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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 영성교육(이범주 바오로 신부님 강의) ☆ 이범주 신부님 ☆

은가루리나 2018. 11. 13. 01:35


위무위  등급변경▼  조회 159  추천 0|2018.11.11. 15:10



하느님의 뜻 영성교육 (이 범주 바오로 신부님 강의)  


2013. 10. 18. 18:55



하느님 뜻의 영성 


[이 범주 바오로 신부님의 강의 : 2005년 사제들의 모임에서]



하느님 뜻의 영성이 어떤 것인지 

1년 전에는 책을 읽어도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루이사 피카레타가 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이나, 

‘하느님 뜻의 나라 동정 마리아’를 번역하여 

출간할 때 전부 읽어보고, 

체크를 하고 출판사에 넘겨 출간을 하고, 보급을 하였는데도 

그런데 그 책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자매님이 쓴 책이라 너무 말이 많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했고 좋기는 좋은데 이게 진짜일까? 

상상을 했고, 그래서 그런지 마음에 깊이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해 5월 말에 

제가 이태리에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하느님 뜻의 영성’대로 사는 

「평화의 섬」이라는 공동체에 가서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번역되어 있는 책을 전부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또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야! 내가 이거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 하였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는 옛날에 성인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중학교 때 성인 전들을 많이 읽어 가지고 성인이 되고 싶어 

스스로 ‘바오로야 너는 성인이 되어야 된다’ 하고 

스스로에게 그런 이야기를 자꾸 되풀이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꿈에서 잠꼬대를 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동안 내 나름대로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았다고 생각을 했는데, 

「평화의 섬」 공동체에서 함께 기도하고 

루이사 피카레타에 관련되어 번역된 책을 읽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느님 뜻의 영성’을 조금씩 알면서, 

느낀 것은, 아, 지금까지 내가 잘못 살았다. 헛살았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산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산 것이었다. 


그것을 뼈져리게 느꼈고, 

지금까지의 삶은 하느님 앞에 맛없는 음식, 고약한 냄새나는 음식들을 제공한 것과 같고 

어떤 면에서는 쓰레기 같은 삶을 산 것 같다. 

이제는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뜻의 영성에 대하여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이 영성을 앞으로 전하는데 있어서 

남은 생애를 전부 투자하여도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 


제가 50이 넘어 안식년을 하면서 앞으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면서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50이 넘으면 벌써 인생의 2/3를 살았는데 

이제 살날이 1/3도 안 남았는데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 땅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  


그뜻을 제대로 읽고 이루어 드렸는지 생각을 하고 

마지막 불꽃을 어떻게 태워야하는가 하는 그것을 계속 기도하면서 찾았어요. 


안식년과 사제연수라고 하여 1년 반의 시간을 받았는데 

계속 기도하며 나름대로 힘들게 찾았는데, 

서 신부님 하고 백 제랄드 신부님이 

다른 것은 쉬더라도 ‘평화의 섬’ 공동체에 가서 살아보라고 하여 

그곳에서 한 달 정도 있다가 

북유럽을 여행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곳에서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에 

더 머물러야 하겠다고 두 달을 머물며 피정을 하고 왔는데 

나중에 서 신부님까지 함께 하셔서 대화가 원활해져서 피정이 더 좋아졌다. 

그곳에서 서 신부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면서 나중에 이 영성을 우리 신자들에게 전해야 하겠다고 

그 동안 나온 것들을 읽고 흐름을 정리하여 

마치 성령세미나의 프로그램처럼 대충 만들어보았다. 


살트르 수녀님들께서 피정을 원하여, 2박3일 피정을 했다. 

제가 제 나름대로 이 영성을 살아보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살려고 해 보는데 좋아요. 


작년 9월부터는 서 요셉 신부님하고 최 봉도 신부님, 백 제랄드 신부님과 저하고 

또 책을 번역하는 요한 실비아 자매님하고 

같이 2개월에 한 번씩 모여서 모임도 하고 이 영성을 나누고 

또 앞으로 할 것들을 의논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뜻의 영성’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 

마태오 복음 7,21에 

“나 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34에서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옛날에 이 성서구절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이번에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는 내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을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갈려고 노력을 했고, 

또 많은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했다 


그런데 이 하느님 뜻의 영성은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지를 내가 받아서

내 뜻과 내 의지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그분의 뜻 그분의 의지를 받아서 사는 삶이다.


내가 지금까지, 또 많은 성인 성녀들이 살았던 그런 방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하느님 뜻의 영성’은 최근에 성인품에 오른 이탈리아의 사제 

성 아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치아(1851-1927) 신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들"이라는 책을 검열하여 출판하고 

또 다른 책들을 검열하여 출판되면서 우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루이사 피카레타의 지도신부였든 디 프란치아 신부님은 

작년 2004년 5월 16일에 성인품에 오르셨는데,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를 창설했고 그리고 남자 수도회를 또 하나 창설했다. 


주교님의 명으로 루이사 피카레타의 지도신부가 되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했을 때는 

종이 주인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는 그런 차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아들 딸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은 내 뜻과 하느님의 뜻이 항상 부딪치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뜻은 이렇게 하기를 원하는데 나는 저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 뜻의 영성 안에서의 삶은 범죄를 저지르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한 순간도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매 순간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선물을 받아서 ‘하느님의 의지’를 선물로 받아서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 순간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 뜻을 따름으로써 범죄를 하게 됐다. 


하느님의 뜻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었는데, 

자기의 뜻은 뱀의 유혹에 빠져서 따먹고 싶은 것이었다. 


자기의 뜻대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의 뜻을 따름으로서 인류가 타락하게 되고 

하느님이 주셨던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의지의 은총의 선물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저질렀고, 

구약성서의 흐름을 거치면서 

다시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저지르기 이전의 그런 상태처럼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아서 생활하시는 분 그분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과 성모님이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매 순간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면서 

한 순간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이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하느님 뜻의 나라를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시대 

즉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하기 이전의 시대,

그때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졌다.



그 시대를 다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보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를 하며, 

우리가 그동안 주님의 기도를 많이 바쳤으며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는 2000년대에서 3000년대로 향하는 이 시대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시대를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로 우리를 이끌려고 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러한 새로운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아담과 하와처럼 예수님과 성모님처럼 선물로 받아서 살고 

또 그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그 삶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려주는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택하게 되는데, 

20세기에 있었던 조금 더 멀리 나아가면,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주기 위하여 새로운 사람들, 

이 선물을 받은 사람도 있고 

또 그 선물을 주기 위하여 도구로 쓴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신부님께서 몽포르의 루도비꼬 신부님 이야기를 하였는데 

루도비꼬 성인의 책을 읽을 때 

마지막 시대의 사도들 그 사도들이 기라성 같은 사도들 

레바논의 삼목처럼 다른 나무들과는 큰 차이가 있는 그러한 성덕, 

그러한 뛰어난 성인들이 나타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저는 옛날에 그 책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지금까지 있었던 성인 성녀들 보다 

더 위대하고 뛰어난 사도들이 나타난다고 하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의 영성을 살게 되면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 있었던 성인들 보다 더 위대한 성덕을 닦을 수 있는 

그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 성녀께서 이야기한 예수성심의 나라가 

바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런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며,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완덕에 이르는 길, 

즉 어린이와 같은 작은 길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하고 선행하며 열심히 수덕생활을 해가지고

높은 성덕에 오르는 그것을 이야기 했었는데, 

소화 데레사는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작아지고 낮아져서 아주 어린아이가 되고 

또 완전히 주님께 의탁함으로 해서 

그 아기를 완덕의 정상에 올려주는 이러한 그분의 은총에, 

물론 성덕에 오르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선물로 주시지마는, 

특별히 그분께서 거저주시는 은총으로 높은 성덕에 올라가는 

그러한 길을 이야기 하고 있죠. 


이러한 것들이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선물로 받는데 있어서 

그 선물들을 조금 경험해 보신 분들이 계십니다.


루이사 피카레타와 성 아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치아 신부님을 빼고 

이야기를 해보면 

지금 시복 준비 중인 

가경자 콘치타(마리아 마더 콘셉시온 카브레라)라는 분이 계시는데 

이 분은 멕시코의 신비가로서 1862-1937에 세상을 사신 분이며, 

어떤 경험을 하시는가 하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자신 안에 예수님께서 신비롭게 강생하는 체험을 하시게 된다. 


마치 성령께서 마리아 안에 강림하셔서 

아기예수님이 잉태되어서 현존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사람 안에 실제적으로 현존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의지, 곧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느님의 의지, 뜻을 선물로 받는 다는 것은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사는 삶이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당신의 삶을 재현하시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당신의 삶을 재현하시는 것이다.



바로 콘치타가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자신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면서 당신의 삶을 재현하시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선물을 받았고, 

이분의 지도신부님이셨든 

루이스 마리아 마르티네즈 대주교님(1881-1956)께서도 

콘치타와 똑같은 선물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 복녀 디나 벨랑제(1897-1929) 수도자께서도 선물을 받으셨다.


다음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님(1905-1938)께서는

어떤 선물을 받으셨는지 그분의 전기를 보면, 

자신이 영성체를 하고난 다음에, 

그 다음 영성체를 할 때까지 늘 주님이 현존해 계셨다.



우리는 보통 성체를 영하고 나서 15분정도 지나 빵의 형상이 없어지고 나면 

주님의 현존이 없어진다고 알고 있다. 


늘 자기 안에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사시는 분들은 그런 삶을 살았고 

또 약간의 글들을 쓰셨는데, 

콘치타의 경우는 글들이 아주 많습니다. 


콘치타는 그냥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던 사람으로 

여러 자녀들을 낳고 살았든 사람이며 

책을 쓴 것이 100권이 넘는데, 

일부 번역되어 있는 것이 

‘내 사제들에게’라고 약300페이지 정도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약1/6정도 번역하여 파일로 가지고 있으며 

내용이 너무 좋아 최 봉도 신부님께서 메일로 보내 주시고 계신다. 


저는 그 파일을 보면서 야! 사제직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사제들에게 필요한 책이다.



이러한 분들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로 2000년에서부터 3000년까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로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고자 하신다


그래서 일반 평신도로 결혼생활을 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수도자를 통해서, 사제를 통해서 

또 루이사 피카레타 처럼 동정녀로서 다양한 신분에 있는 분들이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앞으로 그러한 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지금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 뜻 안의 생활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또 그 선물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이런 구체적인 것들은 

루이사 피카레타의 책을 통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루이사 피카레타의 책은 신부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일기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1권부터 36권까지 있는데 지금 9권까지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하느님 뜻의 영성’에 대하여 깊이 있게 보려면 

12권 이후에 잘 나와 있다고 합니다.



1권부터 10권까지는 준비인데, 

현재 1권은 책으로 발간을 했는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보급이 않된다. 


지금 1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는 약1980권정도 있다.



우리가 하느님 뜻의 영성을 위하여 계획을 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 뜻의 영성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전부 번역을 하여 출간을 하자. 


그래서 앞으로 3년 안에 책을 번역을 다 해서 전체를 알고, 

사람들에게 보급을 하자고 생각을 하고 있으며, 현

재 영어와 스페인어로는 전부가 번역되어 있다. 


다른 언어로는 번역되고 있는 중이다. 


루이사 피카레타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까 1400여 가지의 문헌이 나오는데 

그중에는 이미지 같은 것도 올라오며 

지금 굉장히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성을 전하는 공동체가 

이태리에 사제들 공동체(천주성의 아들 사도회)가 하나 있고, 

‘평화의 섬’이라는 평신도 공동체가 하나 있으며 

미국에서는 ‘루이사 피카레타의 센타’가 있는 것으로 알고 

또한 매년 국제적인 모임을 미국에서 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행위의 신적 증식 

이것은 우리의 행위가 하나의 행위로, 

효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아지게도 하고 큰 효과가 있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느님 뜻 안에 살 때 이것이 가능하게 된다.



“인간의 뜻이 나의 뜻과 하나가 되면

나의 생명이 그 영혼 안에 형성되는 것이다.


네가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고 말하고 싶으면

내 뜻과 하나 되어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내 뜻 안에서 흠숭과 찬양과 찬미와 감사로

하늘과 땅을 채우게 된다. 이는 단순하고 쉽지만 굉장한 말들이다."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굉장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내 뜻과 함께 바치는 기도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이에게 미칠 수 있다.


마치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바친 기도처럼

모든 이가 그 효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각 사람은 그 자신의 지향에 따라 그 효과를 받을 수 있다."




내 모든 피조물들의 입맞춤을 하나하나 다 내게 주고 싶거든

나의 뜻 안에서 내게 입 맞추어라.


나의 뜻이란, 창조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의 행위를 원하는 수만큼 많은 행위로 증식 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이와 같이 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입맞춤을 받는 기쁨을 나에게 줄 것이다. 


더욱이 너는 

모든 사람이 내게 불려 와서 내게 입맞춤을 하게 한 것과 

같은 공로를 얻게 된다. 


이와 같은 모든 사람도 얼마나 잘 지내기를 했느냐에 따라서 

이 입맞춤의 효력을 얻게 된다. 


나의 뜻 안에서 행하는 

하나의 행위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선을 내포 한 까닭이다. 


나의 뜻을 그 자신의 뜻으로 삼으므로써, 

신적인 수준으로 일할 수 있고, 

그 거룩한 행위들을 거듭함에 따라 

서서히 나를 닮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완전한 모상으로 변화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나의 거룩한 뜻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일체가 말하자면 진행 중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내가 행하며 겪었던 모든 것도

진행 중인 행위로서 항시 현재적인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면,

나의 고통이나 행동을 

현재의 고통이나 행동인 것처럼 바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나의 뜻 안에서 고통을 받거나 행하는 모든 것은

나의 고통과 행위 속에 녹아 하나 같이 된다.



그러니 영혼이 나에 대한 사랑의 증거를 주고 싶다면

이전의 고통들을 가져올 수 있다.


이전 것이지만 현행중인 행위이기도 하므로

그것을 내게 줌으로써 나에 대한 사랑과 보속을 배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 p63 1917년 7월 7일)




제가 설명을 드려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되어 행하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 영향이 간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과 연결될 수 있고 

그리고 든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기도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대신 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와 희생을 바치신 것처럼,


그리고 내가 하느님 뜻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서 바치는 

그런 희생이나 고통은 

항상 현재적인 것으로 쓸 수가 있다는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제사를 재현하는 것이 미사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그 효과를 항상 되풀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신적인 행위를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고,

내가 하느님 뜻 안에서 하느님 뜻과 하나 되어 행한 행위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행위로 

항상 현재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그렇게 했다고 해도 

지금 현재 내가 고통을 받았던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할 수 있고, 

마치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계속 미사라는 희생제물인 미사성제를 통하여 봉헌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어서 주님의 뜻 안에서 행위를 하게 되면,


“나의 뜻은 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무한하게 하고

인간의 행위를 드높여 영원한 행위로 바꿀 능력이 있다.


나의 뜻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시작이나 한계나 작음을 잃고,

영원과 끝없음과 무한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나의 뜻 안에서 큰소리로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외쳐라.



그러면 내가 영원한 사랑의 선율을 들을 것이고, 

창조되지 않은 사랑 안에 숨은 창조된 사랑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하고 끝없고 무한한 사랑을 

내게 합당하고 나를 만족시키며 모든 이를 보상하는 사랑을 지닌 사람에게서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영원히 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은 

바로 나의 생명 안에서 그 자신의 생명을 기르는 것이다.



 나는 그 영혼이 행하는 모든 것에 나 자신의 형상을 박아준다. 

영혼이 나의 뜻을 그 자신의 뜻으로 삼을 때 모든 일을 하는 셈이 된다. 


곧 모든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그 모두에 대한 보상을 바칠 수 있고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각각으로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내 뜻 안에서 기도하고 사랑하며 보속하고 

내게 입 맞추며 경배하는 영혼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느낀다.


왜냐하면 내 뜻의 섭리는 내 뜻 안에 만물과 만인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영혼은 모든 이의 입맞춤과 사랑과 경배를 내게 준다. 


나는 이 영혼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보기에 

그에게 그 모든 사람에게 주고자 했든 모든 입맞춤과 모든 사랑을 준다.”



굉장한 말씀인데

우리가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과 하나 되어서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대표해서,

그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할 수 있고,

그 효과가 각 사람에게 다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내가 하는 그 행위를 통해서 

모든 이로부터 당신이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받는 것처럼 느끼시고, 

또 모든 이로부터 받으시고 당신이 주시고자 하는 은총을 나에게 다 주실 수 있다.




  ‘그럼 과거에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지금 인간까지 내려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어떤 신부님의 질문)’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하느님께 하셨던 그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러한 시대로 나가는 것이다.(이범주 신부님 답)’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은 최상의 선물이다.


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언제나 모든 행위들 중에 첫째가는 것이며,

모든 행위들을 능가하는 최상급을 지닌다.


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이므로 영원한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은 영혼의 중심이고,

이 중심은 영혼의 깊은 곳에 있으며

이것이 태양처럼 빛살을 퍼트리면서 

정신에는 빛을 주고,

활동에는 거룩함을,

발걸음에는 힘을,

마음에는 생기를,

말과 다른 모든 것에는 능력을 준다.


성사들 자체도 

영혼들이 나의 뜻을 따르는 정도대로 그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 환경 속에는 

언제나 더욱 즐거운 일들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놀랍게 여기며 믿으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창조능력을 의심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원하고 이 능력을 주는 것이 바로 나인 한, 

온갖 의심은 입을 다물게 마련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자유로이 줄 수 없겠느냐? 


그러니 너는 주의를 집중 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나의 창조적인 힘으로 너를 덮어 보호하면서 

내가 너에게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내겠다.”


(기쁜 소식 p44. 1921년 2월 2일 제12권) 




“내 뜻 안에서 사는 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들 중에서 가장 큰 선물이다. 


나의 선성(善性)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언제나 더욱 세차게 분출된다. 


그들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더 이상 줄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주었으므로 

이제 나의 뜻을 선물로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를 소유함으로써 자기네가 지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선물인지를 제대로 깨닫고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다.”


(기쁜 소식 p48. 1924년 9월18일 제17권)  




“내 뜻의 성성(聖性)에는 길이나 문이나 열쇠나 방이 없다. 


그것은 만물에게 두루 퍼져 있으니, 

누구든지 숨을 쉬기 위하여 마시지 않을 수 없는 공기와 같다.


이 공기는 또한,

이를 원하고 자신의 인간적인 뜻을 버리기만 한다면 

마실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이 영혼의 호흡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혼에게 생명을, 

내 뜻의 생명의 효과와 가치를 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이토록 거룩한 삶의 방식을 사람들이 어떻게 좋아하며 원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이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인데 말이다.”


(기쁜 소식 p49. 1922년 7월 16일 제14권)




  우리가 하느님 뜻대로 사는 것이 하느님께 가장 큰 영광입니다.




  “그러나 내 뜻 안에서 사는 삶 의 성성(聖性)과 이것이 내포하는 효과와 가치 

- 내 창조적인 손이 사람을 나와 닮은 모습으로 그리기 위한 이 마지막 붓질 - 

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나의 관심은 온통, 

내가 너에게 말해온 모든 것이 널리 알려지는 일에 쏠려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뜻을 억제하며 나를 삼키려 드는 불꽃을 내 안에 가두어,

사람들이 내게 돌려 줄 완전한 영광을 지연시키기를 원하는 셈이 된다. 


