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염불

일본의 정토사상

은가루리나 2020. 3. 22. 03:17

 

 

 

일본의 정토사상 ▣ 보조교사방

moowee 등급변경▼ 조회 408 추천 0 2012.11.13. 13:18


주교님으로부터 일본으로 가라는 인사명령을 접하고
일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들어가기 위해
지난 1월에 휴가를 내어 지리산에 들어가
웹서핑을 하던 중 발견된 서적들 중의 한 권입니다.

이미 이곳의 추천도서 게시판의
"염불에 관한 불교서적들" 에서도 소개해 드렸지만
일본에 오기 전, 책의 앞부분과 대충 훑어만 보았기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어제부터 오늘 오전까지 정독을 해 본 결과
이 책 안에는 "내맡김의 영성" 과 비슷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내맡김의 영성에 대해 모르는 분들은 읽기가 어렵겠지만,
내맡김의 영성을 아시는 분들은 쉽게 읽어나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일본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정토종과 정토진종".
독특한 일본의 불교를 창시한 일본 승려 호넨(法然)과
그의 제자 신란(新鸞)에 대해서,
특히, 정토진종을 창시한 신란의 정토사상에 대한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신란은
도겐(道原)과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사상가이며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는 인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생소한 인물이라
책 제목을 <신란의 정토사상의 이해>하지 않고
<일본의 정토사상>이라 하였답니다.


참고로 호넨(법연)은1133-1212이며, 신란은1173-1262 입니다.
 
 
 
 
 
 
moowee 등급변경▼ 조회 408 추천 0 2012.11.13. 13:18


주교님으로부터 일본으로 가라는 인사명령을 접하고
일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들어가기 위해
지난 1월에 휴가를 내어 지리산에 들어가
웹서핑을 하던 중 발견된 서적들 중의 한 권입니다.

이미 이곳의 추천도서 게시판의
"염불에 관한 불교서적들" 에서도 소개해 드렸지만
일본에 오기 전, 책의 앞부분과 대충 훑어만 보았기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어제부터 오늘 오전까지 정독을 해 본 결과
이 책 안에는 "내맡김의 영성" 과 비슷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내맡김의 영성에 대해 모르는 분들은 읽기가 어렵겠지만,
내맡김의 영성을 아시는 분들은 쉽게 읽어나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일본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정토종과 정토진종".
독특한 일본의 불교를 창시한 일본 승려 호넨(法然)과
그의 제자 신란(新鸞)에 대해서,
특히, 정토진종을 창시한 신란의 정토사상에 대한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신란은
도겐(道原)과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사상가이며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는 인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생소한 인물이라
책 제목을 <신란의 정토사상의 이해>하지 않고
<일본의 정토사상>이라 하였답니다.


참고로 호넨(법연)은1133-1212이며, 신란은1173-1262 입니다.
 
 
 
 
일본의 정토사상


제1장 이도(易道)
제2장 범부 신란(汎夫 親鸞)
제3부 신심(信心)
제4장 신심에 근거한 삶
제5장 상(相)과 무상(無相)



p.197

신심이란
<자연법이>로 작용하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리는
단순하고 순수한 행위이다.

이와 같이
아무런 걱정근심없이 아미타불의 은총의 세계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이 뛰노는 경지야말로
아마도 신란이 현세에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경지, 최고의 지혜와 통찰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실로
선불교적 <깨달음>에 매우 가깝게 접근한 경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할 점은
<자연법이 (自然法爾)>는
일차적으로 결코 신란 자신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죄악범부를 구원하기 위한 아미타불의 놀라운 활동을 가리키는 말
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코 신란의 열반 체험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며,
설령 그가 그러한 경지를 체험했다 해도
이것이 그가 성도문적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신란은 이 <자연(自然)>의 경지를
깨달음이 아니라 신심에 의해서 도달한 것이다.

그것은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얻는 자유의 경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미타불에게 맡기는 신심 속에서 얻어지는 자유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란은 이 단순하고도 심오한 은총의 세계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범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했던 것이다.

신심에 의해 실현되는 이 놀라운 은총의 세계에서는
중생의 악업도 즉시 선으로 전환된다.

<없어지지 않고> 전환되는 것이다.



<자(自)>란 저절로라는 뜻으로서,
저절로란 자연(自然)이란 뜻이다.

자연이란 것은 그렇게 되도록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된다는 말은
수행자의 어떠한 타산도 없이
그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선으로 전환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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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입하셔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삶을 사시는 분들이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참 좋은 책입니다.

정토사상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참고로, 불교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어떤 개신교의 홈페이지에 실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비판을 떠나서
공부하는 의미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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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으로 4월 초 8일 석가탄일입니다.
석가탄일은 말 그대로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입니다.


본명이 고타마 싯다르타인 석가는
기원전 6세기 경 인도 네팔 지방의 작은 나라인
카필라 성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위와 풍요를 누리지만,
29세에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번민하다가
처자를 버리고 출가합니다.

그는 6년 동안 고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인 수행에 전념하며
해결 방안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고행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결국
극단적인 고행이나 쾌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 석가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기초로 가르침을 전파하게 되는데
그 결과 불교라는 종교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럼 불교란 무엇일까요?

불교(佛敎)는 글자 그대로 '부처의 가르침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사상을 배우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또한 '부처가 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석가가 설법한 당시의 불교를 불교에서는 '원시불교'라고 합니다.

