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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의탁한다는 것 - 마리노 레스트레포

은가루리나 2016. 8. 2. 18:38


말씀: 베드로전서 2:13



성베드로의 위의 말씀이 정확하게 제가 오늘 묵상하고자 하는 내용, 

즉 ‘하느님께 의탁’에로 이끌어 줍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실제로 하느님께 의탁함에 있어 위기를 겪곤 합니다. 

그리고 갈수록 우리자신의 약함에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지요. 

생각지 않은 때에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우리의 믿음 전체를 앗아가 버린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아주 작고 하찮은 일인데도 말입니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때에,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에 확신이 생기고 

실제로 하느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하느님 뜻의 신비에 대해 이해하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인해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게 되고 마음이 굳어지며 희망이 사라지고 혼란에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끼므로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의탁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요. 

하느님께 의탁에 대한 희망을 잃는다는 것은 길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으므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신뢰와 의탁, 안정, 사랑, 보호 등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삶 동안 그러한 것들을 두루 경험합니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믿음도 바뀝니다. 

믿음이 강한 계절에는 모든것이 우리의 희망대로 되어가는 듯 합니다. 

모든일이 미소짓듯 순조롭고 예상대로 적중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해지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예상대로 되어지지 않으면 방황을 합니다. 

특히 좀 더 젊을 때에는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받아들이며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적인 것을 숭상하기 시작하고 물질세상에 집착하며 

아무것도 아님에도 바쁘기만 한 많은 세상적인 일에 몰두하여 많은 활동을 하지요. 

이해되지 않는 영적인 것이나 영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바쁘게 살아갑니다.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렇게 되기는 아주 쉽습니다. 

아무런 방해없이 원하는 대로 매우 빠르고 바쁘게 사는것이 지금의 우리의 삶입니다. 

바쁘기만 한 삶.


왜 그럴까요?

모든 것이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은 듯 하고 더이상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게 되면 

그것을 대신해주고 위로해 줄 다른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우리 마음에 외로움과 공허를 가져옵니다. 

마음안에 하느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사업이나 많은 활동들과 같은 피상적인 것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을 대신하거나 또는 젊은 시절엔 공부로 대신합니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가정적인 문제나 부모의 이혼과 같은 문제로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리고는 삶이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아름답지 않다고 깨닫고 좌절하거나 

자신의 존재나 삶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도록 

과학이나 공부 혹은 직업등을 찾아다니며 과도하게 몰두하게 됩니다. 

존재적인 삶을 완전히 부정하게 되지요. 

하느님을 완전히 부정하는 삶은 결국 비극을 끌어옵니다. 

공허해진 마음이 더욱 더 굳어져 버리면 완전히 무자비하게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의 도전은 얼마나 하느님께 의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믿음의 굴곡을 거쳤는지, 얼마나 하느님께 의탁을 해 왔는지를 깨닫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이나 우리의 기대에서 벗어난, 

우리의 뜻에 반대되는 하찮은 일들로 인해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의탁을 잃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직 영적으로 많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될것이므로 그러한 상황은 좋지 못합니다. 

죽음을 맞는 순간에 믿음이 매우 약하고, 하느님에 대한 의탁이 아주 약하다면 

살면서 겪어보지도 못한 가장 큰 어려운 순간을 맞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사라짐으로써 세상의 삶의 쾌락과, 감각과 본능, 이성이 모두 사라져서 영혼만이 남는 그 순간, 

그 영혼이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의탁을 하지 못해 약하다면 

우리의 원수인 어둠의 영이 

육체를 떠난 그 순간의 영혼의 대부분의 주의를 빼앗아 지배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의 모태에서 갓 나온 아기는 아무런 힘이 없으며 

자신이 어디로 나온 것인지 무슨일이 있는 건지 알지 못합니다. 

아기가 살아있는지 알 수 있는건 아기의 울음뿐입니다. 

의사는 그 아기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살짝 때리기도 하지요. 

아기가 주변을 겨우 의식하기까지도 한참이 걸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어서서 걷기까지, 그리고 뭔지 알기 시작할 때까지 몇 년이 걸립니다. 

