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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와 보속 2

은가루리나 2016. 8. 12. 18:21



속죄와 보속 2

 

 

모든 짐을 내려 놓으십시오.  죄의식의 짐과 ‘할 수 없다’고 하는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자주 의식적으로 ‘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며 자신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내려 놓고 ‘할 수 있다’고 할 때만이 속죄와 보속은 시작됩니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이 선하여 질 수 있고,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삶이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속죄를 하는 바로 그날부터 여러분의 삶은 바뀌기 시작하여 여러분의 행위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입니다. 훨씬 깊어진 크리스챤이 되어 하느님의 우물안 깊은 곳으로부터 많은 물을 길어

올리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마음 먹는 한 순간에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속죄와 보속은 그렇게 시작하여야 하고 자신의 죄를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얼마나 대죄(영어: MORTAL SIN 죽음의 죄)의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대죄가 죽음의

죄로 불리우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의 서간에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도덕의 행위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한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합니다. 그 시절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장을 써 주면

될 정도로 그 당시 여성은 노예취급을 했었음을 아실 겁니다. 그 남성은 자신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함으로써 끔찍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에 대해 성 바오로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성바오로는 그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그의 영혼을 구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토 1장 5절) 그 뜻은 어쩌면 사탄에 의해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되어 더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되면 그의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매우 신비로운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결과에 대한 깊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계속 죄를 지으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 리타 카시아를 기억하십니까? 성 리타는 두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인을 계획합니다. 성 리타는 그것을 알고 하느님께 매우 열렬히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때 하느님께서 두 아들을 데려가십니다.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끔찍한 죄로부터 그들을 구하신 것입니다. 성바오로도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묵상을 우리의 작은 삶에 비추어 볼때 자신이 얼마나 보속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속죄를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진심과 정직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백성사를 얼마나 정직하게 진심으로 보았으며 고백소를 떠나며 죄와 싸울 준비를 하며 고의적으로 다시는 그 죄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직 속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뉘우치고 고백성사를 보고 나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죄의 유혹과 싸우려 할때 만이 비로소 속죄가 시작되는 것이기 떄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백성사를 남겨놓으신 겁니다. 우리가 항상 그것을 해낼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자주 사탄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또 우리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항상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과 맞서 싸우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고백성사를 봐야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언쟁을 하고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오우~ 참아야 해..” 목까지 차오릅니다. “오~ 도와주세요.. 이 말을 하면 큰일나~ 말하면 안돼~ 말하면 안돼~… “오~ 도와주세요…”… “우웩~!” 결국 입을 열고 맙니다. (웃음) 그리고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게 우리는 항상 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고백성사를 봐야 하지요.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더 잘 할 수 있었고 피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들로 인해 다시 고백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써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죄의식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쟁중 최전방에서 유혹과 사탄을 맞서 싸우는 전사의 삶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무기인 성사를 주셨으므로 그를 통해 일어나 계속 싸울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중 한 사람이 결혼생활을 위협하는 중대한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대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줍니다. 그러면 속죄와 보속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아직 그 곳에 불신과 상처같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또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상처 준 사람은 ‘나를 믿지 못하나?...’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릅니다. 그러나 상처를 준 사람이 사랑을 가지고 동정심과 겸손으로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그것은 진정한 속죄가 됩니다. 상대방은 그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가서 상황은 좋아집니다.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물론 상처 자국은 남습니다. 어떻게 그것마저도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많은 상처 자국을 갖고 살아 갑니다. 전쟁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 다른 크기의 상처 자국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치유입니다.

 

바로 속죄와 보속이 치유입니다.

 

현재의 여러분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여러분이 하느님을 상하게 해드린 잘못한 일에 대해 얼마나 진심으로

속죄와 보속을 하였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과 대화를 할 때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께서 얼마나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용서하시는 분이신지 이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주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고 무관심한 비참한 존재인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더 잘 할 수 있었음을 깨닫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며 찬미하는것을 배우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끊임없이 잘못을 행함에도 저에게 계속 시간을 주시며 기회를 주고 계심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주님

사랑합니다. 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결코 저를 버리지 않으실것을 믿습니다. 홀로 선하시며 신실하신 주님, 제가 주님을 닮도록 도와주십시오. 저의 길을 인도하셔서 주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뜻에 따라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계속 주님을 찬미하면서 주님의 영광의 현존을 여러분의 마음안에 가져와 오직 한 분이신 그분을

흠숭한다면 여러분의 삶이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속죄의 방법입니다.

 

그 선함에 마음을 모아 자신을 선함으로 이끌려 하고 그것은 찬미하고, 행하고 느끼고 말하는 모든 것이 선함으로 이루어지는 그것이 보속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선하신 그분을 찬미하고 사랑하고 예배할 때 여러분이 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치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잠시 연옥에 있는 영혼을 보게 된다면 두가지 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매우 아름다운

거룩한 광경입니다. 그들은 매우 거룩하며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영원히 사탄을 끊으며 더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너무나도 열렬히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면에서 그것은 매우

귀한 광경입니다.