나는 이 글이 질서정연하게 서술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하나의 낱말, 심지어 하나의 쉼표나 대사나 마침표만 빠져도 

나에 대한 빛이 아니라 어둠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내게 영광과 사랑을 주는 대신에 

아무 관심도 없는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주의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빠뜨리지 말고 써라.”


(기쁜 소식 p50. 제14권) 


그래서 루이사가 다 쓴 것이다.




  “내 뜻 안에서, 내 뜻의 힘으로 살기 때문에 

마치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처럼 

참으로 살아있는 나를 각자가 소유하고 있으니, 

나는 그들 안에 신비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실제로 살아 계시는 것이다. 

신비체의 지체니까 그런 정도가 아니라.’ 



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은 과연 하나의 선물이다. 

더군다나 가장 위대한 선물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선물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순간 마다 증가하는 확대로 

꺼질 줄 모르는 빛이며 지지 않는 태양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신적 질서 안에서 하느님께서 정하신 자리 

곧 만물의 왕이라는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




「한없이 나를 사랑하여라!

여기에서 나의 모든 사랑을 가져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나의 능력을 가져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나의 아름다움... 등을 가져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네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네 예수는 더욱 행복해 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 p79 1919년 2월 27일) 




너희 인간들의 전리품이랑은 다 내버리고 

하느님의 것들을 차지하여라.


나는 내 재산을 증식 시키려고 인색하게 구는 법이 없다.

네가 무엇이든지 다 가지기를 바란다.


한없이 나를 사랑하여라. 가져라.

내 사랑을 전부 가져라.


너의 힘에는 나의 힘이 부족하고,

너의 아름다움에는 나의 아름다움이 부족하다.


네가 한층 더 많이 가져 갈수록 네 예수는 그만큼 더 기쁘다.”


(12권 88번의 메시지, 

그전의 것은 18번,16번, 23번 메시지로 여기 저기서 핵심 되는 것만 뽑은 것이다.)




남김없이 몽땅 주시려고 하는 예수님의 사랑, 

당신 자신을, 당신의 뜻을 선물로 주시려고 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지는 거예요.’(질문)


‘방법은 다음시간에 어떻게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답)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을 재현 한다고나 할까요. 


예수님의 신성이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하던 행위를 

예수님의 뜻과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의 의지를 받아서 

그것을 재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내가 그 뜻을 이루려고 막 내 뜻대로 노력을 하는 것은 

내가 유한하기 때문에 내가 행한 공로가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한하신 그분의 뜻과 하나가 되어서 

그분이 나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시게 되면 

똑같은 행위를 했어도 그 효과는 무한한 것이다.




내가, 다른 표현 같은 데서 보면, 

한순간에 행한 그 행위가 지금까지 행했던 모든 그 행위의 가치를 능가한다. 


그런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언가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나의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그러는데, 

나의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려고 노력을 하는데,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행위들의 가치는 유한한 것이다. 


지금까지 행했던 모든 선행을 다 합해도 그 가치는 유한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신성은 무한한데 

신성이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행하는 가치는 무한한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 되어서 행하게 되면 

나의 그 가치도 무한하게 되는 것이다. 


한 순간에 행한 행위의 가치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행위를 뛰어 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영성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런 표현을 쓰는데,

이 지상에서 기거나, 걷거나, 뛰는, 

뛰어서 막 앞으로 나가는 그런 영성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의 우리가 기도하고 노력하고 또 장애가 있으면, 

산도 넘고, 바다도 건너고, 강도 건너고 

그러면서 산전수전 다 겪는다고 굉장히 힘들어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구를 열심히 돌고 뛴다고 해봅시다. 

그것을 몇 달 몇 년 하더라도 지구를 몇 바퀴 못 돌 것이다. 


그런데 만약 빛을 타고 돈다면 똑딱하는 순간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돈다. 

하느님의 신성과 일치하여 한다면 그런 효과가 있는 것이다.




‘지금 왜 이것을 알려 주느냐?(질문)’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답)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으려면

하느님께서 이를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고,

이를 갈망하며 계속 청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삶에 대한 간절한 원의가 일어나도록 하려면,

하느님의 그 뜻 안에서의 삶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으려면,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진정으로 통회하며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을 선물로 주시기 전에,

그동안의 삶을 심판하시고,

죄를 역겨워하며 고의적인 소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자기의 뜻이 무(無)가 되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습관이 될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를 선물로 주십니다.


이를 위해서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모든 것을 

성모님을 통하여 성삼위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과 관련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에 대한 갈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선물로 주고 싶어 하신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네가 내 뜻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성덕을 일으키기 바란다.


내 마음은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영혼이 더 많아지기를 

억누를 길 없도록 열망하고 있다. 


나를 보아라. 


나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나의 고통과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리고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너에게 내 거룩한 뜻을 주기를 원한다. 


누가 이렇듯 아버지다운 사랑이 가득한 나의 (뜻? ) 을 주기를 원한다. 


너희가 나를 기쁘게 맞아 드리면 

자녀들 가운데 있는 아버지로서 내가 함께 머물러 있겠다. 


그러면 우리는 더 없이 큰 일치 안에서, 오직 한 뜻으로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오,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 나를 에워싸고 모여,

바로 나 자신의 뜻으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것이 너무나도 간절한 바람이기 때문에,

나는 얼마나 많이 탄식하고 혼절할 정도로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모른다.”   (기쁜 소식 p16)




“나는 또 왕으로서 백성들 가운데 살기위하여 와있다. 


이 왕은 그러나 너희에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부담스러운 짐을 지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아니고, 말고! 

나는 너희의 뜻과 비참과 나약과 모든 악을 내게 달라고 하려고 온 것이다. 


너희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하며 불안에 떨게 하는 모든 것을 

내 사랑 안에 숨겨 모조리 태워 없애는 것


― 이것이 내 주권(主權)의 실제이다. 


자비롭고 평화스럽고 너그러운 왕인 나는

내 극진한 사랑과 부요함과 행복 및 내 평화와 지극히 순수한 기쁨으로 

너희를 충만하게 하면서, 

나의 뜻을 너의 뜻과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기쁜 소식 p18) 




  “……나의 뜻은 사람들 안에서 살기 위하여 하늘에서 온다. 

그러니 내 뜻을 받아드려 다스리게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쁜 소식 p25 1925년 2월 8일 제19권) 




그래서 이렇게 주님은 당신의 뜻을 주기를 열망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제 인간 편에서 어떻게 응답을 해야 되느냐. 

어떻게 다룰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다만 우리의 뜻을 소유함으로써 

자기 창조주와 닮은 모습, 창조주의 모든 선의 공동소유주가 될 자격을 얻지만, 

우리의 지고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와 공통점이 도무지 없다. 


그러므로 내 뜻의 나라를 땅에 다시 세우려면 

이 나라가 모르는 체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이 무한한 선을 얻으려고 행한 행위들 위에 

내 뜻의 나라가 내려와서 건설되도록 해야 한다.



이 선물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이를 허비하지 않고 드높이 존중하며

자기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실, 나의 뜻이 일체를 지배하는 최상권을 얻게 하려고

제 목숨마저 바치는 사람,

목숨 그 자체보다 이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그것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이 선물에 비하면 

자신의 목숨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사람이 결코 그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나의 뜻을 따르기를 참으로 원하며, 

이를 위하여 무슨 희생이든지 다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자 한다. 


그런 이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속에서 언제나 내 뜻을 선물로 달라고, 

아니면 빌려서라도 달라고 청하게 된다. 


그리하여, 내 뜻을 빌려서가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보일 때, 

그 때에야 나는 내 뜻을 선물로 준다. 왜냐하면, 

거듭해서 청하고 또 청하다보면 

그 영혼 안에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음식’을 빌려 사는 것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 자신의 뜻에 대한 맛을 잃게 된다.” (기쁜 소식 p57. 1925년 12월 25일 제18권)




지금 우리 뜻으로 하는데 맛들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으로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느님 뜻에 따르는데 맛들이다 보면 자기 뜻은 맛없는 음식이 된다.



“미각이 고상해져서 

그 자신의 자아의 소산인 천한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 영혼은 

자기가 그토록 동경하고 열망하며 사랑한 선물을 소유하게 된 

자신을 보면서 

그 선물의 생명으로 살아갈 것이고, 

이를 사랑하며 이에 합당한 존경을 바칠 것이다....” (기쁜 소식 p58 19항) 




“나는 일체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내게 신뢰를 이루고 있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줄 수 있다. 


영혼이 신뢰를 가지고 있으면 

그가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틀림없이 얻기 마련이다.”




루이사 피카레타는 1945년 1월 15일 편지에서 이렇게 말 합니다.


엾은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으시는지,

얼마나 많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시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을 선물로 주시기를 

그분께 간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 p97 38항)




하느님 뜻 안에 사는 삶을 선물로 주시기를 그분께 간청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또 이런 말씀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딸아, 

나의 사랑은 천지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뜨겁게 흘러넘치고 있다. 

그래서 나의 뜻은 사람들에게 이 뜻의 생명을 되돌려주기로 정하였다. 


찬란한 광채에 싸여 나타나서, 더할 수 없는 관대함으로, 

사람들의 공로를 보지 않고 

다시 한 번 이 뜻의 나라를 그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다.

(공로를 보지 않고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를 알고 그 선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거룩함과 빛과 행복의 나라를 다시 간절히 열망하게 된다. 


이 나라를 배척한 것이 인간의 뜻이었으니만큼, 

이 나라를 부르고 갈망하면서 사람들 가운데 다시 오시기를 간청하는 것도 

인간의 뜻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뜻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이유이다.


어떤 선(善)이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면

생활화할 수도 갈망할 수도 없는 것이다.”


(기쁜 소식 p81-82 29항 1927년 10월 30일 제?권)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뜻에 대하여 알고, 갈망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내 뜻을 선물로 주고자 하는 사람에게

선물보다 앞세우는 것은 이 선물에 대한 지식이다.


지식이 미리 길을 닦는다.

지식이 내가 주고자 하는 선물에 대한 계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영혼에게 지식을 많이 줄수록

이 선물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더 커진다.”


(기쁜 소식 p58 19항 1925년 12월 25일 제 18권)




‘그러면 저희들은 그 지식을 조금 아는 것입니까’(질문)

‘지금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답)


‘아직 저희들은 모르고 있죠. 당연히 모르죠.’(질문)

‘지금 강의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답)


‘조금 더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까?’(질문) 

‘하하’(답)




“사람이 내 뜻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

이 뜻의 무한성을 알아차리는 것,

나와 함께 자기 자신을 많아지게 하여 어디든지 들어가는 것,

지상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하늘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

인간적인 방식을 처분하고 하느님의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 


이것은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이상하게 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빛을 향해 정신이 열려 있지 않은 이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하여 

어떤 때는 이 사실을 다른 때는 저 사실을 서서히 알려 줄 터이니, 

그들도 마침내 알아듣게 될 것이다…….”


(기쁜 소식 p38. 1918년 1월 12일 제12권) 




“딸아, 나의 뜻에 관해서 이제껏 많이 말해 왔지만 

내 영원한 지혜가 

네게 단지 그 지식을 주기 위하여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뜻 안에 사는 법과 그 뜻 안에 있는 재산을 알려주고 

네가 이 뜻 안으로 걷는다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주위에서 네 안에 부어주고 있는 수많은 은총에 화답하여라. 


이 화답이 나로 하여금 마음 안에 들어가서 

거기에 내 거처를 잡게 하는 열린 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뜻을 하느님 뜻 안에서 삶을 알고, 

그 뜻 안에서 삶을 사는 훈련을 하고,  

그러면서 물론 그 뜻 안에서 삶을 청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자리 잡고 일하시면서 

당신의 뜻, 당신의 의지를 선물로 주시게 됩니다. 

내용이 너무 많아 가지고 다 할 수가 없구요.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아서 우리가 살기위해서는 

아까 이야기 한데로 그것을 간절히 갈망을 해야 되는데

 그리고 그 뜻 안에서 살려고 하는데 

제가 그냥 제 예화를 들어 어떻게 실천을 하려고 하는지, 

제가 하는 삶을 조금 설명을 해 드리고 이쪽으로 넘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하느님 뜻 안의 삶을 갈망하고, 

제 뜻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러한 봉헌식이라고 할까요, 


미사에서 그 봉헌식을 드렸습니다. 


이태리 있을 때 이태리 신부님이랑 같이 미사하면서 

미사 중에 제 뜻을 온전히 봉헌하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삶을 나름대로 살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미사를 봉헌 할 때, 

저녁에 자다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즉시 제 의지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의지, 당신의 뜻을 주시도록 

그러니까 제 꺼랑 당신 꺼랑 바꿔 주시도록, 이렇게 청합니다.


 그리고 미사에 들어간다면 

미사에 들어가기 전에 성체 앞에서 깊이 몸을 숙이고 기도하면서 

다시 나를 내 의지, 내 뜻을 온전히 봉헌하면서 

그분의 뜻, 그분의 의지를 받아서 미사를 하려고 그렇게 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미사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 제사를 현재화 하는 것이며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그럴 때 

예수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어서 그분의 뜻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 하게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제들과 예수님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으니, 


그런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미사를 봉헌할 때는 

이 세상 모든 사제들이 드리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내가 미사를 봉헌할 수가 있다. 


그런 지향으로,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사제들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살아있는 사제만이 아니라, 

과거에 살았던 사제, 또 앞으로 있을 사제, 그 사제들과 연결되어 있는 예수님, 

그분과 하나 되어서 내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할 때도 예수님께서 (메시지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성체를 영할 때 어떻게 영했는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너희는 모두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하고 

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셨지만 

당신도 그 성체를 영 했어요. 


그런데 그 성체에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때 성체를 영 했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영 했느냐 하면, 

그때 성체, 영성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이 귀한 선물에 대해 

마땅히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하느님께 사랑을 드려야 할 인간들이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영하지도 않고, 

또 영해도 모독하는 그런 것으로, 모령성체를 하기도 하고 

사랑이 없이도 영하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을 보상하는 그런 뜻으로 성체를 영한다. 


그래서 그들이 하느님께 드리지 못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찬미, 감사와 흠숭 이것을 대신 드리는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셨다.


그래서 나도 성체를 영할 때 

그러한 자세로 예수님께서 그때 가졌던 마음가짐과 하나가 되어서 

그 성체를 영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성체를 영하지만 지향이나 폭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루이사의 글에 뭐라고 되어 있나 보면 

예수님께서 나랑 하나가 되어서, 당신의 성체를 영하시는 것이다.



루이사의 책에 보면 루이사가 성체를 영할 때, 

당신과 하나가 되어 있는 예수님께 

저에게서 성체를 받아서 영하듯이 

제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성체를 받아 영해주시도록 

그렇게 청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데 

그 사람이 성체를 영하는 동시에 

그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성체를 영하게 된다. 


그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제 제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저를 통해서 성체를 영해주시도록 

그리고 저도 예수님께서 성체를 영하실 때 가지는 마음가짐과 하나가 되어서 

이 세상 모든 이들을 대신해서 성체를 영하는 자세로 영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신성이 하셨던 

그런 일들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니 저희들은 예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과 동화되기 위하여 영성체를 하게 되는데,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신성이신데 

왜 저희들과 같이 하시려고 하시나’ (질문)



영혼이 깨어 있는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각각 따로따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데, 

사랑을 드리고, 찬미를 드리고,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 일을 대신 해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이상 다른 사람이 영광을 안 드려도 

이미 예수님께서 그 영광을 다 드렸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는 영광의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다 보상되었으니까, 

예수님께서 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의지를 선물로 받아 가지고 있을 때는 

예수님의 의지와 하나가 되어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되풀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조금 더 나아가면 엄청난 이야기를 하신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나 하면,



우리 성인성녀들이 하느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데 

자기 뜻대로 사는 것과 같다.


사실은 매 순간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인간의 삶이 채워져야 하는데, 

그 분이 매 순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데 이 인간들은 매 순간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살지 못하니까 

그 사랑으로 살지 못한 부분은 비어 있는 공간이다. 


그런 비어있는 공간들은 성인성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성인성녀들도 매 순간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까. 

비어있는 그러한 삶이, 

그런데 우리가 지금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 성인성녀들을, 

과거에 살았든 성인성녀들과 예수님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과거에 그리고 또 앞으로 미래에 있을 사람들이 드리지 못하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드리는, 

예수님 뜻 안에서 살면서 그분의 의지를 받아서 

그렇게 그런 행위를 하게 되면, 

천국에 가있는 성인들의 영광이 배가되는, 

그러니까 그들이 원래 천국에서 누리는 영광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한 만큼 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들을 대신해서 하느님께 사랑을 드림으로써 

그들의 사랑이 배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까지도 가능한 것으로, 

그래서 성인성녀들은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영혼들이 있으면 

자기들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선물들이 있으면 

우리에게 모두 줄려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을 내가 받아서 훨씬 더 큰 이익을 돌려주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영성생활하고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신적인 차원,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신성이 하신 일을 우리가 본받는 것이고, 

지금 그것을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재현하는 삶이다. 


이제 이러한 삶을 잘 살기 위해서는 그동안 내 뜻대로 살은 삶을 회개하고, 

내 뜻대로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삶이 도래할 수 없는 것이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죄입니다.


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죄이다. 


인간의 뜻대로 살면서 죄가 시작되었고, 

이 세상의 많은 문제점들은 

자기 뜻대로 살기 때문에 

내 뜻과 상대방의 뜻이 부딪쳐서 모든 문제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매 순간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죠.


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고해성사도 받으셔야 된다고 하니까, 

죄에 대한 성찰을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교만에 대해서, 


“교만은 인간이 하느님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이고, 

가장 무서운 배은망덕인 것이다. 


교만이라는 죄가 그들의 정신을 어둡게 하고, 

마음을 타락 시켜서 절제 없고, 

천박한 온갖 짓에 몸을 맡기게 하는 것이다. 


교만은 은총을 태워 버린다. 


더할 수 없이 불행하게도 교만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이는 흉측하고 악한 애비이므로 

영혼 안에 온갖 탕자들을 곧 다른 모든 죄를 낳기 마련이다.” 



우리 교회의 가르침에서 7죄종의 첫째가 교만이죠. 

그리고 그것이 모든 죄의 뿌리라고 그러죠.





불순결 


 “예수성심의 가장 큰 모욕과 고통을 미치는 죄는 바로 불순결의 죄이다. 

인간은 각각의 악습과 육정에 빠져 나를 모욕하고 있다.


[루이사의 말 ; 

나는 그 역겨운 의식이 인간의 의뢰임을 안다. 

그리고 마치 고약한 음식은 

사람들이 불안전하게 아무렇게나 해치우는 모든 선행이었다.]


너의 음행으로 어찌나 나를 지겹게 만드는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너희가 나로 하여금 달아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나는 순결한 영혼들을 무척 사랑한다. 


불결한 영혼들에게서 달아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순결한 영혼들에게는 자석에 끌려 다가가서 머물러 있게 된다. 


