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55 pp.284-288 제 3편 제 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6절 휴식과 평온

은가루리나 2019. 2. 2. 16:41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205  추천 0  2012.12.26. 22:11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284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4 장 육체(肉體) 및 정신(精神)의 

각가지 자연적 선(自然的 善)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 6 절 식(休息)과 온(平穩)




영적(靈的)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나,

어떤 종류의 임무에는 허다한 번민과 피로와 근심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한 임무에 있어서는 

사람은 이미 다소의 틈도 자유도 없으며,

일, 기도, 신심(信心)의 독서 등의 복판에도 

끊임없이 누군가에 괴롭혀지고 있다.



이에 반하여,

어떤 종류의 임무는 단지 약간의 노고만을 요구하며,

근심도 분망함도 부과하지 않는다.

더구나 특별히 직책을 가지지 않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p.285


휴식과 평온은 회칙의 준수와 내적 생활의 영위를 매우 쉽게 한다.


우리는 그런 것 안에 있어 

마음껏 자기 영혼의 함양에 전심하고

종일 천주와의 일치를 간직할 수 있는 편리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자기 직책의 의무를 완수하고 공동의 선익을 위하여 진력해야 할 때에도 

왕왕 이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때로는 그것을 쉬이 떠날 수 없을만큼 깊이 애착하는 일도 일어나기 쉽다.



휴식과 평온에의 이 애착은, 그 자체 아무리 정당하드라도, 

위와 같은 경우에는 이미 과도한 것이 되며,

범용(凡庸)한 이기주의(利己主義)에 빠지고,

무사무욕(無事無慾)이나 헌신(獻身)을 망각한 이가 되며,

또한 참된 사랑의 불꽃을 꺼버리리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게 있어서도 남에게 있어서도 매우 쓸모없는 이가 된다.




어떤 직무에 부수돼 있는 번민, 근심, 끊임없는 분망은

우리에게 희생과 자아포기와의 무진장한 광산(鑛山)을 제공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죽기를 바라는 이에게 있어서는 참된「갈바리아」이며,

만인을 위하여 간단 없이 바쳐지는 희생이다.


그러나,

이런 용무와 걱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어 자신의 내적 생활을 소홀히 하고,

행동에 있어, 초자연적 정신이 결여된다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력만 아끼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의향을 순수하게 하고,

자주 자기 영혼을 천주께 올려, 충분히 잠심(潛心)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성「벨나도」, 성녀 대 「데레사」, 성「알퐁소」,

그 밖에 많은 성인처럼 매우 분망한 이가 또 있었는가.


그들이 그와 같은 일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많은 저술을 남겼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쳤으며,

극히 완전한 관상자(觀想者)가 될 수 있는 틈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인지 

이상하게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그런 일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p.286


천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에게 있어 가장 유익한 것은, 

분망 가운데 있는 것인지, 평온 안에서 안식하는 것인지,

그것은 오직 천주께서만 알으신다.


그러므로 

거룩한 무관심 안에 자신을 확립하고,

천주께서바라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미리 각오하고 있는 것은 현명한 길이다.


관상수도회(觀想修道會)에 불리운 우리가

천주이신 스승과의 친교(親交)안에 보다 쉽게 살기 위하여,

평화와 한적함을 바라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성「베드루」는 정당하게도 「다볼」산에 있음을 행복하게 여겨,

결코 거기를 떠나지 않고,

유화하신 구세주의 곁에 같은 장막 안에서언제까지나 머무르겠다고 열망하였지만,

그래도 「주여, 만일 원하신다면」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말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천주의 뜻이겠는가.

사람은 지상에서는 어디에도 영속하는 「다볼」산을 찾아낼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바리아」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인데,

그러나 

십자가를 선택하고 새로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실 것을 천주께 금할 권리는 

우리에게는 조금도 없다.


만일 천주께서 

어떤 직책에 있어 떼지어 닥쳐오는 무수한 십자가를 우리를 위하여 택하신다면,

우리는 신뢰하여 그것을 받자.



천주는 그르치실 수 없는 예지, 가장 인자하신 아버지시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죽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시련이 필요하였다.


자신이 택한 다른 십자가는 

의심 없이 그처럼 우리의 필요에 응하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여기에는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와 명시의지(明示意志)외의 혼합(混合)이 있다.


우리에게 허용되는 한, 

또한 의무의 아무 것도 해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평온과 한적함을 사랑하고 바라며, 구하고,

그리고 말하자면 

우리의 주위에 평화스럽고 한적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우리의 소명(召命)의 정신도 또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우리를 번민과 걱정 안에 두시는 것이 

천주의 성의에 맞갖은 일이라면,

우리는 천주께 대하여 「아나라」고 대답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그러한 경우에도 가능한 한,

내적 정신, 침묵, 천주와의 일치를 간직하도록 힘쓰자.


그리고 일 순간이라도 틈이 있을 때마다 이것을 이용하여,

보다 깊이 천주 안에 들어가도록 하자.


p.287


성「벨나도」는 그렇게 하였다.


그는 가끔 교황의 명에 의해서 오랜 동안 자기 수도원에서 떠나,

분망한 업무에 줄곧 쫓기기만 하였다.


홀로 천주와만 있고 싶다는 갈망을 품고「끌레르보」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나 돌아오자 마자,

그 최초의 염려는 

수련원을 찾아가, 자기의 새로운 아들들을 위로하고 

말의 젖으로 그들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오랜 동안 수도자들이 위안에 결여돼 있으므로,

그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 수도자들의 일을 염려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항상 말하였다.


「이미 오래전 부터,

사랑은 나의 사랑하는 모든 것 보다도 

먼저 그대들의 영혼을 위하여 진력하도록 나를 재촉하였다.


기도, 독서, 저술, 묵상 그밖의 신심행위도,

나는 그대들에게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손실처럼 생각하였다.


나는 일을 위하여 관상(觀想)을 떠나는 것을 인내한다.



그리고 설교 후에 

화를 내기 쉬운 이가 유화하게,

오만한 이가 겸손하게, 

담소한 이가 용감한 이가 되는 것을 보고,

나는 관상의 감미를 버린 것을 조금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주의 자녀들이 구원되기만 한다면, 나를 원하는대로 사용해도 좋다.


그들은 나를 아낌없이 사용함으로써만,

나를 괴롭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그들이 그 필요시에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그들의 소망에 응하고 싶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동안,

거짓 없는 사랑으로써 그들에게 봉사하면서 나의 천주를 섬기고 싶다.」

(「아가에 관한 설교」51, 52,  「시또회 대창립기」제1편 12장)


p.288


성「프란치스꼬. 살레지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일 누군가가, 

가장 연소한 사람이라도 그를 방문했을 때, 

성인은 마치 웃사람 앞에 나간 손아래 사람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누구도 귀중한 시간이 낭비될 때에도

조금도 귀찮다는 표시를 드러내지 않았다.


『천주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은 이것이다.

그것 외에는 무엇이 내게 필요하겠는가.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은 다른 일을 할 의무가 없다.

우리의 중심은, 천주의 의지이며,

그것을 제쳐 놓는다면, 헛된 염려와 분주함 뿐이다.』라고.

위에 말한 것은 성인의 금언이었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지오  「정신」1부15항)




「샹딸」의 성녀「요안나」는,

성인이 압도될 정도의 분망중에 있어도,

항상 천주와의 친밀한 일치를 간직하고,

모든 일에 있어 마찬가지로 천주의 거룩하신 의지를 사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괴로운 일도 그에게 있어 감미로운 것이 되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 성 프란치스꼬. 살레지오 전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