 

또다른 면은 여러분이 보게 되리라 상상 할 수도 없었던 가장 깊은 슬픔입니다. 거룩한 슬픔이지만 매우 매우 매우 깊은 슬픔입니다.

 

그들은 연옥에서 그들이 했던 행위의 결과를 맞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매우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완벽한 차원의 죄의 결과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호소하시며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죄를 올바로 해야하는 그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지상에서 사는 동안 속죄와 보속의 은총을 통해 그것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임을 믿어주십시오.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이 항상 교회에 가 있고 많이 기도하고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등등으로 생각하지만, 물론 그것들이 좋은 것임엔 틀림이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의 결과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상해 드렸고 얼마나 이웃에게 해를 끼쳤으며 얼마나 자신의 영혼 구원을 막았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때 그것이 우리를 깨워 하느님께 순종하고, 선하게 되고자 하며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염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걸으려 하며 과거의 자신이 어둠속에서 잃어버린 삶과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게 되어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회개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럴 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네, 저는 제가 했던 모든 잘못들이 얼마나 심각한건지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죄는 매우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대죄는 단순한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사탄이고 사탄은 영입니다. 사탄은 거대한 악의 군대입니다. 대죄는 많은

영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망쳐놓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이 사탄의 군대와 함께 하며 이 일시적인 삶에서 유익을 얻습니다. 또 어떤사람은 끔찍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대죄와 관련하는 것은 끔찍한 악몽입니다. 대죄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떄문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를 원하시며 부르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백소를 나올때 어떻게 보속과 속죄를 해야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제가 신자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아무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백성사를 보고 성체를 영하며 “마음이 가벼워졌어. 기분이 좋아!” 라고 말하지만 속죄와 보속에 대해서는 마음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각조차 안합니다.  어떻게 보속을 하겠냐고 물으면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우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대사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현존앞에서 하루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죄를 지었던 단 며칠 동안일지라도 하느님과의 관계는 깨진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벗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백성사를 끝내자마자 속죄와 보속을 맞아야 합니다. 즉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과의 우정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죄를 통하여 깨뜨린 하느님과의 관계를 고백성사를 통하여 용서받았으므로 곧

속죄와 보속을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화가 났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것에 대해 고백성사를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고백성사를 보고 나오자마자 그 사람을 다시 보았을 때 자신을 콘트롤 할 새도 없이 노력하지 않고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속죄와 보속에 대해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다시 그

죄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요즘은 속죄와 보속이라는 말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현대적인 사제들은 “오~ 자신을 그렇게 자학하지 말아요.. 그건 구시대 고리타분한 이야기에요.. 시대가 달라졌어요… ” 하고 말합니다. 오~ 그런 현대적인 사제들이란 … ㅉㅉ.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현대적인 크리스챤.. 그런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성서를 현대적으로 할 것이고 어떻게 도덕성을 현대적으로 할 것이며.. 현대적인 순결..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죄와 보속으로 깊이 들어가 지금 지상의 삶에서 그것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연옥에 가길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연옥을 믿지 않는 크리스챤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은 은총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전체 교회가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제가 때로 묘지를 지나갈 때면 연옥을 믿지 않았던 크리스챤들이 기도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을 느낍니다.

아무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천국에 계십니다.” 하고 말합니다 … 하! 천국에 있다구요? 그들은 연옥에서 많은 것들을 맞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개신교 신자는 천국으로 곧바로 갑니다. 어떤 불교신자도 그럴것이구요. 하느님께서는 삶의

마지막에 종교가 아닌 사랑에 의해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카톨릭 신자에게는 많은 것들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입니다.

 

어떤 영혼들은 아무도 기도해주지 않아 오랫동안 연옥에 갇혀있습니다. 우리는 연옥에 있는 이방 종교인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합니까? 거의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구원의 조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과 용서입니다.

 

오직 성체의 도구인 우리만이 인류의 모든 영혼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인류의 다른 사람들보다 큰 의무가 지워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더 낫다거나 특권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군대의 군사로 불리움을 받았으므로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도 선함을 위해 살았다면 천국에 갑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를 지나갑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이 끝나면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전 앞에 나갑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완전한 하느님의 왕국으로 들어 갑니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은 종교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지만 불교도 회교도 유대교도 할 것 없이 모두 생이 끝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대전 앞에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정의와 선함을 보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그에 대한 죄의식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압니까? 누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우리 카톨릭 신자에게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주어졌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연옥에 대한 지식과 보속과 속죄에 대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이곳 지상의 삶에서 그것을 보속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속죄와 보속의 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감사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삶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불평합니다. 하느님께 삶에 대해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생명에 대해 감사할 줄도 모른다면 어떻게 속죄와 보속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여러분은 아침에 눈을 떴을때 그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를 드립니까? 마치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자기의 일에만 몰두하다가  무언가 필요하고 삶이 엉망징창이 될 때만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항상 감사하고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흠숭하고 항상 감사를 드릴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시고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참고:

대죄의 성립 조건 세가지 (클릭시 대죄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연결)

1. 어떤 중대한 일이나 행동

2. 중대성을 스스로 알고 있음

3.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