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영적성장의 단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06:42)
■ 내맡긴 영혼은 ■ The abandoned soul
영적성장의 단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지도사제 1710.07.26 12:52
흔히들 "영적성장의 단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몇 궁방이 어떻고, 정화 단계가 어떻고 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영적성장의 단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분명히 그 단계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성장의 단계가 하나의 제품이 만들어지듯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람은 물건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그 과정이
물건 만들어지듯이 공정별로 딱딱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로봇" 제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영적 수준이 1궁방에서 7궁방까지 성장하는 과정이나
정화, 조명, 합일(일치)의 단계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그 과정이 다 다르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과정을 다 초월하여
곧바로 최고의 영적 단계로 진입할 수도 있는 것이며
어떤 이는 중간 과정을 초월하는 이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가 그 좋은 예입니다.
그 강도는 모든 단계를 초월하여
한순간에 하느님과의 합일(일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이는 맨날, 성당의 감실 앞에서
"생각"을 붙들고 부르스, 탱고 다 돌려도
평생을 고 모양 고 꼴로 살다가 가는 이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영신생활의 초보자에게
영적성장의 단계가 이러저러하니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스승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는 행위입니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영성생활이란 그것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을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그 단순하신 하느님을 어떤 인간의 지식으로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적"이 되는 행위가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복잡한 방법으로 이해되고 알게 되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일수록
그 안에는 하느님이 아니 계시게 됩니다.
쩡말입니다!!
신학자가 神學을 가르칠 수 있다 하여도
사람이 하느님을 神仰하게,
하느님을 앙모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 당사자와 하느님뿐입니다.
영성생활이란
두 존재가 원초적 사랑을 회복하여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초적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뛰어난 방법이
바로 "내맡김"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던
"자유의지"의 잘못된 사용으로 잃게 된 사랑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그 자유의지를 하느님께 반납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 자기 뜻을 반납해 드리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영적성장을 시켜 주십니다.
사람에 따라
정화, 조명, 합일 또는 1궁방~ 7궁방의 단계와 머무르는 시간도
다 다르게 당신이 알아서 조정해 주십니다.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내맡겨 내가 없어졌기에
그 이후의 일도 다 하느님께 내맡기고
우리는 그저 날이 갈수록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
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과거의 어떤 한 성인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 방법에만 치우치게 만든다면,
오히려 그것이
하느님과의 일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성인들은 정말 "인내심"이 뛰어난 분들이십니다.
무엇을 하기 싫어도 대단한 인내로
억지로 꾹 참고 죽도록 하다보니 하느님과 일치 된 분이었는데
그 뛰어난 분이 행하신 길을 고대로 따라하라 하니~~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하기에 나의 모든 것, 내 뜻을 당신께 돌려 드립니다."
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기만 하면,
영적성장은 스승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 * * * * * *
■ 내맡긴 영혼은 ■ The abandoned soul
영적성장의 단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지도사제 1710.07.26 12:52
<댓글>
지도사제 10.07.26 19:56
"바람의 길을 네가 알 수 없고
임산부의 배 속에 든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듯
그렇게 모든 것을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너는 알 수 없다." (코헬 11,5)
- 이끌림10.07.26 18:43 -
아멘!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내맡겨 하느님의 것이 된 사람만
하느님의 일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거룩하게 살면 살 수록,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져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께서 하나씩, 때로는 엄청 알려 주시죠,
靈感(inspriration)으로 말이죠.
쩡말이예요,ㅎㅎㅎㅎ
〓 내맡김영성 나눔 〓
무위신부님 글- 영적성장의 단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무심 13.01.04 06:55
<댓글>
지도사제 13.01.04 14:04
자신을 "無知" 한 사람으로 인정한 사람은 반드시 이끌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리고 無知, "知識" 이 없기에,
무지한 사람을 당신의 "智慧" 로 채워주십니다.
오히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루카10,21)"
당신의 지혜를 감추십니다.
└ 지도사제 13.01.04 18:49
저는 어린 시절, 집을 떠나 소신학교의 기숙사 생활에서
<정말 하기 싫어도 대단한 인내로 억지로 꾹 참고 죽도록>도
해 보았습니다, 그 어린 시절에, 신부가 되기 위해!
그렇게 해 보신 분들 계시면 한 번 나와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몇 분 안 될겁니다.
그리고, 해 보신 분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꾹 참고 죽도록> 해 보셨습니까?
