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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교사방에서> 거룩한내맡김의 영성은 주부적(注賦的) 영성 -1

은가루리나 2016. 1. 6. 09:46

거룩한내맡김의 영성은 주부적(注賦的) 영성       (2013.09.26)

 

 

<注賦的(주부적) 靈性>

 

영성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톨릭 영성을 단순화시켜 분류하자면,

근본적 영성, 특수한 영성, 주부적(注賦的) 영성, 개인적 영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근본적 영성은 말 그대로 가장 근본이 되는 영성이다.

청빈, 정결, 순명 혹은 신덕, 망덕, 애덕 등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기본적 영성이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영성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도 지켜야 하고,

꾸르실리스따들도 지켜야 한다. 성령기도회 회원들도 지켜야 한다.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근본으로 삼아야 할 영성이다.


특수한 영성은 조금 다르다.

모든 이들이 지킬 필요가 없다.

 

교회 역사 안에는 그동안 수많은 특수 영성들이 꽃을 피웠다.

도미니코회,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베네딕도회 등 수도회 영성이 그것이고,

레지오 마리애 등 신심 단체들의 영성도 그렇다.

 

하느님은 시대 상황에 맞게끔 섭리하셔서 특수한 이들에게 특수한 영성의 깨달음을 주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영성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도 따르면 좋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수도회 회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예수회 회원은 프란치스코회 영성에 평생 동안 투신할 필요가 없다.

일반 신자들도 예수회 영성에 투신할 강제성이 없다.

그래서 ‘특수한’이라는 말이 붙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근본적 영성과 특수한 영성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가 말한 특수 영성의 청빈과 가톨릭 근본적 영성에서의 청빈은

그 성격이 조금 다를 수 있다.

 

근본적 영성에 있어서 청빈은 

돈을 정당한 방법으로 얻고, 정당한 방법으로 쓰는 것이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당시에는 하느님 뜻에 맞게 벌고,

하느님 뜻에 맞게 쓰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

 

당시 많은 이들은 물질의 노예로 살았다.

진정한 의미의 청빈 영성이 빛을 잃어가던 그 시기에는

극단적인 청빈의 특수 영성이 필요했다.


세 번째, 주부적(注賦的) 영성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주부적 관상(觀想, contemplatio)이다.

근본적 영성과 특수한 영성이 보다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느님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적(神的) 영역을 체험하고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영성생활을 깊여나가다 보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이끌림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관상은 하느님께 집중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겸손하고 관대하게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얼핏 몇몇 특별한 은총받은 이들에게만 가능한 영성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나 가능한 영성이다.


넷째, 개인적 영성은 모든 인간 개개인이 가지는 영성이다.

넓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근본적 영성, 특수한 영성, 주부적 영성은

모두 개인 영성에 화살표를 겨누고 있다.

 



래서 우리 각자는 근본적 영성의 영향도 받고 특수한 영성의 영향도 받는다.

 

우리 모두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원이 아니지만 프란치스코 영성의 영향을 받는다.

예수회의 영향도 받고, 살레시오 수도회의 영향도 받는다.

 

그 모든 단비 속에서 개인 영성생활의 꽃을 피울 수 있다.

사실 근본적 영성도 특수한 영성도 모두 나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근본적 영성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영성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영성들이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가 중요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영성은 인간이 가진 조건 속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이미 창조되었기에, 영적 생활이 가능하다.

 

인간이기에 근본적 영성, 특수한 영성, 주부적 영성을 따를 수 있고

개인적 영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소나무는 소공동체 모임을 할 수 없다. 개구리는 성체 조배를 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영성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공기와 물의 고마움을 잊고 살 듯,

그렇게 주어진 영성적 성향에 대해 잊고 산다.

 

그래서 눈 앞의 현실적 문제에만 급급해 하며 산다. 그러면서 ‘인생은 괴로워’한다.

이는 천지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깊은 뜻을 놓치는 것이다.

 

눈 앞의 급급한 현상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자! 이제 준비됐는가. 가톨릭 근본적 영성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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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영성이란 무엇인가?



 

약간 어려운 말 하나 하자.

모든 인간은 유일회적(唯一回的) 존재다.

 

이 말이 도대체 뭔가.

복잡한 철학적 의미를 쏙 빼고, 단순화 시키자면,

‘이 세상에서 나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것을 왜 그렇게 어렵게 말하냐고?

사실 영성을 논할 때 인간이 유일회적이라는 개념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없다.

 

나와 똑같은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

인간이 존재한 이후, 아니 천지 창조 이후 나는 오직 하나다.

하나로 일치된 부부가 바가지 던지며 싸우는 것도 실제로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거룩한 수도회 안에서도 성격이 맞지 않아 갈등하는 수도자들이 많다.

