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

차례 / 모든 것은 순서(順序)가 있습니다

은가루리나 2020. 1. 24. 01:01



내맡긴 영혼들이 나서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1) 

▣ 보조교사방


moowee 등급변경▼ 조회 406 추천 0 2018.01.12. 10:01




moowee 2018.01.12..09:34



◀ 루이사 피카레타(1865-1947) : < 천상의 책 >


◀ 마더 예우제니아(1907-1990) : < 아버지 영광을 위한 삶 >




{ 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면서

★아버지다운 내 사랑의 호소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알리고자 하는 이 무한한 사랑은 영원한 사실인 까닭이다.


★언제나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법을 다른 이들에게도 가르쳐 주어라.★


그러면 너희를 이처럼 뜨겁게 사랑하는 아버지를

오늘부터 내가 너희 모두에게 보여 줄 수 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아들들인 사제와 수도자들아,

너희는 모든 사람에 대한, 

특히 너희에 대한 이 아버지의 사랑을 알리도록 힘써야 한다.


나의 뜻이 모든 사람과 너희 안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하여라.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알고, 흠숭하고, 사랑하게 하는 일이다.


나에 대한 이 사랑을 활성화시키지 않고

시간을 끌며 내버려두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사랑받고 싶은 열망으로 내 목이 타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며 저는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먼저 

<루이사 피카레타(1865-1947)>를 통해서 당신 아드님의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 ★ 가르침(아버지를 사랑하는 법) ★ 이 널리 알려지지 않으니까,

그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직접 

<마더 예우제니아(1907-1990)>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주시지 않았나?" 하는.




* * * * * * *




루이사 피카레타의

<천상의 책>에서 어떤 오류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합니다.


마더 에우제니아의 

<아버지 영광을 위한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답니다.



그렇다면,

<천상의 책>의 예수님 말씀과

<아버지 영광을 위한 삶>의 성부 하느님의 말씀에서

그 어떤 한 가지라도 서로 다른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 어떤 말씀 한 가지라도 다른 말씀이 발견된다면

이 두 책은 서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맡긴 영혼들이 나서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1) 

▣ 보조교사방


moowee 등급변경▼ 조회 392 추천 0 2018.01.21. 08:43




질서[秩序]  (다음사전)

秩  10획, 부수 : 禾   차례 질

序  7획, 부수 : 广   차례 서


(1) (기본의미) 사물들의 규칙적인 배치나 배열. 또는 그 원칙.

(2) 일정한 범위 안에서 일의 원인과 결과를 지배하는 근본 원리.

(3) 하나의 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 간주되는 차례나 절차.




진리 [眞理] 참된 이치 

眞  10획, 부수 : 目   참 진

理  11획, 부수 : 王   다스릴 리


참된 이치. 또는 우주의 근원적 원리.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

본연의 위치창조된 목적에로 돌아오게 하시는 부르심




창조된 목적 = 본연의 위치 = 질서 =

원칙 = 근본 원리 = 참된 이치 = 우주의 근원적 원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불변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근본 원리(원칙)가 있고 질서(차례)가 있습니다.


근본 원리에 따라 질서가 바로서는 자리가 본연의 위치이며,

모든 사물이 그 본연의 위치 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목적 입니다.




모든 것은 순서(順序)가 있습니다.



순서 [順序]  

順(차례 순) 序(차례 서)


정해진 기준에 따라 여럿을 선후로 구분하여 나열한 것




하느님 신앙에 있어서도 순서가 있습니다.




순서를 지키는 것이

질서가 바로서는 길이며,

질서를 바로 세우면 모든 것이 본연의 위치로 돌아오며

그렇게 본연의 위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목적을 구현하는 일입니다.




<신명 6>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5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7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인들은 이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모세오경을 꿰차고 살았습니다.

또 그럼에도 하느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느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성경은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쟝 삐에르 꼬사드)과 

거룩한 위탁(동 비딸 러오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과 거룩한 위탁을 꿰차고

그 내용을 입으로 달달 외우고 머리로 다 저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본연의 위치, 질서를 벗어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목적을 잃어버린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하느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知彼知己"로부터! ■ 내맡긴 영혼은 ■ 


moowee 등급변경▼ 조회 715 추천 0  2010.11.05. 10:58



모든 일의 시작은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상대만을 알아서도 안 되고, 나만을 알아서도 안 됩니다.

자신과 상대를 모두 다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도 알아야 그 관계가 올바로 형성되고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면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느님이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 알고 얻게 되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지식

즉 "神學"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하느님이 직접 당신을 알려 주셔야 하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은 그 오랜 세월을 수많은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알량한 지식이 그것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그 낮디낮은 머리로 무엇을 자꾸 생각해내어

인간의 방식으로만 하느님을 알려 해왔던 것입니다.


이에, 

너무도 답답해하시던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환히 다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사랑이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아는 지름길"입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십니다(知彼).

또한,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저절로 "자신에 대해서" 올바로 알게 됩니다(知己).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靈眼이 열려

"자신이 얼마나 미약하고 미천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또,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그분의 지혜가 얼마나 높으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면 "知彼知己"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자신의 편지들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먼저 강조하셨고

또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찾아 얻을 수 있지만,

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더 먼저 가능해질 때,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저절로 뒤따라오게 되는 것이며 

더 쉬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알려면 먼저 하느님을 아는 것이 먼저이고,

하느님을 알려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알게 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본 모습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의 인간은 참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아마, 현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친 외침이 

바로 그 말이 아닌가 합니다.


하느님 앞의 인간은, 엄마 앞의 "똥싸개 젖먹이"보다 못한 존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미약하고 미천한 우리를 

"철부지" 또는 "어린이"로 대접해 주셨습니다.

엄청난 어른 대접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똥싸개 젖먹이가 

"엄마의 사랑"을 자기의 지식, 생각, 경험으로 알 수 없습니다.

엄마의 사랑을 아는 방법은 

그저 "엄마의 사랑"을 통해서 "느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느낌"입니다,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과 심장의 두근거림과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몸으로 느끼며 

엄마의 사랑을 알아 갑니다.

엄마의 사랑을 알게 된 똥싸개 젖먹이는 "엄마"만을 찾습니다.


똥싸개 철부지의 엄마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엄마만을 찾는 일"입니다.

무조건 엄마만을 찾습니다.

똥을 싸도, 오줌을 싸도, 조금만 배가 고파도, 조금만 추워도, 조금만 더워도,,,,,


엄마는 무조건 자신만을 찾는 자신의 똥싸개 젖먹이에 대해 

더욱 큰 사랑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엄마보다도 우리의 하느님은

무조건 당신께 모든 걸 내맡겨 매달리는 내맡긴 영혼들을 더욱 사랑해 주시며 

행복을 느끼십니다.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49,15)



엄마와 똥싸개 젖먹이와의 대화법은 오로지 "느낌"입니다.

엄마와 똥싸개 젖먹이는 서로 "척"하면 "착"입니다.


생각이 필요 없습니다,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경험이 필요 없습니다.


느낌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존재만이 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의 인간은 하느님을 느껴야 합니다.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면 

비록 그의 몸은 살아 있더라도 영은 죽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태22,32)



여러분!

하느님을 느끼십니까?

하느님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느끼십니까?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느끼십니까?

당신의 배우자나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뜨겁게 느끼십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배우자나 자식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맡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느님을 정말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무조건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을 애걸하십시오.

"사랑하는 저의 주인님, 제가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모든 일은 "知彼", "知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