우리도 이 육체를 벗고 영적인 세상을 들어가는 순간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이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 영적이지 않다면, 잘 알지 못하는 영적세상을 맞게 될 것입니다. 

지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완전히 신뢰, 의탁을 하지 못했던 영혼은 

하느님의 신뢰와 의탁의 부족으로 죽음의 순간에 앉은뱅이 영혼처럼 될것입니다.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며, 모든 것이 영인 곳에서, 

더이상 육체나 물질적인 것이 없고 더이상 인간적인 사고도 존재하지 않는데, 

영적이지 않은 영혼이 어떻게 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의탁에 의존하여야 하는 이 때,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의탁이 없다면 어두움에 잠기고 말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도전은 

마나 완전하게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파우스티나성녀의 삶을 통하여 인류에게 거룩한 자비의 메세지를 주시고자 하신것입니다.

거룩한 자비의 메세지가 무엇입니까?

“나에게 의탁하여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예수님,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라고 말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 감각의 깊은 곳, 우리의 전 존재의 깊은 곳안에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라는 말을 가져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그 말이 울리도록 해야합니다. 

우리의 죽음의 순간에 그 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간절히 필요할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이 될지 여러분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은 삶에서 얼마나 하느님께 의탁했는지를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말이 될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께 의탁합니까?



우리는 아직 육체를 가진 지상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이 육체에 의해 많은 부분 속고 있을수 있습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이 매우 종교적이고, 기도도 많이 하며, 

입으로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주 공언함으로써 

자신이 영적으로 강하다고 느끼고 확신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것들이 하느님께 의탁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것과 의탁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의 엄마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지만 의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엄마의 조언이 본인이 믿고 따르기에는 옳다는 확신이 없을 수 있지요. 

그것은 완전한 의탁이 아닌 것입니다. 

엄마를 믿지만 의탁하는 것은 아닌 것이죠. 

아들이든, 형제이든 혹은 누가 됬든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지만, 

그가 주는 모든 충고를 따를만큼 의탁합니까? 아닐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과 의탁한다는 것은 다른것입니다. 

사탄도 하느님을 믿지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즉 믿는다는 것과, 의탁하며 순종한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 두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두가지를 혼동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관한 것들을 확실히 하여야 할 필요가 있고, 

하느님께 의탁하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명확히 이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큰 실수를 한채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단지 종교행위나 신심행위, 혹은 교리상의 법에 어긋나지 않게 살고 있다는 생각등으로 

그것이면 충분하고 안전하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율법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부자청년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더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할 수 없었으므로 슬픈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성서는 무엇을 가르치려 한것입니까? 


단지 계명을 지키는 선한 크리스챤, 선한 가톨릭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고백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석하고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자선도 좀 합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으로 향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맞을 일을 준비하기엔 그것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죽음의 순간은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여러분 존재의 상황을 마주 할 현실에 부딪히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의미는, 바로 여기, 

이곳의 삶에서 우리의 영적인 존재의 참으로 높은 상태를 이룰수 있는 큰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의 삶에서 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은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큰 은총은 우리에게 몸과 피를 내어주시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바로 이곳의 삶, 여기에 있다는 그 것입니다. 

이곳에 살면서, 자신과 이 세상에 속하는 모든 것을, 

모든 우리의 집착을 내려 놓는 방법을 가르치시고 준비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곳을, 하느님을, 영적인 삶을, 완전하고 거룩한 삶만을 목표로 사는 것, 

그것이 정확하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며 원하시는 것이며 

지금, 이 삶에서 그러한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나는 거룩하게 되고 싶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전에 읽은 말씀에서 성 베드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고 느낀다면 

이 삶에서 오직 우리가 해야 할 결심을 

우리의 온힘을 다해 진심으로 주님앞에 무릎꿇고 나아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이것이 저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제게 속해있고 제가 당신께 속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거룩하게 되려는 열망 뿐이라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거룩함만이 당신과 내가 함께 하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저희는 결코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릎끓고 당신께 거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청하나이다. 

저는 거룩해지고 싶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인만이 천국으로 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천국입니다. 

