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기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단순(單純)함/ 단순(單純)함 [교회 밖으로 나오기] 리처드 로어 신부 강론

은가루리나 2017. 10. 24. 13:24

단순(單純)

                                                                     Simplicity



교회 밖으로 나오기


교회에 대한 내 생각들은 나의 신원과 신분에 바탕을 둔 것들입니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해 있어요. 나는 사제입니다. 그들이 먼저 나를 추방하지 않으면 사제로 죽을 거예요. 그런즉, 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집안에서 하는” 말입니다.


교회에 대한 논의를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미지인 ‘창조’에서 시작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로가 로마서에서 “창세 이후로 그분의 영속하시는 능력과 신성한 본질이 비록 사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창조하신 것들 안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하셨으니”(1, 20)라고 말했듯이 창조가 하느님의 첫 번째 계시(啓示)기 때문이에요.


비록 하느님을 볼 수 없지만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창조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올시다.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 뒤에 일어난 문제들로 시작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 첫 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말하지요. “하느님께서 그 지으신 것들을 보시니 참으로 좋고 매우 아름다웠다.”(창세기 1, 31).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참으로 좋고 매우 아름다웠다”고 언급된 유일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 문제에 너무 매달려 있는 바람에 하느님이 처음에 하신 말씀을 잊어버렸어요. 우리 자신의 작은 순간에 매몰되어서 큰 그림을 잊은 거지요. 그리고 나는 이것을 하느님이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 위의 생명’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서 전체 창조역사를 1년으로 압축시켰어요. 1월에 지구가 출현합니다. 4월쯤엔 파충류가, 9월에는 포유류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지요. 중간 단계들 모두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습니다만 인류가 아주 늦게 출현한 것은 알고 있어요. 이른바 ‘지혜 인간’이라는 호모 사피엔스가 생겨난 것은 12월 31일이 끝나기 불과 3분 전입니다. 그러니까 전체 유대-그리스도교 역사가 12월 31일 마지막 몇 분의 일초 동안에 이루어졌다는 얘기가 되네요.


나는 하느님이 그 마지막 몇 분의 일초에 처음으로 말씀하셨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창조를 일컬어 “하느님의 지문(指紋)”이라고 하셨지요. 우리는 우리의 신학이론을 개발하는 데 너무 바빠서 그 지문 들여다보는 걸 잊었습니다.


예수는 교회인 우리를 인간 존재의 새로운 공동체로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어린 양떼라고 부르시지요. 나는 우리가 전체로 되기를 그분이 바라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분은 우리에게 한 덩이 옹근 빵이 아니라 누룩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소금이라고 부르셨지요. 그런데 우리는 요리 전체가 되려고 하는 겁니다. 그분은 우리가 산꼭대기를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바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산 전체가 되려고 하지요.예수가 사용하시는 이미지들은 아주 겸손하면서도 매우 힘 있는 것들입니다.


유럽 대륙은 온 땅을 그리스도교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지요. 덕분에 우리는 지금 그저 누룩으로 소금으로 등불로 존재하기가 어려워졌어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를 거의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고 권력의 길로 가려 하지요. 우리는 옹근 빵 한 덩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그냥 누룩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훨씬 겸손하고 나약하고 미미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위치올시다. 그것은 무력해보이고 그래서 정말로 힘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만 어필하지요. 나머지는 모두가 자기 목적을 위해서 복음을 남용하고 오용하고, 불행하게도 그것이 우리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설명하실 때 예수가 ‘교회’(the Church)를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은 분명 아니었어요. 하지만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듯이 자기를 우상화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았지요. 무엇이 저 자신을 숭배하는 한, 홀로 숭배 받아야 할 ‘한 분’(the one)을 숭배할 수는 없는 겁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것은 오직 ‘하나’만이 절대라는, 다른 모든 것들이 상대라는 뜻을 선언하는 거예요. 다른 모든 것이 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되는 겁니다. 교회, 성경, 교회의 성사들, 영성생활을 위한 수련이 모두 거기에 포함되지요.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스스로 목적일 수 없는 거예요.