모든 것 속에서 순결, 

사랑에 있어서나 일에 있어서나, 

혹은 영혼이건 육신이건 그 무엇에 있어서나 순결의 결핍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감싸여 흠집을 낸다.”


 



이기심에 대하여, 

조금 전에 메시지에서 이기심이 나왔죠.


“이기심이라는 독이 모든 마음 안에 들어  갔으니

그들은 마치 해면처럼 이 독을 빨아들인다.


전염성이 강한 이 독이 

수도원들과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침투한 것이다.


딸아, 진리의 빛과 덕행의 힘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저속한 미덕에 굴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독 앞에서는 지극히 높고 고상한 덕행들도

부서지기 쉬운 유리처럼 산산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그들은 내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단지 그들 자신의 이익 때문인 것이다.

(우리들이 반성해 보아야하는 그런 부분입니다.) 


기껏해야 그들이 좋아하는 어떤 것과 나를 함께 원할 따름이다. 

이는 내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 


참된 지배는 오직 홀로 다스리는 것이니까. 


각 사람에게 있어서 주된 일은 생각과 말과 활동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남들의 존경과 만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마음을 쓰는 것이다.



영혼이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쾌락비용이나 이익욕구 등 

다른 것으로 흩어져 버리기 시작하면, 

그때에는 신적인 숨결이 영혼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소극적인 사랑이 온 영혼에 두루 퍼지게 되면 

신적인 사랑은 텅 비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간은 지극히 순수한 신적 사랑의 집합체가 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럴 경우 연옥에 가서 그 불의 힘에 의해서 그것을 회복해야 하고, 

그런 다음 사랑이 넘쳐흐르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연옥을 떠나게 된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원수는 쾌락과 재산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다. 


이 원수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교묘하게 파고들어 끊임없이 들볶아대기 때문에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인간을 괴롭히고 우울하게 만들어 모든 행복을 잃게 하는 것이다.



나는 갈바리아에서 이 세 가지 원수를 쳐 이겼다. 


인간에게도 이를 정복할 수 있는 은총을 얻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행동을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은 

나의 은총을 배격하고 열광적으로 그 원수들을 사랑한다.




자애심은 극도로 그 이상적이기에 

우선 그들을 넘어지게 하고 

다음에는 그들 안에 온갖 생각과 우려와 주저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숫한 의심과 두려움을 느끼며 

오늘 싫어하는 것에 내일 거듭 떨어지곤 함으로써 

그들의 삶은 그것이 교묘하게 엮은 일들의 것에 언제나 걸려들어 있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순명의 예리한 시각은 자애심을 죽인다. 

그것은 날카롭고 투명해서 옳지 못한 발걸음을 즉시 예견하고 미리 피한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작은 자녀로서 거룩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근시안적인 자애심은 그런 영혼들을 짓누르면서 

참된 성덕의 길에서 조금도 진보하지 못하도록 가로 막기만 하니 말이다.


(자애심이 성덕의 일부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어떤 직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사 무욕의 정신이 지도자로서 그를 특징짓는 빛이 되어야한다.”





사제들에게 해당되는 성사, 미사성제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 성사들이 그 자체로 거룩한 성사들이 성의 없이 마구 집전되고 있으니 

그분의(루이사가 이야기 함)그분의 성심이 얼마나 미어지는 아픔에 잠기시는지 


허울뿐인 거짓 경견함이나 신앙심이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 보다는 더한 모욕을 끼치는 것 같았다. 


렇다 그처럼 그릇되게 집전되는 성사들이야말로 

지극히 거룩하고 깨끗하고 올곧은 그분의 성심에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심장을 가장 깊이 찌르는 것은 독성적인 미사와 위선이다.

(지향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올바른 지향 없이 습관이나 이득 때문에 행해지는 숫한 선행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심판 날에 그 자체로는 선행인 많은 일들이, 

그들의 지향 때문에 썩어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얼마나 부끄럽겠느냐. 


그들의 행위가 다른 많은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명예롭게 하기는커녕 수치스럽게 할 것이다.


나는 위대한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행해진 지향을 본다.


이 지향이야 말로 내가 주목하는 것이다.

너의 모든 활동이 나의 순수하고 거룩한 지향으로 빛나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네 안에서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에

내 은총의 힘을 아낌없이 쏟아 붓겠다.”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굉장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해야 되는 부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 너희의 전부이니 

너희에 대한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보라 너를 에워싸고 있는 이 작은 세계는 

피조물에 대한 생각과 애착과 망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네가 벗어나지 않으면 

나는 온전히 네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따라서 네 마음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전부 요구하십니다.


 ‘그 시작과 과정과 끝맺음에 이르기 까지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하지 않은 일은 무엇이나 무미건조하고 

아무 공로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지적해 주셨다.’ (루이사의 말)


 


“사랑은 다른 모든 덕행에 광채를 주는 덕행이다. 


사랑이 없는 모든 일은 죽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오로지 그들 자신과 관계있는 것 

곧 그들의 만족과 열정 따위 그들의 마음에 드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 사람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려 할 때에도 

실제로는 다만 그들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설사 덕행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때마다 그 자신이 하느님의 생명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된다. 


반대로 영원히 오직 나만을 생각하면 

그 자신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직 그분만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온 생애에 걸쳐서 어떤 간격도 두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사랑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렇게 항상 사랑하지 않으면

이 사랑 안에 소홀(疏忽)했던 날과 시간과 순간의 수와 같은 수의 빈곳을 

자기 자신 안에 남기거니와

이 빈곳들을 다 채우지 않고서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는 여생동안 갑절로 나를 사랑하거나 죽기 전에 다 끝내지 못하면 

연옥 불의 힘으로 그렇게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끊임없이 그분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순교자들도 연옥에 가 있겠네.’(어느 신부님의 말)


‘하하하’(전체)


더 큰, 아주 큰사랑으로 우리가 사랑을 함으로써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치는 그런 큰사랑으로 사랑을 함으로써 

과거에 사랑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 채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연옥에 가서 정화되어 채워가지고, 

사랑이 넘치는 상태가 되어야 천국에 가는 거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 때도 그냥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랑은 단 한 가지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웃 사랑이라면 

나는 그것을 내게 속한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다.”



예수님께 대한 그런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웃 사랑이라면, 

그건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랑은 

오로지 나를 기쁘게 하기위한 목적으로 시행할 때만 완전하고, 

오로지 그때만 진실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일체를 비운 사람과는 사랑으로 인정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사랑 했을까요’(어느 신부님 질문)


‘그것은 모르겠지만’(답)


하느님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거룩한 사랑은 삶의 서막을 이루는 반면에, 

악한 사랑은 삶의 멸망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아서 

그때 자기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택하게 되면 

그때 선택이죠, 


나를 내 뜻을 완전히 하느님의 뜻에 봉헌하고, 

온전히 그분 뜻대로만 살면 완전히 정화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정화할 것이 없기 때문에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바로 가게 되는 것이다.


 



겸손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시는데, 

루이사 피카레타가 쓴 책을 보면 겸손에 대하여 굉장히 많이 나온다. 

겸손에 대한 것 중에 몇 가지만 읽어 드리면 이렇습니다.



“겸손은 하늘의 은혜에 대한 보증이다.


겸손은 영혼을 안전하게 감싸주기 때문에

원수의 관계가 그 영혼 속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겸손은 하늘의 모든 은총을 안전하게 자리 잡게 하기에 

나는 겸손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늘의 온갖 은혜가 풍성하게 흘러들게 한다. 


나는 무지하거나 가난할지라도 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과 통교한다. 


영혼이 단순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그만큼 더 진리에 다가 간다. 


오, 그렇다. 

겸손은 은총을 부르고 사슬을 끊어 버리며 

영혼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을 쳐부수어 

그를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한다. 


겸손은 

모든 덕행의 맛을 내며 죄의 부패로부터 영혼을 보존하는 소금이다.”


겸손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이게 지금 굉장히 많은데, 

결국 나중에 루이사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끝내지를 못하고 계속하게 되니까 하면서



“겸손은 하느님과 온 천국의 미소이고 온 지옥의 구름이다.” 


“가장 높은 겸손은 어떤 이치도 따지지 않는 것이니,

이런 저런 이유에 대하여 논하지 않고 너 자신의 무(無)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완전히 무(無)가 되는 것이 가장 큰 겸손이다.


“하느님을 가장 현양하는 덕행은 겸손이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인간을 가장 고상하게 높여주는 덕행 역시 겸손이다.”


그래서 겸손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고, 

인내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인내는 순교를 능가하는 덕행이다.


인내는 순교자의 인도자 일뿐이 아니라

굳셈이라는 산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이기도 하다.


인내만이 덕행들의 보고를 열수 있는 비밀열쇠이다. 


인내하여라. 

매사에 있어서 너 자신을 나의 뜻에 맡겨라. 


잠시 동안만이 아니고 언제나 언제나 그렇게 하여라. 


선(善)에 항구 하는 것만이 

영혼이 참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항구함만이 모든 덕행을 함께 가져오고

이것만이 영혼을 하느님과 덕행과 은총에 결합시킨다 해도 무방하다.”


 


통회, 정개, 보속과 관련된 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대죄는 그 죄를 지은 영혼뿐만이 아니라 

그 영혼 안에 있는 덕행들도 모조리 헤치고 죽이는 죄이다. 


소죄는 영혼을 매우 약하고 상처 입게 한다. 

그러니 그가 쌓은 덕행들도 상처를 입는다. 


그러니 죄는 얼마나 치명적인 무기이냐. 

죄만이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죽일 수 있다. 

오, 죄라는 것은 얼마나 추하고 치명적인 것인가. 


정말이지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는 외에도, 

죄의 독성과 그 쓰디쓴 결과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러면 죄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게 되겠기 때문에,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끔직한 괴물을 보듯 피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 루이사는 자기가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기 전에 심판을, 

우리가 각각 성령의 빛을 받아서 나중에 삼 천년기의 절정에 가서 

하느님께서 우리자신을 볼 수 있게 해주신다고 하셨죠. 


루이사도 역시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기 전에, 

자기 자신의 그동안에 살았든 삶에 대한 그러한 빛을(소심판) 받아서 

판단을 받게 됩니다. 


또 그분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일단 나 자신의 허무 속으로 들어가자 


스스로의 모든 비참과 범한 죄들을 다 깨닫게 되었다. 


심판관이신 그리스도의 현존, 참된 현존 안에서 

나는 한낱 나뭇잎처럼 떨기 시작했으므로 

고백의 기도를 바칠 힘도 없을 지경이었다.’



자기 죄를 완전히 고백했을 때, 

통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강조하십니다.



내게 자기를 봉헌한 이들 마저도 

생활을 바꾸어 그 모욕을 근절하기는커녕 

어떤 점이 자기의 결점인가 하는 것을 따지는데 만 마음을 쏟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통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통회와 사랑은 매우 효과적인 두 가지 약과 같아서 

상호 협력적으로 치유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르면 영혼이 완전히 낳는 데도 말이다. 


죄는 영혼 전체를 중독 시키며 추하게 만들어 

그 영혼 안에 내 모상을 사라지게 하는 독이다. 


통회는 이 독을 없애버리고 나의 모상을 되찾게 한다. 

진정한 통회는 해독제인 것이다. 


그리고 통회는 독을 지우고, 영혼 안에 빈자리가 생기게 하기에 

이 빈자리를 나의 은총이 채우는 것이다. 


내가 그 수많은 고난을 당한 까닭을 생각해 보아라. 


그것은 바로 죄였으니 

아주 가벼운 결함도 네게는 무거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인간이 천국을 얻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설사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신의 의지로 하느님을 모욕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모욕하는 짓이란

죄를 짓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루이사가 또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몸서리칠 정도로 지겨워해야 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고해성사의 은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해성사는 

그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면서 덕행도 다시 활기차게 해준다. 


그리고 이일은 영혼의 준비정도에 따라서 크고 작은 차이가 생긴다. 

이것이 성사의 힘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칠성사의 인효성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은 너희의 과거 삶이나 죄, 

온갖 악행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아라. 


나는 그 모든 것을 내 사랑의 불바다에 묻어 태워버리겠다. 

그런 다음 우리함께 새 삶을, 온전히 나의 뜻인 삶을 시작하기로 하자.”


 



금욕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금욕도 영혼 안에 모든 불완전과 갈증을 바싹 말려 없애 버릴 힘이 있다.


고행은 영혼의 악한 물질을 완전히 말리고 성화의 물이 넘쳐흐르게 한다. 

그리하여 지극히 아름다운 덕행들이 싹트게 한다.


눈이 육신의 시력인 것과 같이 극기는 영혼의 시력이다.

그러므로 극기는 영혼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 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휴식은 육신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영혼에는 훨씬 더 필요하다. 


사람은 자기중심에서 쉴 필요가 있는데, 

중심은 곧 하느님이다.


그러나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쉬려면 내적고요가 필요하다.



이 내적고요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격정들의 질서를 벗어나 고요해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해 있지 않는 모든 욕망과 성향과 애정의 침묵을 부과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뒤숭숭해지면 

이는 네가 하느님으로부터 그만큼 벗어나 있다는 표지이다. 


줄 곳 하느님 안에 있으면서도 완전한 평화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적인 영혼 안에는 동요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그 영혼이 자기 자신 바깥에 나가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자기 이탈, 자기 뜻에서 이탈, 

무아(無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마음속에 은총을 부어 주려면 

네가 절대로 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나의 뜻 앞에서 너의 뜻은 사라져야 된다.” 



내 마음속을 정화해야할 필요성과 나 자신의 무아에 관한 것으로써 

흔히 자기 자신의 정화의 필요성과 무아에 관한 말씀인데, 

거룩한 겸손의 덕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이러저러한 말씀을 주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의 뜻 안에는 나약과 격정과 비참이 들어 있어서 

나의 영원한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막이 되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 p74) 


너의 뜻은 나의 뜻 앞에 사라져야한다. 


필요한 것은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는 것, 

그래서 그들의 인간적인 뜻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이 그들의 영혼 속에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시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의 효과와 가치도 함께 주실 것이다. 



내가 한 영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그 자신을 알게 하는 것이다. 

자기 인식과 하느님의 인식은 서로 병행한다. 


바로 너 자신에 대한 집착을 없애야 한다. 


곧 네가 오로지 내 안에서만 살고자 한다면 

너 자신에 대하여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나 자신의 생명을 네 안에 넣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내 안에서 그럴듯한 사람이 되려면, 

언제나 너 자신을 허무로 여겨야 한다. 


그렇게 참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면 

흐뭇한 마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네 안에 쏟아 부어 주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생명으로 살려면, 

생명을 받아서 살려면 우리 자신을 무(無)화시켜야 된다. 


비워야 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나를 비울 수 있다. 

그래야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 수가 있는 것이죠.



“내가 한 영혼에게 주의해서 보는 것은 

그가 자신의 뜻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나의 뜻이 그 영혼을 옷 입히고 거룩하게 하여 

온전히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이 뜻 안에 들어오려면, 

단지 자신의 뜻이라는 돌을 치우기만 하면 된다. 


이 돌은 설사 나의 뜻 안에 있다 하더라도, 

내 뜻에 참여할 수도 그 효과를 누릴 수도 없다. 


「영혼도 나의 뜻 안에 묻혀 완전히 죽어야, 

나의 뜻 안에 그 자신의 뜻이 삭아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참된 거룩함을 지닌 그리스도의 모든 덕행이 되살아남과 더불어 

새로운 신적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뜻이 너희 내면과 외면 전체에 드러나는 표가 되게 하여라. 


그러면 네 안에 다시 무엇이 나타날 때건 

너는 거기에서 참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열망할 수 있는 모든 성덕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성덕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33 1907년 1월 20일)」 



네가 너 자신 안에서 가장 먼저 없애야 하는 것은 너의 뜻이다. 


네 안에 있는 그 나라는 것은 

선(善)을 제외한 모든 것을 탐하므로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그런즉 내 앞에 너의 뜻을 온전히 희생 제물로 바쳐야

너의 뜻과 나의 뜻이 하나가 될 수 있다.”


거듭거듭 자기 뜻을 없애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네가 너 자신을 죽이고 너의 허물을 알수록 

나의 인성이 더욱더 빛살을 내뿜으며 내 덕행들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자기포기는 

인간 본성상 고통스럽고 지긋지긋한 모든 것을 흡수하여 

감미로운 것으로 바꾼다.”



그래서 이제 자기가 완전히 소멸되면 

어떤 것들이 자기에게 와도, 

그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고통도 기쁨으로 바꿀 수가 있게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일치에 도달한 사람은 

또 하나의 경지인 자기 소멸의 경지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내 현존 안에서 영혼은 합당한 자리에 있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이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허무 안에 낮추어 진다 


그러면 신성이 강물 같은 은총을 그에게 쏟아 부어 그 안에 잠기게 한다. 


내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자기 자신을 상당한 인물로 여기는 자는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이고,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여기는 사람은 모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자기를 무(無)화시키고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 맡기고 

그 분의 뜻을 주시도록 청하는 것이 여기 이제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 까지만 하고 끝냅시다.



“너희가 너희 뜻을 내게 준다면, 

모든 일을 내가 말한 대로 하는 셈이 된다.


‘우리 뜻을 달라는 것 이예요.’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해줌과 동시에 너희도 행복하게 된다. 


나는 나의 뜻이 너희 가운데서 다스리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 하늘과 땅이 너희에게 미소를 지을 것이고, 

내 천상엄마께서 확실히 너의 어머니와 여왕님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내 뜻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져올 크나큰 선임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그분은 내 열망을 채우시며, 

내 눈물을 그치게 해 주시려고, 

게다가 너희를 참 자녀들로 여기며 사랑하기 때문에 

뭇 백성들 가운데로 다니시면서 그들을 준비시켜 

내 뜻의 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이시도록 하신다. 


그분은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 시켰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처럼 큰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그들의 영혼을 준비 시키는 일을 

그분에게 그분의 어머니다운 사랑에 맡기고 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바로 하느님 뜻의 나라를 준비시켜 주시는 분임을,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제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받기를 원하며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이 뜻을 선사하고자 하십니다. 


사람이 권리와 자기 뜻의 사용을 

모두 하느님께 맡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루이사의 글에 다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나의 사랑은 매우 크기 때문에 

한 영혼이 그 자신을 내게 바치기로 결심하면 

나는 풍부한 은총으로 그를 감싸고 어루만져 주며 격려하고, 

그가 자기 내면(內面)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또한 그가 느낄 수 있는 은총을 주며, 

호의와 영감을 주고,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준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58 1916년 5월 25일)



그래서 이제 루이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역시 감사해 마지않으면서 

내게 바라시는 모든 것에 순종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수님과 성모님께 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성모님께 대한 봉헌,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께 대한 봉헌 

이것은 여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 명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사람처럼 잠자코 너 자신을 내 팔에 맡겨 보아라,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바쳐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일부터 시작해야한다.




「가장 아름답고 내 마음에 드는 행위는

내 뜻 안에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이다.


사람이 그 자신의 실재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기억할 정도로 맡기는 행위 말이다.


나의 뜻 안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은

그 자신의 실재를 없앰으로써 하느님의 실재를 되찾게 한다.


