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맡김의영성■

< 후속 > 18. 왜, 내맡김의 영성이 최고라고 떠드는가? ■ 내맡김 영성 ■

은가루리나 2015. 10. 22. 23:36


2016-12-23  마처예함, 맞춤법

2017-06-27



moowee 등급변경▼ 조회 763  추천 0  2010.04.16. 11:50



얼마 전, 

과거에 제가 신학교에 추천서를 써 주었던 아들 신부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많이 있는데 왜, 내맡김의 영성이 최고인가?"라고 

말입니다.


저는 내맡김의 영성이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참으로 탁월한 영성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는 제 아들 신부의 질문을 계기로 

또 다른 분들이 그러한 질문을 해올 경우,

"내맡김의 영성"에 대해 누구에게나 간단히 잘 설명해 줄 수 있도록 

글을 정리헤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왜, 내맡김의 영성이 가장 탁월한 영성인가? >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영성이 최고의 영성이라 생각하여

수도공동체를 세워 

나름대로의 여러 수덕방법과 기도방법과 덕행방법을 내세우고 펼쳐왔는데---

내맡김의 영성이 왜, 

하느님과 일치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에는,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접근 방법이 있는 것인데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만이  꼭 유일한 접근 방법이 아니지 않느냐?"하는 

질문입니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만이 

하느님께 나아가고 그분과 일치하는 데에 꼭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우리 교회 역사상 참으로 훌륭한 많은 성인들께서 

그분들의 삶으로 이미 우리에게 직접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순교로써, 어떤 분은 고행으로써, 

어떤 분은 수덕생활로써, 어떤 분은 기도생활로써, 

어떤 분은 자선사업으로써, 어떤 분은 교회학자로서 말입니다.


성인들께서는 

저마다의 각기 다른 자신의 처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오직 모든 것을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심으로

하느님과의 진정한 일치를 증명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여튼, 성교회에서 성인들을 추대하여 

후손들이 그분들의 삶을 본받도록 추앙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분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신 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인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나 용기나 덕행이 아무리 뛰어났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가르침이나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지 않았다면

성인으로 추앙되지도, 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



신앙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제 글의 다른 곳에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神仰)이란 "하느님을 앙모(공경과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는 최고, 최선의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께 나아가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길이 아무리 많고 다양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모두의 공통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바라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각자가 개인적으로 답을 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순교가? 고행이? 수덕생활이? 관상생활이? 자선사업이? 희생적 생활이?

저는 이러한 생활들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하느님께 나아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모든 길, 모든 방법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이라는 말을 정확히 표현하고자 한다면,

"하느님과 일치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말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 ,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특히 "당신의 모습으로(창세1,27)" 사람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창세1,3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참좋아 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꼭 드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2)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늘 헤아려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사람마다 어떻게 다르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

이것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창조목적"입니다.



훌륭한 성인들이 살아갔던 저마다의 방법들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결과"들입니다.

성인들도 처음엔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방법대로 살기 위해 무척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리(順理)대로 살면 힘이 덜 드는 것입니다.

성인들도 순리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힘들게 사셨던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했다면, 

그리하여 하느님께 먼저 내맡기셨다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었기에 그렇게 힘들게 살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훌륭한 성인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몰랐었다고요?"

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성인들도 처음엔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을 것"이라고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



하느님께 내맡기면 

순교를 하든, 고행을 하든, 수덕생활을 하든, 

자선사업을 하든, 희생생활을 하든, 

무엇이든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하려 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살면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하느님께서 살아주시기 때문에

힘이 드는 일이지만, 

힘이 드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힘이 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1요한 4,19),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順理)"입니다.


아마, 잘 모르긴 해도 

성인들도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분이 무척 많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뜨겁게 사랑하면, 

힘든 일도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이 계셔서 일부러 큰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시겠지요.

그렇지만, 사랑은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은 때로는 힘들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7-8)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사람은,

그 사랑을 닮은 "작은사랑"입니다.

하느님은 "큰사랑"이십니다.


작은사랑은 큰사랑을 본받아 점점 커져야 합니다.

작은사랑이 큰사랑이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큰사랑에 내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서로의 사랑을 "믿고" 내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랑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샘솟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지 못하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며,

그러한 사랑에는 "걱정과 두려움 더 나아가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참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참주인"이십니다.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 내맡기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 내맡기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희망"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코린 13,13)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둡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올 하느님께 다 내맡길 수 있습니다.



가끔,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을 "구속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분도 계시는데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서로에게 구속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에게 묶이고 구속되는 것이 오히려 "자유로운 삶"입니다.

사랑으로 서로에게 묶이길 원하지 않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거짓 사랑은 "무책임"합니다.

끝이 있습니다.

일시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내맡기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자유의 근원이신 당신의 "참사랑이라는 자유"에 묶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를 영원히 행복하게 책임져 주십니다.

