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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

은가루리나 2016. 9. 13. 23:53


도서명 : 어둔 밤 ★★★          페이지 : 195

저 자 : 십자가의 성요한          역 자 : 최민순

출판사 : 성바오로출판사          독서 기간 : 2008.2.5-6

 

* [가르멜의 산길]과 마찬가지로 자의적으로 해석/소개하는 성경 본문들이 많이 눈에 띈다. 특별히 다윗의 시를 인용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구절이 기록된 배경과 내용과 무관하게 자신이 원하는 ‘표현’에만 중점을 두고 인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윗의 경우를 포함하녀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1) 다만 스스로 아는 바는 이따금씩 그 불꽃과 타오름이 자기 속에서 어찌나 세차게 일어나던지 사랑에 할딱이며 하느님을 그리워한다는 그것이다. 그것은 다윗이 이러한 밤에 있으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을 표현한 바로 그대로이다. 즉 "내 마음이 불타기에(풀어 말하자면, 관상의 사랑에서) 내 콩팥이 바뀌었나이다(시 72:21)." 콩팥이 바뀌었다 함은 감각적 기호의 욕구가 변했다는 것으로 이는 곧 감성의 길에서 영성의 길로 옮겨짐을 뜻하고 영성의 길이란 바로 메마름 그리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욕구의 중절을 말한다. 다윗은 또 이르기를 "나는 무(無)로 돌아가 없어졌어도 몰랐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우리가 말한 대로 영혼이 어디를 거쳐 가는지 모르는 채 전에 맛보던 천상 및 지상의 모든 것에 죽어버리고 이유도 모르는 채 다만 사랑에 반한 까닭이다.(59-60) - 저자는 본문의 원래 의미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과 유사한 표현이 있으면 그대로 자신의 증빙 구절로 삼는다.

 

2) 이 메마르고 어둔 관상의 밤이 빚어내는 첫 번째 중요한 이익이 바로 자기와 자기 비참에 대한 지견(智見)이다. … 이에 대한 썩 좋은 예증이 출애굽기(33:5)에 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자,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을 알게끔 하시고자 사막에서도 꾸미고 다니던 화사한 옷과 몸치장을 벗어던지라 하시었다. … 너희가 입은 옷은 명절의 화사한 옷이라, 비천한 그대로의 너희를 느끼지 못하니 그 옷을 벗어버려라. 그래야만이 앞으로 너희가 걸친 옷의 궁상을 보고 너희가 무엇이며 대접받을 사람이 못 됨을 알 수 있으리라.(63-64) - 이것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동행하시지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하나님을 설득(?)하여 동행하시게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중의 의미로 모든 장식을 제할 것을 명하셨다. 어느 면에서는 저자가 말하는 바와 통한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일 뿐 저자가 말하는 ‘어둔 관상의 밤이 주는 유익’과는 무관한 내용일 뿐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영혼이 제 발로 서고, 감정이나 감각에 기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예언자도 자신을 들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즉 내 초소에 버티고 서서(이는 욕을 끊어 기대지 않음이다.)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이는 감성을 가지고 추리하지 않음이다.) 기다려보리라.(이는 하느님께서 내게 알려주실 것을 관상하고자 함이다.)(합 2:1)(67) - 하지만 이 구절은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 가운데 횡행하는 악과 그로 인한 호소의 결과 이스라엘 전체가 외침(外侵) 받으리라는 말씀을 들은 후에, 다시금 호소하고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저자가 말하는 욕을 끊음이나 감성으로 추리하지 않음, 하나님의 알려주실 것에 대한 관상 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인용이다.

