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제 3 편 5 장 명성(名聲)의 선익(善益)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2절 굴욕(屈辱) (1) (2)

은가루리나 2017. 2. 7. 22:13


제 2 절  굴욕 (屈辱) (1)




만일 우리가 

자신의 겸손의 진위(眞僞), 그 진보의 정도, 그 진퇴(進退)여하를 

확인하기를 바란다면, 

굴욕은 그 기회를 준다.

굴욕을 잘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것으로써 힘있게 진보가 촉진되고,

때로는 특별한 진보를 성취할 수 있다.

굴욕 없이는 결코 완전한 겸손을 쌓을 수는 없다.


성「벨나도」는 이렇게 결론한다.

「만일 그대가 겸손의 덕을 획득하기를 바란다면, 

굴욕의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낮추어지는 것을 참을수 없다면, 결코 겸손에 높여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간」84 )(...)



성「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낮추는 것을 배우는데  두 길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는 수동적(受動的)인 것이며,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속하고, 따라서 위탁의 대상의 하나가 된다.


또 하나는 능동적(能動的)인 것이며,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 안에 포함되어 있다.

많은 이는 후자만을 바라고, 전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에는 동의(同意)하지만,

남으로부터 멸시되는 것은 수긍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성 프란치스꼬.살레시오 「정신」16.35)



물론 스스로 낮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자신의 성소에 가장 적합하고,

그리고 우리의 본성의 경향에 거스르는 것과 같은 수업(修業)을 택하여야 한다.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참으로 그것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면

겸손한 체하는 말을 결코 입에 담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적에는,

「그러한 말투는 오만의 가장 교묘한 절정이며,

사람은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그쪽에 등을 돌려 저어가는 사공과 같이 행하는 것이다.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허영의 대해(大海)로 돛에 바람을 안고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동16.35)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는데 있어 말로 하는 것보다도 행위로써 하자.

수도원에 있어 능동적인 겸손의 최선의 길은

회칙(會則)과 장상과 동료 수도자에게도 항상 충실하게 복종하는 것이다. (...)



끝으로,

회칙(會則)에 관한 위반에 대해서는

천주의 어전에 있어 하는 것과 같이 장상의 면전에서 고백하고,

통회와 겸손한 마음으로써 그 수도회에서 행하고 있는 보속을 한다는 것은,

또한 유효하게 자신을 낮추는 방법이다.

회칙에 정해져 있는 비하(卑下)의 행위 이외에,

자발적으로 택하여 하는 것도 있다.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이런 종류에 관해서는 매우 신중을 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런 것에는 교활하게도, 무위식중에 자애심이 잠입(潛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밖에서 가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찾는 비하(卑下)의 업을 가장 열등한 것으로 간주한다.」(동)


성인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하지 않는 굴욕의 행위를

훨씬 귀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 우리 스스로 만드는 십자가는 보다 가벼운 것이 보통이며,

자애심을 죽이는 데는 거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에게 수치를 당하고,

가차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말해지며,

마음 안에 꿈틀거리는 비참함과 부패의 세계가 폭로되고 자주 보여지며,

통절히 느껴질 필요가 있다.


천주께서 우리 건강을 앗으시고,

자연적인 능력을 감소시키시며,

무력과 암흑 안에 방치하시고,

또는 다른 내적 고통을 주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한, 악마의 손으로써 우리를 채찍질하시고,

장상에게 우리를 경계하도록 

그리고 형제들이, 관례에 따라서,

우리 과실을 시정하는데 참여하도록 명하시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우리를 비하(卑下)에 의해서 단련하시기 위해서는

특히 유효한 거치른 치료방법으로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이 목적을 위하여, 천주께서는 참으로 모든 사람을 사용하시어,

그 지혜로운 분발심도, 맹목적인 쓰라린 분발심도,

선덕도, 결점도, 거룩한 의향도, 나약함도,

필요에 따라서는 악의까지도 이용하신다.