그러므로 그 영혼은 자신을 내게 맡김으로써

내가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는 셈이기에

나에게 그만큼 더 큰 영광을 안겨 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33 1907년 6월 23일) 


 


「중요한 것은 오직, 나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주고 

모든 것 속에서 내 뜻을 행하는 것임을 사람들은 알려고들 하지 않는다. 


자신을 온전히 내준 후에는 신적인 행동이 된다. 

곧 나의 것이 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떠날 각오와 채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40 1912년 3월 20일)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테니까 

너는 그저 네 뜻을, 네 의지를 내게 주기만 하면 된다. 


네게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너는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네 의지력을 나의 뜻에 맡기기만 하면 

내가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 


「나의 첫 열매인 내 뜻의 자녀들이 

이제는 인간적인 분위기에 싸여 살지 않고 

신적인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을 보면서 

내 입술에 띠게 될 미소 말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86 1921년 1월 7일) 


 


내 뜻의 자녀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겠지만, 

나의 피앗 안에서 모든 것을 내게 줄 것이다. 


얘야, 너의 마음을 내게 다오, 

것은 나의 순응(順應)이다. 


네 마음을 내게 주고자 한다면 

설사 사랑이 없는 냉정한 마음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보답으로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을 주겠다. 


그 마음을 내 마음의 열기로 뜨겁게 타오르게 하여 

네 안에 있는 세속적인 애착을 모조리 잘라 버리게 해주겠다. 


나에 대한 신뢰와 맡김은 

영혼을 빛나게 하고 다른 모든 격정들을 바로 잡아준다.”




주님께 우리를 몽땅 맡기는 것, 

우리 뜻을 온전히 맡기는 봉헌, 

이것이 아주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자기를, 자기 뜻을 봉헌하고 주님의 뜻을 주시도록 청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조금 더 부언을 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 뜻 안에서 살기 위한 세 단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그런데 다만 맡기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영혼 자신에게 가장 좋고

내게 영광을 돌리는데도 가장 좋은 방법은

항상 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


이 사실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뜻 안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은 

나의 뜻만큼이나 고상하고 신성하며 끝없고 무한하다. 


그러한 행위들은 나의 행위들과 유사한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무(無)를 발견한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기 때문에 

전부이신 존재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를 온전히 비운 채, 

나와 함께, 내 안에서, 나처럼 활동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공로나 이익을 보는 대신, 

나를 기쁘게 하는 일과 

자기의 모든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내게 넘겨주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며, 


내가 그 행위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따위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큰 영예를 간청할 때에도 오직 하나의 관심사밖에 없으니, 

바로 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69 1917년 12월 6일) 




그래서 우리가 봉헌을 하고 나서 

온전히 그분 뜻만 생각하면서 살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내 뜻 안에서 새로운 행위를 할 때마다 

영혼은 새로운 힘과 지혜와 사랑과 신적인 거룩함을 얻고, 


이와 같이 신적인 특성들을 획득함에 따라서 

그 자신의 특성을 깨끗이 포기하게 된다. 


영혼이 하느님 뜻 안에서 행동할 때면 

그 자신의 인성은 말하자면 정지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70 1918년 3월 26일) 



네가 언제나 나의 뜻을 행하면 빛을 먹으며 자라게 된다. 


너의 고행과 금욕과 고통이 

네 영혼을 위한 빛의 양분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뜻이 참 생명을 줄 수 있는 오직 하나인 본질적인 음식이기 때문이다. 


빛을, 계속 빛을 먹으며 자란다면 

네 영혼에 배여 있는 결점들이 끊임없이 정화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뜻 안에서 하나하나 행위를 할 때마다, 

계속 우리가 정화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이 될 때 나의 뜻 안에 사는 영혼도, 

다만 한 번의 미사가 아니라 모든 미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제물이 된다. 


나의 뜻 안에 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제병들 안에서 축성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나의 뜻을 떠나지 말아라.”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70 1918년 3월 27일)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서 살 때,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살 때, 

주님께서 각 미사에서 제물이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은 성덕의 절정이며, 

영혼 안에 끊임없이 은총이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은총들이 있는 영혼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하느님 자신이 황홀해 하실 정도이다. 


천사와 성인들도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는다.”


 


이런 하느님의 뜻 안에 사는 은총을 받고 싶죠(질문). 


예(전부).



하느님의 뜻 안에 살기 위한 세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국제모임, 

하느님 뜻의 영성에 대한 국제모임에서 나온 자료에서 뽑은 것입니다.

그냥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1 단계 : 


첫 단계로 하느님 뜻 안의 삶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이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이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그리고 지난날 자기 뜻대로 살았든 삶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잘 준비하여 자신의 의지를 봉헌 할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신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과 주님의 뜻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봉헌 준비로 하느님 뜻 안의 삶에 대한 글을 읽고, 

여러 날  깊이 기도하며 미사에 참례하고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미사 중에 봉헌식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봉헌한 날부터 죽는 날까지 

계속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 거듭 봉헌함으로써 

모든 환경 속에서 더욱더 하느님의 뜻을 받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하느님 뜻 안에 살고자하는 결심을 새롭게 하며 기도하고, 

하루 종일 하느님 뜻에 자신을 열고, 

그분의 뜻을 받아 매 행위를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뜻이 각 행위의 주인이 되어 주시도록 청하거나, 

그분의 거룩한 의지를 빌려주시도록 청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 안에 온 존재와 모든 행위를 봉헌하고, 

그 뜻대로 사는 훈련은 

인간적인 뜻이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죽이고 비우게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버리라는 말씀을 실천하게 하여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 8,34)라는 말씀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2 단계 : 


둘 째 단계로 하느님 뜻에 관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 그 진리를 받아 드리고 묵상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뜻에 대한 진리를 더 많이 알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고,

영혼 안에 그 진리를 받아 드릴 수 있는 공간을 넓혀줍니다.


‘봉헌을 하고 나서 하느님 뜻과 관련된 말씀을 듣고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느님 뜻 안의 생활에 관한 무수한 진리를 묵상하고, 끈기 있게 실천하면 

그 진리들 안에 내포된 생명과 행복을 흡수하게 됩니다. 


영혼이 이 진리들을 알고 실천하여 성장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모든 행위의 가치도 성장합니다.


‘하느님 뜻 안의 삶은 그냥 하나가 아니고, 아홉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 단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하느님 뜻 안의 삶의 가치가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살기 위한 세 단계를 거치고, 

하느님 뜻 안의 삶에 들어가면 아홉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 대한 삶의 진리들은 루이사의 글, 

11권에서 19권에 대체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책들은 놀랍게도 교회의 출판 허가를 받아서 출판되었고 

우리가 신뢰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첫 열권을 읽고 진지하게 추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책들 안에는 거룩한 생활의 기본적인 원칙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기초입니다.


‘그래서 1권부터 10권까지도 무시하시면 안된다. 

기초가 되니까. 무조건 처음부터 읽어야 된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은 그분 인성의 자유의지와 

그분의 신적의지가 완전히 일치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이 지상 삶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관한 진리인 하느님 뜻 안에 사는 삶의 효과와 가치,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을, 

영원히 이를 배우고 창조주를 닮는 방법 등의 진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 진리들을 받아 드리고 묵상하고 실천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 동정 마리아의 위대함과 

말씀강생의 신비, 주님의 우주적 구원계획과 그분의 고통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 뜻 안의 삶, 

원죄의 무게와 무수한 결과, 

제한적인 죄에 포함된 악습들,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인간의 배은망덕, 

매순간 효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여 사는 방법 등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하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루이사의 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제 3 단계 : 


셋 째 단계로 하느님 뜻 안의 삶에 대한 무한한 가치를

깊이 이해한 영혼은 이를 소유하고자 더욱 힘쓰게 됩니다.


영혼은 하느님의 뜻에 대해 창조된 모든 피조물 안에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알고 

이 사랑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미와 사랑을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은 

하느님과 하나 된 삶이 주는 선물을 음미하고 차지하는 가운데 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여기 앞에 나무가 있다. 


나무나 꽃이나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주신 사랑의 선물이죠, 

그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는 싸인(표지)인 것이거든요, 


그래서 만물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에 응답을 하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그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사랑을 드리는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느님과 하나 되어 사는 삶이 점점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영혼은 루이사가 쓴 ‘수난의 시간들’이라는 책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수난에 참여하고 

함께 죄인들을 위한 보속을 바치는 훈련을 할 수 있고, 

(지금 이 책으로 성당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24시간으로 나누어 묵상하는 이 책의 내용들은, 

매일 한 시간의 수난 내용을 차례로 반복하여 바치는데 

매우 효과적인 묵상과 기도입니다. 


이 책을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고,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위한 보속을 바치는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느님 뜻의 나라 동정 마리아’라는 책을 통하여 

하느님의 의지 안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신 성모님과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실천하여 

거기에 포함된 무수한 선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와 구원과 성화 사업에 대한 24개의 묵상으로 이루어진 

‘하느님 뜻 안에서의 영적순례’라는 책을 통하여 

든 피조물과 모든 일 안에 있는 

하느님의 속성의 현존과 하느님 뜻과 사랑을 발견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 그분의 뜻을 발견하고 배울 수 있다.)



이 세 가지 단계는 한 단계가 끝나고 다음 단계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 단계는 하느님의 의지를 선물로 받기까지 

함께 나가며 점차적으로 하느님 뜻 안의 삶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가능한 것을 먼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묵상을 하고 

‘하느님 뜻의 나라 동정 마리아’를 가지고 묵상하면 좋은데, 

제가 여기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 하면, 

제가 이 책을 출판하기 전에 쭉 읽어보고 

또 여기에 있는 대로 기도도 해보고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참 이점에 대해서는 설명을 잘 하신 것 같은데, 

그런데 이것은 상상으로 쓴 것 아닌가하고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왜 이렇게 길어, 

사실 저 한태는 별로 와 닫지 않았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그렇지 않고 와 닫으신 분들도 계신데, 

여기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정말 우리들을 위해서 수난하기를 원하시고, 

그런 것들이 나오는데, 


이글을 쓴 루이사가 많은 사람들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고, 이런 내용들이 나오는데 

이것, 제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느님 뜻의 영성에 대하여 알고 나니까, 

하느님 뜻 안에 들어가면 그 모든 이들을 대신해서 할 수가 있거든요. 


그것을 알고 나니까, 

아, 이게 그래서 이랬구나, 하고 이 부분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했던 강의를 들은 분들은 

이 책을 보면 그전과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제 들은 메시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을 열망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배웠느냐 하면,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멀리 해 달라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이렇게 하기 싫은데, 


고통들은 피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수난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가능하면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또 인류구원을 위해서 큰 유익을 가지고 오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고난을 열망하시는 모습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들을 이해하고 나니까 이 내용들이 새롭게 다가 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나서 한번이 아니라 두 번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고, 

중요한 부분은 엔드라인을 하고 제가 핵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제가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처음 보면 잘 이해를 못할 것이라는 중요한 요점들을, 

다른 부분들과 다른 활자를 만들고, 

또 노인들이 보시고 잘 안 보인다고 해서 굵은 활자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의 나라 동정 마리아’도 

그것 하느님 뜻대로 살면 좋은 것인데 


그 부분이 만일 루이사의 생각이고 

하나의 상상으로 한 것이 아닌가하는 그러한 부분들이 많았어요. 


이 글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보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어떤 영적독서를 할 때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이나 이해의 정도, 이런 것들이 성장하면서 

그런 것들이 이해가 되므로  

처음 볼 때에 이것이 뭐 이래하고 끝내면 안된다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 삶에 대하여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하느님 뜻 안에 생활을 할 때 기도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시작할 때든지 나를 부르며 기도하여라. 

언제나 나의 현존 안에서 나와 함께 일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하면 일을 완전하게 끝낼 수 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네가 항상 이렇게 한다면 더없이 깊은 겸손을 얻게 될 것이다.”


(천상의 책 제1권 p42 7항) 


 


루이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나를 기도 안으로 끌어당기셔서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수많은 빛과 은총들에 대한 관상기도에 

온전히 몰입하게 하셨기 때문에 

나는 이전보다 더 깊이 매료되어 피로나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었고, 

오래도록 줄곧 기도 안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천상의 책 제1권 p50 11항) 




“일속에 떨어지게 할 때면 

여러분도 기도로 으르렁거리며 죄지을 기회를 피해야합니다. 

그러면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것입니다.”


(죄지을 기회를 피하는 것도 기도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엇보다도 당부하는 것은 항구한 기도이다. 


설사 네가 죽음의 고통을 겪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평소에 늘 바쳐온 기도들을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된다. 

(천상의 책 제1권 p71 15항). 



거룩하고 순수하고 천상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내게서 나가고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내게 간청하는 것이 

내 안에서 취하는 것이 아닐 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에게서 나가는 모든 것은 하느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뜻대로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에 늘 응답해 주신다고,

1요한 5,14에서 말씀하신다.)




‘소리기도(염경기도)가 통교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면 

하느님과 영혼 사이의 대화를 유지시키는 자양분의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이 내적 묵상이라고 말한다.’ 


― 루이사의 이야기입니다.




“네가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을 가지기 바란다. 


언제든지 나하고 대화를 나누기 위한 영혼의 끊임없는 노력은 

그것이 마음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입으로건 혹시 단지 의향 만으로건 

그 영혼을 내 앞에 매우 아름답게 단장해주기에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곡조가 내 마음의 가락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혼과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의, 

하느님 뜻 안에서 생활한 기도를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의지를 받아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생활화된 기도를 하도록 힘써야합니다.


아침에 잠을 깨면서 잠 잘 때까지 계속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봉헌하면서,

하느님의 의지를 주시거나 그 의지를 빌려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의지를 받아 그분의 뜻대로 사는데 도움이 되는 기도문을 사용하여 

일상생활에 기도를 하면 하느님의 의지를 받는데,

그분의 뜻을 받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기도문들은 

하느님의 의지와 하나 되어 기도하는 훈련을 하게 함으로써

하느님 의지 안에 삶, 하느님 뜻 안에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기도문들이 조금 있는 데요, 

이 기도문들은 일부는 번역이 되어 있는데 아직 책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생활화된 기도란 생활 속에서 예를 들면 

식사 전후기도 같은 것도, 하느님 뜻 안에 사는데 도움이 되는 기도로서, 

일상적으로 하는 하느님 뜻 안의 삶으로 들어가는데 도움을 주는 

그러한 기도문들이 있습니다. 


성체조배 할 때, 미사 전에, 영성체 전후에 

이럴 때하는 기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 살기 위해서는 

분의 말씀들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네가 내 말을 간직하며 존중하기 바란다. 


내 말은 내가 영원한 것처럼 영원하고, 내가 거룩한 것처럼 거룩한 까닥이다. 


너 자신을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으로 여기며 

나의 모든 가르침을 너의 정신 안에 모아들이고 마음 안에 간직하기 바란다. 


그러면 때가 왔을 때에 그 모든 가르침이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서 

네가 그것을 활용하면서 실행에 옮길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 뜻 안에 삶에서는 

하느님 뜻과 관련되는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사는 것이 그것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들은 그것이 알려지는 정도만큼 

내 뜻 안에 살게 될 영혼들의 수준을 다양하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19 1937년 11월 7일)



하느님 뜻 안에 삶에 대한 진리를 아는 정도에 따라서 

그 안에 삶의 수준이 결정된다. 


알아야 우리가 청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오, 사람들이 나의 뜻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될 때에, 

참으로 많은 신적 비밀이 그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22 1936년 12월 8일) 




"그렇다 

나의 ‘피앗’에 대한 지식이 이제 

태양과 같이, 다시 천둥과 같이, 

그리고 폭발하는 힘과 드센 바람과 같이 나타나서, 

똑똑한 사람이나 무지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까지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있을 일을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또 번개같이 그들의 마음을 치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그들을 내리누를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지식을 얻게 되는 선익 안으로 들어서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세상에 참된 쇄신을 가져올 지식이니,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정복하기 위해서 온갖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기쁜 소식 p82 29항 1927년 10월 30일 제?권)




루이사는 1942년 5월 26일 편지에서 이렇게 말 합니다.


“하느님 뜻의 생명은 

이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따라서 우리 안에서 성장하는 까닭이니,

사람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선이라면 소유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알려짐과 더불어 우리의 이해력을 넓히셔서

우리 안에 그 궁전을 이룩하십니다.


따라서 

이 뜻은 우리 안에 그 자신의 거룩함과 아름다움과 사랑을 증대시키시며,

우리의 영혼 안에 이 뜻의 신성한 바다들을 형성하십니다.


마귀들이 온갖 술책을 써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환히 빛나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 뜻이 알려지기만 하면 

우리 안에 그 자신의 자리를 잡으시고 모든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이 하느님의 뜻이 행하는 일에 동의할 따름이니, 

이 뜻에 자리를 내어 드려서 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뜻으로 하여금 

걸어 다닐 수 있는 발과 일할 수 있는 손과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드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쁜 소식 p94, 95)



지식은 분명히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아는 정도에 따라서 

그것을 인정하고 갈망하고 사랑하고 따라서 소유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소유하려는 보석이 그야말로 보배로워지는 것은 

이 사람이 그것을 구입하는데 

얼마나 비싼 값을 치러야하는지를 알게 되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들려주신 하나의 실례거니와 

보석은 변함이 없으나 그것에 대한 사람의 앎이 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도 그러합니다. 


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알려 주시려고 작정하신 만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의인들과 성인들도 하느님의 뜻을 인식하고 사랑하고 소유한 만큼 성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시간적인 순서로 보더라도 꼴찌는 행복합니다. 

첫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기쁜 소식에 나와 있는 저자, 편집하신 분의 글을 따온 것인데, 

지식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소중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알아야 우리가 청할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아야 더 갈망을 하게 되고, 

그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그것을 차지하여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살 때 

우리는 예수님과 일치한 생활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인성과 일치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식사하기 바란다. 


음식이 네 몸과 하나 되듯이, 

너의 사랑도 나의 사랑과 하나가 되게 하여라. 


그러면 내 성령이 내려와서 네 영혼과 결합하리니, 

네가 행하는 모든 일을 내 사랑으로 성화시켜 줄 것이다.”


(천상의 책 제1권 p50 11항) 




제가 이 성서구절로 살은 경험이 있습니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식사를 받은 너, 

그리고 사랑으로 식사를 하는데, 

이 구절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식사, 음식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우리가 먹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만들어 준 음식들은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신 것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에게 사랑의 선물을 줬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감사를 드리지 않고 막 먹는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식사하기를 바란다는 이 구절을 기억하면서 살 때,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음식에 감사드리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느님 뜻 안에 들어가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께서 사랑의 선물을 주신 것에 대해서 고맙다고,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며 

이러한 사랑의 고백을 하면서 식사를 하게 되면, 

지금까지 식사를 했던 습관이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이 구절들을 기억하며 살다보면 

꼭 식사 때만이 아니라 

걸을 때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 감사로 걸음을 옮길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다리를 하느님께서 주셨지만 

그 다리를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사랑의 선물로 주신 것인데 이것을 기억하면서 살다보면 

걷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그분의 사랑에 응답을 하는 것이다. 


다른 것도 모두 이렇게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너 자신을 기억하지 말고 인정하지도 말아라.