 

4) 신적인 극은 영혼을 변화시켜 신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점령하고는 영혼의 일체가 되다시피 밀착해 있는 묵은 인간의 본성과 애집을 벗겨낸다. 신적인 요소가 영혼 본체를 어두움의 심연 속에 삼켜버리면서 어찌나 난도질을 해서 바수어놓던지 영혼은 처절한 죽음을 당하듯 스스로의 비참을 맞대어봄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녹아나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 이 고통과 고뇌가 실로 형언키 어려운 것이지만 다윗은 “죽음의 밀물에 이 몸은 말리우고”, “명부의 그물이 이 몸을 휘감았고”, “막다른 골에서 하느님을 부르고”(시 17:5-7)라고 서술하였다.(99) - 앞부분의 설명은 그런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윗의 탄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가? 다윗의 이 탄식은 저자가 말하는 현상과 관련된 표현이 맞는가?

 

5) 이 애집이나 습성이란 것이 영혼의 실체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영혼은 위에서 말한 자연 및 영성엣 가난이나 공허 말고라도 심한 불안과 내적 고뇌를 치르기가 일쑤인데, 에제키엘(24:10)의 말씀이야말로 이 경우를 잘 밝혀준다. “나무를 많이 넣고 불을 지펴라. 고기를 푹 삶아서 국물을 쏟아버리고 뼈는 태운 다음….” 이로 미루어 영혼의 실체가 감성 및 영성적으로 겪는 가난과 공허가 어떤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예언자는 또 “솥을 숯불에 올려놓아 달구어라. 놋쇠가 달아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타고 녹이 다 가시게 하여라.”(에제 24:12)하고 말씀하였다. 이로 보아 관상의 불로 정화를 당하는 것이 영혼에게 얼마나 큰 고통일 것인지 알아들을 수 있다.(102) - 에스겔이 말하는 것은 악한 위정자들이 백성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짐승을 잡아먹듯이 벗겨먹는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지 ‘관상의 불로 정화를 당하는 고통’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인용을 보면 과연 저자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면에서는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을 하면서도, 금방 돌변하여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마치 베드로처럼… --;

 

6) “주께서 돌멩이로 내 이를 부스시고 나를 땅에다 짓밟으시니 나는 언제 행복하였던가. 나의 넋은 평안을 잃었는데, ‘나의 영광은 사라졌고, 주 야훼께 바랐던 모든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하며 쫓기는 이 처참한 신세, 생각만 해도 소태를 먹은 듯 독약을 마신 듯합니다. 주여 이 몸 잊지 마시고, 굽어 살펴주십시오. 이것을 마음에 새기며 두고두고 기다리겠습니다.”(애 3:1-21, 뒷부분만 발췌) 예레미야가 통곡한 그 고난과 고생은 영혼이 영성의 밤과 정화 안에서 당하는 고초를 여실하게 묘사한다.(105-106) - 아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전에 두고 마음의 아픔과 고통을 ‘애가’로 노래한 것이다. ‘영성의 밤과 정화 안에서 당하는 고초’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7) 틀림없이 이 사랑에 굶주린 나머지 “개처럼 짖어대는 그들, 읍내를 여기저기 쏘아 다니나이다. 그들은 먹이를 찾아 헤매나이다. 배부르지 않으면 울부짖나이다.”(시 58:15-16)라고 한 다윗의 말 그대로다. 왜냐하면 이 하느님의 사랑과 불의 접촉이 영을 말리고 욕구에 한껏 불을 질러주는 까닭에 영혼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갈증을 풀려고 몸부림을 치며 말할 수 없는 갈망을 품고 갖은 모양으로 하느님을 소원하는 것이다.(128) - 어쩌면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정반대의 내용을 인용하는지!! 다윗의 원수들이 악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개떼처럼 쏘아 다니는 내용을 묘사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불의 접촉을 받아 사랑에 대한 갈증을 풀고자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가!

