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섭내

제3장. 내맡김의 상태가 요구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내맡김의 다양한 효과들 .....

은가루리나 2017. 11. 26. 00:59


제3장


내맡김의 상태가 요구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내맡김의 다양한 효과들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현재의 의무만으로 살아가는 이 길을 걸어가려면

우리는 우리가 느끼고 행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 이상의 모든 목적들은 쳐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현 순간을 선행하거나 뒤이어 올 순간은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현 순간에 만족해야 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법이 항시 잘 보호되고 있다고 추정하지만,

그럼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대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 사람, 이 책에 애착을 느끼고 있고,

이러한 의견을 주거나 받고 싶으며, 

이러저러한 불평을 토로하고 싶고,

이 영혼에게 내 마음을 열어 보이거나 그의 감정을 받아주고 싶으며,

어떤 것을 주거나 그것을 해보고 싶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성찰이나 추론이나 노력에 의존해 스스로를 지탱하지 말고,

은총의 인상을 풍기며 나타나는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떤 상황에 결부시키는 당분간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거기에 개입해 들어가는 일 없이,

온전히 그 상황에 열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실행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내맡김의 상태에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 통상적으로 우리를 지지해주던 모든 것들의 역할을 

반드시 대신해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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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영성의 본질이다



 06 


하느님은 내맡김의 상태로 부른 영혼에게서 

당신 은총에 완전히 복종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이성에 의존하거나  문제를 사려 깊게 생각하지도 말 것이며 

이런 은총의 이르심에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생각, 자신의 이론, 자신의 노력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런 것을 행하기를 원하실 때에는 

그것을 하면 좋겠지만 

자기 생각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은  내맡김의 상태에 있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우리를 지탱시켜주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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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순간 우리는 어떤 덕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포기한 영혼은 이 덕의 실천에 무척 충실합니다.


그는 자신이 읽거나 들은 것을 항시 염두에 두고 실천을 하는 까닭에

가장 고행을 많이 한 수련자도 

이 덕에 따르는 의무를 그보다 더 잘 수행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영혼들은 

어떤 때는 독서에, 또 어떤 때는 다른 것에,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 때는 아주 사소한 사건에 대해 이런 지적을 하거나,

이런 숙고를 하도록 이끌림을 당합니다.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는

이 영혼들에게 뭔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는데,

이 앎은 

이들이 덕을 실천하는 또 다른 순간에 이들을 돕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이 영혼들은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다만 그 일을 하고 싶다는 끌림을 느낄 뿐입니다.


이들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나는 그것을 믿고, 읽고, 청하고, 바라보도록 인도됨을 느낍니다.

나는 이끌림을 따르며,

내 안에 이런 끌림을 불러일으키시는 하느님께서는

내 역량 안에 이 특별한 일들을 자산으로 쌓아 두고 저장해뒀다가

후에 이것들을 다른 것들에 대한 이끌림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다른 것들에 대한 이끌림은 

나로 하여금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저장된 이것들을 사용하도록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영혼들로 하여금 단순하고, 온유하며, 유연하게,

그리고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충동들이 일으킨 가장 가벼운 미풍에도 

유동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을 소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들을 온갖 일에 전념케 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노력과 노고를 통해 

삶을 영위해나가는 영혼들의 상태에 적용되는 규칙에 의해서,

만약 이들이 이러한 끌림에 저항한다면,

이들은 

미래의 순간에 주어질 의무들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것들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들을 판단하고, 이들의 단순함을 비난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모든 상태를 인정하며,

이 상태들의 모든 단계와 발전을 아주 잘 나타낼 줄 아는 이 영혼들은

섭리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 감미롭고 다정한 맛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이비 현인들로부터 경멸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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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나중에 무엇인가 덕을 행할 수 있도록 

지금 그것에 관해 배워두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이유도 모르면서 

그토록 특별한 행동에 이끌리고 있는 까닭에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저는 쓰고, 읽고, 듣고, 관찰하는 일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따를 뿐입니다. 

그 일에 응답해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은  

내 안에  일종의 영적인 창고를 지으시고  미래에 

제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선익이 되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단순한 마음, 온유함, 양순함을 본질적인 것으로 살게 하며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은총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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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현인들은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었던 사도들의

이 끊임없이 불안정한 삶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까?


평범한 영성가들 역시 이처럼

그들의 매 순간을 섭리에 의존하는 영혼들을 싫어합니다.