이 원시불교에서 소승불교(小乘佛敎)가 나왔고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나왔습니다.

소승불교는 스리랑카, 태국, 버마, 인도차아나 등에 두루 퍼져 있고
대승불교는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그러면 소승불교는 무엇이고 대승불교는 무엇일까요?


먼저 소승불교는 대승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불교로
출가주의(出家主義) 불교입니다.

출가는 가정생활, 성 생활, 경제 행위 등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초기 경정인 '스타니파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를 원해서도 안 되며 친구를 원해서도 안 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교제를 하면 애정이 생기고 애정이 생기면 고통이 생긴다.
애정에서 재앙이 나온다는 이 점을 명심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결국 이 말은 가정생활을 영위하면
애정과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열반에 이를 수 없으므로 출가하라.


그래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소승불교는
'출가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소승불교 뿐 아니라 석가가 설법한 원시 불교도 출가주의 불교입니다.

그런데 석가가 입멸한 후 수백 년이 지난 기원(紀元) 무렵이 되자
소승불교의 출가주의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출가하지 않고
구원 얻을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불교를 전개해 경전을 만들고 대승불교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가(在家) 신자도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소승불교가 가정생활을 버리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침인데 반해
대승불교는 "가정생활을 하는 것에 관계없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소승불교 측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본래 소승불교의 명칭은 대승불교에서 붙인 것입니다.

소승불교의 출가주의는 오로지 자기 혼자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출가주의를
후세에 생긴 대승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독선이라고 비난했고
가르침이 작다는 뜻으로 '소승'이라고 불렀습니다.

때문에 소승불교에서는 자신湧?불교를 '소승'이라고 부르지 않고
상좌부(上座部) 불교라 부릅니다.
 
 
 
상좌부 불교도들은 대승불교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대승불교가 비불설(非佛說)이라고 공격합니다.

즉 대승불교는
석가가 입적한 후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나온 신흥종교로서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비판입니다.

이들의 이런 비판은 억지가 아닙니다.

실제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에는
석가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석가의 사상은 원래 무신론으로
신 또는 신적 존재자에 관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대일여래나 아미타불 등과 같은 신적 존재자가 나옵니다.


또, 대승불교에서는
정토(淨土) 혹은 불국토(佛國土)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정토(불국토)는 기독교로 말하면 천국입니다.

그런데 정토사상은 원래 석가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즉 원시 불교에는 없습니다.


또한, 소승불교는 시종일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공(空), 즉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라고 보는 세계관입니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끝없이 변화하는무상의 세계 속에서 상주(常住)하는 것,
즉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을 잡으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대승 불교는 영원한 것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일파인 정토종에 이르면
원래의 원시 불교에는 없었던 ‘죄’의 개념이 거론됩니다.

일본의 승려 신란은 인간의 죄 문제를 강하게 인식했으며,
사찰 중에도 ‘참회멸죄사’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대승불교에는 말법(末法) 사상이라고 하는 역사관 및
미륵이라는 미래의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석가가 입멸(사망)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현대는 말법시대로,
석가의 가르침이 실행되고 있지 않은 무척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란하지만 결국 미륵이라는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해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미래의 어느 날 이 세상에 구세주가 나타나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원래 원시 불교에서는 없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앞에서 소개한 대로 대승불교에는
대일여래나 아미타불과 같은 신적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상,
정토사상, 상주(常主)사상, 죄 사상, 미륵보살 사상 등
원래 원시 불교에는 없었던 사상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기독교의 사상과 유사합니다.

실제로 불교사의 권위자인 A. E. 골든은 미륵의 어원을 조사한 결과,
“인도어로 미륵은 ‘마이트레야’이고,
중국에서는 ‘미르어’,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으로서
이것은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이다.”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히브리어의 메시아가 인도에서는 마이트레야,
중국에서는 미르어, 한국에서는 미륵이 된 것입니다.


또한 아미타불에 대해서도
불교사의 권위자인 알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미타불의 교리는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중국 불교는 카슈밀이나 네팔에서 전례된 것으로,
아미타불 사상은 당시 그 지방에 영향을 주었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고후 4장 18절)고 밝힘으로서
끝없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상주(常主)를 강조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성경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대승불교 여덟 종파의 조상이라 불리는 용수(주후 150년~250년경)는
금강보살로부터 대일경(大日經)이라는 경전을 받을 때
금강보살로부터 관정(灌頂)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머리에 물을 뿌리는 의식으로
그 이전의 불교에서는 없었던 것입니다.

용수는 분명히 기독교의 세례를 모방해
그러한 의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원래 불교에는 없었던 멸죄 사상을 칭송하는‘참회멸죄사’가 생겨나는데
이 또한 기독교의 영향입니다.


그리고, 12세기에 이르러 대승불교에서는
남무아미타불을 외우면 누구든지 정토에서 태어날 뿐 아니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남무(南無)는 ‘귀의한다’ 또는 ‘믿는다’는 뜻으로
남무아미타불 이란
‘아미타불을 믿는다.’ 또는‘아미타불에 귀의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불교에서 신적 존재자인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그 신적 존재자에게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은
사도행전 2장 21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기독교 신앙이
여러 경로를 통해 불교 사상에 영향을 끼친 결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순수불교가 아니라 혼합종교입니다.

이 때문에 대승불교에 대해
“대승불교는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대승비불론’(大乘非佛論)이
학자들 사이에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나라의 불교는 대승불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