 

8) 욥(7:2-4)이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그늘을 갈구하는 종처럼,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처럼.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눠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지고, 나는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이 영혼에는 모든 것이 옹색하다. 자기 자신도 하늘도 땅도 일체가 좁을 뿐, 욥이 여기서 우리 문제를 들어 영적으로 말하듯이 영혼은 어둠에까지 아픔에 차 있다.(129) - 이 부분은 ‘우리 문제를 들어 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 가운데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하소연하는 본문이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정화를 우리는 어둔 밤이라 부른다.”고 하신 성인은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 인간이 치러야 하는 정화, 즉 밤이 감성 및 영성의 두 가지라 했고 그의 양상 역시 능동 및 수동의 두 가지라 했습니다. 능동의 밤은 곧 “다름 아닌 끊음과 씻음으로서, 세상의 바깥 일들, 육에 즐거운 것들, 의지에 맛스러운 일체를 끊고 씻어버림”인데 [가르멜의 산길]은 이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둔 밤]은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을 소재로 하는 것입니다.(5) - 역자의 머리말에 나오는 부분인데, [가르멜의 산길]과 [어둔 밤]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요약해서 소개하고 있다.

 

2. 그들은 기도드릴 때에도 마찬가지다. 기도 중에 할 일이란 오직 맛과 감각적인 신심을 발견하면 그만인 줄로 알아서 억지로라도 그 감각적인 것을 짜내느라 애쓰기 때문에 머리와 다른 능력들이 피로하고 지칠 따름이다. 그러자니 감각의 맛을 느끼지 못할 경우 그들은 맥이 풀리고 조금도 기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으로 해서 참다운 신심과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사실 참다운 신심이란 자기를 믿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생각 하나로 인내와 겸손으로 무미한 속을 끝까지 버티는 데 있는 법이다. (41) - 기도에 있어서 ‘감각이나 맛’에 치중하는 것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바른 기도와 바른 믿음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요, 인내와 겸손 가운데 ‘무미’한 상황을 끝까지 버티는 데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3. 영성의 일에 맛을 즐기는 사람들인 만큼 그 맛이 없으면 영성의 일도 권태로운 것, 그러기에 기도 중에 자기가 바랐던 그 맛이 생기지 않아서 만족감이 없으면(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시고자 맛을 거두시는 일이 있다)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으려 하든지 아니면 억지로 하게 된다.

그들은 이와 같은 나태로 (완덕이란 하느님을 위하여 제 뜻, 제 재미를 없애는 길이건만) 완덕의 길을 제쳐놓고 제 뜻, 제 재미를 따라서 하느님 뜻보다도 제 뜻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느님도 원하시기를 바라고 하느님 뜻에 자기 뜻을 맞추기를 꺼려하므로 하느님 뜻이라면 따르기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제 뜻, 제 재미가 없는 일이면 하느님의 뜻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제 마음이 흡족하면 하느님도 좋아하시리라 믿으니 결국 하느님을 가지고 자기를 측량함이 아니라, 자기를 가지고 하느님을 측량하는 것이다.(44) - 위의 내용과 흡사한, 그리고 보다 좀 더 이끌어 간 내용이다. 여기에서 이들은 기도한 것 같지 않다는 실망에서 더 나아가 기도를 하지 않거나 억지로 하게 되고, 또한 자기의 뜻과 재미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판단하게 된다. 잘못된 기준을 가지는 것의 위험성!

 

4. 초심자들이 하느님의 길에 나아가는 법이 유치하고 아집과 자애로 뒤범벅이 되어 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훨씬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어 하느님을 유치하게 사랑하는 법을 지양하고 보다 높은 법으로 하도록 이끄신다.

그들이 영성 수행 중에 맛과 기쁨을 한창 누릴 때, 그리고 하느님 은혜의 태양이 눈부시게 비친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빛을 몽땅 어둠으로 바꾸시고 전에는 마음대로 언제든지 하느님 안에서 맛볼 수 있던 영의 감로수, 그 생수 구멍을 밀폐하신다.

