의 뜻은 하느님의 뜻 앞에서 포기되어져야 한다.


여기서 ‘기투’라는 말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나 자신을 버리고 온전히 내어 던질 때 진정한 영적 성장이 가능하다.

내 뜻이, 내 생각이 전적으로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나의 뜻도 좋고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더 큰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내 뜻을 낮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수락하는 기투’(Appreciative Abandonment)다.
하느님의 뜻을 수락(인정)하고
그 뜻에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던진다는 의미다.

수락하는 기투의 반대말은 ‘외면하는 기투’(Depreciative Abandonment)다.
하느님 뜻을 외면하고 살아가며 그저 돈과 권력 등 세속적인 것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포기 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과연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

돈과 권력 등 세속적인 것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포기당하고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내 뜻 보다 더 큰 하느님 뜻을 인정 수락하고
능동적으로 나 자신을 포기하고 투신할 것인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 자기의 명예만을 위해서
자기의 어떤 손해도 보지 않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인은 다르다.
하느님 뜻은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어느 누구도 하느님 뜻을 명확히 알려주지도 않는다.

사실 우리 선택은 상당부분 오류가 많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은 그 뜻, 그것을 알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 뜻을 인정 수락하고
그 뜻에 내 삶을 내어 던지고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나는 오직 하느님 뜻대로만 살아간다”며 스스로 행복을 꿈 꿀 수 있겠지만,
사실은 큰 불이익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공명’(명확하지 않음, 확실히 드러나지 않음,
정확히 예견되지 않음)이다.


환상으로만 포장된 결혼은 쉽게 깨어질 수 있다.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작은 희생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결혼은 쉽게 깨어질 수 있다.

불공명이 다가온다고 하더라고
내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수용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혹시 피하고 싶은 어려움조차도
나 스스로를 초월시킬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



영적 성장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인지하고,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 있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내적으로 충만한,
영성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