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섭리에내맡김

ㅣ서론ㅣ

은가루리나 2016. 8. 5. 16:21


⑴ p.13-15


   16, 17세기에 프랑스에는 많은 영성 저술가들이 있었다.

이 두 세기의 역사 안에는 위대한 이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바로 그들은 유럽 문명을 활성화시키는 데 있어 일익을 담당했던 자들이다.


이 위대한 이름들 중에 전에는 공적으로 아무런 영예를 누려보지도 못하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한 때 별처럼 빛나던 사람에게 가졌던 애착심보다 훨씬 더한 애정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한 분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코사드의 요한 베 (Jean-Pierre de Caussade)이다.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라곤 거의 없어  그저 막연해 할 뿐이다.

그의 초상화는 한 점도 없으며 

키가 큰지, 작은지  혹은 뚱뚱한지, 말랐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머리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리고 눈은 푸른색이었을까. 아니면 갈색이었을까?

멋졌을까, 초라했을까?

나는 초라했으리라 상상해 보지만  

그러한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행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 것들이다.    (p.13)



   는 1675년 3월 6일에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랑스 남쪽의 켈시 지방의 어느 곳이었으리라 추측이 되고,

거의 확실시되는 것은  그가 어린 시절을  당시 대학이 있던 도시인 

툴루즈(Toulouse) 북쪽에 위치한 카오르(Cahors) 읍에서 보냈다는 사실로,

20년 전 페넬롱(Fenslon)도 그곳에서 학생으로 지냈던 곳이라는 점이다.


코사드는 1693년 툴루즈에서  예수회의 수련자가 되었으며,

170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다음 종신서원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문 적이 없었다.


그는 오크 오리악에서 희랍어, 라틴어를 가르쳤고  

로데에서는 철학 교수를 지냈으며,

그 후 모리악과 아빌에서 같은 자리를 굳혔다.

이 모든 도시들은  툴루즈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코사드가 신학 공부를 하고 또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대학은 

툴루즈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후 1720년까지 코사드는 여러 도시에서 교수 생활을 계속하다가

그 해를 끝으로 교수직을 접고, 

프랑스남부와 중부 지방의 여러 곳에서 설교사와 고백 신부로 일하였다. 


1729년 그는 

프랑스 북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로렌느 공작가의 옛 수도였던 

'낭시(Nancy)' 란 시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영성사(靈性史)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에 있는 수도원, 

즉 (방문회 수녀들)(Visitation nuns)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인데,

우리는 그 결과들을 뒤에 가서 살펴볼 것이다.

그는 꼭 일년 동안 그곳에 머문 다음 툴루즈에 돌아와 알비로 갔다.


1733년 말낭시에 돌아온 그는 거의 6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 다음  페르피냥에 있는 예수회 대학과 알비에 있는 대학의 

학장으로 일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중 마지막 5년을 

툴루즈에 있는 예수회 신학원 학생들의 책임자로 지내다가 

1751년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또났다.   (p.15)




Fran?ois de Salignac de la Mothe-F?nelon, 은 보통 프랑스와 페넬롱으로 알려져 있는데 

프랑스의 로마카톨릭 신부로서 주교, 신학자, 시인 그리고 작가였다. 

그는 정적주의(Quietism)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주로 기억되고 있다. 

1699년에 텔레마쿠스의 모험이라는 작품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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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p.15-17


   사드의 요한 베드로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약간의 사실은

그 동안 낭시에 있는 수녀들에게 쓴 편지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두 장의 우편엽서라면 충분히 채워질 만한 글이다.

이유는 그의 편지들이 영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편지들은 호라스 왈폴(Horace Walpole) 같은 저술가가 쓴 편지와는 다르다.

그러나 한 두 구절을 살펴볼 때, 

그는 은둔 생활을 하지 않았고  

이 세상의 일거리로부터 단절되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그가 낭시에서 페르피냥으로 옮겨갔을 때, 

낭시에 있던 마리-데레사(marieTherese)수녀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 적이 있다.  