이제는 어둠 속에 버려져 상상과 추리의 감정을 가지고는 어디로 갈 바를 모르게 된다. 이제는 그전처럼 묵상이 되지 않기 때문인데 이미 내관(內官)이 밤 속에 깊이 잠겨든지라 하느님은 그들을 말라비틀어지게 놓아두시니 항용 기쁘고 즐겁기만 하던 영성의 일이나 완덕 공부에서도 아무런 재미가 없을 뿐 아니라 그와는 엉뚱하게 그런 일들에서 맛없음과 쓰거움을 맛볼 따름이다.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하느님께서 그들이 제법 자라남을 보시고 어린 티를 벗어나 굳세어지도록 그들을 젖가슴에서 떼치시고 팔에서 풀어놓으시면 제 발로 걸을 줄을 익힌 그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가므로 자못 신기로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47-48) - 처음 신앙을 시작하고 처음 기도를 시작한ㄴ ‘초심자’는 유치해도 괜찮다. 더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심자의 단계를 넘어섰는데도 불구하고 그 유치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어둔 밤을 허락하신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대하는 바른 태도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이다.

 

5. 저 메마름이 흔히는 이 밤과 감각욕의 정화로부터 오지 않고 죄와 결점, 혹은 나약과 미온, 아니면 어떤 언짢음이나 몸의 불편함에서 올 수 있으므로 여기 몇 가지 표징을 적어서 메마름이 저 정화에서 오는가, 아니면 위에서 말한 결함들에게 오는가를 가려내야 하겠는데 그 중요한 것을 댄다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서도 아무런 낙을 못 얻는 그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이 어둔 밤에 두시어서 감성욕을 씻어 닦게 하시므로 어느 것에든 빠지거나 맛들이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표징은 이러하니, 하느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하미라 믿고 행여 하느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음이다. 메마름(건조)과 미지근함(미온)의 두드러진 차이는, 미온은 의지와 마음이 나른하고 풀려서 하느님 섬김에 열심히 없는데, 정화적 건조(씻어내는 메마름)는 하느님을 섬기지 못함에 대한 걱정 및 시름과 함께 열심히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셋째 표징은 아무리 자기편에서 할 일을 다 해도 그전처럼 상상의 감각으로 묵상이나 추리를 도무지 할 수 없는 그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주시기 시작하시지만 그전처럼 감성을 통하지 않고 순수 영을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전에는 개념을 분석 종합하던 추리를 통해서 묵상을 하던 것이 이제는 추리의 지속이 없는 순수 관상을 하게 되어 하느님께서는 이 순수 관상의 길로 당신을 주시므로, 여기에는 영혼의 하부 구조인 어느 감성도 - 내부 감각이든 외부 감각이든 -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이나 환상 따위는 이 관상의 어느 상념에도 기댈 수가 없고 이를 바탕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49, 50, 53) - ‘어둔 밤’은 ‘메마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메마름은 꼭 ‘정화’의 표징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그의 나태와 악한 태도에서 오는, 그저 ‘메마름’에 불과한, ‘정화하지 못하는’ 메마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것은 ‘묵상’(상상의 감각으로 묵상하고 추리함)과 ‘관상’(순수 영을 통하여 직접 하나님을 만남)의 차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6. 감성의 밤 -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하느님께서 영혼을 감성의 생활에서 영성의 생활, 즉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주셔서 영혼은 제 능력으로 하느님 일을 추리할 수조차 없게 되는 - 그러한 밤의 메마름에서는 영성인들이 큰 고생을 하게 마련인데, 메마름만이 아니라 길을 잃은 듯한 걱정 때문에 그들은 좋은 일에 맛이나 멋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셨구나, 영혼 복이 다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 깨우쳐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들은 뒷걸음질을 쳐서 길을 버리거나 혹은 고삐를 늦추거나 함으로써 적어도 전진하는 데에 지장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지나친 부지런함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묵상과 추리의 길로만 가려고 한 나머지 본성의 힘을 너무 피로하게 만들면서 자기들은 게으름과 죄 탓으로 이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야말로 쓸데없는 생각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첫 번째 길과는 아주 다른 길, 즉 관상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하나는 묵상과 추리요, 다른 하나는 상상과 추리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할 것 없이 끝까지 인내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좋고, 순박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일이니, 당신은 그들을 그저 맑고 밝은 사랑의 빛으로 인도하시기까지 갈 길에 필요한 것을 꼭 주실 것이고, 그들이 하느님 은혜를 받을 만큼 자격을 얻으면 영의 어둔 밤을 통하여 저 빛을 주실 것이다.

