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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강의록 [강의록]

은가루리나 2017. 8. 1. 22:20

 

moowee 등급변경▼ 조회 614  추천 0  2010.11.18. 08:04

 

 

[강의록]
< 새 강의록 >

moowee 추천 0 조회 644 10.11.18 08:04

 

 

< 새 강의록 >

 

 

제 1 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이,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의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 함께 뜻을 생각하며 "주님의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아멘.

 

찬미 예수님!

저는 방금 소개받은 이해욱프란치스코 신부이다.

 

(간단한 자기 소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는 

참으로 오랜 세월을 하느님을 찾으며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저의 경우만 하더라도 

유아세례 후 5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신앙생활 해왔다.

 

유아 세례 후 초등학교 3학년 때 첫영성체, 4학년 때 견진성사,

고등학교 때부터 소신학교 생활 3년, 대신학교 6년의 신학생 생활,

몸에 병을 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전 24년의 사제생활 모두를 합하면

모두 34년 간의 긴 세월을 道 닦는 삶을 살아왔어도

진실로 하느님을 찾아 얻은 삶을 살아오지 못했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어 온 하느님을 찾아 얻으셨습니까?"

"지금 그래서 너무너무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지금 정말로 진정한 행복을 느끼십니까?"

 

여러분 중에는 

하느님을 찾아 얻으셨다고 생각하는 분도 더러 계시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아마 더 많으실 것이다.

 

속담에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토록 아주 긴 세월 동안 하느님을 찾아 왔는데,

왜 그 하느님을 찾아 얻지 못하였나?

 

그것은 분명,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가 되어도 아주 큰 문제가 되는 일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원하는 무엇을 얻기 위해 수십 년을 어떤 일에 매달려 왔는데

그 일의 결과가 전혀 시원치 않다면 

과연 그 일이 제대로 된 일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문제 의식도 느끼지 못하며,

더 나아가 문제 의식을 느꼈더라도 

"오랫동안 해오던 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냥 그 일을 계속 지속해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바보스럽고 미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 

정말 소중하고도 귀중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정말 그것보다 더 불행한 삶은 없을 것이다.

 

수십 년을 신앙생활 해오면서 하느님을 찾아 얻지 못하여

"미래"에 대하여 늘 불안하고, "현실"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신앙생활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신앙생활이 문제가 있다면,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더라도 그냥 그 생활을 계속 해나가겠는가,

아니면 그 생활을 중단하고 완전히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겠는가를 

결단을 내려야 하고 

그 결단이 빠르면 빠를수록 우리에게는 좋을 것이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서 그것에 대한 결단을 내리는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날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약 1년 전부터 요즘까지 약 2백 명이 넘는 분들이 저의 이야기를 들으신 후, 

영적인 결단을 내리시어 하느님을 찾아 얻고,

참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계신다.

 

 

 

 

<그럼 왜, 

많은 신앙인들이 그런 "문제 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는가?>

 

저는 그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그것을, 누가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오늘 여러분 앞에 선 이유는 

정말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드리기 위해서이다. 

 

 

신앙이라는 말은 한자로 귀신 神자와 

우러를 仰, 높을 仰, 앙모할 仰, 믿을 仰자가 합쳐진 글자인데,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神佛 등을 굳게 믿어 그 가르침을 지키고 그에 따르는 일"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니까 신앙이란, 

그저 단순히 하느님을 믿기만 하는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

 

신앙이란, 

하느님을 굳게 믿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우러러 사랑하고, 그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느님을 높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며,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형성되는데,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생활"인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간의 관계는 서로 어떤 관계인가?

부부 간에 또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는 또 어떤 관계인가?

그것은 "사랑의 관계" 외에 또 다른 어떤 관계가 전혀 아닌 것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배우자를 믿고 사랑했기에

혼인으로 서로 부부의 인연을 맺고 "부부생활"을 해나가듯이,

"신앙생활"이란 

믿음과 사랑의 대상이 "인간"에서 "하느님"으로 바뀐 것 외에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사랑"을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본성이 우리 안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존재하는 그 무엇이든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자기 밖으로 나오게 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 안에 "사랑"이 심겨진 것인가?

그것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1,27)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요한4,16)

사랑이신 하느님이 사람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기에,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심어지게 되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심어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서로 사랑을 나누고 

또 그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이 만드신 다른 사람들과 서로 사랑을 나누기 위함인 것이다.

다른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10,25-28)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이미 다 잘 알고 계신 그런 이야기라고요?"

"아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어떤 누구를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최대한 잘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순 거짓말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면 절대로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잘 알고 계십니까?">

<"하느님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과거 "교리시간"을 통해서?

아니면, 미사 때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서?

