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

제3부 14 바빠야 산다?

은가루리나 2020. 1. 6. 16:02

 

pp286-290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

제3부 허무맹랑한 내맡김의 영성
14 바빠야 산다?
2010. 06. 16.




요즘 사람들은 모두 ‘바빠야 산다’고 말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쉼 없이 너무 바쁘면, 영혼이 죽는다. 
몸도 따라 죽는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도 너무 돌리면 고장이 나고, 빨리 폐물이 되어 버리는데 
기계도 아닌 인간이 너무 바쁘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조금만 한눈팔면, 
떠난 버스 바라보기가 되는 현대 사회에서 
‘느림Slow이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느린 삶을 살기 위해 
요가다, 명상이다, 마음 수련이다, 국선도다 하여 
이것저것 다 끌어들여 하다 보면 
거기에 어느덧 ‘신영성(뉴 에이지New age)’이 자리 잡게 된다.

신영성은 현대인들에게 딱 알맞은 영성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개인을 우선시하고 
통제받기를 싫어하는 시대의 흐름에 
무척 잘 어울리는 영성(?)이기 때문이다. 

기성 종교의 통제, 간섭, 규제, 한마디로 그 ‘잔소리’들을 
자신의 좁아진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싫어서 내가 내 돈 들여 나를 만드는데 
누가 나를 뭐라 해! 
내가 선택한 건강법도 내 돈 들였으니 내가 싫어 중단해도 
누가 나를 뭐라 해!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닦는 것, 수련이 결코 아니다. 
자기를 닦는 수련은 안 닦인 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타인의,
그것도 올바른 닦임을 받아 제대로 닦인 이에게만 가능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자신을 닦아 줄 훌륭한 스승을 찾아 삼만 리를 헤매 왔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자신을 닦으려고 
티베트니 인도니 미국이니 하며 큰돈을 들여 외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얼마 후 돌아온 그들은 또다시 더 큰 스승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참스승은 오직 한 분뿐!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내맡긴 이들에게 있어서도 스승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시다. 
영적 지도 신부는 단지 ‘보조 교사’일 뿐이다. 

수도자들이나 성인들께서 
‘나의 영적 제자, 또는 나의 아들, 나의 딸’이라고 부르셨던 것은
단지 그들이 먼저 진리를 깨치거나 수도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편의상 그렇게 불러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것일 뿐, 
참스승은 오직 스승 예수님, 한 분이시다.

스승을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참스승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맡기면 
예수님을 스승으로 얻게 되고 
모든 것을 스승 예수님께서 다 해 주시게 된다

스승 예수님이 모든 계획을 하나하나, 시시때때로 잘 알려 주시면, 
바쁠 필요가 전혀 없고, 
바쁜 일로 바쁜 상황이 되더라도 바쁘지가 않다, 마음이! 
바쁘지 않아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고, 
오히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내맡긴 이들은 초기에 ‘바쁨’을 맞닥뜨렸을 때마다 
계속해서 ‘느긋함’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노력하면 
그다음부터 아주 쉽게 그 바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하느님께 내맡김을 봉헌해 드릴수록, 
더욱 느긋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하느님께서 바쁜 일정조차 당신이 다 알아서 
이리저리 조정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조정에 내맡겨 드리면 드릴수록,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가 막히게 잘 조정해 주신다. 

정말 혀를 찬다, 정말로. 
그런 일을 몇 번 경험하면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뢰로 곧 
‘무뇌인간無腦人間이 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게 될 뿐이다. 

무뇌인간이 되기 위해 
그동안 내 안에 쌓고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을 빼내 버리려는 노력,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이 된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고기만 밝히듯이 
무뇌인간이 좋음을 한 번 맛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내맡기는 삶은 느림도 바쁨도 아닌, 
하느님 맘대로, 곧 엿장수 맘대로의 삶이다. 
하느님께 내맡겨진 이는 
하느님께 당신 맘대로 하시라고 자신을 내드렸고, 
엿은 엿장수 맘대로 하라고 엿판 위에 놓여진 셈이다.

내맡긴 이들은 
바쁨 속에서도 바쁨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바쁨을 즐기며, 
느림 속에서도 게으름 없이 느리지 않는 느림을 누리게 된다. 
흐르는 물처럼 부는 바람처럼, 물을 타고 바람을 타고
그리고 하느님 뜻 속에서 그 뜻을 타고 살아가는 영혼이 된다.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나중에는 참으로 그렇게 완전히 되도록 이끌어 주실 것을, 
나는 아주 확신한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 이끄심을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이 바쁘다는 세상에서 남들이 바쁘다 해서 덩달아 바쁘지 말자. 
바쁨은 모든 것을 잃게 한다.

인생에서도 과속은 위험하다. 
앞만 보고 내달리는 고독한 인생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이다, 하느님께 말이다. 

그러면 도로 주변의 생명들에게로 눈이 돌려진다. 
생명 안에 살며시 숨어 계신 하느님,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그분, 
생명들의 주인이신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분을 만나면 곧 그분과의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바쁨을 모른다. 
바쁠 필요가 조금도 없다. 

바쁨은 사랑이 아니다. 
느림도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시간이 아니기에 시간을 모른다.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내맡김을 늦추려 함은 시간을 알고 시간을 헤아리는 것이다. 
시간은 없는 것인데 
어떻게 시간을 알고 시간을 헤아려 늦추려 하는가? 
그것은 시간 속에 들어온 ‘시간 아닌 시간의 홀림’, 
그놈의 유혹일 뿐이다. 

부디, 시간을 잊고 
시간 속에 자신을 내맡김으로 시간을 창조하고 
시간의 주인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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