그 대신 나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너 자신을 무시하노라면 홀로 나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네가 너 자신을 잊고 없앨 정도가 되면 나를 아는 지식이 진보하게 되고 

다만 내 안에 있는 너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를 실천 하노라면 

네가 너의 정신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의 정신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너의 눈으로 보지 않고, 

너의 입으로 말하지 않고, 

너의 심장으로 고동치지 않고, 

너의 손으로 활동하지 않고, 

너의 발로 걷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나의 눈으로 보고, 

나의 입으로 말하고, 나

의 심장으로 고동치고, 

나의 손으로 활동하고, 

나의 발로 걷게 될 것이다. 


영혼 자신의 기원에 밀착되어 있지 않은 모든 것, 

자기 존재의 출발점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을 멸하여 

(無)로 환원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혼이 자기의 기원으로 돌아가서 

홀로 하느님 안에 있는 자신 만을 인정하고 

스스로 창조된 목적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본연의 꾸밈없는 방법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당신의 삶을 재현하시는 그런 것이 되는 것이다.



“네가 움직이고 숨 쉬고 일하고 먹고 자고 할 때마다 

무엇이든지 나의 인성 안에서 하는 것처럼 하고 

무슨 행위이든지 내게서 오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너도 내게서 나의 행위를 받겠다는 의향과 태도로 모든 것 속에서 행동함으로써 

너 자신 안에 모든 사람을 받아드리며 담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너의 행위가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두루 퍼지게 될 것이기에 

다른 모든 사람이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게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일을,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 아무것도 못 받아도 

나한테서 모든 것을 다 얻게 된다. 


그래서 이게 지금까지의 영성생활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혼이 자기를 잊으려면 

그가 하거나 해야 하는 모든 일을 마치 

내가 그 영혼 안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기도하려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자 하시니

나도 그분과 함께 기도해야지.’ 하고 말할 일이다,


일을 할 때도 ‘예수님께서 일하고자하신다.’ 하고 말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걷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시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즐겁게 지내고자 하신다.’ 등 


그릇된 일을 빼고는 삶 속의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일이다.


이와 같이 해야 비로소 영혼이 자기 망각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 뜻에 군림 p43 1912년 8월 14일)


(자기망각을 얻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신성하게 하였다. 


그 모든 행동을 사용하면서 각 행동에 신적인 공로를 부여한 것이다. 


나의 수난이 그들을 구속했다면 

나의 숨은 생활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심지어 극히 사소한 행위들까지도 

신적인 공로와 무한한 가치로 끌어 당겼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하는 어떤 행위, 여러분이 하는 어떤 행위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30년간 숨은 생활을 통해서 

그 행위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대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런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영광을 드려야 하는데, 

영광을 못 드리죠. 


그분에게 사랑을 제대로 못 드려서, 


그런데 그분께서 대신 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내가 지금 하는 행위를 성화 시켰다. 


우리가 지금 주님과 하나 되어서, 

그분의 뜻과 하나 되어서 그분의 뜻 안으로 들어가서 

그분이 했던 그런 마음가짐으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되풀이, 

예수님께서 이미 과거에 했던 것을 

우리가 되풀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뜻 안에서 삶이란 것이.



“인간은 신성의 광채가 완화된 내 인성 앞에 옴으로써 

순수하고 거룩해지는 은혜를 받고 

나의 신성화된 인성 안에서 그 자신을 신성화시키는 은혜도 받는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이렇게 생활할 때 

우리 자신이 신성화되고 거룩하게 되어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우리가 똑같이 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과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


“그런즉 너는 주의를 기울여라. 


항상 나의 뜻 안에 눈길을 두고 있으면 

나의 뜻 안에 사는 삶의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될 것이다.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내게 이끌어 내는 것은 

영혼이 그 자신의 뜻을 나의 뜻 안에 대치하는 것이다. 


너희 행위들 하나하나가 나의 뜻과 일치하도록 주의하여라. 


‘따라서 네가 나의 뜻과 일치하여 

극히 단순한 행위를 할 때에도 나에게 완전한 사랑과 찬미와 감사와 보속의 행위를, 

여타 모든 것의 완전한 행위를 내게 주게 된다...


(하느님 뜻에 군림 p51 1914년 10월 29일)’



그러니 흠 없고 완전한 행위들만이 

불안전한 행위를 할 줄 모르는 완전한 존재에게 영예와 만족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오직 나의 뜻 안에서만 

그처럼 완전하고 흠 없는 행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 뜻에 군림 p52 1914년 10월 29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신성으로 우리 모든 인간과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찬미를 드리고 그랬다고 그랬죠. 


우리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그 행위들을 다 성화 시키신 것이다.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행위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당신이 대신 함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그분이 받으셨어요. 



“그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우리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그분께서 갖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내가 생활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이미 그분이  행했던 행위, 

내가 지금하고 있는 행위를 예수님께서 행했던 그 뜻과 하나가 되어서 하는 것, 


그러니까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위이고 그것은 완전한 행위이다. 


그 완전한 행위이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느님께 완전한 존재인 그분께 영예와 만족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불완전한 우리 인간, 죄 많은 인간, 

여러 가지 이기적인 동기,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그런 행위, 그러한 것들이 섞여있는 행동은 

하느님께 완전한 사랑과 찬미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완전한 행위를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인간은 유한한데’(질문)  


‘우리 인간의 육적인 뜻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데 

하느님의 뜻이라는 선물을 받고 하느님의 뜻 안에 들어가게 되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리가 이미 

예수님께서 당신 신성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행했던 그것과 하나로 결합되어서 

하느님께 봉헌하기 때문에 

그것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답)



“나는 내 뜻 밖에서 행해지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나의 뜻이 너의 생명, 너의 죽음, 너의 모든 것이 되어야한다. 


「모든 것은 나의 뜻을 최종 목적으로 해야 한다. 

영혼이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모든 것을 행한 것이 된다. 


많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 뜻 안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행위가 나의 뜻 안에서 이루어 질 때에, 

나는 내 뜻의 그 행위를 통하여 

나의 생애와 업적과 말과 생각과 다른 모든 것이 반복 되는 것을 느낀다.」


(하느님 뜻에 군림 p53 1915년 6월 17일) 



영혼이 나의 뜻 안에 있는 정도에 따라서 

나의 거룩한 지상 삶을 그 정도만큼 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느님 뜻에 군림 p59 1916년 9월 8일)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안에 어느 정도 있느냐에 따라서 

어느 정도 예수님의 지상생활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정해지는 것이다.



“내가 성체성사를 제정하고 영성체를 통하여 

사도들에게 나 자신을 내주었을 때에, 

아버지의 뜻 안에서 나 자신에게도 이를 주었다.

(예수님께서 영성체를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모든 것을 보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 무한성이, 

만물과 만민 안에 두루 편재하는 속성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이를 싸안고 그 모두에게 성체로 나 자신을 내주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많은 사람들이 이 성사에 참여하지 않음을 보고, 

또 그들이 이 생명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영성체를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아버지를 모욕하는 거냐?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는데 내가 하느님의 선물을 거부하니까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이 된다.)


나는 모두가 영성체를 한 것과 같은 영광을 아버지께 드렸다. 


즉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해서 

그 거룩한 생명의 기쁨과 영광을 아버지께 드렸던 것이다. 


그러니 너도 내 뜻 안에서 영성체를 할 때에, 

내가 나 자신을 모든 이에게 주고자 했듯이 

나를 모두에게 주면서 이 모든 일을 반복 하여라. 


그러면 

모두가 영성체를 한 것과 같은 영광을 나에게 주는 셈이 된다. 


나의 뜻 안에서 사는 영혼은 단순해진다. 


나의 뜻 안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이 지니는 엄청난 가치를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면 오죽 좋겠느냐!”


(하느님 뜻에 군림 p60 1916년 9월 8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영성체를 할 때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주는 일, 

성체를 통하여 생명을 줬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했다. 


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뜻에 의하여 모든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성체를 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이가 하느님 아버지께 드려야할 영광을 대신 드리게 됩니다. 


우리도 지금 하느님 뜻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성체를 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성체의 효과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드려야할 영광을 우리가 대신 드리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영성체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당백이나 일당 천, 일당만이 아니라 

일당수십억의 그런 놀라운 영성생활, 

이런 지향 하나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 뜻과의 완전한 일치 


“네가 나 자신의 뜻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완전히 사랑을 할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바로 나의 뜻으로 나를 사랑함으로써 

내 사랑 고유의 방식으로 

너도 이웃과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뜻 우리의 의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 주님의 의지를 받아서 

그분의 뜻 그분의 의지로 이웃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그것이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삶에 대해서 


“가장 유익한 것은 나의 생애를 본받는 것이다.

(천상의 책 제1권 p44 9항) 


내가 행한 말을 행함으로써 나의 삶을 계속하려고 힘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가 그를 내 수중에 간직하며 보살피겠다.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무한한 사랑이었으니, 

이 사랑이 나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게 하였다. 


사람들이 나를 거스르는 태도나 행동으로 

부당하게 내게 끼친 아픔과 고통과 비탄과 치욕은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내 영원하신 아버지께 바쳤던 것이다. 


나는 너에게 그런 내 삶을 본받기를 바란다는 것을 잊었느냐?」


(천상의 책 제1권 p108 24항)


 


지극히 사랑하는 내 뜻의 딸아 너는 내 뜻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 형제자매들이 행하지 않은 많은 행위들과 

다만 인간적으로만 행한 행위들을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아서는 경건하지만 

신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행위들을 

네가 대신 거룩하게 하지 않겠느냐.


나는 모든 일을 거룩하게 해 왔지만 아직 만족하고 있지 않으니 

사람이 나의 뜻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해석하면서 거룩하게 다가와 

나의 행위들 안에 입맞추기를 바란다. 


그러니 오너라. 오너라. 내가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얼마나 간절한 바람인지 

사람이 이 거룩한 분위기 속으로 들어와서 나와 함께 자기 자신을 많아지게 하고 

모든 사람 안에서 거룩하게 사랑하고 보속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대신하는 것을 보면 

나는 온통 즐거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사람 안에는 인간적인 것이 보이지 않고 

온통 나의 것들만 보인다. 


나의 사랑이 피어오르며 불어나고 

보상은 무한대에 이르기 까지 증식되며 

대속은 신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대속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지 않은 것, 

이 대속의 차원도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그분의 뜻 안에 들어가서 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대속해서 했던 그런 일들을 

우리도 그 차원에서 하게 됩니다. 


루이사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무일도 바칠 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기도를 바칠 수 가있다. 

성무일도를 안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할 수 있다.





하느님 뜻 안의 삶에 대해서 계속하겠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은 예수님께서만 이룰 수 있는 삶입니다. 


여러 사람을 대신해 

딱 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와 나 단둘이만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서로를 기쁘게 하자.



” 이 말씀을 듣고 루이사는, 

예수님께서 표지를 세워주시며 도와주시지 않고서는 

숨을 한번 쉬는 것이나 걸음을 한 발짝 옮기는 것 무엇인가 선행을 한다는 것이 

도무지 가능한 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슨 일을 할 때나 

겸손과 순종 속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루이사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너에게 비결을 하나 가르쳐주고 싶다.


네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고,

이 지상에서도 언제나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비결 말이다.


그것은 네 마음속을 이렇게 결심하는 것이다.


즉 네가 이 세상에 다른 아무도 없이 오로지 예수님과 단 둘이 있다는 것,

따라서 홀로 그분만을 만족시키며 기쁨과 사랑을 드리고

그 보답으로 

오직 그분에게서만 사랑을 받으며 매사에 만족하기로 하는 것이다.”


예수님하고 둘만 사는 것처럼 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오로지 그분 안에서만 기쁨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영혼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하느님으로 가득차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께서 그를 영원한 사랑에로 드높이시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참되고 위대한 찬양이요 참된 겸손이기도 한 것이다. 


영혼이 이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표현인 것이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을 알리는 것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으시게 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랑을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라면, 

하느님만을 알리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라면 

그 사람은 하느님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아니라 하느님 덕분으로 돌리는 영혼에게 

주님께서는 얼마나 특별한 사랑으로 큰 은총들을 베푸시어 

부유하게 하시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할 때 하느님 덕분이다) 


그분께서는 또한 이렇게 덧붙이셨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언제나 태양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는 광선처럼 

나와 결합하여 

여기에서 생명과 열과 광휘(光輝)를 받는 것이다.


(그분은 태양이시고 우리는 태양광선이라는 것이다) 


광선이 만일 태양의 중심에서 이탈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 


중심을 떠나자마자 생명과 열과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으로 돌아가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안에서 나와함께 나를 위하여 이래야 한다. 


진실로 나의 소유가 된 영혼은 하느님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너도 내 안에서 살려고 힘써라. 


그러면 

내 안에서 모든 덕행을 담는 그릇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 뜻 안에서 살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이웃이나 사물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거듭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자신의 뜻을 없애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영혼은 그 자신에게서 자연적인 것을 제거할수록 

그만큼 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것을 얻게 된다. 


자애심을 없앨수록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더 얻고, 

인간적인 학문에 대한 지식과 삶의 쾌락에 대한 맛에 덜 집착할수록 

천상적인 것과 덕행들에 대한 지식을 더 얻으며, 


쓴맛을 단맛으로 바꾸면서 이들을 더 잘 맛들이게 된다.



(그런 인간적인 학문에 대한 지식에 집착하면 천상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겠죠. 

- 학위는 따야 될 것 아닙니까? (웃음)) 



나의 뜻이라는 곡식 알갱이가 네 안에서 커질수록 

그 껍질인 너는 그만큼 더 미천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루이사는 1942년 5월 26일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알려질 때 이 뜻이 맨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를 선으로 변화시키며 우리의 격정들을 꺾어 누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나약함을 가지고 우리를 강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또한 그 능력으로 우리 영혼에 변화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하느님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실감하게 하기도 하십니다.(기쁜 소식 p94)


 


이제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더라도 너는 이상하게 여길 것 없다. 


이를 받아드리려면 

아무리 거룩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 자신의 뜻에는 생기를 불어 넣으려고 들지 않는 

최대의 희생을 치를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뜻의 소유를 감지할 수 있고 

내 뜻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의 뜻에 생기를 불어 넣으려고 하지 않는, 

그 희생을 치를 각오가 있을 때

주님의 뜻을 소유할 수 있고, 

그 뜻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체험은 머리로 해서는 안되고, 직접 살아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 자신으로 살지 않고 다만 온전히 주님 안에서 

즉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 자신을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 결과로는 자주 너 자신을 벗어나서 

내 섭리의 무한한 바다 속에 투신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 뜻 안에서 이렇게 살려고 하다 보면 

처음에는 하루에 한두 번 기억 날 때, 

내 뜻을 봉헌하고 그분의 뜻으로 살려고 하지만, 


그 횟수가 점점 잦아지고 나중에는 완전히 자기 뜻을 포기하고, 

그분 뜻대로 살게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너 자신을 사라지게 한다면 결

코 아무 죄도 짓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없으니까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감정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것에서 이탈한 영혼들은 

무척 나를 기쁘게 하기에 

그들 자신을 벗어버리는 정도에 따라서 내 빛이 온통 스며들게 된다.’


(감정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것에서 이탈한 영혼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데, 

그 자신이 자신을 벗어버리는 정도에 따라서 그분의 빛이 스며든다.)


 


자기의 잘못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은 

나의 자비를 모욕하는 것이다


나는 네가 범한 잘못을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천상의 책 제1권 p44).



(우리가 잘못한 것을 용서 받으면 

그 죄를 다시 기억하지 말고 기억나면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 뜻 안의 삶은 하느님께만 열중하는 삶입니다. 


네 마음 안에는 오로지 나의 뜻만 있어야 한다. 

너의 뜻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너 자신의 허무를 깨달을 때는 

있는 힘을 다해 지체 없이 내 뜻의 무한한 능력 속으로 들어 와야 한다. 


너 자신의 무(無)에 이르기 까지 말이다. 


참된 성덕의 지주는 자기 인식 안에 있다. 


자기 인식은 자기를 없애고,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께로부터 얻을 지식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한다. 


그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활동이 바로 하느님의 활동이 되는 것이다. 


그 영혼의 내면이 하느님과 하느님에게 속한 모든 것에 온전히 몰입하게 될 때,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전적으로 그에게 주신다. 


그러나 그 내면이 

어떤 때는 하느님께 다른 때는 다른 사물에 열중하면,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부분적으로 주신다.’


(전적으로 하게 되면 전적으로, 

이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 부분적으로 밖에 하느님을 못 차지한다.)


 



‘나는 크게 보이는 것들에는 감동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 속에는 

언제나 인간적인 요소가 상당히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은 것들 ― 하찮게 보이지만 

본성상 그 자체로 위대한 것들에 감동하는 것이다!’


(하느님 뜻에 군림 p97 1921년 3월 17일)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느님 뜻 안에서 살 때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먼저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분은 또한 그분에게서 

결코 떨어지는 일없이 람을 사랑 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어떤 선행을 베풀면 

그것은 마땅히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알아보고,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바로 그 선행의 원동력이 될 창조주이시니까. 


하느님께서 사람을 써서 내게 그렇게 해 주셨다고 믿는다. 


반대로 누군가가 내게 악행을 저지르면, 

그 이 없이 하느님께서 

오로지 나의 영적이고 육체적인 행복을 더 키워주시려고 

그렇게 하도록 허락 하셨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내 마음은 더욱더 제게 하느님께로 이끌며 결합되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안에서 보고, 

그 각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봄으로써 

사람에 대한 존경심도 잃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루이사는 자기 글에서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네 눈을 내게 고정 시킨다면 네가 그 어떤 사람도 판단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 일이 고통스러운 것인지 하기 싫은 것인지 

혹은 쉽거나 힘든 것인지 따위를 살피려고 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천상의 책 제1권 p45 9항)



주님께만 눈을 고정시키면, 

고통스러운 것이나, 싫은 것이나, 쉬운 것이나, 힘든 것이나 

이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눈을 고정시키니까 이게 다 힘들고 그런 것이다.



“참 신앙은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이웃을 보는 것에 있다. 


신앙과 관련된 모든 말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참된 가치이다. 


그러므로 

나는 전 인류에게 믿음을 두루 퍼트리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를 실천한 사람은 

누구든지 내 뜻을 인간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나의 입노릇을 하는 것이다.”


(신앙을 전하는 것, 예수님의 입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이웃 사랑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가장 기꺼이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랑은

내게 가장 가까운 이들을 위해서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그런데 내게 가장 가까운 이들은 연옥에서 정화되고 있는 이들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만하고 그쪽으로 가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그들이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고 그들에게 주는 선물, 

기꺼이 그분이 받아들이신다.”


 


“그들이 행하지 않은 모든 선은 

나의 영광과 그들의 영혼에 그만큼 많은 빈곳을 남기는 것이다.


너의 모든 행위와 기도와 고통 속에서

쉬거나 일하거나,

침묵을 지키거나 대화를 하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나,


요컨대 네게 일어나는 모든 일속에서

사람들이 

그 모든 활동으로 마땅히 내게 주어야 할 모든 영광을 돌려주겠다는 지향을 

가질 일이다.


