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54 pp.276-284 제 3편 제 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5절 직무

은가루리나 2019. 1. 19. 17:46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24 추천 0 2012.12.12. 05:27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276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4 장 육체(肉體) 및 정신(精神)의 

각가지 자연적 선(自然的 善)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 5 절  직무 ( 職 務 )




자유의 몸으로 있는 이는, 

자기 취미에 맞는, 또한 그 적성(適性)에 알맞는 일을 구하고,

그것에 관해서 단지 그리스도교적 현덕(賢德)의 법칙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수도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스스로 일을 선택할 수가 없다.



우리는 평수사(平修士)로 머물러 있느냐,

또는 물질상 혹 정신상의 직분이 주어지느냐 하는 것은 순명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거룩한 위탁을 실행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즈네브」의 거룩한 주교「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격언에 따라야 할 절호의 기회이다.


따라서,

우리는 천주의 의지를 될 수 있는 한 훌륭하게 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자기의 의지에 따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자기의 의지에는 두개의 암초(暗礁)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임무를 구함에 있어 처하게 되는 위험,

또 하나는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순명을 어긴다는 것, 

이것이다.


p.277


그러므로,

우리는 불확실한 동안에는 아무 일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 일도 구하지 않고,

도리어 거룩한 무관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 아니겠는가.


실제, 우리는 어떤 임무를 떠맡는 것,

또는 별로 이렇다 할 임무를 가지지 않는 것의 어느 편이

천주의 뜻에 보다 잘 적합하고 우리의 영혼에 보다 유익한지 모른다.




특별한 임무를 가지지 않는 경우에는,

우리는 많은 위험과 책임을 면하고,

천주 한 분의 소유이며, 사소한 분할(分割)도 없이,

감미롭고 거룩한 마리아의 일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데도,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왕국을 지배하는데도,

완전히 자유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무위한거(無爲閑居)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매우 힘드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과연 견인불발(堅忍不拔)의 힘으로,

그것에 전념할 만한 인내와 용기가 항상 있겠는가.



또는 도리어 한가한 사람처럼 마음 내키는대로 

기분 전환의 구실을 만들거나,

자기에게 관계가 없는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고도 보장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여하튼 우리는 임무에 있어 발견되는

희생과 헌신과의 허다한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p.278


이에 반하여,

임무는 우리에게 자아포기와 근심과 굴욕의 풍성한 수확을 가져 온다.


임무는 이것을 중요시하는 이에게 있어,

하나의 무거운 짐, 때로는 매우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임무는 희생에 의한 성화(聖化)에 유익한 점이 크다.



그리고, 정신상의 임무는 더욱 막대한 이익을 가져 온다.


즉 이와 같은 임무는 가르침의 양식을 나누어 주고,

날마다 훌륭한 영혼과 접촉하며,

그리고 항상 좋은 모범으로써 설교하기 위하여 선을 행하는 

행복한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한다.



그러나 그 임무가 가져 오는 책임도 또한 매우 무거운 것이다.


그것은, 자기 양떼가 충분한 선업의 열매를 거두지 못할 적에는,

주께서 우선 우리 자신에게 그 책임을 추궁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靈的)인 일을 소홀히 하여,

다만 물질적인 것에만 마음이 빼앗기고 

또는 그 임무에 있어 방종에 흘러, 

본성의 경향에 안일을 주는 염려는 없겠는가.




요컨대, 위에 말한 것, 그 밖에 비슷한 일을 고려하여,

우리는 자기 소망에 관하여 극히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에 이르리라.


「주여, 당신의 영광과 나의 참된 선익을 위하여

임무 안에 날을 보내는 것과 임무 없이 머물러 있는 것과의

어느 것이 좋은 길입니까.


주여, 당신이 알으시는 바와 같이,

나는 이것을 모르오며 그래서 나는 온전히 당신께 신뢰하나이다.


당신과 나의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이를 처리하소서.

이것을 온전히 당신께 맡기나이다. 」라고.


p.279


그렇다고 우리는 무엇인가 소망을 품고,

그것을 효애의 마음으로 나타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인가.


물론 허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미묘하고 경계를 요하는소망이다.


성「알퐁소」가 지당하게 주의하고 있는 것처럼,

「선택하기를 좋아한다면,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임무를 택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선택의 자유가 부여돼 있다면,

가장 바랄 만한 임무는 

가장 비천한 것, 가장 고통스러운 것, 일이 가장 많은 것,

천주를 지향하여 보다 많이 겸손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도 소망을 간직한다는 것은

거룩한 박사에게 있어 매우 의아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말한다.