"제가 페르피냥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일거리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나서 상반되는 의견들을 바로잡아 주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주교, 고관대작, 왕의 대신들, 군대 참모들과 의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형식적인 방문들,

특히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과 관련된 방문들을  싫어하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일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식으로 하느님을 크게 신뢰하며 삽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다수의 복잡한 사람들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을 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마리-데레사 수녀에게 

"처음에 저는 한 짐이나 되는 사무적 근심에 눌려  매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물론 이 일에  대한  걱정거리들은 

대체로 제가 좋아하는 침묵이나 고독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저를 도와 주셨고, 

모든 일거리에 매이지 않는 은총을 저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일하고 있지요.

많은 방문객들 때문에  제가 성가심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의무라고 생각하거나  순전히 필요하다고 여길 때만, 

제가 스스로 그들을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느낌을 알아주는 제 동료들인 예수회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저와 함께 자신들의 일을 처리합니다. 

그들은 이런 것이 저에게 자랑거리라거나  

사람을 피하게 만드는 인간 불신이 아니라는 점을 잘 깨닫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 중 그  누구도 저의 행동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몇 분은 이로 인해 덕을 쌓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다른 수녀인 마리-앙뚜아넷(Marie-Antoinette)에게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저는 온화한 기후를 가진 곳일 뿐 아니라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인 여기 로 다시 왔습니다. 

그들이 저지르는 한 가지 잘못이 있다면,  

제가 고독을 좋아하는 대신,  그들은 너무 사교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초대를 받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저에게 정말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하느님은  

제가 늘 사랑해 온 시골풍경의 그 아름다움에서 한없는 기쁨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도록 

다른 이들에게 저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알비는 아름다운 풍경과는 별도의 다른 기쁨들을 코사드에게 안겨다주었다. 

그는 방문 수녀회의 한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녀님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만족감을 저에게 가져다주는 그 멋을 

저는 찾아냈습니다.  

여기 알비에는 세상을 완전히 등진 가난한 글라라회 수녀님들의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참금 없이 입회하여  완전히 애긍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들의 장상은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분들 중에 가장 거룩한 분입니다. ...

저는 거룩한 수녀님들 사이에서 체험한 엄청난 쾌활함과 거룩한 기쁨을 

전에는 결코 맛본 적이 없었습니다. ...

그것이 저에게 그 얼마나 큰 은총이고 위안이며, 

또 제 자신의 성화를 위해 얼마나 좋은 본보기인지 모르겠습니다."   (p.17)


   이러한 것들이 코사드에 대해 밝힐 수 있는 전부이다. 




호라스 월폴(Horace Walpole)  영국의 소설가(1717~1797). 

저작은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데, 

그중에서도 공포파의 최초의 소설인《오트란토 성》(1764)이 유명하다. 

이밖에도 《리처드 3세의 생애와 치세에 대한 사적 의혹》(1768), 

비극 《이상한 어머니 》(1768), 기타 미술과 역사 관계의 서적도 있다. 

특히 《오트란토성》은 영국에 공포소설의 유행을 가져오게 하였고 W.스콧, A.뒤마 등 낭만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732∼1797년 사이에 쓴 그의 서간은 20세기에 10권이 넘는 방대한 서간집으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자서전적인 기술 외에 당시의 사회 ·정치에 관한 관찰과 의견을 적어 놓아 사료로서도 귀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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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 p.17-21


  러한 것들이 코사드에 대해 밝힐 수 있는 전부이다. 

한 가지 사실이 더 있다면, 그가 한권의 책을 익명으로 발행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은『모(Meaux)주교, 보수에의 가르침에 의거한 

여러 가지 기도 방법에 관한 영적인 지침들.  예수회의 한 신부』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0년이나 지난 다음에서야 출간

그의 두 번째 저서

『하느님섭리에 내맡김』(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이 아니었던들 

이미 오래전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 두 번째 책을 썼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스런 이야기이다.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낭시에서 지내는 몇 년 동안 

그는 그곳 방문회 수녀들의 영적 지도 신부로 일하였다.   