다른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외에 다른 곳을 가고 싶습니까? 

누구도 천국외에 다른 곳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참 ‘집’인 천국에 가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지금이 바로 그것을 위해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그것을 준비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 그곳을 향한 길로 가지 않는다면 언제 그 길로 향할 것 같습니까? 

죽는 순간에요? 오~ 노, 그때는 은총이 멈추는 때입니다. 

지금이 거룩해질것을 결심해야할 때입니다. 

오늘밤 눈깜짝할 새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은 결코 늦은 것이 아닙니다. 

리가 하는 영적인 결심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즉시 이루어지며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영과 관련된 결심은 영원안에서 즉시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나아가 무릎끓고 참으로 거룩하여지고 싶다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안에 있는 무언가가 즉시 힘들어 할 것입니다. 

아마 무언가 몹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을 느낄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자신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거룩하여지는 것을 막는 많은 것에 집착하며 그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내려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그것을 주님께 청할 때 무언가가 여러분을 잡아 끄는 것을 느낄것입니다. 

그것을 못하도록 계속 막을 것입니다. 

자신이 무언가 잃는것 같고 무언가 큰일이 생긴것처럼 

자신이 죽을 것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것처럼 느껴질것입니다. 

그것이 결심하려할 때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마치 나쁜 관계를 끊어버릴 때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끊지 못한다면 

자신을 상하게 하고 남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끊어야 하는데 변화되지 않는 자신에 지쳐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날 일어났을때 더 이상 뒤돌아 보지 말고 앞으로 가야 합니다. 

더이상 뒤돌아 보지 마십시요. 

주님께서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의 집착을 버려야 할 때 해야할 일입니다. 

모든 두려움, 걱정, 육적인 온갖 정열과 바램, 세상적인 몰두 등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생각하는 것과 같은 모든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거룩한 삶에 촛점을 맞출때, 그것이 하느님께로의 참된 의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주님 앞에 무릎꿇고 거룩해지고 싶다고, 

어쩌면 처음으로 말한 바로 그 날,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나에게는 한계가 있다고... 

주님, 당신은 불완전한 나를 완전하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신 구원자이시니, 

예수님께서 해 주십시오.” 라고, 

그 방법밖에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없음을 알고 있다고, 

나는 성인이 되고 싶다고, 

나의 삶을 드린다고, 

그리고 거룩해질 것을 결심한다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이 

하느님께 참된 의탁을 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여러분은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슬프게도 그러기 이전에는 여러분은 아직 영적인 것의 근처도 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성화되는 완전함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영적일 수 있겠습니까? 

그저 종교적인 사람일 수는 있겠지만 영적인 사람이 되기엔 아직도 먼 것입니다. 

영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의탁하여야 하고, 

자신이 성인이 되어야 함을 이해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인이 되는 것, 그것만이 하느님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자신을 속이는 것들입니다. 

나머지는 신학적인 사고를 도용한 평범한 정보일 뿐이고 영적으로 보일뿐,

일이든 모든 종류의 소명이라든지 신심이든지 

실제로는 인간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 것들일 뿐입니다.



인간은 기도할 때, 하느님을 향한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하느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도하며 하느님께 의탁하여야 하고, 믿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였든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당신의 뜻으로 이끄실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도는 많은 것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의탁하고 자신을 끊어버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자기자신의 기도조차도 끊어버려야 합니다. 

기도는 우선 하느님에 대한 경배로 시작하여야 합니다. 

생명을 주신것에 대한 감사로서 시작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하느님이 자신을 창조하신 초월적인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나서 각자의 상황을 말씀드리는 것이죠. 

자신의 상황을 말씀드릴때도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분께 말씀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 동등한 입장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상황을 말씀드리십시오. 

원래 기도는 사랑이 촛점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은 의탁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지않고 의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거래일 뿐입니다. 

협상이나 투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일일 뿐입니다. 요구하고 자리를 떠버리는 것이죠.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매우 약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인것과 거리가 멀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왜 그러실까요? 

신약성서 어디를 읽어 보아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 축하하는 구절은 한 군데도 없음을 발견하실 겁니다. 

