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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요한의 「감성의 밤」

은가루리나 2016. 9. 14. 00:43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1542-1591)은 수도원에 들어가는 수도자들을 위하여 『어두운 밤』이라는 책을 썼다. 그가 말한 '어두운 밤'은 자연계의 밤을 가리키지 않고 성도들의 영혼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영적으로 칠흑과 같이 암울하여 사람이나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마저 끊어진 것과 같은 상태를 경험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요한은 '어두운 밤'을 「감성의 밤」과 「영성의 밤」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는 성도들이 초보적 신앙단계에서 벗어나 더 완전한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 이 두 밤을 통과해야 된다고 증거 하였다. 또 요한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연단 하는 과정을 두 종류의 밤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어두운 밤' 즉 연단과정을 통과하는 목적을 성도들이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사람에게는 감성 즉 감각이 있는데, 누구든지 이것을 통하여 행복을 누리게 된다. 먹는 즐거움, 입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 냄새맡는 즐거움 등이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감각이란 시각이나 미각이나 후각이나 청각이나 촉각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요한이 말하는 「감성의 밤」이란 이러한 감각들이 자유롭게 쾌락이나 평안이나 기쁨을 누릴 수 없도록 어둡게 하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인 생활 즉 정욕적인 생활을 엄격하게 절제해야 되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감성의 밤」에 대하여 『어두운 밤』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감성의 밤에서 영혼이 메마름에 빠지도록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폭풍과 고생을 보내주신다. 성도들은 닦달질을 당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아 나가고 합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감각과 기능을 정화해 나가야 한다. 사실 고생과 유혹을 거쳐서 단련과 시험을 치르지 않은 영혼은 감성적 생활 때문에 합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또한 합일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닦달질은 '마음 고생'이다. 이 '마음 고생'으로 말미암아 나약한 의지가 집착하고 연연해하던 정욕적인 것과 쾌락적인 것들을 통해서 맛과 위로를 느끼는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영혼은 여기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해지면서 진보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감성의 밤」을 통과하는 기간이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모든 성도들이 똑같은 시련을 당하지도 않으며 각자가 죄를 범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서 알맞게 연단 하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합일의 경지까지 성장하게 하시려는 뜻에 따라서 시간을 길게 하거나 짧게, 혹은 정도를 높이거나 낮추시면서 그 영혼을 짓부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과 의지가 강한 성도라면 하나님께서 더 빨리, 더 호되게 연단하여 정화되게 하신다. 하지만 연약한 성도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관용을 베푸시고 시련도 가볍게 해 주시어 이 밤의 기간이 오래 끌게 된다. 


이런 성도들은 이 땅에서 완전한 순결 곧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들은 연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안 받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호되게 연단을 받아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해도 자기의 불완전함을 발견하여 회개함으로써 점차적으로 정화되도록 얼마동안 저 시련과 메마름을 겪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따금씩 위로를 베푸셔서 한번 놀란 그들이 다시 세속의 것을 찾지 않도록 하신다. 


아주 약한 성도들에게는 신령한 체험들을 맛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나가게 하시는데, 이러한 '푸대접'이 없으면 하나님께 좀더 나아가려고 할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의 합일이라는 복되고 아득히 높은 자리로 올라갈 영혼들은 제 아무리 하나님의 빠른 인도를 받는다해도 상당한 기간동안 이 메마름과 시련의 밤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십자가의 요한, 『어두운 밤』 최민순 역. 성 바오로 출판사, 1988, 9-59면에서 인용]


이상과 같이 「감성의 밤」에 대한 내용을 보면,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서 영혼이 메마름에 빠지도록 폭풍과 고생을 보내주신다고 하였다. 연단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도대체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어? 사랑의 하나님인데 폭풍과 고생을 보내주시다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더 높은 신앙의 경지, 즉 신인합일과 완덕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연단을 받으며 영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감성의 밤」에서 성도들은 닦달질을 통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아 나가고, 장차 합일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감각과 기능을 끊는다고 하였다. 닦달질은 '다그친다', '들볶아댄다'라는 뜻인데, 성도들이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닦달질을 통해 연단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닦달질을 당하는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마음 고생'은 연단을 받을 때 꼭 필요한 것으로 내적 고민과 갈등을 가리켜 말한다. 