그는 많은 편지들을 그녀들에게 써 보내기도 하였고 또 강의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의 편지들을 보관했고 강의내용도 적어 놓았다. 

이들 수녀들은 18세기의 멋진 이름을 가진 

샤를롯-엘리사벳 부쉬에 드 몽뒤레(Charlotte-Elisabeth Bourcier de Monthureux),  

마리-앙뚜아넷 드 마위에드 립쿠르(Marie-Antoinette de Mahuetde Luptcourt), 

안나-말가리따 부데 드 라 벨리에르(Anne-Marguerita Boudet de la belliere)라는 수녀들과 

마리-안나 데레사 드 로(Marie-Anne Therese de Rosen)과 

프랑스 한 원수의 딸인 루이스-프랑소와 드 로산(Louise-Francoise de Rosen)이라는 

두 수녀였다.


루이스-프랑소와는 네 번이나 수녀원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자신과 그의 자매는  코사드가 기록한 모든 것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관하였다. 

이 두 수녀들의 조카로서 

로뎀부르크의 마리아-안나-소피아(Marie-Anne_Sophie)수녀도 있었는데, 

그녀 역시 여러 번에 걸쳐 원장으로 일하였다. 

코사드가 낭시에 처음 갔을 때, 그녀는 수련장이었는데 

그녀에게 보낸 코사드의 편지 중 하나는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의 첫 장 서두, 제2부와 제3부의 일부가 되었다.


지난 세월동안  수녀들과 장상들에게 보내진 코사드의 편지들과 

피정 동안 그들에게 강의한 기록들은 

박학한 프랑스 예수회원인 앙리 라미에르(Henri Ramiere) 신부에게 넘겨졌다. 

그가 그것들을 모아 작은 책으로 편집하여 1861년에 발행한 이 책은 

즉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독되었다. 

그 후 새롭게 편집된 책들이 선보였고,  마침내 

라미에르 신부는 오늘날 우리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신선한 자료들을 가미시켰다. 

이렇게 새롭게 편집된 책들은 계속해서 발행되었고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었다.


    영성생활의 대 스승이며, 

영국  다운사이드(Downside)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대수도원장이었던 

돔 요한 체프만(Dom John Chapman) 신부는 40여 년 전에

"저는 지난 몇 년간 예수회의 요한 베드로 신부님만큼 

저에게 도움이 되어 준 작가를 찾아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코사드는 분명히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가장 뛰어난 열 명의 영적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고, 

그의 책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십가자의 성 요한의 『영혼의 노래』와  제노바의 성녀 카타리나가 쓴 『대화집』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에 대한 지대한 존경심의 표시인데, 

그렇다면 그의 메시지가 참으로 그러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일까?   (p.19)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은 

여타의 뛰어난 저술들이 그러하듯 열정이 듬뿍 담긴 책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순전히 지성적인 열정일 수도 있고  이성적인 열정 

혹은 인간이 지닌 수많은 복합적인 성격들 가운데  커다란 흥미와 기쁨일 수도 있다. 

열정은 조절되거나 감추어질 수도 있고  폭발되거나 분출될 수도 있지만  항시 존재한다.


    코사드의 열정은 사고적이고 정서적이었으며, 하느님께 대한 경배였다. 

누구든지 코사드에 관해 연구하면 할수록  어느 한 순간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의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바쁜 삶을 살았다. 

그는 마지못해서이긴 했지만  대단히 활동적인 사제였으며 세상일에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친밀감을 피하고  세상일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모든 일이 나로 하여금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주요한 원리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보내지고 다스려진다. 

비록 그것들이 귀찮은 것일지라도 기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확실하고 신속하게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은 소책자이다.

흔히 소책자들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머리에 떠오르는 그러한 책자로는 

토마스 켐피스(Thomas a kempis)『준주성범』,『공산주의의 실체』

페인(T.Paine)의 『인간의 권리』, 루소(J.J.Rousseau)『사회계약론

성녀 데레사(S.Thererese)『영혼의 이야기

그리고 말할 나위도 없이『복음서』등이 있다.