선사(禪師)들 말대로, 그것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달을 쳐다보는 대신 누가 최고의 손가락인지, 누구한테 진짜 손가락이 있는지 그런 걸 따지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지요. 이것이야말로 우상을 만들지도 숭배하지도 말라는 제1계명에 대한 명백한 불복이에요.


첫 번째 우상을 만든 사람은 첫 번째 사제인 아론이었어요. 모세가 신비체험으로 얼굴을 빛내면서 하산했을 때 그의 형인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곧장 그를 ‘종교’로 인도하였지요. 우상을 빚음으로써 우리 마음에 맞는 하느님, 우리 손 안에 있는 하느님,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하느님을 모시는 겁니다. 종교가 주는 유혹은 언제나 테이블을 돌려서 우리 자신이 상황을 주도할 수 있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교회’를 ‘하느님 나라’로 혼동하는 첫 번째 잘못을 저지르는 거지요.


두 번째이자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잘못은 우리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통치’ 또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양 ‘천당’(heaven)을 ‘하느님의 통치’로 혼동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셨어요. 하느님의 나라가 여기 있음을 분명히 밝히신 겁니다. 하지만 그 ‘여기’는 우리가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어디’가 아니에요. “사람들이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그가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마시오.”(마태오복음 24, 23) 그 ‘여기’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기관이나 제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어떤 것과도 한 울타리를 쓸 수 없지만 여전히 하느님이 일하시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따로 ‘크리스천’이라는 푯말을 붙일 필요가 없는, 그런 곳입니다. 제도종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이에요.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 ‘주님, 주님.’ 부른다 해서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소.”(마태오복음 7, 21)


4백년 뒤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지요.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속해 있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 많은 사람이 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서 우리는 ‘교회’를 ‘하느님의 통치’로 혼동해왔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예수가 말씀하신 대로 ‘큰 그림’ 또는 ‘가장 큰 틀’로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궁극적 전망(ultimate perspective)이지 어느 한 장소가 아니에요. 하느님의 전망(perspective of God)입니다. ‘큰 틀’에 여러분 자신을 열어놓을 때마다 여러분의 작은 틀은 완전 떨어져 나가든지 아니면 본연(本然)의 전망 속으로 녹아 들어가지요. 그걸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면 네 나라는 간다.” 예수는 가장 심한 말을 위선자들에게 하시고 두 번째로 심한 말은 재물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에게 하시지요.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통치를 알아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셋 있는데 힘(power), 명성(prestige), 재물(possession)이 그것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 그들은 분개하면서 그 말씀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지요. 그리고 그를 가리켜 믿음이 없는 자, 율법의 적, 마침내 악마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진 것이 너무 많고 그것들을 지켜야 하니까요.


‘하느님의 통치’ 선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지킬 것이 없는 사람들, 스스로 만든 자아상(像), 명성, 재물, 신학, 원리 또는 확신 따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가리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히브리어로 ‘아나빔’(anawim)이라고 부르지요. 마리아의 성모송에 ‘아나빔’의 영성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통치’라는 현실을 살아가면 그때 세상은 상대적이 되고 우리는 ‘순례하는 나그네’가 되지요. 삶은 스쳐 지나가는 것에 그 바탕을 둘 수 없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현상들에 그 바탕을 둘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이 진실 위에, 우리의 ‘참 자아’라는 진실 위에, 하느님이 “아주 좋다”고 하신 이 창조된 세계의 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요.


좋지 않은 것을 좋지 않은 것이라고 확정하는 것, 이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이 몸소 창조하신 것을 보고 아주 좋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대단한 믿음이 있어야 해요. 우리는 다만 완벽한 것들만이 사랑할 만한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는 하느님이 불완전한 것들을 사랑하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불완전하고 모자라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베푸시는 잔치에 의로운 사람들이 오지 않는 거예요. 하느님은 절름발이, 귀머거리, 소경을 부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까요.


