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기도

신부와 신랑

은가루리나 2016. 10. 25. 08:28



1신부와 신랑(1)



-엄효선리나55 15.12.17. 23:54-


<이 모든 것은 영적 혼인, 인간이 이승에서 얻을 수 있는 신적 합일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을 아니다.

죽음과 영광에 들어감으로써 영광스러운 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더 내밀한 합일이 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현시다.>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이 온갖 좋은 것을 포함하고 있기에,

여러분이 영과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차지가 될 것이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두가 사랑이어서

만일 하느님만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를 찾는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그 나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완전히 하느님께 전념해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 자체는 그토록 열렬하게 원하던 바로 그 보물과 그 왕국이 된다.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바로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모든 선물을 누리고 즐길 수 있게 되는데,

우리 기쁨의 충만성은 바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큼 현시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실성을 다해서 그분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는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활동하시는 데 쓰이는 도구들인 우리가 

그분을 섬겨 드리는 것이 곧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섭내6-9◈









1신부와 신랑(2)




"영혼이 천상의 사랑과 열망에 의하여 감동을 받아,

하느님 말씀의 아름다움과 공평함을 똑똑히 바라보면,

영혼은 그분의 사랑스러움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엄효선리나55 15.12.19. 02:03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오신 우주 전체에 말씀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비가들은 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사랑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신비가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정원에서 슬프게 찾는 아가의 신부, 

신약성경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이 신한적 사랑을 발견한다.>


<공의회는 이러한 독신자들이 또 다른 혼인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시사한다.

사제의 독신생활에 대해 언급하면서 공의회는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저 신비로운 혼인을 상기시켜 주며, 

미래에 완전히 드러날 그 혼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신랑으로 맞는다" 고 말한다.


독신생활은 사랑과 봉사생활을 위해 소수에게만 주어진 카리스마적 선물이며,

혼인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세상에 봉사하게 하고 

신랑이신 하느님과 종말론적 혼인에 이르도록 하는 성소임을 독신자들은 알고 있다.>


<혼인하든 독신으로 살든 신적이고 신비적인 사랑은 하느님께서 똑같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성령의 은사를 능가하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1신부와 신랑(3)



엄효선리나55 15.12.23. 01:32


<사랑과 아름다움>



영혼이 천상의 사랑과 열망에 의해서 감동을 받아,

하느님 말씀의 아름다움과 곤평함을 똑똑히 바라보면, 영혼은 그분의 사랑스러움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이 아름다움을 보는 순간 신부는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을 알고 

이 아름다움 자체에 열중하고 이 아름다움으로 변화된다


신랑은 신부가 절실한 사랑으로 응시하는 거울이다.

그녀는 무엇을 보는가?

그녀는 자존하는 아름다움이자 하느님 말씀인 신랑을 보고 자존하는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자신도 본다.

("저는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당신이 될 것이고, 당신은 당신의 아름아움으로 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아경이다.

변형하는 합일이자 영원한 생명의 전조다



<약혼>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 자신을 잊었네

내 얼굴을 사랑하는 이에게 기대었네

밸합에 둘러싸여 걱정거리를 잊어버린 채

모든 것을 멈추고 나를 내맡겼네."


그녀가 맺은 영적 혼인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다.


출발, 즉 무아경은 합일로 인도하는 긴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키스는 합일이다. ....그 안에서 영혼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동등하게 된다.


포옹은 "그녀가 신랑 품에 안긴 것과 같다."

포옹에 의해서만 그녀는 하느님의 삶을 산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찾고 있다면 

사랑받고 계신 하느님은 그 사람을 더욱더 찾고 계시다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요점은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도하신다는 것,

신비적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선물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멋진 선물이다!

무력하고 버려진 어린아이가 사람이 되신 말씀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다.




{“네 침상 생활 초기에 내가 너를 천국에 데려가 

지극히 거룩 하신 삼위일체 앞에서 우리의 혼인식을 거행했던 일이 기억나지 않느냐? 

그때 성삼위께서 너에게 선물들을 주셨는데, 너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우리 성삼위가 하늘에서 내려와 네 마음을 차지하고 

그 안에 우리의 영구적인 거처를 마련하였다. 

우리가 너의 지성과 마음과 네 전체의 고삐를 잡았던 것이니, 

네가 행한 모든 것이 너를 지배하는 우리의 창조적인 뜻의 유출이었고, 

하느님의 영원하신 뜻이 너의 뜻에 생명을 주고 있음을 드러내는 확증이었다.”}♣이루어지소서♣









1신부와 신랑(4)


엄효선리나55 15.12.29. 22:25


<영적 혼인>


이 영적 혼인은.... 사랑에 빠진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총체적 변화다.

