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책_맡김

소리-무화_천상의 책_맡김{6권 142장} 하느님이 뜻 안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맡김이다.

은가루리나 2015. 9. 7. 11:18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질 하느님 뜻의 나라


천상의 책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와 그 본연의 위치와 창조된 목적에로 돌아오게 하시는 부르심




6-142



1905년 11월 8일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맡김이다.




1 몹시 괴로운 투쟁을 벌이고 나자 

그분께서 아주 잠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내 뜻에 자기를 맡기는 영혼은,


마치 좋은 음식을 가까이서 보며 식욕을 느끼고,

입맛이 당기는 바람에 그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하여 

자기의 살과 피로 변화되게 하는 사람과 같다.


그가 그 좋은 음식을보지 않았다면 

식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맛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니,

줄곧 배가 빈 상태로 있었을 것이다.



3 그러한 것이 영혼에게는 맡김이다.


내 뜻에 자기를 맡기면

바로 그 맡김을 통하여 신적인 빛을 보게 되고,

이 빛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을 죄다 흩어 없앤다.


그래서 하느님을 뵙게 되면 그분을 향유하고 싶어지고,

하느님을 향유하게 되면 

그때에는 하느님을 먹고 있는 느낌이 된다.


그렇게 하느님이 완전히 그 자신으로 변하는 느낌이 되는 것이다.



4 그런즉 


첫걸음은 맡김이고,


두 번째 걸음은 모든 것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고,


세 번째 걸음은 하느님의 뜻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것이고,


네 번째 걸음은 하느님의 뜻을 소화하여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걸음을 내딛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하느님이 빈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













16-37,

딸아, 내 뜻은 만물의 생명이며 활동이다.

한데 너는 알고 있느냐?


누가 내 뜻의 활동에 따라 내 영원한 의지 안을 날아다니는지. 

곧 내 뜻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영원의 영역 안에서 이 뜻이 행하는 대로 행하며 돌아다니는지를?


그것은 내 거룩한 뜻 안에 자신을 완전히 맡긴 사람이다.


맡김은 내 뜻과 함께 날기 위한 날개다.

이 맡김을 그치면 못 날게 되고 날개는 망가진다.




17-14,6 

그러면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것의 첫걸음은 무엇을 하는 것이겠느냐? 


그것은 영혼 깊은 곳에 신적 질서를 확립하면서 

나쁜 경향이나 격정이나 기호 따위 인간적인 것을 비우는 것이다. 


17 

그러니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더라도 

너는 이상하게 여길 것 없다. 


이를 알아들으려면,

거룩한 일에서조차 자기의 뜻에는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려고 하는 

최대의 희생을 치를 각오가 서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뜻의 소유를 실감할 것이고, 

내 뜻 안에서 사는 것의 의미를 손으로 직접 만져 보는 느낌이 들 것이다.




16-40 9 

그러니, 보아라, 

내 뜻 안에서 살려면 내게 자기를 완전히 맡기는 것이 

얼마나 긴요한 일이냐!


10 

나의 뜻은 인간 뜻의 비참한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뜻이 원하는 것은, 

피조물이 (현세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 스스로 비축한 볼품없는 식량없이, 

내 뜻의 태 안에서 태어났을 때처럼 이 뜻과 함께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11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일치가 생겨,

나의 뜻에는 비통이 가져오고 인간의 뜻에는 불행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12 

내 뜻 안에서 살려면 완전한 맡김이 요구된다는 점을 

그들에게 이해시키는 것 

- 이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이제 알겠느냐?




20-25,2 

"딸아,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의지 안에 너를 맡기면 맡길수록 

이 의지의 길에서 그만큼 더 진보하고, 더 많은 지식을 얻으며,

하느님의 뜻 안에 있는 재산을 그만큼 더 많이 소유하게 된다.


하느님의 뜻 안에는 알아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언제나 있는 까닭이다.




17-6,13 

그러니 주의를 기울여라. 

네가 모든 권리를 지고한 뜻에 맡기면, 

내가 내 뜻 안에서 사는 성덕을 네 안에서 계속 길러 주겠다.