이 패턴은 결코 바뀌지 않았습니다. 입증하거나 지켜야 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지요. 하지만 영적인 사다리를 오르는 데 한 생애를 바친 우리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렵습니다. 그 진실은 꼭대기 아닌 밑바닥에서 발견되는 것이니까요.


사다리를 ‘오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성육신을 통해서 ‘아래로 내려오는’ 그분을, 놓치고 말지요. 중산층 사람들을 괴롭히는 많은 죄의식, 이른바 가련한 자아상(像)의 확산 그리고 자기-증오와 자기-중심의 대부분이 예수가 우리 집일 수 없다고 하신 이 세상에 터를 잡고 살기 때문이라고 나는 봅니다. 착각과 환상을 바탕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저절로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될 거예요.


‘하늘나라 통치’(Reign of Heaven) 선언이야말로 있을 수 있는 가장 래디컬한 정치적 신학적 선언이올시다. 완벽한 존재로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것은 ‘큰 틀’ 안에서, 모든 것의 궁극적이고 충만한 상태 안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전망 안에서 사는 것과 연관된 문제예요. 생각을 달리 하거나 교회의 특별 선교 프로그램을 감당하거나 새로운 구속신학으로 살아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삶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길을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새로운 종류의 사유(思惟) 속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길을 ‘사는’ 겁니다.


복음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를 다르게 ‘살라’고 그래서 그 삶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지요. 달리 말하면 복음은 우리를 단순함, 나약함, 대화, 무능력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덕목들이에요.


중산층 종교가 우리를 위안하는 쪽으로 성경본문을 이용하도록 항상 유혹해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거울 같아서 먼저 우리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하지요. 그 다음에 새로운 방식으로 살도록,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순진한 형제자매로서의 삶을 살라고 우리를 ‘도전’합니다. 먼저 하느님 말씀으로 자기를 대면하고 그 말씀의 도전을 받은 뒤에야 우리는 같은 하느님 말씀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삶이 바뀌기 전에 먼저 성경에서 위안을 끌어내려고 했지요! 소위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다른 누구보다 더 탐욕스럽고 이 세상에서 안보를 지키는 데 열심인 겁니다. 입으로는 예수가 자기네 주님이고 자기네 안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에요.


내게는 세계 여러 곳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이 묻더군요. “왜 우리가 당신들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당신네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세계의 엄청난 자원을 소비하여 지구별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당신들은 당신들의 가난한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니다. 당신들은 예수를 미워한다. 그러면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여 스스로를 거짓말쟁이 바보로 만들고 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어요. 나 자신 무고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별의 많은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음은 부인 못할 사실이에요. 우리가 정직하다면 교회가 그들을 구원론과 영적인 포박(捕縛)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우리에게 복음은 한 번도 땅에 제대로 착지(着地)한 적이 없었어요. 세상의 정치사회적 경제적 질서를 건드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코 오지 않았어요. 우리가 경건하게 “그 나라가 오소서.”라고 말하면서 그 말끝에 “내 나라는 가라.”를 덧붙이지 않을 때 그때 가짜 종교가 서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다고 믿지요.