"성령 세미나"나 "기도회", 또는 어떤 "피정 강의"를 통해서?

또 아니면, 어떤 "성경공부"나, 어떤 "신학원의 강좌"를 통해서?

아니면, 오랜 세월을 신앙생활 하다 보니 "서당 개처럼" 얼떨결에?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로 인간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또,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나, 

어떤 신학자가 알려 주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으로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느님을 잘 알 수 있을까?

 

 

 

< "어떻게 하느님을 잘 알 수 있을까요???" >

 

하느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단 하나!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뿐이다!

 

"신앙"이란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일"이며,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잘 알아야 하는데,

하느님을 잘 알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말이 되는가?

결국, "사랑한다"와 "안다"라는 말이 같은 말이라는 말이 

말이 되는가?

 

아, 말이 된다고요?

참 다행이네요.

사랑한다는 말과 안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하느님을 알게 된다.

하느님이 당신을 열어 보여 주시고 날이 갈수록 더 잘 알게 해 주신다.

부부가 진실로 사랑하면 날이 갈수록 서로를 잘 알게 되듯이 말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을 아는 일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부부생활이란 부부가 서로를 아는 일이며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알아 가는 일이고,

부부생활이란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알아 가는 일이다.

서로를 사랑하면 저절로 서로를 잘 알게 된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알고 계신다,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모른다, 너무나 잘 모른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부가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면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속속들이 다 안다, "척"하면 그냥 "착"이다.

 

부부가 수십 년을 살아왔어도 서로의 마음을 잘 모르면

부부가 진실로 서로 사랑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척"하면 "착"이 되어야 하는데, "척"하면 "멍?"이다.

뭘 원하는지 또 뭘 해 주어야 할지 잘 모른다,

엉뚱한 것을 해 주고 엉뚱한 것을 원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무엇을 하느님께 해 드려야 할지 

잘 모른다.

 

그래서 하느님이 원하시지도 않는 엉뚱한 것을 자꾸 해 드리고,

또 하느님이 기뻐하시지도 않는 엉뚱한 것만 자꾸 청해 댄다.

 

하느님은 

우리의 무슨 기도 무슨 기도, 무슨 행위 무슨 행위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엉뚱하게 자꾸 자기 방식으로 해 댄다.

 

그리고 매일 빠지지 않고 무슨 기도를 많이 해 드렸다고 혼자 만족해 한다.

그러한 행위를 저는 "misery(비참)的 신앙"이라고 표현한다.

 

영화 misery의 장면이 아직도 제 머리 속에 생생하다.

어떤 소설에 빠져 있던 어떤 여인이 

우연히 교통사고를 당한 소설가를 구조하여 자기 집에 감금해 놓고 

무조건 자기식으로 소설을 써 나갈 것을 강요하며 

폭행을 일삼는 내용의 영화였다. 끔찍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무엇이 부족하시다고

우리 인간의 부족한 기도와 우리의 행위들을 바라실까?

 

우리가 매일미사에 참여하고 매일 묵주기도 백 단씩을 받으신다고

하느님이 매우 기뻐하시며 엄청 흡족해 하시겠는가?

 

매일미사를 하지 마시라는 것이 아니고,

매일 묵주기도를 하지 마시라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이사1,13)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으며 바치는 모든 기도는

하느님께 역겨움을 느끼게 해 드릴 뿐이다.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만이 "참 기도"이며,

참 기도만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에 대한 "진실한 사랑"밖에 없다.

하느님이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만을 원하신다.

 

하느님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해 주시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우리의 "한없는 사랑"을 드려야 한다.

저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義로움"을 찾아 드리는 일이라고 믿는다.

 

저는 참으로 "義로운 사람"은  자신만의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뜻(意)을  존중해 줄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의로운 사람이야말로 "義理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義자와 함께 잘 쓰이는 글자가 "正(바를)","公(공번)" 등인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뜻을 존중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의로운 사람"이며,

하느님과 "義理"가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을 수 있으며,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6,33)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과 그것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까지도 찾아 얻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인가?

사실, 제가 이 자리에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모두 하느님께 내맡겨 드려야 한다.

왜?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왜,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인가?

하느님은 나를 만드신 "나의 주인님"이시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은 나의 주님"이시라는 진실인데,

많은 신앙인들이 이 진실을 "지식"으로는 받아 들이지만

"실재적인 삶"에서는 거부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나의 주인님"이시라는 진실을 인정하고,

실제로 하느님을 주인님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의 생명도, 나의 배우자도, 나의 소중한 자녀도, 나의 귀중한 재산도

모두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이기에,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다 내어 드려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 당신의 생명까지 다 내어놓으셨다.

 

 

의로운 사람은, 의리가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하여 다 내어 드린다.

그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