이들을 인정해주는 건 이들과 동일한 상태에 있는 몇몇 영혼들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는 하느님께서는

단순하고 충실하게 자신을 내맡기는 이들에게

반드시 이러한 성격의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5-1








01 


현명하고 경건하다고 말해지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부당한 비평




  세속적 지혜는 

어느 곳에도 정주할 수 없었던 사도들의 끊임없는 방랑생활에  

호감을 갖지 않으며, 

많은 평범한 종인들도 

자기들이 하는 모든 일을  섭리에 내맡기고 있는 영혼들의 사고방식을 

참아주지 못합니다.

이들 영혼을 인정해 주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피조물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하느님은

단순하고 충실하게 스스로를 내맡긴 영혼에게 

반드시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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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그의 삶이 되고, 당신을 통하여,

비밀스럽고도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영혼을 완덕으로 이끌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모든 자기 고유의 생각, 지식, 노고, 탐구, 추론은 착각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자기애 내지는

자기 고유의 감각에 이끌려 몇몇 터무니없는 경험을 하고 난 후,

마침내 자신의 이 속성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영혼은 하느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당신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통로들을 숨기고 뒤엉키게 해놓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자신의 허망함을,

자신의 자산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해롭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게 된 영혼은 하느님만을,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만을,

그분을 통해서만 소유하기 위해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깁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이나 앎 또는 성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은 영혼에게 있어 착각의 원천일 따름입니다),

위장된 겉모습 아래 감추어진 은총의 효력과 실재성(實在性)에 의해 그러합니다.


영혼은 신적 작용을 모르지만,

자신의 파멸이라 생각되는 수많은 종류의 상황을 통해서

그 작용의 위력과 실체와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이 어둠에는 치료약이 전혀 없기에,

이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어둠속에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맹인과 다를 바 없으며,

이리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약의 효능을 모르는 병자와 같습니다.


병자는 약의 쓴 맛만을 느끼고,

대개의 경우 이 약들이 자신을 죽게 만들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왜냐하면 약의 복용으로 나타나는 발작과 허약함이

그의 이런 두려움을 정당화시켜줄 죽음의 외양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죽음의 외양 아래 건강을 부여받으며,

이 약들을 자신에게 처방해주는 의사의 말에 따라 그것을 복용합니다.



----------6-8



제 6 장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이다 




 08 


하느님은 영혼을 부수어 버릴 듯해 보이는 방법들로

내맡긴 영혼들을 보호하신다.



자기를 인도하는데 애써 노력한 어리석음을  여러 번 체험해 본 뒤에 

영혼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이 흘러나오는 모든 통로를 숨겨놓고  뒤엉키게 해 놓으셨으므로 

하느님 안에서만 

영혼은 생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무(無)라는 것을 알아두고, 

또 영혼 자체에서 파생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무익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됨으로써 

영혼은 하느님께 스스로를 내맡겨

그분만을 모시고 

그분을 통해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때  하느님은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것은 영혼이 어떤 것에 대한 사고를 해 왔기 때문도 아니고 

어떤 조명(照明)을 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유는  

이 모든 것이 지금에 와선 환상의 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제 아무리 숨기고 변장한다 해도

하느님의 은총의 실재성(實在性)과 그 결과로 인해 

영혼의 자태는 새롭게 변화됩니다.


영혼이 하느님의 작용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영혼은  하느님의 작용에서 

영혼을 망쳐버릴 것같이 여겨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 

그 모든 효력을 반가이 맞아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무지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러한 것을 참아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당신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지(無知) 안에서입니다.


영혼은 맹인과도 같으며 

또 자기가 먹고 있는 약이 신통해 보이지 않아

그 약이  본인에게 끼치는 선익을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 병자와도 같습니다.

이 병자는  종종 복용하는 약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약을 복용할 때 나타나는 허약함과  여러 가지 병의 재발은 

자신의 공포심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지만  그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듯 보여도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그의 건강은 회복됩니다.



   물론 병상에서 생활하면서 의사들의 치료를 받아야만 되는 진짜 아픈 사람들과 

자아포기한 영혼들이 체험하는 무기력함과 허약함은 

아주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자아를 포기한 영혼들의 병은  진짜 병이 아니므로

그들은  그런 것들을 무시해 버려야 합니다. 

이런 느낌을 갖도록 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신데, 

그분은 그들이 본래의 신앙 상태로 되돌아가 

자신들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기게끔 그런 일을 해 주십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치료제입니다.


이 영혼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시는 모든 고통을 넘어서서,

쓰러질 때까지 짐을 지어 나르는 고용된 말처럼  

자신들의 몸을 태우면서

기쁘게 길을 따라  꾸준한 발걸음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채움으로 인해  영적인 힘을 약화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하겠습니다.