거기에는 상당히 인간적인 이유들이 내포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을 내지 못하거나 두꺼운 책을 힘들여 읽을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가능한 한  적은 장수로 된 책의 메시를 원한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팸플릿은 여러 권으로 된 책만큼의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책자를 선호하는 사람은 독자뿐 아니라 작가 역시 그러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천여 장 대신 백여 장에 자신의 사상을 집약하려는 노력은

여러 권의 책에  불가피하게 산발적으로 적혀 있을지도 모르는 

날카로움과 주장에 유의하는 것이다.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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⑷ p.21-24


   코사드는 예수회원으로  여러 가지 중요 직책을 맡았었지만,

그의 훌륭한 가르침은  성 이냐시오의 영성보다는 

살레시오 가르멜 영성에서 훨씬 더 큰 영항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론 그가 

살레시오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 de Sales)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1610년에 방문 수도회를 세운 분은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샹딸의 요안나(Jane de Chantal)였으며,

코사드는 자기 생애의 여러 해를 

곳 방문 수도회의 영적 지도자로 보냈다는 점이 바로 그러하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는  코사드가 태어나기 20년 전에 성인품에 올랐고

성인이 쓴 두 개의 걸작품인 

『신심생활 입문』,『신애론』이 그당시 편집에 편집을 거듭하였으니,

코사드와 같은 분이 이런 책을 읽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코사드는  자신의 영성적 견해와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적 견해가 

참으로 유사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코사드가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에 대해 말할 때,

성프란치스코는 "무관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휘의 문제일 뿐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청하지 말고, 아무 것도 거절하지 말라" 고 말씀하신다.

또 그는

"무관심한 마음이란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느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그분 손 안에 든 왁스덩어리와 같다" 고 선언한다.

그는 확실한 표지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라면 가치 있는 어떤 일도 중도에서 그만두고,

또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면 우리가 훌륭한 목표로 향하던 도중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뚜렷한 표지" 라고 한다. 


성프란치스코가 사용한 또 다른 말은 "이탈" 이다.

"이탈한 영혼은  묵상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인지  아니면  

이웃을 돌보는 일이 그분을 섬기는 일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느님이 영혼으로 하여금 매순간 해아 할 역할을 다하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사드가

"현 순간의 의무"(그의 영성에 있어서 생동감이 넘치는 부분)에 대한 자신의 학설에 

이러한 점을 어떻게 도입, 발전시켜 나갔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p.23) 


   르멜 수도회의 위대한 신비가이며 교회학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이 

코사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확실하다.

성 요한은 

코사드가 방문 수도회가 있는 낭시에 맨 처음으로 갔을 때인 바로 3년 전에 

성인품에 올랐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당시에는 영성이 뛰어난 사람

곧 교회의 봉인으로 새겨져야 할 남녀의 작품들과 글들에 대해

불꽃과도 같은 훨훨 타오르는 관심사를 지니고 있었다.    


  코사드가 

방문회 수녀들에게 보낸 지침서에서 단 한 번 성 요한에 관해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다.

이유는 그가 성 요한을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지만  인용은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의 인용도 거의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상당히 자주 반영하고 있다.


이 가르멜 수도자는 영혼이 신앙의 전적인 암흑에 싸여 있지만,

이 암흑 속에서 

영혼은 빛과 확실한 안내자를 찾고 있는 소경과도 다름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여러 번 되풀이하는 가운데 코사드는

"신앙의 어둠보다 더 안전한 것이 없고, 

우리를 잘못에로 덜 이끌기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 암흑이 우리를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합니다." 라고 주장한다.


