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
1903년 10월 12일
가시관의 의미
1 오늘 아침에는 흠숭하올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나의 내면에 나타나셨다.
그런 모습의 그분을 뵈면서 나는 이렇게 여쭈었다.
"인자하신 주님,
채찍질을 당하셔서 그토록 큰 고통을 겪으시며 그 많은 피를 쏟아내신 당신의 몸을,
당신의 머리가 시샘이라도 하신 것 같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몸보다 머리가 덜 존경받기를 원하지 않으셔서 원수들로 하여금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가시관을 씌우게끔 부추기기까지 하신 듯 하니 말입니다?"
2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딸아,
내가 가시관을 쓰고 있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서,
아무리 많은 말을 하더라도 언제나 할 말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의 머리가 어찌하여 몸과 경쟁이나 하는 듯이 머리 고유의 독특한 고통,
곧
몸의 전반적인 고통과 구분되는고통 및 출혈에 의해서 영예를 입고자 했는지,
창조된 인간 정신이 그 까닭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3 머리는 온몸과 온 영혼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머리가 없는 몸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다른 지체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머리가 없고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인즉,
머리는 온전한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몸이 고통을 받거나 선행을 한다면 머리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고
몸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4 그러므로 (내가 가시관을 쓴) 이유 중의 하나는,
통치와 지배력의 회복으로 은총의 새 하늘과 진리의 새 땅이
인간 정신 안으로 스며들게 하는 일을 내 머리가 해야 했고,
또한 혹독한 고통이 될 정도로 깊어진 죄의 새 지옥도 몰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온 인류 가족에게 영광과 영예와 존귀의 관을 씌워 주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가시들이었지만
먼저 내 인성에 그것으로 관을 씌워 영예롭게 하고자 했으니,
이는
죄가 인간에게서 앗아갔으나 내가 다시 돌려 준 불멸의 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5 게다가 가시관은 가시가 없는 영광이나 영예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육신과 정신이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
격정을 지배할 수 없고 덕행을 획득할 수도 없다.
참된 지배력은 고행과 희생의 가시로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6 더욱이 이 가시들은 내가 유일하게 참된 왕임을 뜻한다.
오로지 나를 자기 마음의 왕으로 삼는 사람은 평화와 행복을 누리고,
나는 그를 내 나라의 왕으로 세운다.
그러므로
나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작은 믈줄기 같은 피의 갈래들은 같은 수의 끈들처럼
나의 통치에 대한 지식에다 인간의 지성을 동여 묶는 것이다."
7 내가 내적으로 듣게 된 그 모든 것을 누가 제대로 옮길 수 있을까?
나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사실, 조금밖에 옮기지 못했지만 그것마저 두서없이 표현한 것 같다.
하긴, 신적인 것에 대해서 언급할 경우 누구나 그렇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고상하고 탁월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건,
하느님은 창조되지 않은 분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하느님에 관한 한 서툴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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