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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끝나지 않은 여행'(대림특강)

은가루리나 2016. 11. 17. 12:11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끝나지 않은 여행)

 

 

영적 성장의 단계

 

 

  변화를 지향하는 독특한 인간의 능력은 인간의 영성에도 반영된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려 깊은 사람들을 보면 우리들이 모두 영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영적 성장이나 종교적인 발달 단계들은 저마다 다르다.

 

  이 문제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 가운데 현재 가장 유명한 분은 『신앙의 단계 Stages of Faith』'라는 책을 쓴 에모리 대학 캔들러 신학교 교수인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교수이다.

파울러 교수는 영적인 성장을 여섯 단계로 서술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네 가지로 재정의했지만, 결국은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이다. 파울러 교수의 저작은 내 책보다는 훨씬 더 학구적이고 피아제, 에릭손 그리고 콜버그 같은 단계 이론가들의 저작에 대한 학술적인 언급이 많이 되어 있다.

 

  내가 이러한 단계들에 대해서 통찰하게 된 것은 책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인데, 특히 소위 ‘예상치 못한’ 경험을 통해서이다. 열다섯 살 때 내가 살던 지역에 있는 기독교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서 이런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나의 주된 관심은 여자 아이들을 살피는 것이었지만 기독교에 관련된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보는 데에도 어느 정도 관심은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방문하기로 마음먹은 교회는 시내에서 단지 몇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이 교회에는 당시에 상당히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의 설교는 근방의 모든 라디오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방송되었을 정도였다. 열다섯 살이었던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사람이 위선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시내 위쪽으로 올라가 아까 가보았던 교회의 반대 뱡향에 있는 교회로 갔다. 이 교회에도 역시 먼젓번 교회의 목사만큼은 아니지만 꽤 알려진 목사님이 계셨다.

 

  그분의 이름은 죠지 버트릭(George Buttrick)이었는데, 열다섯 살짜리 눈에도 이분이야말로 성인이고 정말로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열다섯 살짜리의 빈약한 머리로 내가 왜 이렇게 생각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당시에 가장 유명한 목사님은 열다섯인 내가 보기에 영적인 성장에서 이미 내가 그분을 앞서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기독교 교회에, 나보다 영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앞선 목사도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이십오 년 동안 교회와 등을 돌리게 된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었다고 하면 선뜻 일리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이런 경험을 훨씬 이후에 또 한번 겪게 되었다. 몇 년 동안 심리치료를 담당하면서 이상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고통이나 골칫거리 혹은 여러 어려움에 빠져서 나를 찾아와 정말로 치료에 집중하고 나면, 심심치 않게 이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의심을 품고 질문을 남발하는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 심지어는 무신론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혹은 회의론자였던 사람들이 고통이나 문제점, 어려움에· 봉착해서 나를 찾아와 열심히 치료를 받고 나면 자주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으로 신실하고 영적으로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 된다.

 

  이러한 유형은 이해할 수도 없고 정확하게 예상할 수도 없다. 같은 의사가 같은 치료법을 사용해도 성공하거나 아니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는 것만은 아니고 저마다 다른 단계에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신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가끔씩 내가 정한 카테고리를 간섭해 오고 사람들은 내가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정신의학적이고 영적인 분류 방식에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주의 깊고 유연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최초의 근본적인 1단계는‘혼돈/반사회’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단계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인구의 약 20% 정도가 포함된다. 대체로 이 단계는 영성이란 것이 부재하고 이 단계의 사람들은 원칙 없이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 단계를 반사회성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실제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고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교묘하게 속이면서 진실한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의지 이외에는 스스로를 통제할 매커니즘이 없기 때문에 혼돈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원칙이 없다는 뜻이다. 통제되지 않은 의지란 하루는 이쪽으로 갔다가 다음날에는 저쪽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존재도 마찬가지로 혼돈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곤경이나 어려움에 처해 있기도 하고, 종종 감옥이나 병원 혹은 길거리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따금씩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어서 자신들의 야망에 의해 상당한 명성과 권력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사장이나 유명한 목사가 되기도 한다.

 

  1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가끔씩 혼돈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맛보게 된다. 대체로 그런 경험에서 금방 벗어나지만,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이 계속되면, 자살을 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은 이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가끔씩 사람들은 2단계로 전환될 수 있다.

 

  이런 식의 전환은 대체로 ― 여기서 대체로라고 말한 이유는 향상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 급작스럽고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마치 신이 아래로 내려와 그 영혼을 가로채서 위로 확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그 사람에게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 과정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 혼돈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정말 어떤 이이든 심지어 내가 통제를 받는 상황끼지도 기꺼이 감수할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 사람들은 2단계로 전환되는데, 나는 이 단계를 ‘형식적/제도적’이라고 이름 붙였다. 내가 제도적이라고 이름을 지은 까닭은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통제를 제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옥도 일종의 제도가 될 수 있다.

 

  내 경험에 의하면 교도소로 정신과 의사가 진료를 하기 위해 새로 들어왔을 때 집단 치료를 위해서 수감자들을 불러 모으고 교도소장의 오른팔이 되어 그럭저럭 수난을 당하지 않고도 지내는 죄수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모범적인 죄수나 시민이 된다. 이 사람은 제도에 너무나 잘 적응하므로, 가장 먼저 가석방될 기회를 얻는다. 곧바로 이 사람은 걸어다니는 범죄 요인이 되고 가석방되고 일주일도 안 돼서 다시 체포되어 바로 철창신세를 진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을 길들이려는 제도의 울타리 안에서 모범적인 시민이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 제도란 군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나 다른 사회에서도 군대는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다소 남성 중심적인 군대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통제받아야 할 제도라는 것은 고도로 조직화된 사업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도란 교회를 의미한다. 실제로 대다수의 교인들은 2단계, 즉 형식적/제도적 단계에 빠져 있다. 일정한 순서가 있고 이 단계마다 전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2단계 안에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특징짓는 그 뭔가가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통제를 교회라고 하는 제도에 의존하고 있고 내가 그것을 형식적이라고 부른 이유는 종교적인 형식에 매우 집착하기 때문이다.