또한 성 요한은 선언하기를

"이 지상생애에서  우리는 지성, 상상력 혹은 우리의 어떤 감각을 통해서는 

실상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일치를 신앙과 희망 그리고 사랑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코사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자아포기의 상태는 

하느님 및 그분의 모든 활동들과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는 특별한 행위 안에서의 

신앙희망, 그리고 사랑의 혼합입니다." 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성 요한과 코사드를 연결하면서 

앞뒤 참조 형식으로 많은 장을 채워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훨씬 더 흥미 있어 하는 것은 

가르멜 성인이 이 예수회 신부에게 끼친 영향이 아니라 

이 예수회원이 

역시 위대한 가르멜 성녀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게 끼쳤던 영항이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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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4-27


  성녀 데레사는 1873년에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코사드의 책은 1861년에 이미 발행되었고 많은 편집들이 뒤따랐다. 

내가 지금 쓰는 것은 순전히 추측이지만  사실일 수도 있다.

성녀 데레사의 가족은 신심이 깊었고  많은 영적 독서를 하였다.  

혹시 코사드의 책은 그  책들 중의 하나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성녀 데레사의 아버지 마르탱(Martin)씨가  리지외의 가정집, 

뷔소네에 있는 2층 서재에서 그것을 사려 깊게 살펴보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그 가르침은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하던 

가톨릭 신자들의 온몸을 적셔 주고  말끔하게 해 주었음이 확실하다.


코사드에 관한 탁월한 현대적 권위자로서 예수회의 올프-갈리아(Olphe-Galliard)신부는 

코사드가 지난 세기 말의 신학자들 -그들 역시 저술가였다- 에게 끼친 지대한 공로를 

아주 또렷하게 밝혀 준 바 있다. 


그래서 성녀는 강화(講話)에서  또 고해 신부들을 통해  

자아포기에 대해 들었으리란 편이 훨씬 더 가합하다고 말해야 옳다. 

성녀가 14살이 되었을 때,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된  

예수회의 알미르 피숑(Almire Pichon)과 10년 동안 긴밀한 연락을 취했음도 기억해야 한다. 

그 신부는 이전에 여러해 동안 마르탱 가족의 친구였고 고해 신부였다. 

그 후 그는 캐나다로 떠나갔지만, 성녀 데레는 편지로 계속 그와 연락을 취했다.  

성녀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  피숑 신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저의 온 영혼이 이 속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피숑 신부는 성녀의 모든 편지를 없애버렸으니 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점을 겸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나는 이 예수회 신부가 코사드에 관해 무지하지 않았고,  

이 18세기 사제에 대한 그의 지식이  성녀 데레사를 통해 길러졌다는 것도 상상해 본다. 

이제 우리는 추측과 상상을 끝내고 분명한 것을 살펴 보도록 하자.  (p.25)  



   성녀 데레사가 늘 주장하기를,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행위의 탁월성이나 위대함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행하는 보잘것없고 가장 하찮은 일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사랑을 위해 행해지는 경우라면  그것이 최고로 중요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는 사랑에 따라 그분이 판단하신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행위들을 실천할 수 있음을  성녀는 선언하고 있는데, 

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200여 년 전에 코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고의 성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 여러분은 삶을 눈여겨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삶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행위들로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런 것들에 대해 만족해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행위가 되어져야할 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완덕을 추구하는데  연출해야 할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성녀 데레사에게 되돌아가 보자. 성녀는 한 조수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매님의 생활은 겸손하고 숨겨진 생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앞에서는 아무것도 미소하지 않음을 기억하세요. 

자매님은 사랑으로 처리하고 있는 모든 것을 행하도록 하십시오."


병상에서, 성녀는 사람들에게서  이 세상을 하직한 다음  

성녀에게 맡겨진 모든 영혼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즉시 이르길 

"신뢰와 완전한 위탁의 길인, 

영적 어린이의 길에 그들이 나서도록 권고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성녀의 자서전 안에 언니 마리아에게 보내는 글,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으셨던 비밀들" 을 말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이러하다. 


"예수님은 결코 드러나시지도 않고 

당신의 목소리를 나로 하여금 듣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은밀히 저를 가르치시지만 

당신 사랑의 신적 용광로에로 이끄는 유일한 통로를 저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것은 아버지의 품 안에 두려움 없이 잠든 아기처럼  완전한 위탁과도 같습니다.