또한 사람들이 마땅히 행해야 하지만 행하지 않은 모든 선을 

보상하겠다는 지향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아까 제가 설명을 했던 것이죠. 


내가 어떤 음식을 먹을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그런 것들을 통해서, 

먹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되는데, 

그렇게 안 드린다 말이 예요 . 


그러니까 내가 하느님 뜻 안에서 그분과 일치해서 그 일을 행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겠다. 


그 대신 보상하겠다.


그들이 하지 않았던 것들을 보상하겠다는 지향으로 

모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어도 되는 것이냐?(질문). 

그 지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답).


 


이것은 하느님께 내 의지를 그때 봉헌하고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의지랑 일치해서 그 일을 하려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려고 하는 행위들을 

당신이 이미 그 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니까 이게 이런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 의지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뜻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내가 그분의 뜻 안에 들어가면 

그분과 하나가 되어 가지고 

그 모든 것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물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사물과의 관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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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네 주변 사물을 거룩한 무관심으로 대하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수행함으로써

항상 나를 기쁘게 하는 일에 정신을 모으기 바란다.”


(세상 것들은 거룩한 무관심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피조물로부터, 

심지어 나 자신으로부터도 완전히 이탈하여,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일러 주셨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야 하는데, 

그것은 그분 안에서는 어떤 피조물이든지 반드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네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마음 쓰지 않고 언제나 

거룩한 무관심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하셨다.”


(천상의 책 제1권 p158 39항)


여기서는 무관심이라고 했지만 거룩한 무관심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거기에 집착해서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이 은총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첫째 표징은,

외부에서 느끼고 보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면서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미로움과 온전히 거룩한 정다움을 외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끝으로, 

순전히 나의 것이 아닌 모든 것에서 이탈하는 정도에 따라서,

너는 점점 더 깊이 나의 절대적인 뜻에 잠기게 될 것이다.”


(천상의 책 제1권 p161 39항)



항상 모든 것에서 어느 정도 이탈하느냐의 정도에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어느 정도 깊이 잠기느냐, 

이게 이제 겸손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에 신경을 안쓰면 무엇을 먹고 사느냐 

일은 어떻게 하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꼭 필요한 것들 외에 

이 세상사물은 그 무엇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그러므로 내가 철저한 가난 속에서 있었던 것처럼 

너도 불필요한 것은 모조리 업신여기는 그러한 가난을 받아 드리기 바란다. 


나는 네게서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거나 소유하지 않는

참된 마음의 가난을 원하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것은 주어진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이 자신이 헐벗었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적인 것도 입게 된다.


초탈한 영혼들을 독특하고 각별하게 돌보는 것이 

나의 섭리인 까닭이다.


나의 섭리가 어디서든지 그들을 감싸주기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루이사가 그렇게 살다보니까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나하면,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이것이건 저것이건 

그 무엇에 대해서도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루이사가 교육은 어디까지 받았나,(질문) 


초등학교 2학년정도, 

몸이 아파 집에서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마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세상에서 보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그런 사람들을 택해서 크게 쓰시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파우스티나 수녀님도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이다.




그다음에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영혼이 모든 것에서 이탈하면 

그 주위를 싸고 있는 지상적인 것들 일체를 멀리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진다.”


(모든 것에서 이탈하면 주위에 무엇이 있어도 상관없으니까 

거기에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할 때,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나옵니다.



"네가 무슨 일속에서건 아무리 사소한 행위라도 

인내와 맡김과 부드러움과 균형과 평온함을 반영함이 없이 

너에게서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오직 사랑으로 말미암아 일하고 고통 받는 사람은 

신적인 방식으로 일하고 고통 받는 것이 된다. 


다른 방식으로 한다면 

비록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인간적인 방식이다. 


그러니 창조주와의 합일이 결여되어있고 

따라서 창조주의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만을 얻을 뿐이다. 


반면에 

참으로 나의 방식과 일치해 있으면 

사랑의 불이 모든 차이점을 태우고 없애기에 

나의 일과 사람의 일을 하나 되게 한다.”



(중요한 가르침은 

내가 지금까지의 하고 있는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되면 

내가 행한 공로는 인간적인 공로가 되고, 

주님과 하나 되어 일을 하게 되면 

내가 하는 그 일이 신적인 일이기 때문에 신적인 공로가 된다.)





하느님 뜻에 관한 일



“너는 내 뜻 안에서 나와 함께 내 뜻의 지배를 준비하기에 

관심을 기울여라. 

너는 나의 뜻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쏟지 말아야 한다. 


나의 뜻을 알리는 일을 맡은 사람은 내 대변자가 되리니 

나는 내 뜻의 나라의 신비를 그 사람에게 맡기겠다. 


너무도 소란스러운 이 시대에 

악을 향해 어지럽도록 치달리고 있는 이 시대에 

내가 지고한 ‘피앗’의 나라를 큰 선물로 주고자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보다 

더한 은총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밝힘과 하느님의 뜻을 내포하는 계획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라고 루이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루이사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의 답장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 뜻의 아들이여, 

하느님의 수많은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을 얻어 주는 것이야말로, 

그대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입니다.’ (기쁜 소식 p95) 



루이사가 쓴 책들 중에 하느님의 뜻과 관련된 핵심적인 구절들을 쫙 뽑아 놓은 것이 ‘기쁜 소식’이라는 책입니다. 

조그만 소책자인데 저는 처음에 그 책을 처음 보고 이해를 못했는데, 뭐 좋은 글이 쓰여 있는데 그래도 중요한 것은 다음에라도 이해해야지 하고 언드라인도 치고, 굵은 글씨로 바꾸라고 지시를 해놓고, 그리고 지난번에 또 한 번 읽어보고, 두 번 정도 읽어 봤는데도 좋은 내용은 있는 것 같은데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태리에서 기도하고 피정을 할 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나서 그때 다시 한 번 봤어요. 하느님 뜻 안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나서 보니까 내가 지금까지 본 것이 다르고, 그리고 다른 것을 보고나서 또 한 번, 네 번째 보니 판단이 났어요. 그러니까 이게 어느 정도 이해하고 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판이하다 똑 같이 한글인데 하고 느꼈어요.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은 무한한 차원이 있는 것이다. ‘기쁜 소식’이라는 소책자는 쓰기는 루이사가 썼지만 여기저기에서 뽑아서 이글을 편집한 사람은 루이사의 책을 20여 년 동안 연구한 사제 (파블로 마틴 신부)가 뽑은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자기 수준에서 뽑았단 말이예요. 내가 그 사람 수준에 못 미치니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가 와 닿지 않는 것이다. 이해를 하고 나니까 와 닿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쁜 소식’ 말고 루이사의 이미지를 보시려면, 컴퓨터 안에서 루이사 피카레타로 들어가면 사진이나 이미지 같은 것이 쭉 나온다.


여러분들이 이것에 대해서 공부를 하시려면, 제일 먼저 보셔야 할 것이 ‘하느님의 뜻이 영혼들 안에 군림하실 때에’라고 하는 책을 일차로 보고, 그 다음에 이어서 ‘기쁜 소식’을 보면 좋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영혼들 안에 군림하실 때에’라고 하는 책을 읽으면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이 이렇게 좋은거구나, 이런 것에 대해서 처음에, 야 이거 굉장한 것이다. 하고는 이해를 하게 된다. 다음에 ‘기쁜 소식’을 보게 되면, 중복되는 메시지가 두세 개 정도 밖에 없고 모두 다른 것이다. 이것을 보게 되면 핵심적인 요점들을 정리하였기 때문에, 아,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조금 알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책을 보시려면, ‘천상의 책 제1권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 책을 보십시오. 천상의 책 제1권인데 이 책을 여러분이 보시면 루이사 피카레타가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초기에 신비체험을 했던 것들, 예수님과의 약혼, 영적인 결혼 그런 것들 메시지 전달의 일기 쓰기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쭉 열거를 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루이사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좀 자유롭게 ‘천상의 책 2권, 3권’으로 쭉 보시면 좋습니다. 2권에서 36권까지, ‘하느님의 뜻이 영혼들 안에 군림하실 때에’라는 책을 보시면, 강의를 들으셨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쉬우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천상의 책 1권을 보면서, 무슨 책이 이래 왠 잔소리가 이렇게 많아 하면서 읽기를 여러 번 중단했고, 또 ‘수난의 시간들’과 ‘하느님 뜻의 나라 동정마리아’ 이 책도 봤지만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이 책보다 제가 감동을 받은 책은 ‘마리아 발도르다’가 쓴 책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였는데, 이 책보다 아무래도 감동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이 영성을 몰랐을 때, 그런데 영성을 알고 나니까 이제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들을 다시 모두 보았어요. 그 때 보니까 ‘수난의 시간들’의 핵심이 무엇이고, 감이 잡혀서 판을 좀 바꾸면서, 원 사람들의 강조점의 초점을 발견하고 활자와 글씨체를 바꾸게 되었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영적 순례’는 창조와 구원과 성화의 피앗(Fiat) 묵주(작은 묵주로 총 6단으로 되어 있다)를 네 바퀴를 돌아, 24시간의 영적 순례를 바치기 위하여 만든 책으로 이것을 가지고 제가 해 보니까 조금 어렵다 그래서 제일 나중에 보시면 좋겠다. 이 책도 루이사가 쓴 책이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맛들이고 나서 그다음에 보시면 되는데, 이태리의 평화의 섬 공동체에서는 이 책으로 매일 기도 합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한 시간을 가지고 30분에서 길면 1시간 기도를 합니다. 수난의 시간들도 그렇게 합니다. 끝나면 다시 반복해서 매일 하는데 성탄 때도 수난의 시간을 묵상 합니다. 1년 12달 매일 기도를 합니다. 동정 마리아는 5월 달에 이 책은 1일부터 31일까지 묵상하게 되어 있어서, 5월과 10월에 여러분들이 묵상을 하면 좋습니다. 이 책도 그곳 공동체에서는 하루에 한번 저녁에 읽고 묵상을 합니다.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동정 마리아를 매일 묵상하셔도 좋습니다.


‘영광의 책’은 1994년 미국 플로리다 주 잭슨빌 시에서 토마스 M. 페이 신부님께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을 이해하게 되신 것을 110여 가지의 문답식으로 독자들과 나누고자 적으신 책으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기 위해서 시작을 하다보면 의문점도 많은데 이 책을 통해서 의문점을 해소하도록 하는 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뜻 안에 사는 것과 하느님의 뜻이 다스리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그들은 이 뜻을 부여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가르치는 사적 교사들이 되려고 서로 앞을 다툴 것이다.”


(공적 교사는 우리 사제들이니까)


제가 볼 때에는 내년 이맘때쯤 되면, 올해 책이 약 10권정도 나오고, 번역이 절반정도 되면 어떻게 하는지를 전하면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프로그램(성직자들 4박 5일정도, 평신도들 중에 영성에 메말라하는 사람들, 성령 세미나를 하고, 성모님께 봉헌하고 다락방등을 한분들)을 하는 것을 내년 이맘때쯤 잡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의 자료가 약 143쪽 정도 되는데 읽으면서 핵심되는 구절들 필요한 것들만 뽑아서 해드리는 것입니다.


성체성사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성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성체 안의 나를 받아 모시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대로 잘 준비하고, 

영성체를 한 후에는 내게 감사하면서 

네게 필요한 은총과 도움을 청하면 된다. 


그 외 다른 생각들은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위해 제정한 사랑의 성사, 곧 성체성사 안에서 

나는 33년 동안 지상에서 살면서 행했던 모든 일과 겪었던 모든 고통을 

계속 행하며 겪고 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 자신의 성사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다."

(천상의 책 제1권 p64 14항) 




"나의 성체적 삶의 시기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삶의 시기는 성체적 삶의 시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시기, 유년시기, 지금은 성체적 삶의 시기) 

그 정체가 

숨어 지냄과  변모와  끊임없는 자기 소멸의 시기이니 

나의 강생과 생애와 십자가상 수난이 

사람들에게 사랑과 찬미와 감사와 본받음의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이 

내 성사적인 삶도 황홀한 사랑의 대상이 된다. 


나는 나의 눈길 안에 모든 사람의 눈을 담고, 

나의 음성 안에 모든 사람의 말을 담고, 

나의 동작 안에 사람들의 동작을, 

나의 손 안에 사람들의 일을, 

나의 마음에 사람들의 애정과 갈망을, 

나의 발안에 그들의 발걸음을 담았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지상에서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의 인성과 신성 및 나의 뜻과 하나 되어 나를 영했으니 

내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다. 


내가 성사적으로 나 자신을 영 했을 때에 

내 안에 있는 것이 느껴지는 모든 것을 네가 새로이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네가 입 맞추며 나를 껴안았을 때도 나의 모든 것이 네 안에 있기에 

네가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 모든 이의 입맞춤을 느꼈다. 


이 단순하고 동그란 성체 안에 나는 모든 것을 포함 시켰다. 

그래서 나도 나 자신을 받아먹고자 하였다. 


모든 성체 안에는 

나의 기도와 나의 감사가 있으며, 

그 외에도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그러니 사람이 게을리 한다 하더라도 

나는 내 일을 계속 하면서 

각 영혼 안에서 나 자신의 성체를 받아먹는다.”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면서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그 사람이 마땅히 하느님께 영광을, 

성체를 받아먹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보답을 해야 되는데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면서 대신 보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영성체를 하면, 

예수님의 뜻 안에서 하나 되어 하게 되면 

예수님과 같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성체를 영할 수도 있고, 

하느님께 그런 영광을 드릴 수도 있고, 


렇게 영광을 드리니까 

그분께서 나에게 그 모든 이들이 받을 영광, 그 은총을 나에게 주시기도 하고

이런 관계가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귀하고의 투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귀들이 내 힘을 능가할 정도로 유혹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네가 너 자신의 허무에 잠겨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추면서 내게 의탁하는 것을 보면 

악마는 네게 접근 할 힘을 잃고 분통이 터져서 제 입술을 깨물기 마련이다. 


내 이름으로 싸움을 시작하고 

싸움 중에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면 

이 이름이 너를 보호하는 성체가 될 것이다. 


너는 또한 그 이름으로 네 가장 힘든 시련에 끝마무리를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의 무리, 어둠의 세력을 대적하여 물리치는 것을 이야기 해 주신다.)



‘악령들이 나를 떼밀어 그 불구덩이에 처넣으려고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내 소리를 듣고는 

조금도 해치지 못한 채 물러갔다.’


(루이사가 사탄에게 시달리는데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루이사가 이야기 합니다.



‘그분께서는 

그 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 속에서 나의 의지가 악을 극도로 지겨워해서 

죄의 그림자만 생각해도 쓰디쓴 고통을 맛볼 정도였기 때문에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시면서 위로해 주셨다.


(마귀가 와가지고 계속 이 죄를, 

너는 죄인이고 구원받지 못하고 하면서 루이사에게 이야기하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분께서는 

악마는 사악한 영이고 따라서 거짓말쟁이니까 

절대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셨다.’

(천상의 책 제1권 p75 16항)




‘영성체를 몹시 증오하는 악마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겠는가?


아무튼 

그는 성체를 영하지 못하게 하려고 교활한 술책을 총동원하는 것이었다.’

(천상의 책 제1권 p76 16항)




마귀가 영성체를 아주 싫어하는 것이다. 


마귀가 공세를 취하면 취할수록 

루이사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그 마귀들이 공격하는 모든 고통을 자기 죄에 대한 보속으로 받아들이니까 

결국 마귀들이 해봤자 자기들이 손해니까 나중에는 떠납니다.



‘성체 안에 계신 주 예수님을 받아 모신 어느 날, 

그분께서는 내게 악령들을 퇴치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악령들을 하찮은 벌레이기나 한 듯 무시하면서 

무슨 말을 하든지 전연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나를 유혹할 의욕조차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한 상처 속에 나 자신을 집어넣고 

그분의 정신에 나의 정신을 일치시키면서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 안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 인성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잃어버린 은총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목적 외에도, 


그분의 인성을 통하여 

영원하신 아버지 대전에 사랑과 속죄와 배상과 대속의 산 제물이 되시어 

아버지의 의노를 풀어 드림으로써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쳐 이기신 당신 승리의 영과 초자연 생명에로 

인간을 드높여 주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묵상하는 것이다.’

(천상의 책 제1권 p78 17항) 


(예수님의 구속사업, 예수님의 승리의 삶을 묵상하는 것 

이것이 악령을 퇴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생활할 때, 수덕생활을 해야 되는데 

수덕 충동을 제지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모든 것은 최초로 충동을 제지하는 일에 달려있다.


영혼이 그것을 알아차린 즉시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스스로를 낮추고 뉘우치면서 과감하게 정리할 때도

하느님의 힘이 그를 에워싼다.


그러나 이 순간에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하면 

영원히 하느님의 힘을 무력하게 하면서 모든 악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셈이 된다.


그런즉 너는 옳지 않고 거룩하지 않은 최초의 충동,

생각과 말을 조심해야한다.


일단 첫 충동을 제지하지 못하면

영혼 안에서 격정이 지배하면서 영혼을 억압하게 된다.


영혼의 내면은 온통 격정 투성이다. 


이 격정들을 하나씩 꺾어 버릴 때마다 

그 각각 해당되는 격정이 서로 다른 크기의 은총과 함께 영혼 안에 자리 잡는다. 


하나하나의 격정이 완성됨에 따라서 

그것에 부여되는 은총의 크기도 달라지는 것이다. 


영혼이 격정의 동요를 감지하는 것은 

그가 내 뜻의 범위 안에서 끊임없이 살고 있지 않다는 표지이다 


때때로 그 자신의 뜻 안으로 잠시 도망치곤하기에 

부패한 본성의 악취를 풍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분노, 미움 등의 격정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그분 뜻 안에 있지 않는 것, 

그분 뜻에서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버리지 못 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순명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순명은 

인간의 격정들을 뿌리채 뽑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토록 찬양된다. 


그것은 영혼 속에 있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모조리 없앤다. 

그리하여 매우 영예롭게도 영혼의 원래 상태를 되돌려 준다. 


나는 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인성을 취한 것은 

바로 불순명을 부수고 순명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 덕행은 내 안에서 아주깊이 배어든 것이어서 

순명이 나의 본성이고 

그것도 내게 가장 소중하고 찬란한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혼은 

순명에 의하여 그 자신 안에 덕행들의 완전한 부활을 이룰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시며 생활 하셨다는 것입니다. 

순명, 신덕, 망덕, 애덕 등의 여러 가지 덕행들을 다 강조하고 계시는데 

고난에 대한 부분만 잠간 말씀드리고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제 몸을 좀 도사리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싫어하니까, 


어떤 사람은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고통! 그러면 좀 피하고 싶고 

그런데 루이사 피카레타의 책을 보면 루이사는 고통을 열망합니다. 

그 십자가를 주시라고


루이사의 책을 사전 지식이 없이 대하는 이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대속적인 권한과 계속적인 권한, 

성부의 의노, 징벌, 십자가에 대한 사랑, 

이사가 사는 희생 제물로 함께 고난을 나눈 예수님과의 신비적 결혼, 

많은 입맞춤,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한 놀라운 표현, 

많은 말씀 등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설명을 드리고자합니다.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희생을 당하시는데, 

그 인류가 자기의 희생을 통하여 구원될 것이라고 하는 것,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될 인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고난을 열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크고 강한 고통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부분을 이해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만 고난을 받으셨느냐?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고난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떻게 고난을 당하고 계시느냐?  