끝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 자기 뜻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압니다.

서로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인 것입니다.


"왜, 내맡김의 영성이 가장 탁월한 영성인가?"에 대한 답은 

"사랑"에 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저에게 가르쳐 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정답입니다."



-------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유능하고 특별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더 유리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면,

당신의 뜻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살아주십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통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2,20)



"하라, 하지말고 하라!

하지마라, 네가 하지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시게 하라!


살라, 삶없이 살라!

살지마라, 네가 살지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사시게 하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1,27)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창세1,3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2)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1)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대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코린 13,13)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2,20)
















신비생활이 끝나는 날, 그날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그날일 것이다. /신앙의해, 부활 제3주일 ▣ 주일강론



moowee 등급변경▼ 조회 20  추천 0  2013.04.13. 22:04



< 신앙의해, 부활 제3주일 > 2013, 04, 14



오늘은 본당 주보 1면에 실린 "생명의 말씀" 을 중심으로 강론을 하겠다.

오늘 생명의 말씀의 제목은 "발현하신 예수님 알아보기" 이다.


오늘 생명의 말씀을 쓰신 신부님께서는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는 '수덕생활'과 '신비생활'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수덕생활"이 무엇인지를 운동선수의 예를 들어 아주 쉽게 잘 설명해 주셨다.


그러시면서 

"'신비생활'로 들어가기 위해서, 

즉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원한다면,

나태해지는 자신을 극복하고 매일 열심히 덕을 닦아야만 한다" 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맞는 옳은 말씀이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수십년을 "덕을 닦는 생활 수덕생활" 에 대해 들어왔고,

배워왔고, 직접 체험해 왔고, 

마침내 몸에 병을 얻은 뒤에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 지리산으로 들어간 목적도 

사실은 덕을 닦는 "수덕생활" 을 

본격적으로 아주 깊이 체험해 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저를 "수덕생활" 이 아니라 "신비생활" 로 이끌어주셨다.

그야말로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로운 하느님의 섭리>이셨다.


어린시절부터 저의 머리 속에 박혀 있던 "신비생활" 이란,

아무나 체험할 수 없는 것, 소수의 특별한 성인들이나 경험할 수 있는 것,

특히 나같은 놈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만 여겨졌던 그런 말이 

바로 "신비생활" 이라는 단어였던 것이다.


그랬던 단어가 

지리산 속의 생활을 통해서, 아니 <내맡김의 화살기도>를 통하여

내게로 다가왔고 

드디어 나를 차지하고 나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단지, 셀 수도 없이 "하느님의 이름" 을 불렀더니 

하느님이 내게로 다가오셨고,

어느덧 하느님이 나를 차지하셨고, 하느님은 나의 것이 되어 주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 "꽃" 에 나온 구절 그대로의 체험이었다.


이제 하느님은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아니 도저히 잊힐래야 잊힐 수 없는 "단 하나의 의미" 가 되었던 것이다.


나도, 참으로 부족하고 죄스런 나도

하느님께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아니 잊힐래야 잊힐 수 없는 

"단 하나의 의미" 가 되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아니 느껴진다, 깊이 느껴진다.



아~ 이것이 바로 소위 "신비생활" 이라는 것이구나, 신비생활!

아~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신비롭게만 생각하던 신비생활!


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은 다 "신비" 또는 "신비생활" 이라고 말하는구나!

알려지지 않고, 보여지지 않고, 느껴지지 못하는 것을 

신비롭게 여기는구나!



이제 나는 "신비생활" 이라는 말이 전혀~ 신비롭지 않게 느껴진다.

"단 한 가지" 를 빼놓고 말이다, 그게 또 하나의 "신비" 이다.


아직 신비롭게 느껴지는 그 "단 한 가지" 란,

"왜? '루이사 피카레타'처럼 거의 죄없이 산 사람이 아닌, 

정~말로 부족하고 죄스런 나에게 까지 찾아와 나를 차지하시고

또 나의 것이 되어주셨나?" 

이 의문이 또 하나의 신비인 것이다, 지금 나에게는!


아마, 이 신비가 벗겨지면 

또 하나의 다른 신비가 나타날 것은 너무나 뻔~하다.

그래서 우리가 미사 때마다 "신앙의 신비여!" 를 외치는 모양이다.



아마 신비생활이 끝나는 날, 

그날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그날일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

그의 편지 <코린토 1서 4장1절>에서 말했나보다.


하여튼, 

하느님께서는 부족하고 죄많은 저를 "통하여"

엄청난 일을 계획하시고 시행해 나가고 계심을

나는 "느끼고 있다느낌으로" 말이다.


오늘 저에게 훌륭한 강론 거리를 주신 저의 후배 전영준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또한 

"수덕생활" 에 정진해 나가실 모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여러분께서도 

"신비생활" 의 체험도 권장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