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호칭기도

지고하신 뜻의 나라의 경계를 확장하소서 (천상의 책 19-38, 19-40}

은가루리나 2016. 8. 13. 15:39


19-38



1926년 7월 18일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셨던 당시에

당신 뜻의 나라를 드러내지 않으신 까닭.




15 너는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그처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을 받게 해 달라고  자주 내게 청하며 졸라 대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부성애를 뛰어넘는 나의 자애는 

너를 또 한분의 내 어머니처럼 대하였다.


16 나는 내 어머니에게  내가 그분의 배 속에 잉태되리하는 사실을 숨겼다.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먼저 그분을 준비시키며 양성하였고

때가 왔을 때  천사를 통하여 나의 잉태를 알리면서  실제로 내가 잉태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처음에 떨며 당황하지만  즉각 평온을 회복하다.

내 어머니는  

하느님의 빛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사는 것에  익숙하셨기 때문이다.



17 너에게도 나는 그렇게 행동해 왔다.

즉, 여러 해가 지나도록, 

내가 네 영혼 안에  내 지고한 뜻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너에게 숨겼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를 이룩하기 위하여 

너를 준비시키고 양성하며  네 안에 나 자신을 넣어,

네 영혼 깊은 곳이 나를 둘러싸게 하였다.


18 그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무렵  

나는 너에게 숨겼던 비밀을 드러내었고, 

너의 특별한 사명에 대해 말했으며,

네가 내 뜻 안에서 사는 것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지 어떤지  정식으로 물었다.

너는 떨며 두려워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며 안심시켜 주었다.

'어째서 심란해 하느냐?

네가 이제까지 내 뜻의 나라에서 나하고 같이 살아오지 않았더란 말이냐?'


19 그러자 너는 마음의 평온을 되찾고  내 뜻 안에서 사는 일에 더욱 열중했기에

나는 즐겨  내 뜻의 나라의 경계를 확장하였다.

내 뜻의 나라는  그 경계가 없을 만큼 무한하지만 

피조물은 유한해서  이 나라 전체를 소유할 능력이 없으므로,

피조물이 소유하는 정도에 따라  나라가 확장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19-40



1926년 7월 23일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이에게는 그 경계를 벗어나게 하는 길이 없다. 

그도 예수님도 서로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아버지다우신 애정과 인자함이 넘치는 음성으로 

"딸아, 어찌하여 내가 너를 떠날까 두려워하느냐?" 하고 입을 여셨다.


4 "잘 들어라. 나는 네 안에 있는 그 두려움을 그냥 보아줄 수가 없다. 

너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너를 세워 둔 곳이, 네 존재 안팎에서 흐르는 내 뜻의 바다가, 

네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해서 거기에 너 자신을 맡겼기에 

그 자체의 경계를 얼마나 넓혔는지, 

나도 너도 그 영역을 벗어나게 하는 길을 찾아낼 수가 없다.


5 그러니 네가 나를 떠나고자 해도  나갈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사방으로 돌아다녀도  언제나 내 뜻의 끝없는 경계 안에 있을 것이고, 

내 뜻 안에서 행한 너의 행위들이  네가 나갈 길을 전부 막아 버렸으니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6 또 내가 너를 떠나고자 해도, 

내 뜻의 경계 밖 어디에 내가 있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그럴 수 없고, 

나의 뜻은 어디든지 있으니, 내가 어디를 가든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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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욱프란치스코61 16.04.16. 22:17



<부족한 제 안에서 당신 마음껏 지고하신 뜻의 나라의 경계를 확장하소서>



"지고하신 뜻의 나라의 경계를 확장하소서"


최근 제가 올리는 글들에 <하느님의 호칭>의 변화를 느끼셨는지요?

최근의 저의 하느님에 대한 호칭이, 

<주님>에서 하느님 아버지 또는 아버지 하느님 아니면 

아예  아버지로 바뀐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느낀 느낌인데,

제가 처음 모든 것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저의 가슴 깊이 다가온 단어가 피조물이었고  그 다음으로 하느님 아버지였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아버지이신 사실을 온 존재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뜨거운 눈물로 하느님 아버지를 얼마나 외쳐 불러댔던지 모름니다.ㅠㅠ



최근에 다시 그 하느님 아버지 아니,

아버지라는 호칭이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또 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라 부르면서 저의 내맡김의 삶의 경계(지경)가 더 확장되고,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꼭 아버지라 부르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따라쟁이 이기 때문입니다.




{19-38,19 내 뜻의 나라는 그 경계가 없을 만큼 무한하지만 

피조물은 유한해서 이 나라 전체를 소유할 능력이 없으므로,

피조물이 소유하는 정도에 따라 나라가 확장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