궁굼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해야 하기 때문에 죽도록 꾹 참고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맡김은 <그분의 이끄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맡기면 죽도록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미 죽으셨고,
그분을 위해 우리의 뜻이 이미 죽었기(내맡겼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인내로 억지로 꾹 참고 죽도록 하는 것>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하라, 하지 말고 하라!
하지 마라, 네가 하지 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시게 하라!>
하느님만 떠겁게, 떠겁게 싸랑하시길 바랍니다.
영적독서 노트
[2011년 9월 7일] 관상의 단계에 대하여
하늘나그네 11.09.06 20:03
<댓글>
지도사제 11.09.07 08:13
"참 생명이란 주님의 의지(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관상의 단계에 대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거룩하게 사는 것이요,
거룩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관상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삶 속에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자신의 것을 다 내어드리지 못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순 거짓말'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 부족함과 죄스러움까지 다 내맡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맡겨 드리면
'관상의 단계'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맡겨드려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져 버렸는데
무슨 단계가 필요합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단계나 순서'가
순식간에 다 하느님의 뜻대로만 바뀌게 됩니다.
오직 그분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이 단계요 순서입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그저 그분을 느끼며 그분을 사랑하면 끝입니다.
단계나 순서는 하느님이 알아서 할 일이시고
우리는 그분께 집중하여 몰입하여
그분의 이끄심에 충실히 이끌려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
주님, 저를 이끄소서, 저는 기쁘게 이끌려 드리이이다
└ 지도사제 11.09.07 11:20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얼마나 높은 단계의 영성인지
잘 알 수 있죠.
하기야,
아브라함과 성모님 그리고 예수님이
그 영성을 직접 살아가셨으니까요.
이 영성이 아니면,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신 '성인들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분들의 '방식'은 또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
바로 아래의 '최고의 방법'이니까요.
성인들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은
성인들이 자신의 '영적 스승'이 되고,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따르는 사람들의 영적 스승은
'예수님'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에 있어서
단지 '보조 교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외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예수님)께 다 내어 맡겨드렸는데,
하느님의 것이 된 영혼을
어느 누가 지도하고 어느 누가 이끌어 주겠습니까?
거룩한 내맡김으로
부족해도 죄스러워도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되었기에,
하느님이 직접 지도하고 이끌어 주셔야 하는 것이 당연치 않을까요?
스승 예수님이 필요하시다면
다른 성인들의 영성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십니다.
선생님(스승 예수님) 맘대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 사람에 필요한 정도에 따라서 말입니다.
우리 선생님의 교수법은 정말 끝내주십니다.
스승님의 가르침만 잘 따르면
엄청 훌륭하신 성인의 영성을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절대 '교만'의 말이 아닙니다. ^
영적독서 노트
[준주성범 1-2] 겸손히 자기를 낮춤
하늘나그네 11.11.01 23:21
<댓글>
지도사제 11.11.02 11:36
<내맡김의 영성>
1. 내맡김의 영성이란?
" 하느님에 대한 앎을 알려고 너무 서두르지 마라.
그 '서두름'도 또 하나의 '교만'이다.
< 내맡김 영혼은>
"영적 성장의 단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와
"참으로 영적 성장을 바란다면 이렇게!" 를 읽어보세요.
이해욱프란치스코61 2016.12.13.
사랑하는 하내영 여러분!
'영적성장을 서두르는 것도
또 하나의 다른 욕심이며 교만'입니다만,
자신의 영적성장을 이루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는 것 또한
하나의 죄악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들이라면,
하느님께서 당신에 대한 앎을 알려주시는 대로
그 앎을 알려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을 알려 노력하지 않는 이는,
100% 다 내맡긴 영혼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명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은
하느님에 대한 앎의 지고한 가치를 잘 알고 있기에,
아니 하느님께서 그 가치를 알도록 깨우쳐 주셨기에 날이 갈수록
그분에 대한 앎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분께서 빠져들도록 이끌어주십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의
하느님에 대한 앎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寶物倉庫가
바로 이곳 무형의 기도원 마처예함이며 이곳의 쌓여진 글들입니다.
이곳에 들어오신 지 얼마되지 않으신 하내영이나 오랜 하내영 모두,
이곳의 지난 글들을 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A.Q는 저절로 높아질 것입니다.
이곳의 거룩한 글들이,
글들 속에 숨어계신 그분께서 여러분의 A.Q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상위 카페 <마처예함>에서 모셔온 댓글입니다.