우리는 “예수가 주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미국이라는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나라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복음은 믿음직스럽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우리가 메신저를 예배하는 데 너무 바빠서 메시지를 잊었다고 확신합니다. 산상설교의 대부분이 가톨릭에서도 프로테스탄트에서도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어요. 우리 모두 개혁되어야 해요. 하지만 나는 우리가 미미한 사람들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너무 크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제 막 성년이 되려고 하는 나이에요. 복음서로 하여금 우리에게 솔직히 말하게 하고, 가난에 대하여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 힘이나 무기 대신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단순하게 사는 법에 대하여 단도직입으로 분명히 말씀하시는 예수에게 귀를 기울이며 살아갈 나이가 되었다는 얘기올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세계 자원의 60%를 ‘국가방어’를 위한 비용으로 쓰고 있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안전한 곳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오직 우리 가슴 속의 진실과 자유를 약속하셨지요.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통치’를,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를, 원치 않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요 황제처럼 군림하는 그리스도교지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지금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이지요. 우리 자신을 미워하는 건 잘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조상들 어깨 위에서 그들이 저지른 죄의 무거운 짐과 그들의 성스러운 행위에서 나오는 광채를 아울러 지고 있어요. 그들은 현재 우리의 형상이고 우리는 과거 그들의 형상이에요. 여러분이 믿음의 내적 여정을 걷고 있다면 그들과 여러분이 정확하게 같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여러분 안에 그대로 있는 걸 보게 될 거예요, 여러분이 정직하다면. 그러나 여러분이 길 위에 있으면 여러분의 어느 부분이 아주 선하다는 사실 또한 보일 겁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여러분의 참 자아를 바로 보게 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그걸 획득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여러분이에요. 그것은 여러분을 빠뜨릴 수 없는 그물이에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통치’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가 완전한 인간을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 일그러진 사람들, 억눌리는 사람들, 그들이 우리를 앞장서야 해요. 우리 가운데 선하고 건전하고 강한 사람들은 출발선을 떠나기가 어렵지요.


여러분이 한계에 부딪쳐 고통을 당하면 현실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 터인데 그것을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저 아랫배의 창자로 느끼게 될 거예요. 여러분은 이제 ‘발전’이 아니라 자비를 믿어 의지합니다.


수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미 정보국(CIA) 윌리엄 캐시가 죽었을 때 그의 아내가 텔레비전 저녁 프로에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캐시는 성실한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아내도 전형적인 아일랜드 여자였지요. 그 무렵 신문들이 정보국의 부패상을 파헤치고 있었는데 캐시가 ‘신성모독’을 범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었습니다. 캐시 부인이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성실한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인 그녀에게 ‘신성모독’이란 정보국을 모독한 게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일단 국가가 저를 하느님으로 만들면 복음이 귀에 들어올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국가’를 떠받드는 데 그리스도를 이용하고 그 ‘국가’의 환상을 축복하는 데 교회를 이용합니다.


대부분 역사에서 종교와 문화가 한 통속이 되는 바람에 우리는 신자 되기 위하여 아주 적은 값을 치르면 되었지요. 사실은 ‘종교인’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상당한 사회적 대가를 지불했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가 “세상이 그대들을 미워할 것”(요한복음 15, 17)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 마땅히 물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는가?” 오늘날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이유가 없어요. 대부분 시간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게임을 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 삶을 새로운 바탕에 세우지 않고 오히려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권력, 명예, 재물이라는 낡은 바탕에 세우고 있습니다. 미국의 진짜 종교는 그가 프로테스탄트냐 가톨릭이야 아니면 유대교냐에 상관없이 언제나 미국이지요.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근사한 말로 부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마음을 돌려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회개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회개되는 거예요. 우리는 다만 열린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놓아버리는 기술을 연습하고 습득하게 되기를, 그리하여 복음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증명하거나 지켜야 할 아무 것도 없이 가난해지는 법을 가르칠 수 있게 되기를 구할 따름입니다. 예수는 그것이, 지켜야 할 게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좋은 소식”(루가복음 4, 18)이 되리라고 말씀하시지요.


지구별 교회의 구석구석에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통치’ 선언에 귀를 기울이고 사회정의 문제에 헌신할 것을 서약하고 있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여러 종파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던 문제들이 별로 중요시되지 않는 것을 목격합니다. 종교개혁(the Reformation)에 대한 질문들은 대부분 백인 성직자들의 질문이었고 그리고 그것들은 권력과 정의에 관한 질문이었지요. 누가 힘이 있고 누가 옳은가? 이런 것은 십대들이 따지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십대이고 복음에 대하여, 공동체에 대하여, 비폭력에 대하여, 원수 사랑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아감에 대하여 좀 더 실질적인 질문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것에 대하여 예수는 당신 견해를 이론의 여지없이 밝히셨지요. 반면에 교회의 성사들과 사제직에 대한 그분의 견해는 훨씬 덜 분명합니다.