... 예수님은 위대한 행동들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은 자기를 온전히 내맡김이며 사드림니다.

... 오! 예수님, 당신의 측량할 수 없는 자애에 대해 

모든 '작은' 영혼들에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보다 더 연약한 영혼을 만나신다고 하고 

그 영혼이 당신의 무한한 인자를 굳게 믿어 그 자신을 온통 내맡긴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더 큰 은혜를 즐겨 넘쳐흐르도록 내려 주실 것 같이 생각됩니다."  (p.26)


   우리는 코사드가

"현 순간의 성사(the sacrament of the present moment)" 라고 일컫는 것에 대해 

주장하는 바를 고찰해 보고 있노라면, 

성녀 데레사가 남긴 다음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만약 제 매순간 단순하게 살지 않는다면,  저로서는 인내심을 갖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현재만을 바라볼 수 있고 과거를 잊으며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무척 조심합니다. 

우리는 실망하고 또 실망감을 느끼는데, 

이유는  과거와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조용히 쉬지 않고 

안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짓은 없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작은 길(Little Way)" 의 전 목적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만인이 하느님 뜻에 조금도 남김없이  내맡김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 외에" 아무것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녀는 성녀 체실리아를 두고 자기가 좋아하는 성녀라고 말했다.  

"저를 특별히 기쁘게 한 것은  성녀가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긴 것이었고, 

그분 대한 끊임없는 신뢰심이었습니다." 

위탁과 신뢰, 이것은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열쇠가 되는 두 개의 단어들이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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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7


   제 코사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포기의 최상적 중요성에 관한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라곤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코사드는 그리스도인이었고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다.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고 영혼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위대하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몇 세기 이전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당신 삶의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에 있어서 당신존재의 미세한 부분들을 다함이 없고, 

가장 확실한 섭리에 간절하게 또 완전한 신뢰를 두고 맡길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권고들이 거의 모든 성인들의 글과 설교에 잘 나타난다. 

그래서 이 문제에 있어서  코사드는 고상한 영적 가르침을 설교한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1675년 그가 태어난 해보다 몇 년 앞서서 로마에 와 자리 잡았던 스페인 신부 

미카엘 데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가 쓴 『영적 안내서』(The Spritual Guide)라는 책이 

로마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의 도움을 받았으며  바티칸의 방 하나를 선사받기도 했다. 

그의 책이 나왔을 때는  다섯 명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흔쾌한 승인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예수회원이었고  나머지 네 명은 종교 재판관들이었다. 


이 책은 5년에 걸쳐 네가지 언어로 20판을 찍었다. 

이 책의 가르침은 순식간에 이탈리아를 휩쓸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영성의 기본 서적으로 삼았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불완전한 몰리노스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의 신앙생활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성과 상상력을 통해  또 감각의 절제와 금욕생활로 하느님을 찾는다. 

이들은 하느님을 목자와 의사로서, 아버지나 주인으로 생생하게 마음에 그리려고 힘쓴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며 

흔히 정열적인 사람의 행동방식을 취하고자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위대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방법이며 초보자들의 길입니다.

비록 이와 같은 방법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이것으로써는 결코 완덕에 이르지 못합니다. 

실상 50년 동안 이 외적 수업을 해왔던 많은 이들의 경우에  하느님은 빠져 있으며 

오로지 그런 사람들의 이름만 남아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내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미지나 형식 혹은 형상과는 무관하게 

평정과 내적 휴식에 근거한 크나큰 확신을 가지고 

순수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손안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며, 

주님의 현존에로 들어 높여진 영과 더불어  영혼의 깊숙한 부분에 숨어듭니다." 


물론 몰리노스는  내적인 영성생활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조사하여 

미세한 활자로 된 150여 쪽에 이를 할애하고 있다. 

그것은 위대하고 심금을 울리는 책자이다.  

그러나 이 책으로 말미암아 몰리노스는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지내야만 했다.  (p.29


    인간은 너무나 자주 인간적이다. 