신부님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과 인간관계가 원만한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와 네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성격이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부부가 싸우는 것도 따라서 정상이다.

 

완전히 다른 ‘나’와 ‘나’가 만나 함께 살아가는데 어떻게 갈등이 없겠는가.

따라서 신앙 혹은 믿음 하나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마다 다르다.

희망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기도도, 은총 체험도 모두 다르다.

 

이제 막 세례를 받은 90세 할아버지의 기도와

신학을 전공한 30대 청년의 기도는 다를 수 있다.

 

주님의 기도 하나만으로 충만감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고,

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도 있다.

 

성체 조배에 감동하는 사람이 있고, 영적 독서에 매료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산책하는 행위 자체로 충만한 기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다.

근본적 영성과 특수한 영성은 이렇게 각 개개인의 기질과 삶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따라서 본당에 4000명의 신자가 있다면, 4000명의 다른 영성이 있다고 보면 된다.

유일회적 인간은 그렇게 소중하다.

청빈의 삶 하나만 봐도 그렇다.

청빈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 돈이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도 진정한 청빈을 실천할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도 청빈과 거리가 먼 삶을 살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한 공동체를 총괄적으로 영성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 지도자가 공동체 전체를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몰고 갈 수 없다는 의미다.

공동체 지도자는 개인의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근본적 영성으로 늘 연결시켜 주는,  교회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연결시켜 주는,

특수 영성의 꽃을 피우는 방향으로 봉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공동체는 개인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을 줘야지 공동체 그 자체가 중심이 되어

개인의 유일회적인 삶과 영성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고 우리는 소위 세속화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내 뜻을 앞에 세우는 것이다.

개인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는 간부가 많이 필요하니까

부지역장, 부구역장, 부반장, 총무, 많이 뽑는 것이다.

영성화(영성적 삶)는 언제나 인격 주체로서의 개인 안에서 그리고 개인을 통하여 발생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오로지 개인적인 인간의 영들 안에서,

리고 그러한 영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개인의 영성화를 위한 요구가

공동체 전체를 영성화하고자 하는 시도에 의해서 경시되거나 대체되어선 곤란하다.

개인은 하느님께서 굉장히 신비스럽게 만들어놓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느 누구도 파악을 못한다.

 

만약 오늘 어렵게 파악했다고 해도, 내일 달라지는 것이 인간이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 아니다.

가치를 같이 만들어 가는 공동체다.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한다는 차원에서 일심동체(一心同體)다.

 

어떤 가치? 남편의 가치? 아내의 가치?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같이 찾아가는 거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가는데 같이 협력해 나가는 거다.

지금까지 근본적 영성, 특수한 영성, 개인적 영성에 대해 살펴봤다.

이제부터는 개인 영성생활의 최고 경지라고 일컬어지는 주부적 영성에 대해 알아보자.

그 경지의 황홀함이 지금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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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영성이란 무엇인가?


 

주부적 차원의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주부적 영성은 영성생활의 최고 형태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탑이다.

 

인간 노력에 의한 기술적, 전문적 접근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노력들이 낮은 단계의 성취를 보장해 준다면,

주부적 영성은 최고 단계의 성취에 이르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automatic)으로 움직인다.

하느님께서 자동으로 직접 인도해 주신다.

 

런데 문제는 아무리 뛰어난 영성가라고 해도, 주부적 영성을 체험했다고 해도

이러한 자동의 관계가 24시간 풀가동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여기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을 갈고 닦아서 은총의 터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터 위에 엄청난 은총의 비를 내리신다.

둘째, 주부적 영성은 일체의 특수하고 개인적인 표현 형태들을 뛰어넘어서

궁극적인 단순함에 이르는 것이다.

 

‘궁극적인 단순함’. 이 말이 중요하다.

성인 성녀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순함’이다.

그 분들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복잡하게 따지면 갈등이 일어나고, 고민만 쌓인다.

따지지 않고 그냥 알아들으면 된다.

 

예비신자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단계는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나아가는 단계다.

 

똑똑하고 계산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는 영성생활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함에서 오는 행복, 단순함에서 오는 충만함을 만끽하는데 방해물이다.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보통 사회적 지위와 성취를 중요시하는 남성은

그 논리적인 태도 때문에 하느님과 가까워지기가 힘들다.

 

하지만 여성은 감성적이고, 모성애적 사랑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에게 “장애물” “사탄”이라고 말했던 예수는 여성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극한 단순함의 경지를 이룬 분들이 바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소화 데레사, 프란치스코 등과 같은 분들이다.

 

이분들은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 아니다.

이런 분들은 하느님과 직통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부적 영성의 초점은 바로 하느님 자체다.