2단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형식이나 의식을 바꾸고, 자신들이 쓰던 기도서를 변경하고 새로운 찬송가를 도입하기 시작하면 무척 혼란스러워한다.

 

  예컨대, 70년대 중반의 미국 성공회에서는 일요일마다 같은 내용을 설교하는 형식에 대안적인 방법도 있을 수 있다고 결정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에 분개하여 극심한 분열을 초래하였다. 또 하나의 예로는 1960년대에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 제2공의회는 교회 내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초래했었다. 그런데 30년이 지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변화들을 되돌려 놓으려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미국 성공회 교인들이나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소요는 전 세계 모든 종교의 교파마다 계속되고 있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적인 형태가 바뀌었을 때 너무나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형식에 의존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혼돈으로부터 벗어나는 느낌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행위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신을 외적인 존재로 본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신이 얼마쯤은 우리들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 ― 신학자들의 용어로는 내재 한다는 것 ― 인간의 영혼 안에 신이 주재한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신이란 저 위에 혹은 저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신을 남성적인 모델에 따라 상상한다. 그리고 신은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적절한 시기에 주저없이 사용할 수 있는 징벌의 힘도 신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신을 마치 하늘에 있는 자비로운 경찰쯤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런 것이야말로 2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2단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들은 아이들을 안정된 가정에서 키운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성이야말로 가장 큰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에서 아이들이 중요한 존재이고 존중 되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자녀들을 존중하며 소중히 다룬다. 반면에 이들의 사랑은 때로는 다소 엄격하고 융통성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사랑을 베풀 줄 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고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는 방법도 배우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정되어 있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존중받으며 성장하고 소중한 대접을 받은 ―이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아이는 엄마의 모유를 받아먹듯이 부모의 종교적인 원칙들 ―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나 유대교든지 ― 을 흡수하게 된다. 이 아이가 청소년이 될 때까지 이 원리들은 실제로 아이의 가슴에 새겨지거나 혹은 정신 의학적인 용어로 ‘내면화’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되고 나면, 이 아이들은 원칙주의자가 된다.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외적인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통제가 가능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신화나 미신 그리고 낡아 빠진 제도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 라고 말하는 시기가 바로 건강한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바로 그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나서 이들은 교회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고 ― 부모에게는 불필요하게 증오와 유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 의구심이 많은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내가 ‘회의적/개인적’이라고 명명한 3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3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일상적인 의미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2단계에 있는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앞서있다. 이들은 결코 반사회적이지는 않고 주로 사회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 책무를 위한 의사들의 모임이나 환경운동과 같은 조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헌신적이고 사랑을 베푸는 부모가 된다. 주로 이런 사람들은 과학자들이거나 과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다.

 

  변함없이 이들은 진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들이 내가 제시한 대로 진리를 충분히 넓고 깊게 추구했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찾기 시작해서, 진리의 조각들이 충분히 짜맞추어져 전체적인 그림을 엿 볼 수 있게 된다. 그 모습은 당연히 아름답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 단계에 있던 부모들이나 조부모들이 믿었던 원시신화나 미신을 닮아있다. 바로 그 순간에 이들은 내가 ‘신비적/공동체적’이라는 이름을 붙인 4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신비적’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이 단계를 설명하려 한다. 비록 이 말이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고 우리 문화에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대체로 잘못 정의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신비주의자라고 일컬어질 만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사물의 이면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시대를 거치면서, 신비주의자들은 남자와 여자, 인간과 다른 생명체, 지구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관찰해 왔다. 이면에 놓여 있는 상호 연관성을 관찰하면서 모든 문화권과 종교의 신비주의자들은 통일성과 공통성이라는 측면에서 사물에 대해 말해 왔다. 이들은 항상 역설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해 왔다.

 

  신바주의적이란 말은 어원이 신비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신비로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신비로움을 해결하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더 많은 신비를 해결할수록 더 많은 신비와 조우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신비로움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매우 편안하게 살아간다. 반면에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칼로 벤 것처럼 정확하지 않으며 심한 불안함을 느낀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러한 원리들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그렇고 미국 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나 문화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사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종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2단계와 4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치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 두 가지로 다르게 해석 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점이다.

 

  유대교의 예를 들어보면, 시편 111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주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작이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의미로 해석할 것이다. “하늘에 계신 힘 센 경찰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서, 정말로 지혜로워진다.” 맞는 말이다. 4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되면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이 또한 틀린 해석이 아니다.

 

  ‘예수는 나의 구주’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말인데 이것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말은 예수야말로 자신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한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요정 같은 후견인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맞는 말이다. 예수는 그렇게 해 줄 것이다. 반면에 4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가 삶과 죽음을 통해서 스스로 각자의 구원을 위해서 가야 하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역시 맞는 말이다.

 

  내가 언급한 대로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러한 특징들은 기독교나 유대교에서는 물론이고 이슬람교나 도교, 불교, 힌두교도 마찬가지다. 사실 내 생각으로는 이런 특성이야말로 그러한 종교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이 종교들은 2단계에 있는 신자들이나 4단계에 있는 신자들 모두에게 여지를 남겨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