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론

연중 제22주일(2012,9,2) ▣ 주일강론

은가루리나 2018. 6. 15. 00:07

moowee|등급변경▼|조회 348|추천 0|2012.09.01. 12:02




< 연중 제22주일 > 2012,9,2

 

저는 숫자 중에서 3이라는 숫자를 많이 좋아한다.

한 해를 3등분해 볼 때, 1년 중 벌써 3/2가 지나갔고, 마지막 3/1이 남았다.

 

"마지막" 이라는 말 속에는 "중요하다" 는 의미가 담겨 있다.

소설이나 영화나 노래에도 "마지막(라스트)" 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만든

제목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 신명기는 모세오경 중 제일' 마지막 책'의 이름이다.

申命記의 申字는 "펴다, 늘이다, 거듭하다, 말하다" 라는 뜻을 가진 한자로써,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거듭 강조하여 말한 책이라고 해서

'신명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신명기의 주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명령인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그 후손이 길이 번영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하느님의 계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누구나 하느님의 계명이라는 말은 들으면 먼저 '모세의 십계명'을 떠올릴 것이다.

"무엇은 어떻게 하고, 무엇은 어떻게 하지 말고" 하는 열 가지의 계명말이다.

 

제가 유아세레를 받은 후 어린 시절 주일학교 다니기 전부터도

어머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들어온 말이 '십계명"일 것이다.

요렇게 하는 것은 죄고, 조렇게 하는 것도 죄고 하는 식의 십계명말이다.

 

그다음부터는 주일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이것은 죄, 저것도 죄, 죄죄죄,,,,,,

소신학교에 들어가서도 이것은 소죄, 저것은 대죄, 죄죄죄, 죄죄죄,,,,,,,

 

대신학교에서는 윤리신학 시간에 죄란 무엇인가,

큰 죄를 막기위해 범한 죄는 소죄인가 아니면 무죄인가 등등,,,,

 

사실은 "하느님" 이라는 개념보다 "죄" 라는 개념이 더 크게

제 머리속에 자리를 잡아 저의 삶을 움직여 왔음을 알아차렸던 것은

불과 6년 전, 병을 앓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하면서였다.

 

물론, 죄란 우리가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될 정말 중요한 요소이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그 죄를 조종하는 마귀를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라는 '하위개념'에 너무 얽매이면 또한

하느님께 나아가기 어려운 것이 또한 사실이다.

 

죄는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죄는 분명히 '하느님' 이라는 개념보다는 하위의 개념인 것이다.

 

하위개념에 얽매이면 '상위개념'에는 눈돌릴 겨를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에만 얽매이게 되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라는 것에는

눈뜨기조차 어려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 구성원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히 "하느님을 가르치는 사람들" 의 대부분이 그러한 신앙 교육을 받아왔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주로 그렇게 가르쳐 나갈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시며,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인 줄은 다 알고,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라고는

열심히들 가르치고 있지만 자신 스스로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이 얼마나 되는지 의심스럽다.

 

무엇이든지 가르치는 바를 자신이 확실히 알고 체험하여 가르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에 실력도 없는 학생들이

이 선생님은 실력이 있는 선생이고 저 선생님은 실력이 없는 선생이라고

감히 학교 선생님들의 실력을 판단한다. 그래도 그 말은 거의 들어맞았다.

 

저는 과거에 하느님을 잘 몰랐었다.

그러면서도 제 자신은 하느님을 잘 아는 줄로 알아왔었다.

신학교에서 오랜 동안 하느님을 잘 배워왔다고 생각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하느님을 배워왔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배워왔던 것이다.

하느님은 "지식의 하느님" 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 이신데,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배워왔으니 헛 배워왔던 것이었다.

 

그러니 사제생활 24년 경력의 소유자인 제가 몸에 병이 들어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하느님을 알고 만나기 위한 방법으로 제가 세운

가장 첫 번째의 생활의 목표가 향심기도를 통한 "관상기도" 였던 것이다.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고 만나기 위해서 였다.

관상기도가 하느님을 만나는 최고의 방법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이 번 서울교구의 사제 인사발령에 두 분의 신부님께서 환속하셨다.

그것도 두 분이 다 각각 사제생활 30년, 34년 경력의 소유자이시다.  

 

34년 되신 한 분은 소위 왜 옷 벗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와 서품 동기인 30년 된 신부님은 제가 너무 잘 아는 신부님이시다.

 

그 신부님은 2년 전, 안식년을 얻고 제가 살던 지리산 근처로 들어오셨는데

안식년의 목적이 바로 "관상기도" 였던 것이다.

 

안식년이 1년이 부족해서 주교님께 1년을 더 연장 요청하여

안식년 2년을 마친 얼마 전 옷을 벗으셨던 것이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 신부님은 중학교 때부터

신학교생활을 하였고 신학생시절부터 정신세계에 관한 많은 서적을 탐독하셨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시던 분이셨다.

 

안식년 기간에도 일체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매월 1회 씩 3일 단식을 하셨는데,

그것도 일체 물도 마시지 않는 단식을 하셔서 얼굴에 빛이 날 정도였다.

 

제가 지금까지 대화를 해오던 신부님들 중에서 내맡김의 영성의 탁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시던 신부님이셨다.

 

그런데 신학교생활 12년, 사제생활 30년

그리고 관상기도 2년의 끝말이 "환속" 이었던 것이다.  

 

제가 그 신부님께 드린 말씀이 기억이 난다.

"신부님, 너무 默想, 觀想을 오래하면 '검은 개'가 와서 물어뜯어요." 라는.

(黑 + 犬 = 默)

 

하느님은 조용히 생각하고 바라만 보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당신을 찾아얻고 껴안고 느껴야 하는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저 생각하고 바라보고만 계시겠는가?

 

하느님은 지식의 하느님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율법의 하느님이 아니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의 골자는 십계명 중 "제1계명" 이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골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나머지 모든 계명이 잘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들은 3가지의 성경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에 결론져 있다.

"이스라엘아들어라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는다.

자신이 진실로 사랑하는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

또 그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내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