이 '마음 고생'은 사람들이 죄성과 본능이 연연해하던 맛과 위로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감성을 정화하여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 고생'을 통하여 빛과 어둠,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선과 악에 대하여 경험적 산지식을 갖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 고생'은 연단을 받으며 더 높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고자 하는 성도들의 마음과 행실 즉 인격을 정결하게 해 준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가장 큰 '마음 고생'은 로마서 7:8-24에 있는 말씀과 같이 죄의 법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과 절망을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체험이 『어두운 밤』에서 증거 하는 '마음 고생'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과정에서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데 가끔 영적으로 실패하는 경험을 하면서 '저는 왜 이렇게 약합니까?', '저는 왜 이렇게 더럽습니까?', '저는 왜 이렇게 부끄러운 생활을 해야 됩니까?'라고 하면서 고민을 하고 탄식하며 애통하고 참회하는 가운데 연단을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 때문에 나타나는 쓰라린 고민·애통·절망·탄식 참회 등이 없다면 영적 훈련이 잘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 요한은 우리의 영혼이 이런 「감성의 밤」을 통과하는 기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지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은 환경, 똑같은 시험이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죄성과 정욕의 내용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조절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조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믿고, 원망과 불평불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견디어낼 만한 자질과 힘이 큰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빨리 호되게 정화하신다. 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어주시고 시련도 가볍게 해주셔서 「감성의 밤」이 오래 걸리게 되며, 행여나 뒷걸음질하지 않도록 위로를 베풀어주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순결에 도달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밤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밤 밖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용을 베풀어주신다는 말은 시험풍파를 가끔 덜어주시고 가볍게 해주신다는 뜻이다. 즉 연단을 받고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큰 시험풍파 속에서 계속적으로 지내도록 하지 않으시고 감당할 수 있도록 돌봐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풀어 시련을 가볍게 해주시기 때문에 「감성의 밤」 밖에 있는지 밤 안에 있는지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므로 '밤 안에 있는지 밤 밖에 있는지'라는 것은 연단을 받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울 만큼 시련이 약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앞으로 전진은 못하지만 겸손과 자기에 대한 인식을 유지하도록 얼마동안 저 시련과 메마름을 겪게 하시고 이따금씩 위로해 주심으로써 큰 시험을 당했을 때 놀랜 경험을 한 그가 세속적인 것을 찾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마음이 아주 약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다가 숨기시다가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도록 하시는데, 이런 '푸대접'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라고 증거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는 것은 어떤 신령한 체험이나 기적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꿈이나 환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신비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약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푸대접'이 없으면 하나님께 다다를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신령한 체험을 하는 것에 대하여 '푸대접'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요한의 견해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시험풍파를 많이 겪고 있는 성도들이 신령한 체험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말하는데, 십자가의 요한은 이러한 체험을 '푸대접'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체험을 '푸대접'이라고 판단하였지만, 많은 성도들의 경험을 분석해보면 시험풍파를 통과할 때 연약하고 무지한 성도들이 은사나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어 고난과 풍파가 많은 연단과정을 빠르게 통과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성도들이 고난풍파를 겪으면서 연약해지고 실망에 빠질 때마다, 신령한 체험이나 기적을 통하여 큰 힘과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얻고 믿음의 경주를 열심히 함으로써 연단과정을 빠르게 통과한 것을 볼 때 결코 '푸대접'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은사나 기적을 체험하는 성도들을 푸대접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성 프랜시스나 썬 다싱을 비롯해서 수많은 성인들은 온갖 신비체험이나 기적을 많이 체험하였는데 이러한 분들도 푸대접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런 분들은 신비와 기적체험을 통해서 많은 위로와 힘과 희망과 용기를 얻고 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면서 충성스럽게 헌신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푸대접'을 받은 성도들은 연단을 받을 때 큰 시험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하나님께서 시련을 가볍게 해주시거나 아예 연단과정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아서 성장하지 못하고 앉은뱅이 같이 된 성도들을 가리켜 말한다. 그러므로 결코 신령한 은사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푸대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십자가의 요한은 사랑의 합일 즉 신인합일이라는 복되고 아득히 높은 경지로 올라갈 영혼들은 아무리 빠르게 인도하신다 하여도 상당한 기간을 메마름과 시련의 밤 속에 있게 된다고 하였다. 


즉 「감성의 밤」을 통과하는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마음과 행실이 죄악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골고루 정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출처]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감성의 밤」 (청계산기도원) |작성자 순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