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맡긴 영혼은

< 연중 제24주일 > 2011,9,11

은가루리나 2016. 7. 8. 14:22


< 연중 제24주일 > 2011,9,11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서 

우리 그리스도교처럼 '죄와 죄의 용서' 에 대하여 정말 엄청나게 강조하고, 

또 실지로 '죄를 용서해 주는 종교' 는 이 세상에 또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

다른 어떤 종교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는 종교가 있는가?

인류의 4대 종교인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중에서 어느 종교도 없다.


혹시, 죄의 용서를 말하는 종교가 나타났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종국에는 죄를 용서해 주는 댓가로 '돈' 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몸' 을 요구하는 사이비 종교임이 틀림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용서' 라는 말은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들어왔기에 

이 말이 우리의 귀에는 지극히 평범한 말로 들릴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이 말은 

마치 '외계 언어' 와도 같은 매우 특이한 언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은 차치하고 2천년 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동태 복수법' 이 통용되던 예수님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었을 것이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하면, 약 3년 전에 TV에 방영되었었고

영화로도 상영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용서' 라는 제목의 시사 프로가 있었다.


제가 이 프로를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제가 과거 어느 본당에 있을 때의 본당 수녀님이셨던

현재 사형수들의 대모이신 조성애 수녀님이 등장하는

사형폐지를 위하여 만들었던 시사 프로였고,

더우기 그 프로에는 제가 병을 얻고 산으로 들어가기 바로 전 본당의

어느 교우 따님의 살해 사건과도 직접 연관된 프로였기 때문이다.


이 프로는 여러 가지 사건에 의해 살해된 여러 피해자 가족을 개별 인터뷰하여

'그 살인행위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었다.


여러 살인 피해 가족 중에 그때 저의 본당 교우의 경우에는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에 원한을 품은 한 청년이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살해하고 동반 자살한 사건이었었는데 

그 프로의 리포터가 질문하기를,

"당신은 그 사건이 몇 년 지난 지금의 상황에서 그 청년을 용서했는가?" 라는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역지사지' 에 처하여 만일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되신다면??? 


제 기억으로는 리포터의 이 질문을 받은 피의자 부모 中, 

피의자의 아버지는

처음엔 신앙의 힘으로 그를 용서를 했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시간이 흐를 수록 괴로운 기억이 지워지 않고 

오히려 더욱 괴롭다고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천주교 신자가 이러할 정도였는데 다른 비신자들의 대답은 어떠했겠는가?

비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용서? 사형폐지?' 

그런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넘이 당장 내 눈 앞에 나타기만 한다면 정말 이 자리에서 그냥,,,,


지금도 이러할 진데,

잘못에 대한 '복수' 가 오히려 사회의 정당한 규범의 하나로 통용되던 

고대 사회에 있어서의

 '예수님의 용서에 관한 가르침' 은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 라고 부르는 것보다

오히려 '용서의 종교' 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한 명칭이라고 말해야 할 것같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당신이 이미 여러 차례 밝히셨던 그대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여 인간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었으며,

당신이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3)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도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사죄권'이 있음을 알려 주셨던 것이다.


그렇게 당신이 세우신 교회에 죄 사함의 '권한' 을 넘겨주심과 동시에

또한, 교회 구성원은 누구나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하여 알려주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라고 당신이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한 대목을 살펴볼 때에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에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로,

'끝없는 용서, 완전한 용서(일곱=완전, 일흔일곱=완전의 완전)'를 말씀하셨다.


완전한 용서, 그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정말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라고

하루에 수도 없이 외우면서도 막상 누가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치게 되면

자신이 입은 피해가 크면 클 수록 용서하기에 더욱 큰 어려움을 느낀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완전한 용서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기에 사람들은

"용서는 사랑의 완성'이라느니,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느니,

'아름다운 용서'라느니, '용서는 신적인 행위'라느니 등등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용서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라면

아마 예수님께서도 아예 그 말씀을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살해한 청년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고

더나아가 그의 영혼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해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단 하나, '하느님의 마음을 갖는 것' 뿐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도 단 하나,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 뿐이다.


그러면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도 단 하나, 

'하느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맡겨 드리는 것'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내어 드려

자신의 모든 것이 부족함도 죄스러움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 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완전한 용서의 길' 로 이끌어 주시게 된다.


인간인 자신이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이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를 신적인 행위'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용서가 아무리 신적인 행위라고 해도,

그 신적인 행위가 적용되는 것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에 한해서' 라는 점이다.



미사 시작의 참회 예절의 셋째 양식에서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을 용서하러 오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우리가 외치듯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에게만이

진정한 용서가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