몰리노스의 글을 읽은 많은 이들은  

그가 구원에 대한 손쉬운 방법을 가르쳐주었음을 알았다. 

그들은 관상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을 때, 

그 상태에 이르는데는  

멀고도 아주 힘든 여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면서 

누구든 관상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잘못된 생각을 하는 영혼들은  관상이라고 잘못 믿고 있는 것에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일상적인 종교상의 의례를 지키는 일과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모든 애덕의 본분에서 

자신들의 의무가 해제된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 생각으로는 자기들이 너무나도 영적인 사람들이었으므로, 

신심에 도움을 주는 물리적 도구들, 

즉 묵주, 성상, 성화 그리고 성해 등 모든 것을 멀리하였다. 

이는 

쉽사리 유혹이나 많은 인간적 행위의 상대적이며 대수롭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그것은 영혼과 사회 질서를 매우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몰리노스는 단 두 가지 점에서 잘못을 범하였다. 

그는 내적인 영성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성체를 모시기 전, 

자신을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계속적이며 완전한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몰리노스 자신은 죄를 고백하지 않고 12년을 살았다. 

물론 이것은 가톨릭 신자로서 남긴 잘못된 교리이며 그릇된 행동이다. 


   그가 범한 두 번째 실수는, 

묵상이란 오로지 초보자들을 위한 것이기에 

크리스천 생활을 드높은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묵상을 버리고 그것을 관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두 방법은 좋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찾고 있는 영혼들은 

몰리노스가 말하고 있는 방법이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강요하고 있음을 

체험은 말해 준다. 

이것은 비록 이단은 아니었다해도 

몰리노스가 여타의 다른 방법보다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선언한 것은 

주제넘은 일이었다.


   그가 교육 수준이 높은 신비론적인 언어에 능통하고 

고도로 세련된 대중을 상대로 글을 남겼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묵상'과 '관상'이 아무런 의미조차도 부여하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이들 영혼이 하느님을 발견하였음을 우리는 항시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에게는 수천 가지의 길들이 주어져 있다. 


예수회원들은 몰리노스를 공박하였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치욕적이며 불명예스러운 이야기다. 

이 공박은 오래 동안 계속되었으며 복잡한 것이었다. 

여기서 본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로마에 있는 종교 재판소의 명에 따라 몰리노스가 1685년에 감금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2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살았고, 

재판소는 그의 저서, 강론 그리고 추종자들의 활약상에 관해 

- 1687년 초에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200명이 감옥에 갇혔음-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해 여름,  종교 재판소의 법령은 

몰리노스가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치고 행하였음을 선언했으며, 

그의 저서와 추종자들의 저서에서 이끌어 낸 68개의 명제들을 조목조목 나열하였다. 

그 내용들은 "신심어린 이들의 귀에는 이단적, 불경적, 공격적이었으며 

무례하고 위험스러웠고 그리스도교 윤리를 파괴시키는" 것들이었다.   (p.31


   몰리노스는 무릎을 꿇고 

모든 그릇된 가르침을 저버리기로 맹세하는 대공개 의식을 치른 다음  

도미니꼬회의 한 수도원에서 종신형에 처해졌다. 

그는 끝내 죄수로서 16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죄목이었던 이단은 정적주의(Quietism)였으며,  

코사드는 이 정적주의에 매우 가깝게 물들었다고 고발되었다. 


실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이라는 저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오랜 기간 동안 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에 와서 인쇄된 것을  그가 살던 당시에 설교했고,  

자신의 책에서와 같은 메시지가 들어 있는 많은 편지들을 썼다. 

그는 예수회원이었고 정적주의를 매우 적대시하였다. 

그는 몰리노스의 단죄를 확고히 하기 위해,  로마에 전적인 외교상의 압력을 가한 

루이 14세의 신하였다.


   코사드는  책들과 충고와 권고 그리고 염경기도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감각을 이용하는 것을  정적주의가 단죄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조심스레 정적주의와 단절한다. 