하덧사 여러분들은
우선 <내맡김 영성>과 <내맡긴 영혼은>을 읽으신 후
이끄심에 따라 이 곳 무형의 성전의 지난 글들을 읽어 보시면 좋겠지요. ^^)
★거룩한위탁
69 pp.356-362 제 3편 제 8장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무화 19.05.25 23:31
P.357
우리가 기대할만큼 신심생활에
진보의 발자취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그렇다고 결코 마음을 산란케 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평온함이 마음을 지배하도록 평화 안에 머물러 있자.
우리의 영혼을 훌륭하게 배양한다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며,
따라서 그것에 충실히 종사해야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확의 풍요함에 관해서는 그 배려를 주께 일임하자.
하섭내
제 4 장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영성의 본질이다
02
내어맡김의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면,
모든 피조물에서 이탈해야 한다.
[ moowee 14.05.08. 10:55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100%) 내맡기기만 하시면
그 즉시 그분의 가르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정말! ]
* * * * * * *
.
━전영준 신부의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4) 16세기 ③
-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지도사제 18.07.08 07:39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4) 16세기 ③
-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기도와 정화로 영적 완덕 이르는 길 제시
2018. 05. 13발행 [1464호]
16세기 스페인 출신 영성가들 중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성가들과 관련된 연구 서적이 다른 영성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 사람들도
이 영성가들이 저술한 작품들을 꾸준히 읽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들의 영성이 특별하고 중요하며 유용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 아빌라의 데레사.
기도를 통해 영적 여정을 가르친 데레사
스페인 아빌라 출신인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de vila, 1515~1582)는
예수의 데레사(Teresa de Jess) 혹은 대(大)데레사로도 불렸으며,
본명은 데레사 산체스 데 세페다 이 아우마다
(Teresa Snchez de Cepeda y Ahumada)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아버지는 기사 작위를 매수해
그리스도교 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되었으며,
어머니는 데레사를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양육했습니다.
따라서
데레사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전(聖人傳)에 매료되었으며,
7세에 무어인들에게 순교하려고 집을 나서기도 했습니다.
11세에 어머니가 죽자, 비탄에 빠진 데레사는
동정녀 마리아를 자신의 영적인 어머니로 생각하는 신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4세에 데레사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 학교에서 6년간 수학했으며,
19세에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아빌라의 예수 강생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습니다.
데레사는 수도생활 초기에 병에 걸려 본가에서 요양하던 중
오수나의 프란치스코(Francisco de Osuna, 1492/97~1540)의 저서
「제3의 영성 입문(Tercer Abecedario Espiritual)」을 읽으면서
종교적인 탈혼을 경험했습니다.
몸이 완쾌된 후 수녀원으로
돌아온 데레사는 지속해서 신비스러운 체험과 환시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데레사도 자신의 체험에 혼란을 겪었지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알칸타라의 베드로(Pedro de Alcntara, 1499~1562)에게
조언과 격려, 옹호를,
또 예수회 수도자
보르하의 프란치스코(Francisco de Borja, 1510~1572)에게
위안을 받으며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데레사는
1559년부터 2년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했습니다. 결국
1562년 신비체험을 통해 용기와 확신을 얻은 데레사는
가르멜회를 개혁하고자 아빌라에 성 요셉 수녀원을 설립하고
맨발의 가르멜회를 시작했습니다.
데레사는 고해 사제였던
도미니코회 도밍고 바녜스(Domingo Bez, 1528~1604)의 권유로
1565년쯤 저술한 「완덕의 길(Camino de Perfeccin)」에서
기도를 통해 영적 완덕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즉,
기도는 수덕적인 측면과 신비적인 측면으로 이루어졌는데,
단계를 구분한다면
구송 기도, 거둠 기도, 고요의 기도, 일치의 기도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데레사는
잘 바친 구송 기도를 통해 기도의 모든 여정을 담을 수 있으며,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침으로써 높은 단계의 정신 기도에 도달할 수 있다
고 강조했습니다.
또 기도의 수덕적인 여정을 위해서
애덕 실천, 피조물에서 이탈, 겸손, 굳은 결심이 필요하다고
언급했습니다.
한편 데레사는
1577년 자신의 최고 걸작 「영혼의 성(Castillo Interior)」에서
인간 내면을 성찰하면서 기도의 단계를 대조해
신비체험의 여정을 설명했습니다.