36-10,2

착한 딸아, 내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너의 예수는 어려운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내 사랑이 나로 하여금 사람의 이해력에 맞추어 가르치게 하기에

사람은 내가 가르치며 바라는 것을 어려움없이 행할 수 있다


꼭 필요한 것은,

내뜻 안에서 살기를 바라고 

그것도 확고하게 열망하는 것이다




「수난의 시간들」제2시간


오, 제 생명이시며 제 전부이시여, 

당신의 발걸음이 저의 발걸음을 인도하게 하시고,

제가 이 땅에서 걷고 있는 동안에도 생각은 천국에 가 있게 해 주소서.








moowee 13.07.08. 10:38



예수님께서 루이사 피카레타에게 말씀하셨듯이

<내맡김>은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의 <첫 걸음>인 것입니다.


하느님 뜻을 절대 벗어나지 않고 

오직 하느님 뜻 안에서만 살기위한 <걸음마>인 것입니다.


걸음마는 걷다가도 넘어집니다.

그러나 또 일어섭니다.


일어서기 힘들 때에는 엄마(성모님)가 손을 잡아줍니다, 

아빠(하느님)가 손을 잡아줍니다. 


엄마, 아빠는 아가가 걷다가 넘어져도 손뼉을 치며 너무 기뻐합니다.


언젠가는 아가가 넘어지지 않고 잘 걷게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넘어져도 흉이 되지 않고 오히려 엄마아빠의 기쁨이 되는 걸음마>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첫 걸음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입니다.


그냥 아가는 엄마의 사랑 속에 아빠만 쳐다보고 아빠의 이름만을 불러댑니다.

끊임없이 불러댑니다, 


아가는 자신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의 화살기도>인 것입니다.


이상이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의 <시작이자 마침>입니다.

그것뿐입니다




moowee 13.07.18. 10:33



감히 <첫걸음도 못 떼는> 사람들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걸음을 걸으려 합니다.


매우 안타깝기 끝이 없을 뿐입니다.



에수님께서 <루이사 피카레타>에게는 네 번째 걸음까지도 가르쳐 주셨지만,


지금은 <에레베이타와 에스카레이터>가 널려 있는 시대라 그런지

저에게는 그냥 < 첫걸음 = 내맡김 >만 가르쳐 주셨습니다. 크으~~~




moowee  2017.01.31. 11:51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내맡김의 봉헌>이 왜 탁월한가는


그 봉헌이 100%의 봉헌이 되면 

그다음 걸음은 저절로(하느님뜻대로) 걸어지기 때문입니다.



봉헌 후, 

그때부터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걸음을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걸어주십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발 등에 우리의 작은 발만 올려놓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거 자녀들의 걸음마를 가르칠 때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moowee 18.01.03. 08:14



자신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믿고 고백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단 1%의 남김도 없이 하느님께 내맡겨 드리지 않고서는

절~~~때로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설령,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교회가 인정하는 聖人聖女들처럼>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예수님께서 

★ 맡김은 첫 걸음 ★ 이라 하셨겠습니까, 하느님 뜻 안에 살아갈 수 있는?!


절~~~대로 

< 두 번째 걸음>으로는 발을 뗄 수 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해욱프란치스코  2015.05.16. 14:31



천상의 책에 쓰여진 예수님의 말씀처럼

첫걸음을 통하여 계속해서 하느님 앞으로 걸음을 걸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걸음을 멈추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날개를 계속 저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지속적인 내맡김이 필요합니다.


내맡김이 생활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9-54 1926년 9월 3일


천상 것에 대한 열망은 영혼을 정화한다.


"딸아, 어떤 선에 대한 열망, 그 선을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이 

영혼을 정화하고, 


그의 지성을 준비시켜  그것을 깨닫게 하고, 

기억을 준비시켜  그것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면 

그의 의지는 그 선을 취하고 싶은 욕망이 돋우어짐을 느낀다. 

그것을  자신의 음식과 생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에게 그 선을 주시며 알리시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선에 대한 열망, 그 선을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은 

음식에 대한 식욕과 같다. 


식욕이 있으면  음식의 맛을 알고, 


유쾌하게 식사를 하며, 


먹은 음식에 대해 매우 흡족해하고, 


나중에  또 먹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