“베드로야, 요한아, 야고보야, 너희는 대단하구나. 정말 잘해 냈으니 축하한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것을 보셨습니까? 

우리의 거룩한 스승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칠고 잔인한 스승이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스승이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자들을 깨어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도록 한 겁니다. 

자신은 죽고 스승이 보여준 길로 곧바로 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참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임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진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결코 자신을 믿지 않는것.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계속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으실 겁니다. 

“믿음이 적은 자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잠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고 말씀하시며 

항상 경고하셨음을 아실겁니다. 

사랑을 가지고 그러나 매우 엄격하게 깨어있도록, 자신을 믿지 않도록 경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타협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고 흑과 백이 분명했습니다.



성서는 영원히 살아있는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잠에 떨어지지 말아라. 훨씬 더 많이 하여라. 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죽음을 맞으면 주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이 학교를 다니면서 엔지니어든 목수든, 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때 열심한 학생이라면, 

잘 배워서 전문가가 되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분야에서 아주 똑똑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위해 기술을 이해하고 배우려 노력할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은 그 이상입니다. 

일시적인 삶동안 세상적인 작은 분야에서도 전문가가 되기 위해 우리는 수년동안 노력을 합니다. 

일시적인 이 세상을 살아가지 위한 것이죠. 

많고 많은 책을 읽고 수백 시간의 수업을 듣는등의 일시적인 배움에도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임에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삶에서는 어떻하겠습니까?


영원한 것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 만큼의 시간을 쓰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준비하기 위해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자신의 내면인 영혼과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계속해서 이것을 배워야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하려 부산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작은 일부터 하십시오.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인간적으로 말하면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말하면 그리 작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기분이 언짢아 있습니다. 

그리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일 수 있습니다. 

네. 그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주님앞에 무릎꿇고 그것부터 치유해 주십사 간청하십시오. 

주님께 말씀하십시오.

“주님 제가 다시 화를 내느니 차라리 죽게 해주십시오. 

그것으로 저는 당신을 상하게 하였고 내 주위 사람들을 상하게 합니다. 

저는 당신과 모든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저는 화를 내곤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지요. 

그러한 성질을 잡지 않으면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을 끊어버려야합니다. 

“나는 그것을 버리겠습니다. 내 삶에서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성은 매우 속임수를 쓰므로 우리는 우리의 악덕이나 나쁜 습관과의 사랑에 빠지곤 합니다. 

우리의 약점과 사랑에 빠지죠.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야. 난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하죠. 

마치 자신을 저주하는 듯이 “나는 그런 사람이야” 라고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그렇고 온 가족이 그래.” 라며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 줄 아십니까? 수호천사가 계속 울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목표로 해야하고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뀌어야하고 그러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영혼에 들러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떠나 영혼만 남았을 때  그러한 것들이 끔찍하고 고통스런 연옥을 만들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주위사람들을 상하게 하였고 그 나쁜 성질로 인해 좋지 않은 일들을 했고 

이곳 저곳에 기회가 있었음에도 베풀지 못했고 동정심이 없었던 삶들이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언짢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제가 말하는 작은 것들입니다. 

아직 큰것들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리고 쉽게 자신의 두려움을 합리화합니다. 

모든 잘못한 일에 대해 우리는 합리화하기위해 많은 것을 만들어 냅니다. 

특히 죄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작은 것들을 정면으로 직면하여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내버리십시요. 

그리고 주님께 

“저는 제 삶에서 그것을 원치않습니다. 두려움이 지긋지긋합니다. 저의 나쁜 성질이 지긋지긋합니다. 

베풀지 못하는 것이 지겹습니다. 제혀가 속사포처럼 사람들의 맘을 상하게 하는 것이 지긋지긋합니다.

제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들 하나하나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을 시작하는 바로 그날, 

여러분이 비로소 영적인 삶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자신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 

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영적인것이 아닙니다.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 잘못된 자신을 힘들게 극복하려 하지 않는 한 

영적인 삶의 사다리를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떨어지기만 할 것입니다. 어둠으로 향할 것입니다. 