인간은 책임있는 연장에 불과하다.

천주께서는 인간을 적당한 때에 벌하시고,

또는 보답하실 권리를 보류하신다.

그러므로 이 역활은 천주께 일임(一任)하자.


그리고 우리의 본성에 있어 괴로운 것을 잊고,

천주, 구세주, 가장 훌륭한 벗이신 분만을 우러러보며,

그 손에서 주어지는 것으로서,

가혹한 그러나 유익한 굴욕이 되는 취급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일반적으로 이러한 치욕은 짧고, 또한 가벼운 것인데, 

그러나 비록 그런 것이 오래 계속되고, 

또한 고통스러운 것이라도,

다만 그것은 천주의 자비에 의하여 보다 유효하게,


「과거의 죄의 보상금, 

나날의 나약함에서 생기는 소죄의 사함, 

나약에 대한 의약, 

덕과 공로의 보고(寶庫),

천주께 대한 충성의 증명, 

천주와의 우정의 대가, 

완덕에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제 2 절  굴욕 (屈辱) (2)



만일 우리가 노하여 굴욕을 물리치고, 혹 불평하면서 이에 복종한다면,

겸손은 고사하고 오만을 기른다.


그리고 이것은

「 세상에서는 수치를 당하면서도, 참으로 겸손하지 않은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

(성 벨나도「 아가 」의 설교 34.3)  일의 이유를 해명하고 있다.


치욕을 감수하는 자만  능히 이것에서 이익을 이끌어 내며,

또한 천주의 손에서 온 것으로 여겨,

「그것은 내게 불가결한 것, 내가 의당 받아야 할 것이다.」등의 말로써 

이것을 겸손되이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그 이익은 보다 큰 것이 된다.


만일 마음에 맞지 않는 극히 사소한 일, 존경의 부족,

마음에 들지 않는 말만으로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지고 동요한다면,

그것은 오만의 뿌리가 아직 우리 안에 충분히 뻗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욕을 재액시(災厄視) 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것을 의약으로 여겨,

이것으로써 우리를 치료하시려는 천주를 찬송하며,

자애심의 근절에 협력해 주는 형제들에게  감사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참된 치욕, 낭패, 비하(卑下)는 

겸손한 이의 왕이신 예수께 그렇게도 오랜 세월에 걸쳐 섬긴 후에까지도,

아직 우리는 이처럼 오만으로 충만돼 있음을 자각하지 않는가.


아, 만일 우리가 과거의 죄과와 현재의 비참함을 잘 알고 있다면

아무도 우리가 그것에 의당 맞갖는 정도의 경멸, 모욕, 불명예 등을

우리에게 지게 한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함을 쉬이 인정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겸손의 기회를 불평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형언할 수 없는 총애의 표시로 여겨

천주께 감사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 하면,

짧고 가벼운 시련의 대가로써,

천주께서 

이 세상에 있어서는  우리의 무수한 비참함을 거의 모든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덮어주시고,

또한 내세에 있어서는  영원한 부끄러움을 면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에서 무죄한 이라고, 감히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많은 죄과에 떨어졌는데,

그 가운데는 아직도 벌을 받지 않은 많은 것도 있다.

그리고 그 보상이 연기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순교자 성「베드루」는 죄없이 투옥되었을 때, 주께 이렇게 한탄하며 호소하였다.


「 어떤 죄때문에, 그렇게도 엄하게 벌하시나이까」라고.

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천주께서는,

「그렇다면, 나는 어떤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라고 대답하셨다.

(「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정배 」13. 2의 8)


성교회는 주께 관해서,

「천주 성부의 영광 안에 성신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고, 홀로 높으시도다.」

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주께서 자기 왕국에 오셨을 때,

백성은 그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이에게 치욕과 학대까지도 마구 가하였다.