감성의 이 밤에서 영성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절대로 묵상이나 추리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인데, 때가 이미 그럴 때가 아니라 영혼을 정적 속에다 버려두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것만 같고, 한편 또 정녕 자기가 게으른 탓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마음이 없는 양 여길지 몰라도,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아니할망정 꾸준히 기도하면서 참는 것만도 큰 일을 하는 셈이다.

여기서 다만 할 일이라곤 모든 지식과 사색에서 영혼을 해방시켜서 자유분방하게 만드는 일이니 무엇을 생각하고 묵상해야 될까에 대해서는 염려를 놓고 다만 하느님 안의 고요하고 사랑 겨운 지견에 만족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의지도 욕망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일체의 집착은 영혼을 어지럽혀서, 여기서 주어지는 관상의 정적과 무위의 맛을 앗아가기 때문이다.(55-57) - ‘감성의 어둔 밤’과 그것을 통과하는 법에 대한 결정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으로서, 이 책의 가장 핵심 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좀 길지만 옮겨 적어 보았다.

 

7. 나아간 사람들이 지니는 불완전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습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것이다.

습성적인 불완전은 애착과 불완전한 습성으로서 미처 감성의 전화가 이르지 못한 영 안에 아직 뿌리처럼 남아 있는 그것이다. 두 가지이ㅡ 정화가 서로 틀리는 점은 뿌리와 가지의 차이, 케케묵은 때를 벗기기와 새로운 때꼽재기를 지우기와의 차이일 것이다. 사실 이미 말한 대로 감성의 정화는 영혼에게 다만 관상의 문과 시초일 빠름인 것, 영을 하느님께 합일시키기보다 차라리 감성을 영에게 적응시키는 데에 쓰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묵은 인간의 때가 - 비록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 그 영에 남아 있어서 비누와 짙은 잿물이라 할 수 있는 이 밤의 정화로 씻어내지 않으면 영은 하느님과의 순수한 합일에 도달할 수가 없다.

현실적 불환전은 어떠냐 하면 모든 사람이 다 불완전에 떨어지는 것이 똑같지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영성적 취향이 너무 피상적이고 감각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말한 것보다 더 큰 부조리와 위험에 떨어진다. … 게다가 악마란 놈은 저 지각과 감흥 따위를 어찌나 구수하게 그럴듯하게 그려 넣는지 영혼은 그런 모든 시현이나 감흥을 믿음으로 끊어버리거나 힘차게 막을 만한 조심성이 없이 그만 홀딱 반해서 넘어가고 만다. … 이를 기화로 악마는 으레 그들을 자만과 교만으로 가득 채우면 그들은 허영과 오만에 끌려서 탈혼이나 다른 외모 등 성인과 같이 여겨지는 겉모앙이 그럴듯하게 보여지기를 꺼리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갈 사람에게 영성의 감 즉 정화의 필요를 다져두기 위함인데, 나아간 사람들치고 제아무리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이미 말한 본성의 애착이나 불완전한 습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없는 만큼 하느님과의 합일에 다다르려면 우선 정화부터 필요한 것이다. … 그러므로 합일에 도달하려면 영의 둘째 밤에 들어가야 하니 여기서는 감성도 영성도 일체의 지각이나 맛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캄캄한 속을 순수한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86-88) - 여기서 말하는 ‘나아간 사람’이란 ‘감성의 어둔 밤’을 거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 번의 ‘정화’를 받았다 할지라도 다시금 또 한 번의 ‘정화’인 ‘영성의 어둔 밤’을 거쳐야 비로소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과의 합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에 대한 설명.