자신의 나쁜 습관과 잘못된 모든 악덕을 버리지 않는 한 천국으로 결코 오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진지하게 직면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고 언제 그것들이 살아나서 어떻게 자신과 이웃에게 잘못된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의탁한다는 것은 그러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오직 하느님께서 도우셔야 우리는 우리의 악덕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서에서 그 어느것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듣고 배웠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마른 잎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하느님께 보이고

하느님께서 힘과 지혜를 주셔서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하실 것임을 신뢰하고 의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참으로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신실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베풀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혹은 어쩌면 자선을 하기도 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더 거룩하고 순결하며 더 나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계명을 지켰고 자신의 위와 같은 행동에 의해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리고는 확대경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를 찾아 다니지요. 

그것은 베품의 삶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선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선하게 되기 위해선 오직 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혼자는 결코 선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누가 만들어 낸 이야기가 이니라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삼위일체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선하신분이시여” 라고 부르자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선하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으로 행동하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인간이 어떤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악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진실로 우리 안에 사셔야만 합니다. 

우리안에 계신 하느님이 우리의 선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안에는 하느님이 사십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안에 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때 우리 안에 선함이 있게 됩니다. 

그것만이 방법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함은 하느님께 의탁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하는 겁니다. 그분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된다는 것은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 있어 화가 나게 하고 혼동을 주며 평화가 없다면 

여러분에게 아직 충분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그 사랑을 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하느님께서 주실거라는 신뢰와 의탁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 청하고 의탁하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치유될 수 없으며 사랑 안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미워해야함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므로 자신을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죄짓는 것을 보았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무슨 이유이든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낮아지기 시작하여 자신이 죄인이라고, 

모든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나는 살인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나의 삶에서 끔찍한 일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은총을 주셨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많은 여러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뉴스를 통해 보거나 듣곤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그들만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자신도 같은 일들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그것 하나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는 야생동물처럼 됬을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누구던지, 어떤 모습이던지 지금 이순간의 나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큰 은총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완벽함의 은총, 완벽함의 은총은 하느님과 함께 걸어갈 때 

하느님에 대한 의탁이 필수임을 이해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뢰하지않고 의탁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걸어가며 내내 뒤돌아 보거나 곁눈질만 하지 않겠습니까? 

두렵고 불안하며 계속 걸어가야 할지에 대한 확신도 없을 것입니다. 

어찌할바를 모르겠지요. 

그것은 의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하느님과 걸어 갈 것이며 우리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자신이 방해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좀 더 노력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어떻게요? 

첫째로 하느님 그분께서 은총과 지혜를 주실 것이라는 신뢰와 의탁을 가지고 

우리자신의 모든 잘못된 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한 은총을 주실것이라는 참된 신뢰와 의탁으로 자신을 포기한다면 

여러분은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의 장으로 들어설 것이며 

조금씩 조금씩 더 나은 더 높은 존재로 이끌어, 위로 오르고 있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굉장한 느낌입니다. 

물론 제트기처럼 오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영원한 삶을 향해 오르는 것이므로 급하지는 않습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다면,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삶의 작은 것부터 변화시키기 시작하십시오.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소짓는게 어려우신가요? 오~ 노력하셔야 합니다. 

가식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여야 합니다. 

일종의 연습삼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을 가지고 하십시오. 

주님께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 사람들에게 미소지을 수 있는 사랑을 주십사 청하십시오. 

자신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는 그날, 그날이 바로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러기 이전에는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거나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 근처에도 못간것입니다. 

그것이 전 생애를 통해 훈련 해야할 가장 큰 과제입니다. 

그것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것 같습니까? 못갑니다. 

지금 사랑을 가지지 않는다면 죽는 그 순간 사랑자체가 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사랑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어서 아무것도 될 수 없을것입니다. 

지옥으로 잠겨버릴 것입니다. 

그곳은 모든 사랑이 없는 영혼들이 영원히 버려져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기회입니다. 자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을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알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쉽지요. 테스트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실된 사랑의 증거가 아닙니다. 

가족이나 친지와 같이 나를 보호해주고 사랑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죠. 