「그대가 비천한 임무를 바라고 나서,

그것에 수반하는 치욕을 기꺼이 받아들여,

혐오와 고배를 극기와 비하를 무릅쓰고

인내할 수 있을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를 과연 알고 있는가」라고.


요컨대 그에 의하면, 어떠한 임무인건,

그것을 바라는 것은 유혹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다.(「대화편」6, 21)




명예스러운 임무를 바라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보다 높은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믿어,

현재의 것보다도 높은 임무를 바라는 사람들은,

만일 이 소망이 

천주의 영광과 악인의 구령에 대한 사심(私心)이 없는

열심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묘하게 미혹(迷惑)되고 있다.


그러한 소망은 그 자체가 숨은 야심을 드러내며,

또한 존중되고, 중요시되며,

편리한대로 생활하겠다는 소망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러한 소망은 얻으려는 임무가 현재 종사하고 있는 그보다도 높은 것,

또는 마음에 드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만일 그대가 참으로 겸손하다면,

높은 지위나 중요한 직책은

그대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나 부여될 것을 바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른 어떤 사람도 그대보다도 이 명예를 받기에 알맞고,

또한 오만한 마음을 품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이 보다 적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 완덕」논술 8,14)


p.280


그러므로,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와 함께 다음과 같이 결론하자.


즉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온전히 천주의 섭리의 손에 맡기는 것은 

언제나 최상의 길이다.


왜 갑보다 오히려 을을 바랄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가 천주의 성의에 맞갖고,

그 의지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천주께 맡겨드리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순명이 우리 수업(修業)에 가치를 준다.」


수도 생활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우리는 순명에 의해서 부과되는 어떤 임무라도 받아 들일 결심을 하고 있자.


「그 임무가 아무리 높은 것이거나, 낮은 것이거나,

우리는 다만 겸손하게 받고, 

그리고 물어보지 않는 한,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이것을 받자.


그리고 질문을 받았을 적에는,

생각한대로 단순하게 대답하기로 하자.

(「대화편」6, 21)



성의대로 우리를 처리하시도록 천주께 맡기고, 

그리고 천주를 향하여, 

「나의 운명은 당신의 손에 달렸나이다.」(성령 30.16)




나는 그런 생각 안에 조용히 살며,

그리고 그것에 관해서 더 알기를 바라지 않나이다고 기도하는 것보다,

천주께 보다 빛나는 사랑과 신뢰의 증거를 드러낼 수는 결코 없다.



장상이 말했을 때,

그것은 천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주께서는 다만 사건으로써

그 임의의지(任意意志)를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그 대리자(代理者)의 입을 통하여 그 의지를 드러내신다.


주께서는 애당초 우리 위에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계시는데

수도서원에 의해서 우리는 천주께 대하여 새로운 의무를 지며,

또한 수도단체에 자신을 바쳤다.



장상은 천주와 수도원의 이름으로써,

우리가 약속한 일을 요구할 공적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하나는,

장상이 거룩한 회칙(會則)에 따라서 우리를 처리할 것을 승낙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평수사의 위치에 두는 것도, 무슨 임무를 명하는 것도,

또는 그것을 면하게 하는 것도, 모두가 장상의 직분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약속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



장상은 기도하고, 남에게 조언을 청하며, 숙려하고,

양심에 따라서 회칙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고 수도자의 수와 재능에 알맞게 결정한다.  p.281



장상은 천주와 상위(上位)의 장상에게만 복종하여야 한다,


그는 하등 우리의 승낙을 청할 필요는 없으며,

그 이유도 말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수도자의 영혼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그의 의무이며,

동시에 자신과 우리와의 이익이다.




그리고 어떤 임무를 우리에게 배당하시는 천주께서는,

그에 적절한 은총을 주신다.


자기의 취미와 혐오의 정을 버리고,

우리가 기꺼이 그 바라시는 곳에 향한다면,

어찌 천주께서 우리를 버려두시겠는가.



어떤 임무가 너무 하찮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절할 권리는 우리에게는 없다.


오만과 선덕의 부족처럼 경멸해야 할 것은 또 없다.

지극히 높으신 분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는 낮은 임무는 없다.



가장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신앙과 사랑과 충실함으로써 이것을 고상한 것으로 한다면,

천주의 눈에는 측량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가장 거룩한 동정 마리아께서「세라핌」들 보다 훨씬 위에 올려지신 것은,

가장 흔한 일상사를, 가장 거룩한 의향으로써 성화시키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도단체는 그 온 유기체(有機體)를 필요로 하는 몸이다.

즉, 그것에는 머리가 필요하며, 손발도 역시 없어서는 안된다.