그동안 자기 형제자매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사람들은 없었지요. 하지만 마태오복음 25장에서는 그것이 심판받을 유일한 범죄입니다. 오랜 세월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미사에 참석했는지에 따라서 심판받는다고 생각했어요. 수년 전만 해도 나에게는 흠잡을 데 없는 주일 결산서가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한지, 얼마나 철저히 십계명을 지켰는지에 따라서 심판받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마태오복음 25장에서 하느님이 그것들에 대하여 아무 언급이 없으신 걸 보고 크게 실망했어요. 그래도 내게는 하느님께 보여드릴 괜찮은 성적표가 꽤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자매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한테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느냐?” 이것은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네 번 반복된, 그러므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같은 질문이에요. 그래도 우리는 반문하지요. “언제 우리가 굶주리고 목마른 당신을 보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그 일을 한다고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건 분명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그 행위를 해야 할 뿐입니다.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셨어요. 만일 우리가 부서지고 깨어진 피조물을 만난다면 그것은 마더 테레사의 말대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변장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실제적인 격려를 드리고 싶군요.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먼저 밖을 향한 여정을 떠났다가 거기 있는 가난하고 부서지고 비천한 이들의 현실을 보게 되지요. 그러다가 자기 자신한테 자비를 베푸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가 하면 먼저 안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가 밖을 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는 안팎으로 ‘옹근’ 길을 가야 합니다. 안으로 옹근 길을 가면 거기서도 부서지고 가난하여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게 될 거예요. 성 프란체스코의 언어로 “우리 안에 있는 문둥이”가 바로 그 사람이지요. 프란체스코는 문둥이를 차마 마주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문둥이를 껴안자마자 그토록 꺼림칙하던 존재가 “달콤함과 생명”(sweetness and life)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하지요. 우리는 밖에 있는 문둥이를 안아줄 수 있기 전에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문둥이를 안아줄 수 있어야 해요. 결국 그것은 동일한 자비의 행동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만든 자비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비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비의 영성 아닌 군국주의적 영성으로 교육받으며 자랐지요. “적을 죽여라. 적을 공격하라!” 이것이 그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공격당하고 서로 죽였어요. 하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을 향한 비폭력 자비의 새로운 영성을 배워 익히면 우리는 같은 것을 세상에 선물하게 될 겁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교회보다 교회 바깥의 여러 집단들이 이 일을 더 잘 하고 있어요. 교회가 저토록 약해진 까닭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데 무척 바쁘지요.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영적인 힘과 이 세상 많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특히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AA)과 그들의 ‘열두 단계’를 눈여겨보았어요. 나는 그들이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모델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무능(無能)을 철저히 경험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같은 경험을 하는 남자와 여자들의 모임 속으로 들어가지요. 나는 이것이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어쩌면 부서지고 피 흐르는 살이 곧 그 이름이기에 그의 이름을 따로 부르지 않는, 교회의 기본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이 경험에 스스로를 굴복시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게 되지요.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는 겁니다. 어느 전통도, 어느 교회도 하느님 앞에서 군림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 모두 영원한 자비를 입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줄여서 말하지요. 우리를 돌아서게 하는 것은 안에 있는 가난한 남자/여자들 그리고 밖에 있는 가난한 남자/여자들, 이 두 부류의 가난한 자들이에요. 그들이 우리를 서로 향하게끔 몰아세우는 겁니다.



공동체의 의미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내가 “나 자신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는 뜻이지요. 모두가 형제자매로 살 수 있는 세계, 거기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특별한 구조(構造, structure)가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전체적으로 공동체와 협동보다 경쟁 위에 세워진 세상에서 살고들 있지요.