 

‘나’는 교육에 의해, 환경에 의해, 주관에 의해 수시로 변한다.

인간은 각자의 교육과 환경, 주관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다른 입장을 드러낼 수 있다.

초점이 흐리다.

 

변하지 않는 초점, 핵심은 하느님이다.

신비신학, 관상, 주부적 영성을 체험하게 되면 하느님이 초점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하느님에 의해 ‘변화되는 나’를 체험하게 된다.

초점만 확실하면 된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초점)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하느님을 알고 보면 나를 위한 하느님’일 경우가 많다.

 

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른 가족을 무너뜨리고,

내 성취를 위해 다른 이의 성취를 깎아내리고, 내 명예를 위해 다른 이의 명예를 더럽힌다.

 

그러면서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한다.

교회 내에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인에게 고통 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방법’으로 해선 곤란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냅둬(내버려 둬) 영성’이다.

 

하느님에게 초점이 맞춰진 사람은 ‘냅둬 영성’이 가능하다.

내가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하시게 해야 한다.

나는 하는 데까지 하고 계속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안 되는 사람들은 ‘냅둬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생도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고, 평화다.

 

나는 내 할 일이 많다.

왜 다른 사람한테만 신경 쓰고 시간 다 바치고 허비하는가.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할 일을 해야지 주부된 영성의 단순함에 들어간다.

다른 생각하며 복잡하게 살 필요 없다.

 

안타까운 사람에게는 해 줄 수 있는 데까지 좋은 방법과 기도와 희생을 바쳐주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면 된다.

 

‘초점’ 하느님은 ‘나’에게 계속 다른 일을 주신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다.

 

주부적 영성은 모든 초점을 ‘하느님’께 맞추고, 나를 그쪽으로 정향시키게 한다.

우리는 번뇌를 가질 필요가 없다.

하는 데까지 하고 안 되면 그분께 맡겨 드리면 되는 거다.

맡겨 드리면 그분께서 나한테 일 주신다.

 

그 일 하는 거다.

자유스럽게 평화스럽게 행복하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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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영성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가톨릭 영성의 큰 줄기라고 할 수 있는

근본적 영성, 특수한 영성, 개인적 영성, 주부적 영성에 대해 살펴봤다.

런데 여기서 우리가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교회의 교의(敎義) 다.

모든 영성은 교의를 통한 검토가 필요하다.

신자 개개인이 체험하는 영적인 체험들은 교의의 검토가 필요하다.

주부적 관상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동안 일상생활에서는 체험하지 못한,

신비스런 영감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늘 접하는 소설책이라든가 문학책에서 체험하지 못한 색다른 경지를 느끼게 된다.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고, 합치에 대한 강한 원의를 일으킨다.

이는 반드시 하느님이 눈앞에 보이고, 성모님이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주부적 영성을 통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식사를 하면서, 테니스를 치면서,

공부를 하면서, 등산을 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강한 체험을 하고

또 그분을 향한 갈망을 기도드릴 수 있다.

이럴 때 느끼는 신비스러움은 교의의 점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교의는 도대체 뭔가.

 

쉽게 말해 예비신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배우는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예비신자 교리를 우습게보면 안 된다. 이 교리야말로 근본적인 것이고,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래서 예비신자 교리는 두 번 세 번 들어도 부족하지 않다.

예비신자 교리 공부는 유치원 졸업하면 끝내듯이 하는 그런 공부가 아니다.

근본적 가르침인 만큼 죽을 때 까지 안고 가야 하는 그런 교리다.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예비신자 교리교사를 꼽는 것도

그들이 가장 근본적인 것을 매일 접하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교리, 교의, 성서는 영성의 바로미터다.

우리 각자의 영성은 모두 이러한 기준들에 맞는지 늘 검토 점검되어야 한다.

왜 그럴까.

 

자칫 환상의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악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선을 가장해 다가오기도 한다.

 

꿈은 현실과 연결된 꿈이어야 한다.

영성은 환상과 꿈이 아니라 현실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영적 체험은 저 높으신 분이 주시는 것이니까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영적 체험은 분명히 신중히 다뤄져야 하고 분별이 필요하다.

요즘 사적 계시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이 체험한 영적 내용에 대해 ‘사적 계시’ 운운하며 유포시키는 이들도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공적 계시도 모르면서 무슨 사적 계시를 말하는가.

성체를 모신 성당보다 더 중요한 곳이 어디 있는가.

 

교회의 눈을 피해 가정집에서 안수한다고 모이고,

치료 은사를 베푼다고 모이는 것은 모두 분별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특수한 것이고,

개인적인 것이고, 주부된 것인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분별해야 된다.