이 힘은  놀라우리만큼 허약한 몸을 튼튼하게 할 수 있어,

고상하고 관대하게 지내는 단 한 해가 

사소한 일로 걱정하며 보내는 100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과 같습니다.



==================5-4


   예전에 영혼은, 사상과 지식을 통하여,

자신을 완덕에 이르게 해 줄 계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 상태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완덕은 모든 생각, 모든 지식, 모든 감정에 <반反 하여> 그에게 주어집니다.


완덕은 섭리에 의해 주어지는 모든 십자가적 고난에 의해서,

현재의 의무를 실천하는 활동에 의해서,

전혀 죄로 이끌지 않는다는 점을 빼고는 좋은 것 하나 없는데다

눈부신 숭고함이나 덕이 지닌 특별함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떤 끌림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간혹 잇달아 닥쳐오는 이 십자가적 고난들 속에서,

베일에 가린 듯 숨어 계신 하느님께서는

매우 생소한 방식으로 당신을 내어주시며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에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자신의 책무에 대해서는 얼마나 혐오감을 갖는지만을 느낄 뿐이고,

그를 끌어당기는 것들은 

그저 그를 매우 평범한 실천 행위로만 인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상적인 성성(聖性)은

그에게 있어 

그의 비천하고 경멸스러운 마음가짐에 대한 내적 질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인들의 생애를 기록한 모든 저서들은 그를 단죄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지 않습니다.


그는 광채를 발하는 성성을 보고 비탄에 잠기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성성에까지 자신을 들어 올리는데 필요한 힘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신의 명령이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비겁함 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덕의 광채나 사색의 탁월함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그가 받게 되는 모든 것은 

그를 멸시하듯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들은 “무슨 성인이 이따위야 !”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을 수긍하는 영혼은,

비천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가 기울인 그 숱한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게 너무나 송구스러워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질리도록 치욕을 맛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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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내맡김을 실천하고 사는 영혼들의 어두움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외적인 대립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길 원하는 영혼에 있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없지만,

그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영혼의 완덕을 향한 계획이 어떤것이었는지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영적 조명(靈的 照明)을 받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완덕은  영혼의 모든 선입견과  그것이 느끼는 모든 것 

그리고 영혼이 배워 알고 있는 모든 것과는 반대로  영혼에게 제시됩니다. 

완덕은  이제 

섭리에 따라 보내진 모든 고통의 형태로, 현순간의 의무들로, 

죄로 이끌지 않는다는 사실 외에는

그들에게 전혀 선한 것이 되지 못하는 여러 갈등 형식으로  

영혼에게 다가옵니다.

이는  

온갖 숭고한 것과 특별한 성덕의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처럼 보입니다.


가려지고 감추어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은총을  생소하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베풀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십자가를 지기에는 너무 허약하다는 것을 느끼고,

의무에 대해서는 싫증을 내며,

매우 평범한 영적 수업에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표상은  

영혼이 자신의 방법과 비열한 본성에 대해 질책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성인들의 생애를 그리는 모든 영혼이 찬란한 성덕을 바라보기는하지만,

성덕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인해  비참해지며

하느님에 의해  있는 그대로 부과되는 대신, 

소심함으로 인해  함을 저지르게 됨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공적(功績)으로 명성을 얻어 지적 수준이 높아진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그런 영혼을 경멸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괴상한 성인인가!" 라고 말하고,

불행한 영혼은  그들을 믿으며, 

그러한 상황을 피하기위해 시행해 왔던 모든 무익한 노력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이런 질책들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만족한 만한 해답을 줄 수 없게 됩니다.





==========5-5


   그러나

영혼은 자신을 온통 하느님께 몰두하도록 만들고,

부지불식간에 자신에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고

오로지 믿음으로 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말해주는 근본적인 힘을 감지합니다.


야곱은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영혼이여,

그대는 하느님을 찾지만, 하느님께서는 도처에 계시며,

모든 것이 그대에게 그분의 현존을 알려주고,

모든 것이 그대에게 그분을 내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 곁을,

그대 주위를, 그대 안으로, 그대를 관통하여 지나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머물러 계시는데,

그대는 그분을 애써 찾고 있는 것입니까?


아! 그대는

실체를 갖춘 하느님께 대한 관념을 찾고, 완덕을 구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그대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그대의 고난, 그대의 행위, 그대의 끌림이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외양 아래 당신을 그대에게 내어주시는데,

그동안 그대는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 거처하는데 있어

당신에게 덧입혀지기를 조금도 원치 않는

하느님께 대한 고상한 관념들을 헛되이 추구합니다.