주께서는 고발되시고, 유죄판결을 받으셨으며,

어느 살인자보다도 못지않은 취급을 당하시고,

두 강도와 함께 형장(形場)에 끌려가시며,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모욕을 당하셨다.


그 흠숭하올 성안(聖顔)을 때리고, 침에 더럽혀지셨을 적에도,

주는 얼굴을 돌리지 않으셨으며,

한마디의 비난도 발하지 않으셨다.


무언 가운데 성부의 성의를 흠숭하고, 그것을 온전히 올바른 것으로 인정하시어,

사랑으로써 이것을 받아들이셨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세상의 모든 죄를 떠 맡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잘것없는, 이처럼 죄를 거듭 짓고 있는 피조물인 우리가,

천주 성자의 치욕을 나눈다는 것,

한마디의 말도 없이 겸손되이 이것을 받는 것을 

어째서 불명예라고 간주해야 하겠는가.


당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에,

거룩한 희생자가  당신 홀로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승낙하면서,

우리 편에서는 그 굴욕의 잔을 마시는 것을 전연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옳고 관대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또는 오히려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오만한 마음으로써 

어떻게「 양선하시고 마음이 겸손하신 분 」을 기쁘게 해드릴수 있겠는가.


주는「 젤뜨루다.마리아 」동정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또한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 나는 모욕을 당하고 무함을 받았으며, 어리석은 이와 같이 취급되었다.

그럼에도 그대는 존경 받기를 바라고,

또한 아직도 치욕을 두려워 한다는 말인가」라고. (「 한 신비자 」122)



뿐만 아니라,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닮기 바란다.

사랑의 정도가 더해짐에 따라,

사람은 더욱 더 기꺼이 지극한 사랑이신 예수의 겸손, 욕설, 모욕을 받아들여

결국 이것을 함께 나누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하여 사랑은

「 세상이 우리에게 짊어지게 하는 굴욕, 무함, 비난, 모욕 천대를

무상의 은혜로도, 비할 데 없는 명예로도 여기게 하여,

십자가를 

지극히 사랑하신 분의 영광 이외의 모든 영예를 내던지고, 물리친다.


이 십자가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포기하며 무(無)로 하는 것을 영예로 삼으며

엄위의 표시로서  

주의 가시관과 갈대의 지팡이와, 우롱하는 홍포와 십자가의 옥좌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 십자가의 옥좌 위에, 주의 거룩하신 애인들은,

『살로몬』왕이, 

그 상아(象牙)의 옥좌에서 맛본 이상의 만족과 환희와 영광과 행복을 맛본다.」

(「 신애론 」11편 19장)



위의 말로,

성「 프란치스꼬.살레시오 」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묘사하고 있다.

경멸과 굴욕과의 타격의 배후에  그는 천주의 의지를 인식하고,

즉시 이에 마음을 합하였다.


그리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아무런 원망도 품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기회로 삼아  올바른 요구를 거절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가령, 누군가가 한쪽 눈을 우비어파는 일이 있어도

변함없는 애정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

악마적인 입과 세계에 으뜸가는 독설(毒舌)을 가지고 있던 파렴치한 목사와 

공개연설을 하도록 강요되었을 때,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 좋습니다. 이것은 마침 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주께서는 치욕에 충만하지 않으셨읍니까.

아, 주는 얼마나 나의 치욕에서 영광을 이끄시겠는가!

만일 내가 가차없이 모욕된다면, 주는 훌륭히 찬양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머지 않아 주위에 천명 만명의 많은 개종자를 발견할 것입니다」라고.

(「 전기 」5편, 「 정신 」1.27)


「 아씨지 」의 성 「 프란치스꼬 」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매우 후대를 받았을 때, 그는 그 반려에게 말했다.

「 자, 여기를 떠납시다.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하는 곳에서는  아무 것도 얻는 바가 없읍니다.

우리의 이득은 악담을 듣고 수치를 당하는 곳에 있읍니다.」

(드. 세규르「 동 성인의 행적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