자신의 자식을 돌보고 사랑할 수 있지요. 

배우자나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 등, 혹은 힘들게 한다하더라도 혈연관계라든지.. 등은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것은 테스트라고 볼 수 없지요. 

그러나 정말 테스트는 자신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려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얼마나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지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진실로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고 

그분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만이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은 없을 것입니다. 멈춰버리고 말것입니다. 

그저 죽을 운명의 인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죽을 운명은 그저 묻혀서 흙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 본연의 영혼으로 되어지고 싶다면 영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진흙으로 만든 옹기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옹기그릇에는 영혼이 들어 있습니다. 

이 영혼은 이 진흙안에서 깨어나서 하느님의 신성을 깨닫고 

그 신성이 이 옹기안으로 와서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진흙이 부서지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진흙에서 벗어나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의 한부분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진흙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움이나 악의 영으로 가득차 이들이 옹기그릇을 땅 아래로 끌고가 흙으로 녹게 하여 

영혼을 아래로 떨어지게 할 것입니다. 

아무곳으로도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렇게 할 수있는 때입니다. 

이 진흙의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바오로가 말씀하셨습니다. 

“더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리려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흙으로 돌아가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 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바로 지금 그것을 깨달아야합니다. 그

렇기 때문에 오늘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겠습니까? 

시간이 얼마나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몇시간, 며칠, 몇달, 몇년... 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얼마가 남았건, 

몇년이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정말 매우 짧은 시간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은 환상일 뿐입니다. 

시간에 속지 마십시오. 실제로는 시간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지금입니다. 

우리자신을 위해 그것을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 오늘, 오늘 밤입니다.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저는 저의 잘못된 이것을 경멸합니다. 

그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용서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저를 정말로 힘들게 하는 그 사람들을 사랑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싶습니다. 

그들을 제 마음안에 받아 안고 싶습니다.

 제가 그들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을지라도 

당신께서 제게 오셔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실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을지라도

당신은 사랑이시고 자비로운 사랑을 가지신 분임을 알고 있으니, 

당신의 사랑이 제게 오면 제가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사랑을 느끼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을 느껴, 당신의 사랑이 제 마음 안에 흐를 때 비로소 제 삶이 있고 

그때야 비로소 주님의 자비에 의해 예수님안에서 제가 부활함을 깨닫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 안에 계시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주님께서 피로서 구원하셔서 부활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사실을 개인적으로 깨달을 준비가 되어야 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단순한 생각이라거나, 교훈, 설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써 받아들이고 즉시 행동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십시오.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바꾸어야합니다. 참된것을 향해 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도록 부르고 계심을 느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바로 지금 영적으로 건강하여 힘을 갖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그분이 부르실 때, 

기름을 준비한 처녀처럼 믿음을 지키십시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처럼 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때가 되어도 아무런 준비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밤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큰소리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자녀들아, 은총을 낭비하지 말아라. 

은총은 바로 지금 너희에게 주어지고 있다. 

바로 지금 영원한 삶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영적으로 아주 힘든 상황, 매우 고통스러운 연옥을 맞게 될 것이다. ”


위협이 아닙니다. 초대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 곳에서 살고 있는 이상 그것은 위협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셨습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바오로는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경주하여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경주합니까?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어떤것을 준비할까요? 잘 달려서 이길수 있도록, 

우리를 뒤로 잡아 당기는 모든 것을 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모든 짐을 내버리십시오. 모든 어두움을 내버리십시오.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내버리는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약함과, 우리에게 즐길거리를 주어 주위를 산만하게 하는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너무 게으릅니다. 너무 느긋합니다. 깨어납시다. 

깨어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무기들을 잡읍시다. 

그리고 자신이 변화되도록 정말 열심히 노력합시다. 

마음을 바꾸고 전 삶을 바꾸어 새로운 사람이 됩시다.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참된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안에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기쁨입니다.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그것은 참으로 큰 기쁨을 줍니다. 

정말 변화되었음을, 더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삶에서 받은 은총중 가장 큰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 더이상 자신의 안전을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이상 자신의 영역을 보호해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이상 자신의 작은 생각에 따라 땅에 묶일 필요가 없습니다. 