당신은 우리 신비체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지체이기 때문에, 

지체인 우리들이 행하는 여러 가지 악행을 느끼면서 고통을 당하십니다.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 온갖 저지르는 죄로 인해서 당신은 큰 고통을 느끼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욕을 당하시고 

그것을 또 보상하시기 위해서 자기희생을 바치게 됩니다. 



루이사가 예수님께서 바치는 희생과 고통에 동참하려고, 

예수님께 그것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드려서 

예수님처럼 루이사도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 흘리는 그런 고통을 영적으로 겪게 됩니다. 


루이사의 경우는 저녁에 잠을 잘 때,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몸이 빳빳하게 다 굳어요. 


아침에 사제가 와서 강복을 주어야 몸이 풀려요. 

사제가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영해주면 그날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제가 오지 않으면 며칠이고 죽은 것과 같이 빳빳하게 굳은 채로 그냥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루이사의 영혼은 자기 육체를 떠나서 

예수님과 친교도 나누고, 천국도 가고, 세계적으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럽니다. 


사람들이 모르도록 보호를 받은 것 같다. 


사제가 와서 강복을 해주지 않으면 안 깨어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제가 와서 강복을 해주고 

그 방에서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영해주기를 64년 동안 

침대에 누워서 생활을 하셨다. 


집안은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며 

물과 음식을 같이 조금 먹으면 다 토하게 되어 안 먹고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토하는 고통도 다 바치라고 말씀하시며 

철저하게 순명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해서 고난을 같이 겪는 그런 사람들, 

내가 자발적으로 원하지만 그분이 은총을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비오 신부님을 보고 사진을 찍었는데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얼굴이 사진에 나온 것입니다.


(이 사진은 ‘수난의 시간들’ 2판의 책 1쪽에 있습니다.)


50년 동안 오상을 지니고 사신 오상의 성 비오 신부님을 찍었을 때 기적적으로 찍힌 사진으로, 

사진 주위에 있는 글의 내용은 


“가시관으로 내가 받은 고통은 창조된 인간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것은, 

저 가시들이 인간의 사악한 생각들을 모두 내 머리에 박아 넣어,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다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악한 고통들을 다 느끼니까 얼마나 예수님께서 고통 스러우셨겠습니까?



루이사 피카레타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데 그 고난에 같이 동참하는 산 제물로 선택된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루이사 피카레타 뿐만이 아니고 

오상의 비오 신부님, 독일의 데레사 로이만께서는 오상을 받으시고 성체만 영했던 분이시다. 


포르투갈의 알렉산드리나, 프랑스의 마르뜨 로뱅 이런 분들이 성체만 모시고 사신 분입니다. 


제가 만난 사람 중에 

독일의 북쪽에 있는 곳으로 공식적으로 아직 인정은 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108번 발현하셨다는 곳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공동묘지가 있는데 그쪽으로 가려면 순례성당이 있고 

그 발현을 목격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자기를 희생 제물로 봉헌하고 나서 

그 분도 오상을 받으셨는데, 그 분은 수호천사와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사순절에 오상의 고통을 받을 때는 수호천사가 나타나서 부활초를 준비하면서 

그 초에다 그림을 그려준다. 


그 성당에 가면 수호천사가 그림을 그려준 부활초가 쭉 전시되어 있습니다. 

수호천사가 나타나서 묵주재료를 놓아두면 묵주를 만들어 준다. 


그러면 순례자들에게 나누어준다. 제가 그런 곳을 가보았습니다. 

그 분이세상을 떠난지 2~3년 정도 되었다. 

수호천사가 만들었다는 묵주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누구에게 주었다. 


두 번 방문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특별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당신 고난에 참여하도록 신비스럽게 살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내일 여러분들이 원하시면 미사 중에 자신의 뜻, 자신의 의지를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께 봉헌하는 예식을 통하여 주님께 봉헌을 하도록 하여, 

다시는 내 뜻대로 살지 않겠다고 자신의 뜻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기도합시다.


좋으신 하느님 당신의 뜻에 대해서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모두가 당신의 뜻, 당신의 의지를 받아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대로 생활함으로써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새 시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소서. 

저희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 저희들을 도구로 쓰셔서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널리 전파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더 강력하게 임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소서. 

그동안 저희 모두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든 성모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수호천사들과 하늘의 모든 성인성녀들의 전구에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저희들을 위해서 전구해 주소서.


그리고 저희들의 삶이 성삼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게 해주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마리아 사제 운동에 대하여



제가 마리아 사제 운동에 와서 다락방 기도 모임을 하고 또 이런 모임을 할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하면, 야 이것 모임이 엄청나다하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동안 딱딱 부러지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두리 뭉실 넘어가는 것에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렇게 속해 있으면서 보니까 그것이 좀 편합디다. 그때그때 따라서 그냥 물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는, 지금은 그렇습니다. 제가 성령쇄신 전담 신부로 오래 동안 있었고, 성령쇄신 신부님들의 모임과 다락방 사제들의 모임에 가다보니 차이점을 느낍니다.


성령쇄신 쪽에 가면 좀 긴장하게 되고 딱딱하며 부드러운 부분들이 조금 부족한 것을 봅니다. 제 생각에는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 이런 부분들은 개신교에서는 열렬한 사람들이 있죠, 그런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들을 느끼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마리아 사제운동의 모임에 오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다른 사제들의 모임에서는 내가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하나 잘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는데, 마리아 사제 운동의 사제들 모임에 오면 그런 마음이 없어집니다. 사람들이 모두 잘 봐주니까 서로 사랑해주고 그러니까 긴장한다든지 큰 부담을 느낀다든지 그러한 것이 없어지고 편안하니까 다른데서 느낄 수 없는 그런 안정감을 느끼면서 좋다하는 느낌이듭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예.(답)


이것은 성모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도록 하시기 때문에 점점 바뀌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오면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계셔 가지고 그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그분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받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 영신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뜻에 관한 강의도 그렇습니다. 계획되기는 2가지만 하게 되었었는데 계속 하라고 하셔서 원래 계획에 없는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없는 프로그램인데 더욱 봉헌식으로 봉헌까지 하게 되고 시간이 되면 강의를 더 하라고 하시니, 아무튼 때에 따라서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성모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그때그때 그냥 흘러가는 것 그러한 것에 익숙해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이익을 찾고 그러면 주위에 있는 사람이 불편한데, 자기 뜻을 버릴 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제가 오늘 ‘하느님의 뜻에 영구적으로 자신을 바치는 봉헌기도’나 다른 기도문들도 마찬가지인데 처음 제가 이 기도문들을 들었을 때나 읽었을 때, 이것 너무 길다, 왜 마음에 안 닿느냐 등의 생각을 했습니다. 하느님 뜻, 하느님의 뜻과 관련된 기도문이 많이 있는데 기도문들이 썩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서인석 신부님과 이태리에 있을 때, 신부님께서 영어로 번역 된 것을 보여 주셔서 보니까, 영어니까 새롭게 들어오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별로 없고, 내가 번역을 했으면 이렇게 했겠다고, 이 단어는 이런 것이 들어갔으면 좋겠다하고, 내 뜻이 들어가고 판단이 들어가니까 별로였었는데, 제가 하느님의 뜻에 내 자신을 봉헌하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려고 해서 그런지, 저 뒤에서 봉헌기도를 다시 한 번 보니까 훨씬 새로운 느낌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전에 가지고 있던 불편 같은 것이 없어지고 단어와 문장들의 뒤에 있는 의미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들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조금씩 조금씩 들어가면서 느낌, 그 뒤에 있는 것을 느끼면서 그렇다고 제가 하느님 뜻 안에서 잘사는 것이 아니고, 저도 이제 열심히 한번 해 볼까하고 시도를 하려고 하는 정도인데, 성령의 빛을 통해서 이렇게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은 무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후에 봉헌문을 바칠 때에 이제 좀 그렇다고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앞으로 이것이 자기 안에 더 깊이 다가 올 때가 올 것이다 하는 것을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봉헌문은 가능하면 자주, 매일 바치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자기 자신의 봉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봉헌에 앞서서 질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여기에 보면 하느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봉헌 하면서 동시에 성모님의 티없는 성심에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것으로 봉헌문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또 성 요셉과 수호천사와 천상 모든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러한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해가지고 천상 주민들까지 다 연결되는 그런 봉헌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뜻 우리의 의지를 봉헌하고 나서 그분께서 당신의 뜻 당신의 의지를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공간, 그 준비를 하기 위해서 나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그분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살려고 하는 그런 삶을 앞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으로 자꾸 봉헌을 하면서, 그분의 뜻, 그분의 의지를 주시도록 청하는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 봉헌 후에 우리 삶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 우리가 거듭 거듭 하게 되면 우리가 내년 이맘때쯤이면 우리가 많이 바뀌어 있지 않겠는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평화의 섬’ 공동체에 가서 그분들과 함께 살 때, 거기에는 29살, 30살 정도의 남자들 3명, 여자들은 조금 나이가 더 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 나이가 많은 분은 70세 정도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지내는데 그 사람들이 하느님 뜻 안에 사는 모습들, 밝고 기쁘게 사는 모습들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그분의 뜻 안에서 살게 되면 그렇게 되리라고 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영구적으로 자신을 바치는 봉헌기도문’을 쭉 마음속으로 묵상을 하고나서, 거기에 자신의 뜻을 합해서 봉헌을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감실 쪽을 향하시고 무릎을 꿇으신 다음에 ‘하느님의 뜻에 영구적으로 자신을 바치는 봉헌기도’를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봉헌 기도를 할 때, 한 단락이 끝나면 잠깐 숨을 멈출 정도로 음미한 다음에 그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바쳤으면 합니다.


“ 오 흠숭하올 하느님의 뜻이시여,

제가 여기 당신 빛의 무한함 앞에 있사오니,

당신의 영원한 선하심으로 문을 열어 주시어

저로 하여금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신 당신 안으로 들어가서

당신 안에서 온전히 제 생명을 기르게 해 주소서.


그러므로, 오, 흠숭하올 뜻이시여,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저는 당신 빛 앞에 꿇어 엎드려,

지고하신 당신 ‘피앗’(Fiat)의 자녀들의 작은 무리 안에 들어가나이다.


또한 저의 무가치함 속에 엎드려 당신 빛을 청하며 간구하오니,

이 빛으로 저를 감싸 주시어,

거룩한 뜻이신 당신께 속하지 않은 것은 온전히 사라지게 해 주소서.


그러면 당신께서 저의 생명, 제 지성의 중심,

제 마음과 온 존재의 기쁨이 되시겠나이다.


저는 제 인간적인 뜻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원하지 않사오니

이를 쫓아내고, 평화와 행복과 사랑의 새 에덴동산을 이루겠나이다.


그리하면 저는 언제나 행복하고, 특별한 힘을 가지며,

만물을 성화시켜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거룩함을 지니게 되겠나이다.


여기 꿇어 엎드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간구하오니,

저로 하여금 오로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만 살게 하시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처럼 제 안에 창조의 첫 명령을 다시 내려 주소서.


거룩한 ‘피앗’의 여왕이신 천상 어머니,

저의 손을 잡으시어 하느님 뜻의 빛 안으로 이끌어 주소서.


저의 인도자시며 지극히 자상하신 어머니로서

저를 가르치셔서 제가 하느님 뜻의 질서와 그 경계 안에 존속하게 하소서.


천상 어머니, 제 온 존재를 어머니의 티없이 깨끗하신 성심에 봉헌하오니,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을 주소서.


제가 유심히 귀 기울이겠나이다.

또한 어머니의 망토로 저를 감싸 주소서.


그러면 지옥의 뱀이 감히 이 거룩한 낙원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리니,

저를 유혹하여 제 뜻의 미궁 속으로 떨어지게 하는 일이 없겠나이다.


지극히 위대한 선의 중심이신 예수님,

당신의 불꽃을 제게 주시어,

제 안에 하느님 뜻의 생명이 자라도록 저를 태우고

완성시키며 먹여 살리게 해 주소서.  


성 요셉, 저를 보호하시고 제 마음을 지켜 주소서.

제 뜻의 열쇠를 당신 손에 맡기오니,

제 마음을 엄중히 지키시며 다시는 이를 돌려주지 마시어,

제가 하느님의 뜻을 떠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수호천사여, 저를 보호하시며 지켜 주소서.

모든 일 속에서 저를 도와주시어,

제 낙원이 번창하고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 뜻의 나라로

끌어당기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모든 천상 주민들이여,

오셔서 저를 도와주시어,

제가 언제나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 안에서 살게 하소서.”


진정으로 나의 뜻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봉헌하는 마음이 진 할수록 

그 봉헌을 받아주시는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봉헌문 맨 밑에다가 날짜를 쓰시고 자기 싸인을 하십시오. 그리고 각자가 보관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 후에 우리가 봉헌의 삶을 잘 생활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하느님, 마지막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에 대해 나누고 갑니다.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당신 말씀을 잘 이해 수 있도록 당신 빛을 비춰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어제 예수님의 수난, 

대속적 수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못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말씀을 읽어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충실하게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언제나 내 마음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내 수난의 첫째 목적은 

영광과 찬미와 영예와 감사와 보속을 하느님의 신성에 바치는 것이다. 


둘째 목적은 

첫째 목적을 이루기에 필요한 모든 은총과 아울러 

영혼들의 구원을 얻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사신 삶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얻어 주기 위하여 이루어진 삶이라고 

하느님의 뜻 책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이 가시관을 받고자 했던 것은 

사람들이 생각으로 범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신적지성과 인간적지성을 하나로 결합하기 위해서였다.


(가시관을 쓰신 것이 

신적지성과 인간적지성을 하나로 결합하기 위해서 가시관을 쓰셨다는 내용이 

조금 새로운 내용입니다.)



내가 가시관을 쓴 이유 중의 하나는 

통치와 지배적인 법으로 

은총의 새 하늘과 진리의 새 땅이 인간 정신 안으로 스며들게 하는 일을 

내 머리가 해야 했고 

또한 혹독한 고통에 이를 정도로 깊어진 죄의 새 지옥도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온 인류의 가족에게 영광과 영예와 존귀의 관을 씌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고통과 학대에 처해 있을 때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사랑하올 내 아버지에게서 마저 버림 받았다.


(이것이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버림받은 이야기입니다.)



매사에 있어서 신성이 인성을 이끌어 간다는 것과 

신성은 

우리 각자가 평생토록 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을 단 한순간에도 이룰 수 있고 

그보다 더 많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루이사가 쓴 것이다.)



이 신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역사하고 있었으므로 

복되신 예수님께서는 전 생애에 걸쳐 모든 사람을 

전체적으로 또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보상 하셨고, 

각자가 하느님을 향해 마땅히 해야 할 모든 것을 

미리 보상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각 사람을 대신해서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 감사와 보속과 영혼을 드렸으며, 

또한 각 사람대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고난 받으시며 기도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각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성심에 의하여 이미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그분께 속죄하기 위해서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상에 오기 전에는 

고뇌, 치욕, 고통, 가난, 질병 및 갖가지 고난의 십자가가 

영락없는 부끄러움과 불명예로 간주 되었지만


내가 다 겪은 뒤에는 

그 모든 것이 나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 되었으므로


그 모양을 바꾸어 감미롭고 즐거운 것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신비체를 통해서 지금도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읽겠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모욕과 고통을 당하신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안에 있기에 

각 사람이 그분을 거슬러 저지르는 모욕을 전부 느끼셨다. 


그리고 

모든 이로 말미암아 전반적으로 

각 사람으로 말미암아 개별적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단죄할 수 있었고 

그분께서 특히 나 때문에 받으신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루이사는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본대로 그들이 내게 한 모든 짓은

(예수님의 수난 때, 예수님께 했던 그런 짓들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인류가 끊임없이 내게 저지르는 모든 모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말고, 

눈이 멀어 분별이 없어진 인류는 

세속적인 것의 소용돌이에 빨려들고 말아서 

단지 내게만 무자비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서로 그렇게 한다.


물질적인 부를 찾는 데만 급급하여 초자연적인 진리를 모조리 내던지고 

이로 인하여 온갖 모독적인 타락의 진창 속으로 빠져들면서도 

그들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는 숫제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오, 영혼의 영원한 멸망이 

예수님께 얼마나 큰 고통을 끼치는지를 세상 사람들이 안다면 

적어도 그분께서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온갖 수단을 활용하여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루이사의 말입니다.) 



‘오로지 나를 공경하는 일에만 마음을 쓰고 

나에 대한 끊임없는 모욕을 보상하여라. 


그리고 멸망으로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하여라.


도무지 마음이 미어지는 고통 속에 있는 나를 홀로 버려두지 말아라.’


(한 영혼이 멸망으로 갈 때 

예수님께서는 무진장한 고통을 지금도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의 열렬한 사랑에서 활동적인 사랑으로 넘어가기를 원한다면 

그렇다면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 끊임없이 잠겨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 안에 잉태된 각 영혼이 

얼마나 많은 죄와 나약과 격정이라는 짐을 내게 가져오는지 생각해 보아라. 


내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 각자의 짐을 떠안게 하였다. 


러므로 내 안에 그들의 영혼을 잉태한 나는 

들 각자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드려야하는 고통과 보속도 잉태한 셈이다.


내 마음의 사랑을 쏟아 붓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에 

이사랑은 눈물로 바뀌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우리하고 하고 싶으신데 

그 사랑을 중요하게 받아 드리지 않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즉 나의 사랑은 위로를 받지 못한 체 홀로 버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비웃음과 업신여김과 모욕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징벌을 내리지 않으실 수 없을 때에 겪으시는 고통과 그 극심한 폭행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폭행을 당하시는 상태가 되는 것은 

그분께서 징벌을 내리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내게 폭행을 가하는 것은 정의이다. 


그리고 더 큰 폭행을 당하는 것은 

내가 인간에게 품고 있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내가 인간을 책벌 할 때에는 

그것이 내 마음을 죽음의 골짜기로 데려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지어서 어쩔 수 없이 책벌을 할 때에도 

그 책벌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 때문에 어쩔 수 없고,)



정의가 벌을 내리는 것도 질서에 속한 것이어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속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징벌 자체도 

사람들에 대한 극히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통탄할 시대가 나로 하여금 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사람들이 교만으로 너무 부풀어 올라서 

각자가 마음속으로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만일 그들 위에 징벌을 쏟아 붓지 않는다면 

그들의 영혼을 헤치는 셈이 될 것이다. 


겸손의 유일한 양식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순교를 방불케 하는 사랑의 고통이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며 굉장히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은 

인간에 대한 너무 큰 사랑 때문에 인간의 불행을 잘 못 되는 것을 보시면서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이다.)


 



루이사 피카레타가 쓴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할 때 나타나는 효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



“딸아, 내 수난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샘을 형성하고 있어서, 

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샘도 더욱 확장된다. 


사람들이 이 ‘수난의 시간들’을 가지고 기도할 때, 

나는 이를 그들의 기도로 여기지 않고 

내가 행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마치 내가 수난 중인 것과 같이, 

나의 공로와 같은 공로를 그들에게 준다. 