 

8. 사실 영혼에 있어서 완전히 정화되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즉 감성과 영성인 때문이니 하나의 정화가 없이 다른 것의 정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것, 감성의 정화가 제대로 있으려면 진실된 영성이 정화가 있은 다음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성의 밤이라 하던 정화는 정화보다도 차라리 욕의 혁신이나 제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유인즉 감성면의 결함과 혼란은 모두 다 영성에 그 힘과 뿌리가 있기 때문이니 좋고 나쁜 습성도 실상은 여기에 있는 것, 그러기에 이것들이 정화되기까지는 감성의 모반과 사악이 잘 씻어질 수 없다.(89) - 일반적인 순서는 ‘감성의 어둔 밤’이고 그 다음이 ‘영성의 어둔 밤’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서 그 순서를 뒤바꾸어 영성의 정화가 먼저 있은 후에야 감성의 정화가 제대로 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

 

9. 하느님께서는 묵은 인간을 이들에게서 실제로 벗기시고자 아울러 새 인간, 즉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하느님께 창조된 인간을 만드시고자 이들의 능력과 애착과 감성을 모두 다 - 영의 것이든 감각의 것이든 그리고 밖의 것이든 안엣 것이든 - 벗겨버리시고, 지성을 어둡게, 의지를 메마르게, 기억은 텅 비게, 애착은 극도의 불안과 고민거리로 돌리시어서, 그전에 영적 보배들에게서 느끼던 맛과 감각을 없애주신다.(90) - ‘영성의 어둔 밤’이란 거의 ‘인성’(인간적/감각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 모두를 포함한)의 제거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신비주의에서 주장하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해서 인간적인 요소를 전적으로 벗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하지만 ‘합일’이 과연 성경적인 개념일까?

 

10. 여태까지 영혼을 비춘다, 무지에서 정화시킨다던 그 하느님의 빛을 어찌하여 여기에서는 어둔 밤이라 일컫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두 가지 이유를 들어서 이 하느님의 지혜가 영혼에게 밤과 어둠일 뿐 아니라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첫째는 하느님의 지혜가 아득히 높아 영혼의 역량을 초월하기에 어둠이라 이르는 것이요, 그 둘째는 영혼의 더러움과 낮고 낮음으로서 그러기에 괴롭고 아프고 캄캄하다는 것이다.

첫째 이유를 밝히려면… 하느님의 일들이란 그 자체가 밝고 환할수록 그만치 영혼에게는 어둡고 캄캄하다는 것이니, 그것은 마치 빛과 같은 것, 빛이 밝을수록 올빼미의 눈동자는 더욱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태양을 쏘아볼수록 시각이 약한 탓으로 안총이 흐려져서 어두워지는 것이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성 디오니시오와 다른 신비신학자들이 주부적 관상을 일러 어둠의 빛살이라 하는데 이는 빛과 정화를 받지 못한 영혼을 두고 하는 말로서 그가 지니는 자연적 지성의 힘이 초자연의 큰 힘을 담당치 못하기 때문이다. … 우리 이성이 하도 약해서 미치지 못하므로 그 무한한 빛에 눈이 캄캄하고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캄캄한 관상이 처음엔 영혼에게 괴로운 것이 빤하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주부적 관상이 지극히 좋은 뛰어남을 많이 가지고 있는 반면 이를 받는 영혼은 정화되지 못한 탓으로 지극히 나쁜 비참을 많이 지니는 까닭이니 하나의 주체 안에 상반되는 둘이 용납될 수 없음에서 괴로움과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다. … 마치 흐리고 언짢고 병든 눈에 밝은 빛이 쏘아 들어오면 아파지는 것처럼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도 아프다는 것이다. 영혼이 제 불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괴로움… 영혼이 그의 자연적 도덕적 영성적 약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신령한 관상이 영혼을 굳세게 만들고 휘어잡을 양으로 하나의 폭력을 쓰는 까닭인데 가뜩이나 약해서 괴로운데다가, 더구나 호된 힘이 쏘아붙일 경우이면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른다.(94-97) - 상당히 공감 가는 설명이다.