즉, 외부에 자리 잡은 가장 불완전한 단계인
첫째 궁방에서 출발해
가장 깊은 중심에 있는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일곱째 궁방까지 차례대로 단계를 거치면서
초자연적인 질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변모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부터 셋째 궁방은
구송 기도와 묵상을 훈련하는 수덕적인 단계이며,
넷째 궁방은 신비적인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체험하고,
다섯째부터 일곱째 궁방은
일치, 순응 일치, 변형 일치를 경험하는 수덕적인 단계입니다.
데레사는 실천하는 영성생활을 통해서도
관상의 높은 단계인 신비 생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 십자가의 요한.
정화의 과정을 강조한 요한
스페인 아빌라 근교
폰티베로스(Fontiveros)의 개종한 가정 출신인
십자가의 요한(Juan de la Cruz, 1542~1591)은
1551년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l Campo)로 이주해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공부하며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에서 미사 복사를 했습니다.
청소년 시절 요한은 병원에서 일하며
예수회 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1563년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한 요한은
이듬해 성 마티아의 요한이라는 수도명으로 서원했으며,
바로 살라망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567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하지만 완화된 규율에 불만을 품은 요한은
카르투지오회로 옮길 고민을 하던 중에
아빌라의 데레사를 만나 수도회 개혁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1568년
두루엘로(Duruelo)에서 십자가의 요한으로 수도명을 바꾸고
이듬해에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1577년
규율 완화 가르멜회 수도자들에 의해
톨레도(Toledo) 수도원에 9개월 동안 감금된 요한은
수도원 옥탑 감옥에서 ‘어둔 밤’이라고 부른 신비체험을 한 후에
자신의 체험을 담은 시를 일부 저술했습니다.
이후에 안달루시아(Andalusia)에 있는
엘 칼바리오(El Calvario) 수도원으로 무사히 탈출한 요한은
동료 수도자들의 요청으로
자신의 체험을 담은 시를 설명하기 위해
스페인 문학사에서도 찬사를 받는 신비신학 작품인
「어둔 밤(Noche Oscura del Alma)」,
「가르멜의 산길(Subida del Monte Carmelo)」,
「영가(Cntico Espiritual)」,
「사랑의 산 불꽃(Llama de Amor Viva)」을 저술했습니다.
요한의 신비신학 전체를 이해하려면
네 권의 작품을 모두 섭렵해야 합니다.
오늘날 영성신학자들은 요한의 네 작품을 통해
신비체험을 통한 영적 여정의 단계를
미세하게나마 구분해 설명합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요한이
전통적인 정화, 조명, 일치의 발전 단계를 기본으로 유지하면서
조금 더 세밀한 설명을 첨가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요한은 초보자에게 해당하는
정화의 단계를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했습니다.
즉,
감각의 능동적 밤과 영의 능동적 밤입니다.
다음으로 요한은
진보자에게 해당하는 조명의 단계도
감각의 수동의 밤과 영의 수동의 밤으로
나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완덕에 다다른 자에게 해당하는 일치의 단계에서
하느님과의 일치가 이뤄진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언급한 일치는 사랑의 일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 영혼은 향주덕의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 영혼은
신적 혼인의 상태를 거쳐 지복(至福)의 상태에 이릅니다.
요한의 신비신학은
위-디오니시우스의 작품과 「무지의 구름(Cloud of Unknowing)」
에서 나타나는 부정신학적인 방법론을 포함하고 있으며,
데레사의 작품과 함께 읽으면 더욱 잘 이해됩니다.
요한의 작품은
영적 진보를 이룬 자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대중에겐 다소 어렵게 느껴졌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데레사의 작품보다 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두 영성가의 작품은
영적 발전을 갈망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도
큰 도움을 주는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두 영성가의 가르침은 그 당시
내적으론 거짓 신비체험이 난무하는 상황과
외적으론
종교개혁의 물결이 이는 스페인 가톨릭교회를 훌륭하게 지켜주며
긍정의 힘을 유럽으로 확산시켰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내맡긴영혼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얼굴"을 만듭시다! (1) | 2016.10.27 |
---|---|
순명의 필요성과 그 잣대 (0) | 2016.10.27 |
역사는 흘러가며 성장합니다. (0) | 2016.10.27 |
내맡김의 주제가 - "내 생애의 모든 것" (0) | 2016.10.27 |
6하원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0) | 2016.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