 

이 모든 영성은 근본적 영성에서 나온 것이다.

근본적 영성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예비신자 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예비신자 교리 때는 성서를 가르치고 성서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르친다.

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무엇인지, 그 교회를 통한 7성사가 무엇인지 가르친다.

 

이러한 근본적 영성의 토대 위에서 개인적 영성도 나오고,

특수한 영성도 나오고, 주부적 영성도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이야기 할 것이, 영성지도(spiritual guidance)다.

 

모든 분별은 역시 영성지도를 통해 이뤄져야 하고, 영성지도자 자신도 분별되어야 한다.

 

영성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영성지도자는 자칫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강요할 수 있다.

상대방은 나와 다르다.

 

내가 레지오 마리애 영성에 대한 귀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 그 특수 영성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제 갓 자라나는 앳된 신앙인의 성장판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칫 상대방이 가진 무한한 영적 잠재력을 망칠 수 있다.

 

상대방은 기질도 다르고 태어난 환경도 다르고 자라난 교육과정도 다르다.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영적 지도자 혹은 신앙 선배는

자신이 전면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경계해야 한다.

 

자신의 방식이, 자신의 체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유익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지도를 받는 사람은 자칫 지도자의 복사본이 될 수 있다.

영적 지도자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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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신앙인을, 혹은 새내기 수도자를 이끄는 영적지도자는

위대한 스승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지도자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 한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은 아름다운 진리를 알려주는 것은 좋다.

또 나는 어떤 아름다운 신적, 영성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체험을 절대화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나 자신의 복사본으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영적지도자는 자신의 엄격한 생활방식을 과도하게 주입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엄격하게 살고 있다고 해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이를 강요한다면

자칫 죄책감과 나약함을 유발시킬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에게 이끄시는 방법은 인류의 숫자만큼 많다.

따라서 영적지도자는 자신의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영적지도자가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유혹은

‘유익하지 않다’고 느끼는 상황들(과도한 활동, 과도한 겸손) 안에서

‘넌 지금 행복해’ ‘넌 이대로 하면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어’ 라며 잘못된 인도를 하는 것이다.

 

또한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사례 중 선배 수도자가 후배 수도자에게

“넌 꼭 이런 체험을 해야 해” “넌 이렇게 해야 진정한 수도자야”라고 말하는 경우다.

 

밀어붙여선 곤란하다.

자발적 체험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훌륭한 영적지도자는 마음속에서 불길이 저절로 타오르도록 한다.

건강한 정신과 영적 토대를 가진 사람이 수도회에 입회해서

혹은 가톨릭 신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불구화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지켜봤다.

 

인생살이에서 건강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이미 영성적 삶을 살았던 이들이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았건 몰랐건 건에 그들은 이미 영성의 신비 우산 속에서 있었던 이들이다.

그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거나, 나약한 병자로 몰락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영적지도자, 영성 교사, 예비신자 교리교사, 사제,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래서 이들은 늘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내 것을 혹시 너무 강요하지는 않는가”

“나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보편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나의 묵상을 절대화시켜서 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영적지도자에게 영성 상담을 많이 받을 것을 권고한다.

잦은 영성 상담을 통해 자기 과신에 떨어지지 않는지 성찰해야 한다.

지도자가 잘못된 길로 빠지면 그 밑에 있는 이들은 모두 함께 잘못된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내가 해야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도자 자격이 없다.

 

“나는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겸손한 사람은 순명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늘 Yes라고 말한다.

“내가 해야 한다”가 아니라 “주시는 일을 받아들이겠습니다”가 되어야 한다.

영적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인간이 영적인 꽃을 피우게 돕는 것이다.

인간만이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잘 살려고 하고,  좋은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모두 영적인 삶에 대한 갈망이다.

신앙생활 처음에 선택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 신앙을 원해서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좀 더 깊이 있는 차원을 들어가다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그분께서 태어나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도 그분께서 섭리해 주신 것이고 내가 지금까지 성장한 것도,

지금까지 좋은 삶을 살았던 것도 모두 그분께서 해 주셨기에 가능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그분과의 합치, 일치를 갈망하게 된다.

이것이 일생을 통해 깨달아 가는 삶 안에서의 관상이다.

문제는 근본적 영성이든 특수한 영성이든 주부적 영성이든

이 모든 것이 모두 ‘나’를 통해 일어난다는 점이다.

 

나의 삶을 통해 하느님 섭리의 위대함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 나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다.

 

이점에서 우리 각자의 개인적 영성은 영성의 꽃이라고 볼 수 있다.

꽃을 든 우리 각자는 함께 손을 잡고 하느님 대전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

이제부터는 이 개인적 영성의 꽃을 일상 안에서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