 

11. 둘째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고통이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오지 않음을 깨닫는다는 점이다. 고통은 그 지혜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나약과 불완전에서 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정화가 없이는 하느님의 빛과 맛과 낙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니(불이 다려져도 탈 준비가 되기까지는 곧 변화할 수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이토록 고통이 큰 것이다.(122) - 저자는 ‘관상’을 ‘사랑의 하나님의 불’과 같다고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여섯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그 가운데 두 번째 항목에 해당한다.

 

12. 셋째로 여기서 다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연옥의 연혼들이 고통을 받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연옥 불이 그들에게 다려지더라도 그들에게 불완전이 없다면 불이 힘을 쓰지 못하고 각고(覺苦)도 없을 것이니 거기서는 불완전이 타는 재료인 만큼 그것이 없으면 다시 더 탈 것이 없는 것이다.(123) - 저자의 ‘정화’ 개념은 결국 ‘연옥’ 개념과 연결된다! 이 책의 76페이지에서 정화를 말할 때 ‘조명의 길(Via purgativa)’이라고도 한다고 했는데, 여기 나오는 purgativa는 연옥을 가리키는 Purgatory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또한 131페이지로 가면 장 요약에서 ‘어찌하여 이 무시무시한 밤이 연옥인가’라는 문구가 나온다. ‘어둔 밤’, ‘무지의 구름’, ‘마른 샘’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이 과정이 결국은 ‘연옥’과 관련이 있는 사상인 것일까, 아니면 저자가 그것을 서로 연관시키고 있는 것일까?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13. 하느님의 빛이 천사를 비추실 때 사랑 안에서 무리 없이 순순히 밝혀주시기는 그 성질상 순령(純靈)으로 그러한 내리심에 준비가 갖춰진 까닭이지만, 인간은 순수 영이 아니고 나약하므로 하느님의 빛이 쪼이면 마치 앓는 눈에 햇살처럼 쓰리고 아릴뿐, 도리어 어두컴컴하게 되는 것이다.(133)

 

14. 여기서는 영혼의 내적 충동과 행위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신스럽게 움직이자면 우선 자연엣 식량(識量)이나 활동에 있어 캄캄해지고, 잠들고, 고요해져야만 마침내 힘을 못 쓰게 됨을 아는 것으로 넉넉하다.

아! 영스런 영혼아, 네 욕구가 어두워지고 네 애호가 메말라 죄어지고 네 능력들이 어떠한 마음공부도 할 수 없으리만큼 무능한 때가 있거든 그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행복으로 알라. 하느님께서 너 자신에게서 너를 해방시키시고 네 가진 바를 네 손에서 거두심이니 네 힘으로는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손이 부정하고 더럽기 때문에, 지금처럼 충분히 완전하게 또 안전하게 일하지 못하리라. 이제는 하느님이 네 손을 잡으시고 마치 장님을 이끄시듯 어디로 가는지 너도 모르는 캄캄한 속을 이끌어주시니 네 눈과 발을 가지고는 아무리 잘 간다 해도 길을 가늠하지 못하리라.(151)

 

15. 영혼이 하느님을 더 가까이할수록 약한 탓으로 캄캄한 어둠을 더 느끼고 더 깊어지는 것, 태양에 바싹 가까이 하는 자가 제 눈의 약함과 부정 탓으로, 엄청난 빛을 감당 못하여 아찔 캄캄해지는 것과 같다. 하물며 무한량한 하느님의 영스러운 빛은 인간 자연 본성의 이성을 초월하여 가까이할수록 장님이 되고 어두워지는 것이다.(153)

 

16. 마치 일찍이 본 일도 없고 그와 비슷한 것도 보지 못한 사람이 무엇을 보았을 때, 그것을 알고 맛보면서도 아무리 애를 써야 무어라 말할 수도 이름할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 감각을 통하여 파악한 일이 이러하다면 감각을 통하지 않고 들어온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언어는 영혼에게 가장 내밀하고 영스러워서 온갖 감각을 초월하므로 내외 감각의 모든 조화와 능력을 중절 및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다.(158) - 말이 필요 없는, 아니 말을 할 수 없는 영역의 것!



[출처] 십자가의 성요한 [어둔 밤]★★★|작성자 자유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