하느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신께 이르는 데에 도움이 되는 수단들을 사용토록 하셨음을 

그는 매우 정확하게 짚었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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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2-36 


   몰리노스와 코사드의 저술을 읽을 때. 

우리는 이들 사상이 가지고 있는 어떤 유사성을 필연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러나 코사드의 독창적이고  영속적이며  지배적인 사상은 

정적주의에 호감을 갖는 그 모든 신뢰심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 사상은 "현 순간의 성사" 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아주 분명한 것이며, 

이제 우리는 이 사상에 대해 배울 차례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즉  대부분의 우리는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는 매우 평범한 창조물이며 

또 그렇게 되도록 일하고  

또 보잘것없는 결정들과 직무로 채워진  나날을 살아가는 창조물이다.

우리의 삶은 

사소한 일들의 흐름, 기쁨, 여러 가지 지겨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일거리와 

흔히는 비극적인 것들로 꾸며진다.

우리는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살이는 커다란 즐거움도 있고 기쁨도 있다.

그대신 염증을 일으키게 하거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도 많다.


코사드는 

인생의 모든 것을 하느님 뜻의 표현으로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흔히 피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 들이고 

우리에게 지겨움과 경멸을 가져올 수 있는 일들을  사랑과 포기로써 인내하게 되는데,

이것은 성스러운 수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완덕을 얻는 최선책은 

하느님께 자신들의 삶을 당신 뜻하시는 대로 내맡기는 것입니다"


코사드는 우리에게 말한다.

“하느님은 매순간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통해 각자 개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매순간의 사건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현 순간에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작은 사건들에 대해 지겨워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경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할 것입니다.”


코사드에게 있어서 중심이 되는 문항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규칙이 있으니 

그것은 매순간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순간 순간을 잘 살아나가야 함을 계속 반복해서 주장한다.

과거는 과거이고  미래는 당도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순간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대처해 나아갈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느님의 뜻하심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우리의 중대한 의무는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매초마다 모든 행동과 생각은 의미있는 것이다.

여기서 코사드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급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것이다.


그가 뜻하는 바는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맡김으로써 

매순간 부딪치게 되는 일에 대해 충분히 깨닫고 

최선을 다해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것 재연해 내는 일인 것이다.


   코사드는 

실제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그랬듯이 심오한 신비주의와 강력히 결합했다.

이것은 특별한 게 아니다.

참된 신비주의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경향보다는 훨씬 더 실천적이다.

그들이 실제적인 것을 찾는 데 비해  우리는 덧없는 것을 찾고,

그들이 "존재하시는 그대로" 의 하느님을 원하는 대신,

우리는 그러하실 거라고 상상하는 하느님을 원한다.


   코사드는 매우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가지 사상에만 사로 잡혔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온전히 그분께 자신을 내어드림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잘못 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독창적인 것은 

우리가 아무런 특별한 일을 할 필요도 없고

독특한 신심을 내보일 필요도 없으며

또 특별한 방법으로 행동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 점이다.


우리가 해야하는 모든 것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사소한 것일 수 없다.

아주 평범한 일이라도  하느님이 뜻하신 바대로 바라보아야하고 

그것은 그렇게 다루어져야 한다.


외견상 사소한 것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지상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 되도록 하느님께 우리를 바짝 데려다 주고,

우리를 기다리는 영원한 생명과 안전한 일치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 줄 것이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코사드의 저술을 처음 읽을 때는 그가 목표로 삼고 있는 일반적인 사상을 단번에 알아내고, 

그 다음에는 천천히 주의를 기울여 여러 번 독서에 임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할 때 

그것이 영성의 걸작품이고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 찬 진지한 저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독자들을 위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코사드는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닌, 우리의 영원한 행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내보였다. 

이런 관심은  그의 점잖은 18세기 프랑스 말로 구사된 모든 구절에 나타나 있다. 

그는 하느님을 경배하고 우리를 사랑하며 

자신이 누리던 평화와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어 한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p.36




요한 비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