말도 안되는 삶의 비젼을 위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들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참되게 의탁하라고 청하십니다. 

하느님께 의탁한다는 것은 그분이 자비이시고 사랑이시고 용서이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셔서 

모든 일을 그 안에서 이루도록 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리가 단순하게 

“나는 당신안에서, 당신을 위해, 당신의 일부가 되기만을 원합니다. 

나는 오직 나의 안에서, 나만을 위해, 내가 모든것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 안에서 나는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질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길 바라십니다. “내가 오직 나에 대한 나의 작은 사고에 계속 의존하며 산다면,

 내가 계속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모든 생각과 편견에 의존하여 살아간다면, 

그리고 계속 내 삶에 대해 꿈꾸고 있는 것에 의존하여 살아간다면, 

결국 저는 파산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삶의 마지막에 영혼이 맞을 현실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앉은뱅이 영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강해지고 싶습니다. 지금 살찌우고 싶습니다. 

바로 지금 모든 잘못된 것들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고통스런 연옥을 거치고 싶지 않기에 바로 지금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실하시므로 

가톨릭 신자로서 계명을 지키고, 영성체를 모시고, 고백성사를 보고 여기 저기서 행한 작은 선행들이

여러분을 저 아래, 지옥에 가도록 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옥에는 가지 않겠지만, 천국으로 곧바로 날아 오르지도 못할 것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우 고통스런 상황을 거쳐야 할겁니다. 피할 수가 없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연옥이나 지옥을 말씀하시려 이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을 말씀하시러 오셨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집으로 오너라. 너희를 위해 준비해 놓았다.” 집으로 오라는 말씀을 전하려 하신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께 의탁하고 그분을 닮고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분이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도록, 

그리고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께 자비를 청합시다.


우리의 시간이 오늘밤까지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밤 무릎을 꿇고 말씀하십시오. 

“성인이 되길 원합니다.” 라고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 그것만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삶의 시작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신심행위를 하는 사람일수도 있지요. 

매일 무릎꿇고 수천번 묵주기도를 드릴수도 있구요. 

그러나 무엇을 하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룩해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거룩해지려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완전해지려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천국을 열망하여야 합니다.


많은 선한 가톨릭 신자들이 천국을 꿈꾸지 않습니다. 

마음안에 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큰 집이나, 사람들에게 대우 받는것, 자랑할 것,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등등 

여러가지 세상적인 꿈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천국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조차도,

 “오! 나는 천국에 가고 싶어. 어떤지 정말 궁금해.” 라고 천국에 대한 꿈을 가지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꿈만을 가지고 삽니다.


집에 대한 꿈을 가집시다. 꿈을 가지기 시작합시다. 

집에 대한 꿈을 갖고 있지 않는데, 마음안에 집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닐겁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안에 어떤 보물을 갖고 있습니까? 

천국을 마음에 가집시다. 바로 지금 말입니다. 그러면 삶이 바뀌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항상 천국에 가 있다면, 

항상 “거기에 가고 싶어, 그것이 나의 꿈이야.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야. 

나는 천국에 가고 싶어.” 라고 말하겠죠. 

그곳이나의 집이야. 주님께서 약속하셨어. 그것만이 내가 원하는 것이야. 

“주님, 꼭 저를 도와 주십시오. 천국에 갈 수 있길 원합니다. 천국만이 나의 집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 매일 매순간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천국에 가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천국을 조금씩 보여주십시오. 저의 꿈인 그곳을 맛보고 싶습니다. 

그곳에 저의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제 안에 천국을 가져다 주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이 참된 보물에 가 있길 바라십니다. 우

리의 마음을 이 땅에서 떼어놓읍시다. 

우리의 마음을 이 지상의 삶에서 떼어 놓읍시다. 

그리고 천국에 가져다 놓읍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만으로 우리를 천국에 데려다 줄것입니다. 

그럴때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갈 것이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말씀을 청하겠습니다.

데모데오 후서 3:1




- 역: WISDOM

- 출처 : 하느님 뜻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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