이와 같이,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의 지향에 따라 같은 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해 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그들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한 횟수만큼 

사랑과 기쁨의 불화살을 쏘면서 내 앞에 자리하게 해 주겠다. 


모든 복된 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참으로 달콤한 황홀이 될 것이다!”

(천상의 책 제11권, 1913년 4월 10일)




“‘수난의 시간들’은 

나 자신의 기도요 보속이요 온통 사랑이기 때문에 

내 성심 깊은 데서 솟아난다. 


내가 너와 하나 되어 이 기도를 바치면서 

얼마나 여러 번 세상에 내릴 징벌을 은총으로 바꾸곤 했는지, 

너 혹시 잊어버린 것 아니냐? 


그토록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는 기도인 만큼, 

나는 이 기도를 바치는 사람에게 하나의 대사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도록 무한한 가치의 부를 지닌 한 움큼의 사랑을 준다.”

(천상의 책 제11권, 1913년 9월 6일)




“얘야, ‘수난의 시간들’을 쓴 상급으로, 

네가 쓴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한 영혼을, 한 번의 입맞춤을 네게 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루이사는, 

“제 사랑이시여, 그건 제게 주실 상급이겠지요? 

하지만 이 기도를 바치는 다른 이들에게는 무엇을 주시렵니까?” 

하고 여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이 ‘수난의 시간들’의 효과는 

사람들이 나와 어느 정도로 긴밀히 일치하여 바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나와 같은 뜻으로 이 기도를 바친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발음하는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한 영혼을 주겠다.”


 


“이 ‘시간들’은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고귀한 기도이다. 

오, 도시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바친다면 

내 마음에 참으로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도시마다 나 자신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테니 말이다!”


 


“딸아, 내 어머니를 기억하여, 

나에 대한 사랑으로 언제나 그렇게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할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몸소 세상에 계시면서 

당신 삶을 다시 살고 계시는 것처럼 느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상의 책 제11권, 1914년 10월)


(‘수난의 시간들’을 바칠 때 성모님과 함께 바치도록 하면서, 

그렇게 하라고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수난의 시간들’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내 기쁨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알면 참 좋겠다. 

게다가, 늘 이 기도를 반복하다보면 너도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천상의 책 제11권, 1914년 11월 4일)




“딸아, 

세상은 내 수난을 초래한 행위들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다. 


나의 무한성이 모든 사람의 내부와 외부를 휩싸고 있고 

따라서 그들과 맞닿여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접촉으로 말미암아 수난 때에 겪은 것들, 

곧 그 못질과 가시관과 채찍질과 멸시와 침뱉음과 여타 모든 것을 

겪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도 그 때보다 한층 더 심하게 겪고 있다. 


그런데 누구라도 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하고 있으면, 

이 기도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못과 가시들이 뽑혀지고 

상처들이 아물고 침이 닦여지는 느낌이 든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당신께서 무한한 당신의 신성으로 

모든 사람의 외부와 내부를 감싸고 그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들로 인해서 지금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계신데 

그것을 아물게 하는 그 역할을 이 ‘수난의 시간들’이 위로 해줄 수 있습니다.)




“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하는 사람은 

나의 생각과 보속과 기도와 열망과 애정을, 

심지어 내 가장 내적인 본성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삼게 된다.”

(천상의 책  제11권, 1914년 11월 6일)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본성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루이사가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하고 있을 때, 

복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딸아, 내가 지상생활을 하는 동안 

수천 수만의 천사들이 나를 호위하면서, 

내가 행하는 모든 것, 즉 나의 활동과 말과 심지어 탄식까지, 

그리고 나의 고통과 피를 방울방울 다 모았다.


들은 나를 흠숭하며 

내 모든 지시에 따르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들이었으니, 

내가 행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 가져가려고 

하늘로 오르락내리락 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 천사들은 지금도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나의 생애와 수난과 내 기도를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으면 

그 사람 주위를 에워싼다. 


그의 말과 기도와 눈물과 예물과 나에 대한 동정심을 모아서 

나의 것들과 합하여 내 옥좌 앞으로 가져옴으로써 

나 자신이 지상에서 보낸 생애의 영광을 새로이 하려는 것이다. 


이 천사들은 매우 큰 기쁨에 싸여 

그 사람의 기도소리를 들으려고 공손하게 기다리며, 함께 기도한다. 


그러므로, 

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을 집중하여 경건하게 기도해야 한다.


천사들이 그를 따라 하려고 

주의를 온통 쏟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천상의 책 제11권, 1916년 10월 13일)


(‘수난의 시간들’을 바칠 때 

천사들이 같이 기도하고, 그 기도를 예수님께로 가져간다.)




 “... 나는 네가 나의 고통과 기도와 나 자신 전체를 네 것으로 삼기 바란다. 

그러면 내가 네 안에서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난의 시간들’ 중 매시간 기도를 바칠 때마다 

각각의 행위와 모든 것 속에서 이 지향을 반복해야 한다.”

(천상의 책 제11권, 1916년 12월 9일)


(지향은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고, 또 인간들의 죄를 보상하려는 지향입니다.)




“이 ‘수난의 시간들’은 

천국에서부터 땅과 연옥과 하늘에까지 끊임없이 내리는 이슬이랍니다.”...

(내가 중간 중간만 읽기 때문에 이것은 그냥 읽어 드리겠습니다.)



루이사는 어느 날 연옥 영혼들과 성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분께서는 연옥에 들어오는 모든 영혼이 

‘수난의 시간들’의 날인(捺印)을 지니고 있고 

이 ‘시간들’의 도움과 호위를 받으며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시며 

기쁨을 느끼십니다. 


천국으로 날아가는 영혼들도 모두 이 ‘수난의 시간들’의 동반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이 ‘시간들’은 

천국에서부터 땅과 연옥과 하늘에까지 끊임없이 내리는 이슬이랍니다.”...


(‘수난의 시간들’이 

죽은 영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할 때에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는 나의 피와 상처와 열망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면, 

곧 내 생명이 거듭 재현되고 있음을 내가 느낀다면, 

이 ‘시간들’에 의하여 무슨 선이든지 다 얻어 낼 수 있지 않겠느냐?”

(천상의 책 제12권, 1917년 5월 16일)




“내 ‘수난’에 대해 기도하는 낱말마다, 

생각과 연민과 보속과 내 고통에 대한 기억마다, 

그 모든 것이 

이 영혼과 나 사이에 전류처럼 흐르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야?”

(천상의 책 제12권, 1918년 7월 12일)


(‘수난의 시간들’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로 일치하는 부분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수난의 시간들’ 책으로 매일 기도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어떻게 받으셨느냐 하면, 

감수하고 견디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삶은 어떤 때는, 괴롭고 어떤 때는 위안을 주는 

갖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지나간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아들으려 하지 않지만 

무릇 바라는 건 

눈이건 우박이건 더위건 군소리 없이 감수하는 

초목과 꽃을 본받을 일이다.


고통을 잘 견디는 참된 방법은 

그것이 누구에게서 오든지, 또 어떤 고통인지를 보는데 있지 않고

이 고통에서 나오게 될 선을 보는데 있다.


이것이 내 수난의 방법이었다.


즉 사형 집행자 들이나 고통들을 보지 않고 

이 고통에 의해서 

내게 그것을 끼치는 사람들에게 베풀게 될 선과 

인류에게 오게 될 선을 보는 것이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면서 

수난의 전 과정을 온전히 지속 시켰던 것이다.


(그러니까 수난의 결과를 바라보면서 수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네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마귀들에 의한 것이건, 

다른 사람들에 의한 것이건, 

너의 더욱 큰 선행을 위하여 나의 안배에 따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굴욕은 

감수 할 뿐만 아니라 좋아하기도 해야 하는 것으로써

음식물을 씹는 것과 같이 받아 드려야 한다.


수모 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 밖에 알지 못하게 되고

결코 겸손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의상을 입고

내 앞에 빛을 내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을 다하여 내게 감사하여라.


그리고 나를 거슬러 저질러지는 죄인들을 보속하기 위하여

너의 그 모든 괴로움과 피로와 고뇌를

찬미와 보상의 제물로 내게 봉헌하여라.”


 




특별한 사람들의 경우 산 제물로 봉헌되고 그러는데,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에 대하여 말씀 하십니다.



“딸아, 영광스럽게 된 내 몸은 이제 고통을 받을 수 없기에 

내 수난을 계속하기 위하여 너를 쓰고 있다. 


지상 생활 동안 내 몸을 써서 그렇게 했던 것과 같이 

내가 네 몸 안에서, 네 몸을 사용하여 수난을 계속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 앞에 보상과 속죄의 산 제물로 너를 바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루이사나 특별히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수난의 고통을 겪는데 

그 고난을 예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고통을 겪고 

그것을 하느님께 봉헌 한다는 것입니다.)



"오, 산 제물로 사는 이들의 능욕이여, 

그들은 우리 천사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그들의 고통으로 해 낼 수 있다. 

오,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나오는 선을 안다면 

이런 영혼들이 많아지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천사의 말입니다.)




"나의 자비를 드러내고자 

너를 지속적인 산 제물의 처지에 있게 한 것이다."


(루이사 피카레타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여 엄청난 고통을 겪는데 

그 고통이 바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산 제물로 봉헌됨으로써 겪는 고통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십자가가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쭉 열거를 하고 있는데, 

여기까지를 읽어드립니다.



“십자가 안에 지극히 값진 선이 있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그것이 영혼을 얼마나 고귀하게 만드는지를 안다면 

누구든지 예외 없이 십자가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를 소유하는 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와 아울러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보석을 얻기 때문이다. 



(루이사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내 사랑아, 너는 온전히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십자가를 반상(返償)하여라. 


십자가는 하늘과 땅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너에게 부여하여 

무한한 아름다움을 모두 지니고 계신 하느님을 매혹 할 수 있다. 


너는 잠시 동안이 아니라 영원토록 무한한 부요함으로 충만해 지기를 원하느냐? 


네 마음속에 천국과 천국의 모든 보화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더욱더 십자가에 사로 잡혀라. 


십자가가 너에게 모든 부요함을 안겨 줄 것이다. 


보아라, 십자가는 하나이지만 그것은 몇 개의 널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하늘은 하나이지만 

더 영화롭거나 덜 영화로운 여러 처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뜻한다.



오, 모든 이가 고통의 고귀함을 안다면 

누가 고통을 더 많이 받는지를 보려고 서로 경쟁을 하련만,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을 영원히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십자가를 우리가 아주 싫어하잖아요. 아주 싫어한다고)



십자가는 영혼들로 하여금 인내심을 가지게 한다.


십자가는 하늘을 열고 하늘과 땅을,

곧 하느님과 영혼을 결합시킨다.


십자가의 힘은 강력해서 이것이 영혼 안에 들어가면,

모든 지상적인 것들로 하여 생긴 녹을 제거 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에 대한 지겨움과 혐오와 멸시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는 사람이 많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십자가의 힘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매우 찬란한 빛을 영혼에게 주기 때문에 영혼이 투명해 진다. 


십자가를 감수하며 그 때문에 내게 감사하면 

나는 즐거워하며 그들에게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서 큰 영예와 영광을 받으며 큰 기쁨을 얻고, 

그들에게는 더 없이 큰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해서 감사 할 때,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체성사가 다가올 영광의 보증이라면

십자가는 그 영광을 사기위해 지불하는 대가(代價)이다.


나는 두 가지 십자가 위에서 영혼들을 완성시킨다.

하나는 고난의 십자가요, 또 하나는 사랑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성사이다. 


성사 마다 각각의 특별한 효력이 있으니, 

어떤 성사는 죄를 없애주고, 다른 성사는 은총을 주고, 

또 다른 성사는 영혼을 하느님과 결합시키고, 

또 다른 성사는 힘을 주는 등 여러 다른 효력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효력을 한곳에 모아드려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영혼 안에 낳아 주는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다.


십자가는 

따라서 아주 짧은 기간에 본래의 상태와 유사하게 영혼을 회복 시켜준다."




"모함과 박해와 반대는 하느님의 섭리가 허락하는 것이니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기 위함이요.


창조의 순간과 같이 어떤 인간이 누린 의짓거리도 없이

오직 창조주와 하나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착하고 거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인간적인 심성이 내적으로 항상 남아 있기 마련이고 

외적으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희망하고 신뢰하며 의지하는 것 속에도 언제나 인간적인 무엇이 있으니, 

남들에게서 존중과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함과 박해와 반대의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기 시작하면 

그 인간적인 심성은 그야말로 파괴적인 우박 폭풍을 만난 격이 된다.


그런 사람의 처지가 된 그는 자신이 혼자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 있을 수가 없다. 

태초부터 혼자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가련한 사람은 어떻게 하겠는가?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고 그의 중심이 하느님께로 온전히 돌아오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그에게 주시고 

그는 지성을 써서 하느님을 알며 

기억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의지로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게 된다.



딸아, 여기에 인간이 창조된 목적과 그 성취가 있다. 


그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고 

거룩하게 되며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이런 후에 사람들과 다시 접촉하게 되어 

그들에게서 도움과 지지와 존중을 받게 되드라도 

그는 이런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체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무관심으로 받아드리게 된다. 


이를 사용하는 것은 

다만 그 안에서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을 볼 때뿐이다. 


그러니 그는 언제나 홀로 있을 수 있게 된다."




"십자가는 착각을 깨우쳐주는 일차적인 것이고,

인간의 행업에 대한 의뜸가는 심판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굴복하면 

십자가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게 해 준다.


사람이 세상살이에서 십자가의 판결에 복종할 때 

나는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착각을 깨우쳐주는 2차적인 것, 

곧 죽음이라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데 그

때에는 특히 십자가의 판결을 회피한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로부터 더없이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십자가의 판결은 전적으로 사랑의 판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드리도록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십자가를 잘 받아드리고 하느님 뜻 안에서 잘 살면, 

우리가 점점점점 변화되어서 어떤 상태가 되느냐 하면,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거처가 되고, 

이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고 

또 죽으면 천국에 직접, 직 천당을 가게 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작은 하느님이 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조금 더 나가면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 안에서 하신 일을 본받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의 하느님, 작은 하느님이 된다고 하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도 분량이 한 시간 정도짜리니 

작은 하느님이 된다는 부분만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뜻은 하늘과 땅에 존재할 수 있는 최상의 정점이다. 


사람이 여기에 도달했을 때에는 모든 것에 도달한 것이며, 

모든 것을 이룬 것이다. 


그에게는 이 최상의 것들 속에서 살면서,

 이를 즐기고 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의 뜻은 대단히 위대한 것이라서 

이를 실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땅에 신이라고 불릴 만하다.



나의 뜻을 행하는 영혼은 성삼위의 내적인 활동에 참여한다.

이 특별한 은혜는 

오직 나의 뜻 안에서 사는 영혼을 위하여 예비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영혼은 

우리 성삼위의 모든 외적인 업적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이 외적인 업적들로부터 내적인 업적들로 넘어 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뜻을 행하는 영혼으로 말미암아 

황홀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을 우리와 공유하는 영혼에게 

우리 것이니 그의 것이니 하는 구분이 없다.


가장 순고하고 탁월하고 영웅적인 행위는 나의 뜻을 행하며

나의 뜻 안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나의 뜻 안에서 행동하는 영혼은 내 모든 속성들을 옷 입듯 입게 된다.


(하느님의, 예수님의 모든 속성을 옷 입듯이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께서 지혜롭고 힘 있고 의로우시기에,

지혜롭고 힘 있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다른 모든 속성도 입게 된다.


요컨대 작은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 뜻 안에서 살면 

완전히 그분의 속성을 입어 작은 하느님으로 까지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짝짝짝 박수소리.



하느님 뜻의 영성 서적 안내



하느님께서 루이사 피카레타를 통하여 알려주신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에 관한 서적들을 안내합니다. 

수난의 시간들이라는 책의 부록에 있는 내용입니다.



1. 하느님의 뜻이 영혼들 안에 군림하실 때에


루이사 피카레타가 쓴 천상의 책 11권과 12권에서 하느님의 뜻에 관한 글을 주로 뽑아놓고 다른 책에서 일부를 뽑아놓은 책이다. 이 책은 하느님 뜻의 영성을 이해하는데 입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따라서 루이사의 글 중에서 제일 먼저 읽으면 좋은 책이다.



2. 기쁜 소식


루이사가 쓴 천상의 책 36권 중에서 하느님의 뜻에 관한 핵심적인 글만 모아놓은 소책자이다. 이 책은 루이사를 통하여 알려주신 하느님의 뜻의 영성에 관하여 오랫동안 연구한 사제가 편집한 책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영혼들 안에 군림하실 때에”를 읽은 후 읽으면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


이 책은 성목요일 오후 5시에서 성금요일 오후 5시까지 예수님의 수난을 24시간으로 나누어 묵상하며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책이다. 루이사는 매일 이 기도를 바쳤고 오늘날도 하느님의 뜻의 영성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매일 바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아주 강력한 효과를 가진 기도이다.



4. 하느님 뜻의 나라 동정마리아


이 책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신 성모님께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대로 사셨는지 한 달 동안 매일 묵상하며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책으로, 5월 성모 성월이나 묵주기도 성월에 매일 묵상하며 바치거나 성모신심을 키우고 싶을 때 바치면 좋은 책이다.



5. 천상의 책 1권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천상의 책 1권은 루이사가 어떻게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되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루이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신비체험들이 기록되어 있어서 루이사와 루이사의 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따라서 천상의 책 2권 이하를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어야 다른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앞으로 천상의 책 36권을 모두 번역하여 출간할 예정이다.



6. 하느님 뜻 안에서의 영적 순례


이 작은 책은 영혼이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서 창조 및 구원의 모든 역사(役事)를 순례하면서 하느님 뜻의 나라가 땅에도 오시기를 간구하기 위한,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은 24시간으로 나누어 천지 창조에서 예수님의 승천까지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는 책이다.



7. 영광의 책 - 하느님의 세 번째 피앗


여기에는 하느님 뜻의 나라의 도래에 관한 110항의 질의응답이 들어 있다. 

그 내용은 하느님 뜻의 나라에 관한 것인데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을 살 때 생기는 의문점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된다.



8. 하느님의 뜻 기도서


이 책은 하느님의 작은 딸 루이사 피카레타가 지어 사용한 40여 가지의 기도를 모아 놓은 책이다.



■ 위에 소개한 책 중에 2 - 5번의 책은 이미 출간 되었고 다른 책들은 앞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말을 들어서 글로 옮기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고 또한 무슨 말인지 여러 번 들어도 생소한 말도 많았는데 그나마 번역본과 대조하면서 많은 부분을 수정하여 재편집하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이 범주 신부님의 강의를 보시고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고, 또한 새로운 ‘하느님 뜻의 영성’에 많은 분들이 동참하여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성덕을 선물로 받으셔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고 하느님 현존을 내 안에 모시고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사시도록 기도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은 모든 것이옵나이다.

하느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끊임없이 저희 안에 머무르시어

당신 말씀으로 저희를 길러 주시니,

저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아버지의 뜻 안에서 감사드리나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드리나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