마르타는 좋은 음식을 준비해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 애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당신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좋아하셨듯,

예수님만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원지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심으로써

마리아로 하여금 착각까지 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낸 예수님의 외양에 비추어 그분을 찾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수수께끼 같은 외양을 하고 있어도

당신을 그 자체로 발견할 수 있는 순수한 믿음의 수준까지 영혼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 앞에서 당신을 위장하십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느님의 비밀을 알게 되면,

하느님께서 아무리 위장을 해도 소용이 없고,

영혼은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셔요,

그가 담장 밖에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고 있답니다.”


오 거룩한 사랑이여, 몸을 감추십시오, 달려들고, 고통으로 펄쩍 뛰십시오,

책무에 끌리는 대로 집중하십시오,


영혼의 모든 생각과 척도들을 실들처럼 조합하고,

뒤섞어놓고, 혼란스럽게 하여 끊어버리십시오!


영혼이 난바다로 나가기를,

그래서 더 이상 길, 거리, 오솔길, 빛을 지각도 못하고 식별도 못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거처와 당신의 일상복 안에서, 고독한 휴식 안에서,

기도 안에서, 이러저러한 신심 행위에 대한 순종에서,

고통 안에서, 이웃에 대한 위로에서,

대화와 일거리들을 회피하는 것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난 후에,

그리고 당신 마음을 흡족케 하리라고 여겨지는 

모든 방편과 수단들을 다 시도해보고 난 후에, 

예전처럼 이 모든 것 그 어디에서도 더 이상 당신을 발견할 수 없게 된 영혼이 

어찌할 바를 몰라 말문이 막혀버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노력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영혼이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포기한 뒤로는 당신 자신 안에서,

그 다음에는,

구별도 숙고도 하지 않고,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 거룩한 사랑이여,

모든 좋은 것과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당신을 볼 수 없다니

실제로 이런 잘못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기 위해

당신이 취하시고자 하시는 피조물이 아닌 다른 것들 안에서

도대체 왜 당신을 찾는단 말입니까?


거룩한 사랑이여, 뭐라고요?

당신이 당신의 성사를 위해 선택하신 형상이 아닌

다른 형상 아래서 우리가 당신을 찾고 있다고요?


이들의 현실성이 결여된 변변치 않은 외양이

순명과 믿음이라는 공덕(功德)에 쓸모가 있지 않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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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 


이러한 시련의 결과와 이를 견디어내는 영혼의 행동




우리가 사랑이신 주님을 잃고 슬퍼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소유를 느끼며, 

우리가 지닌 모든 괴로움과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뿌리를 깊이 내린 어떤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애정을 갖게끔 해줍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창세 28, 16). 

라고 야곱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여러분은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은 그분의 현존을 말해 주고 있으며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주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여러분을 동반해 주시고  

여러분 옆에 계시며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분은 여러분과 함께 살고계시는 데도  여러분은 그분을 애써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실재(實在) 안에서 그분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관념(觀念)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완덕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그것은 여러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것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행하는 모든 것 그리고 여러분의 성향들 모두는

여러분이 지나친 상상들에 헛되이 열중해 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신비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상상들에 파묻힌 여러분에게 오셔서 

결코 함께 하려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마르타는 좋은 음식을 요리해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 했지만, 

마리아는 그분을 맞이하여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했습니다. 

주님이 그녀를 속였다 해도 

부활하신 후  마리아는 그분이 계실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그분을 찾았을 때, 

주님께서는  정원지기로 그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분이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위장하심으로써 

리로 하여금 어떤 형상에서도 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순수한 믿음에 도달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이런 비밀을 알게 될 때는  

어떤 위장을 하고 나타나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아가 2,9)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오! 거룩한 사랑이여, 

당신 모습을 숨기시고 우리를 시험하시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체제를 실처럼 뒤섞어 혼란시키시어  끊어주소서.



   비틀거리며 가더라도  

어둠 속에서 길이나 작은 오솔길도 찾지 말도록 합시다. 

전에는 우리가 고독한 평화 중에, 기도 안에서, 여러 신심 수업에서, 

고통 중에서, 우리의 이웃을 돕는 데서, 

사교적이고 사업적인 일들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분을 발견했습니다. 


리는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왔으나, 

지금은 우리가 했던 이런 일들 안에서  더 이상 그분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과 실패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 안에서 그리고 어디에서든지  

그분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선한 모든 것에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내어 주기를 원하는 방법이 아닌  또 다른 길에서,

그분의 성사를 위해 선택했던 것들과는 다른 형상 아래서  

그분을 찾으려 했을까요? 

러한 점들이 납득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믿음과 순명의 가치는 더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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