그 안에서 각자는 사랑의 합일을 완성함으로써 자기 전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내준다,

그럼으로써 영혼을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참여를 통해 신적 하느님이 된다.> -성 요한-


"사랑은 애인을 사랑하는 대상과 동등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아멘~~



<신비주의와 성행위>


현재의 영성과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긴 역사에서 새로운 발전 단계의 시작일 수 있다면,

지나온 것을 부정하지 말고 오히려 양자가 그것에서 배우고, 

하느님 안에서 깊이 있는 생할을 하기 위해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해야 한다.

또한 성행위와 관련된 뮨제는 역점을 두어 다루어야 할 가장 중대한 문제들 중 하나다.









1신부와 신랑(5)



moowee 11.11.30. 12:41 



이 준주성범은 참으로 훌륭한 영신서적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거 스토아 신학의 영향으로 육체를 멸시하는 금욕주의가 많이 스며 있는 것이 흠이 아닌가~~

그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김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크게 작용하시게 하는 측면보다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과 인내와 고행으로 덕을 닦아 성덕에 이르는 측면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듯 느껴집니다.


내맡긴 영혼들은 이를 잘 분별하여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 ^ 




moowee 12.06.07. 14:16 



우리 교회 안에는 아직도 고행을 통하여 덕을 쌓아야 한다는 "고행주의" 사고가 잔재하고 있습니다.

고행주위는 아마 역사적으로 얀세니즘의 영향과 불교 내지는 힌두교적인 수덕 방법의 영향이 컸을 겁니다.

저도 어린 시절, 소신학생 때는 훌륭한 신학생은 고행을 즐기고, 

고행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이라 여기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고행은 영적 생활에 큰 성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행 내지는 금욕주의는 특별한 소명을 받은 소수의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53,4) 




moowee 12.06.07. 14:24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가 나았다."(이사53,5)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고통과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만 믿고 뜨겁게 사랑하면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탁월한 방법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위탁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걸 위탁하기만 하면, "불행 끝 행복 시작" 입니다. 





moowee 12.06.07. 14:16 


우리 교회 안에는 아직도 고행을 통하여 덕을 쌓아야 한다는 "고행주의" 사고가 잔재하고 있습니다.

고행주위는 아마 역사적으로 얀세니즘의 영향과 불교 내지는 힌두교적인 수덕 방법의 영향이 컸을 겁니다.

저도 어린 시절, 소신학생 때는 훌륭한 신학생은 고행을 즐기고, 

고행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이라 여기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고행은 영적 생활에 큰 성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행 내지는 금욕주의는 특별한 소명을 받은 소수의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 것입니다.




moowee 14.02.27. 15:17 


인간의 性(sex)은 절대 惡의 근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男性으로 태어나셨고 그래서 남성을 지니고 있었고,

성모님은 분명 女性이셨기에 여성을 지니고 계셨고 두 분 다 태어나신 

그 조건에 따라서 살아가셨던 분들이십니다.


우리의 어린시절 잘못된 교육으로 <거룩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신앙인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거룩한 성인, 성녀라고 화장실에도 안가고 이슬만 먹고 사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분들도 우리들처럼 인간으로서 <性慾>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인간의 성욕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완전한 한 인간, 남성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면>

분명, 예수님도 우리처럼 <성적인 욕구>를 느끼셨을 겁니다.


거룩한 수도복을 입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끊고 봉쇄수도원에서 살아가시는

수녀님, 수사님들이라고 <성적인 욕구>까지 완전히 다 반납하고 살아가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거룩한 수도자들이 거룩한 수도복을 걸치면 그분들의 性이 저절로 하늘로 사라집니까?


제가 어떤 그 자매님께 드린 말씀은 대충 다음과 같았을 겁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자매님! 모든 남성들이 다 고추가 있듯 예수님도 마찬가지셨고,

<고추를 생각하는 것을 너무 죄악시하지 말라>고 말입니




<마태5,28>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음탕한 욕심" 없는 생각은 저는 죄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性>은 <하느님의 거룩한 선물이요, 거룩함의 도구>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성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죄악시 해야지 

인간의 성 그 자체를 죄악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각자의 성을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하느님이 맺어주신 모든 부부는 성실한 부부관계를 통해,

부부애를 완성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가끔 보면 <부부관계가 없는 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1신부와 신랑(첨가1)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의 좋은 선물에 기뻐하도록 

인간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잘 만드셨다.>




성적 즐거움을 통해 그 사람안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그는 내적인 깊은 감사를 체험한다.




즐거움은 풍성함이고 충만함이며 하느님의 모상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삼위일체적 본질 안에서 최상의 즐거움을 누리신다."










"인간의 육체에는 성(性)도 포함된다. 

전체 우주는 생명을 주는 '녹색 생명력'으로 맥이 뛴다. 

힐데가르트는 이로부터 유추해서 '생식행위에 있어서의 녹색 생명력' 또한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