기초공동체들의 부활


신약성경은 우리가 가정교회(house Church)라고 부를 수 있는 교회의 모범을 보여주지요. 40명가량의 식구들로 이루어진 기초공동체(basic community)를 말하는 겁니다. 나는 중남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그곳 기초공동체들과 기성교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호혜관계에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우리에게 기성 제도교회만 있으면 모든 것이 너무 쉽게 규격화되고 형식화되겠지요. 반대로 우리에게 기초공동체들만 있으면 냄비에서 팔팔 끓다가 말 거예요. 그것들이 잠간 동안은 성공적으로 보이다가 협소한 분파들로 쉽게 변질되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니까요. 우리가 이 두 가지 형태의 교회 사이에서, 어느 쪽도 우상화하지 않고, 창조적 긴장을 이루며 살아갈 때 가장 잘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문제는 지난 4백 년 동안 우리에게 기성 제도교회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에요. 기초공동체들을 마음껏 실험해볼 기회가 우리에겐 없었지요. 그런즉 이제 우리는,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잘못도 저지르겠지만, 그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브라질에만도 약 8만에서 10만 정도의 기초공동체들이 있어요. 만일 사제들이 모자라지 않게 남아돌았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한테 더 좋은 계획이 있었던 거예요. 제도교회가 가짜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무엇이 교회를 평형(平衡)으로 끌어들여야 했어요.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들이 처음엔 불이 타오르던 교회에서 온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모든 공동체가 회심의 옹근 길로 다시 수렴되지요.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뿌리 내린 곳에서 꽃을 피우며 소그룹 안에서 현실 문제를 당면하라고, 하지만 어떻게든 제도교회와 연계하라고 권하는 겁니다. 우리의 소그룹들이 있다가 사라져도 제도교회는 여전히 거기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우리 조상들을, 비록 그들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더라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과 일맥상통하지요. 내가 미국 사람들에게 이 말을 자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역사의 시작이면서 합계(summation)기 때문입니다.



균형의 중요성


순수하게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는 자체 에고에서 헤어나지 못할 위험이 있어요. 우리의 신앙행위는 우리에게 아직 없는 것을 내어주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게 신앙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요. 어떻게 나한테 없는 것을 내어준단 말인가?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지만 그래도 나는 밖으로 나가서 다른 이들을 치료합니다. 내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서지고 찢어진 내 삶을 통해서! 밖을 향하여 남들을 위한 봉사를, 자기를 넘어 확장되는 봉사를, 내포하지 않은 교회공동체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건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심리학 아니면 가짜 초월이지요. 심리학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둘이 같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3세계로 옮겨지는 교회의 중심


나는 오늘 교회의 움직임이 유럽을 중심으로 펼쳐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든 신호들이 그 반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70퍼센트가 제3세계에 살고 있어요. 유럽은 그동안 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잘 감당했지요. 이제 성경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보았듯이, 여자들의 눈으로,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세계적인 협동의 눈으로 해석되고, 여러분이 아시아에서 볼 수 있듯이, 좀 더 몸에 중심을 둔 영성을 통해서, 명상하는 영성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해요. 우리가 그동안 잘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많이 있다는 거예요. 이제 전통교회가 할 일은 자기를 놓아버릴 수 있을 만큼, 다른 음성들이 자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겸허해지는 것입니다.



이해욱프란치스코6217.10.24 14:43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지요.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속해 있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 많은 사람이 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서 우리는 ‘교회’를 ‘하느님의 통치’로 혼동해왔습니다. >



<한번은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이 묻더군요. “왜 우리가 당신들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당신네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세계의 엄청난 자원을 소비하여 지구별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당신들은 당신들의 가난한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니다. 당신들은 예수를 미워한다. 그러면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여 스스로를 거짓말쟁이 바보로 만들고 있다.”



<이제 전통교회가 할 일은 자기를 놓아버릴 수 있을 만큼,
다른 음성들이 자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겸허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교회,
교회의 지도자들이 충분히 겸허해져야 합니다, 다른 음성들이 자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