어떤 권리로,

우리는 발보다 오히려 머리이기를 손보다도 눈이기를 바라겠는가.


우리가 현재의 직무를 자신의 가치에 알맞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경멸한다면,

우리에게는 겸손이 부족하다.



더구나 천주께서는 겸손을 닦게 하시려는 뜻에서

바로 우리를 그러한 직무에 두시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정신의 오만과 감각의 예민함을 막아주는 직무에 있어

기꺼이 천주를 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천주께 대한 사랑과 충성과의 가장 현저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p.282


우리는 또한 그것이 우리의 가치를 초월하다는 이유로

어떤 임무를 거절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순명을 마비시키고 거룩한 약속을 망각시키는 것과 같은

겸손이란 얼마나 괴상한 것이랴!



우리의 적(適), 부적(不適)을 판단해야 할 이는

우리가 아니고, 장상이다.


우리를 선택 할 책임을 지는 것은 그이이며,

우리에게는 순명의 일만 남아 있다.


물론 우리가 스스로 임무를 구하고 그리고 소망대로 주어진다면,

참으로 두려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임무를 배당하신 것은 천주시므로,

천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이미 앞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천주께서는 보잘 것 없는 연장으로써도

탁월한 걸작을 만들어 내시는 명장(名匠)이시다.



천부의 재능은 덕과 힘을 같이 해서 비로소 귀중한 것이 된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무엇보다도 특히 당신의 연장은 

쓰기 쉽고, 온순한 것,

즉 겸손과 순명을 갖춘 것이기를 바라신다.



또한 천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반드시 성공이 아니고,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만족하신다.




끝으로 임무 안에 영혼이 처하게 되는 위험을

너무나 경솔하게 핑계로 삼아,

이것을 거절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이런 뜻으로 성「알퐁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대는 혹 임무 안에 있어 범하기를 두려워 하는 죄 때문에,

이것을 거절할 권리가 천주 앞에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수도생활에 들어갔을 때에는,

우리는 수도원에 대해서 최선의 봉사를 할 의무를 받아 들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죄를 범하는 두려움이 핑계가 된다면

누구나가 그것을 방패로 삼을 것이다.

그래서야, 수도원 안의 직무와 수도단체의 관리를 위해서는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는가.


천주의 임의의지를 완수하도록 지향하자.

그러면 천주의 도우심은 그대에게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정배」7장 3절의 10 )


p.283


이것을 요약하자면,

「천주께서는 바라시는대로 우리를 처리하시도록 맡기고,

우리에게 부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임무를 기대하여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겸손되이 이것을 받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고,

너무나도 우리의 자연적 경향(自然的傾向)에 맞는 것과 같은,

또는 때로 우리의 구령에 있어 위험한 직무가 없지도 않다.


그런 때,

장상에게 그들이 아마 알지 못하고 있는 각가지 경우를 알리는 것보다,

더욱 적절한 그리고 때로는 더 필요한 일은 없다.


물론 회칙이 그러한 경우를 위하여 명하는

겸손과 순명과 유화함으로써 이것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정중한 건의에도 불구하고,

장상이 아직도 명령을 철회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 보다 유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자기 자신에게 깊이 경계하도록 마음 쓰며,

은총의 도우심에 신뢰하여 사랑으로써 명령을 수락하자.


그리고 후에는 항상 장상에게 자기 행동을 알리는데 충실하도록 힘쓰자.」

(「지도서」제7편1장)


p.284


결론으로서「로드리게스」신부의 중요한 주의를 여기에 인용한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천주께서 우리에게 관하여 고려하시는 것은

수도원 안에 있어 우리가 수행하는 임무의 중요성이 아니다.


장상이건, 설교사이건, 문지기이건, 제의방지기이건,

천주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 일이다.


천주께서 보시는 것은 

각자가 그 임무를 어떻게 완수하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문지기가 그 임무에 대하여 장상보다 탁월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면,

그는 천주의 총애를 받고, 보다 탁월한 보수와 영광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천주께서 그대에게 주시지 않았던 은혜도

또한 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도 바라서는 안된다.


그대의 성화(聖化)에 의해서 천주께 영광을 돌리도록

오직 주어진 직책을 잘 수행할 것,

또는 받은 재능을 잘 사용할 것에만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완덕」8,15 )




그러므로 우리는 임무를 방패로 삼아,

공동생활의 규율과 내적 생활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말고

도리어 자신의 임무를 영원한 광명에 비추어 천주 보시는데서 수행하고,

겸손과 순명에 견고하게 서 있으며,

그리고 선덕에 진보하기 위하여

직책의 의무와 어려움을 선용하도록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오직 필요한 것, 이익 중 최대의 이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