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신학

“Mulieres vulgariter dictae beguinae”: 메히트힐트(Mechthild of Magdeburg)를 중심으로 한 베긴회(Beguines) 연구

은가루리나 2017. 2. 14. 12:23



“Mulieres vulgariter dictae beguinae”

: 메히트힐트(Mechthild of Magdeburg)를 중심으로 한 베긴회(Beguines) 연구





1. ‘아내’와 ‘수녀’를 넘어서: 새로운 출구를 향한 몸부림




최소한 12세기 이전까지 중세 여성들에게 사회적으로 공인된 출구는 결혼하여 아내가 되거나 수녀가 되어 종교적 공동체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지참금(dowry)을 비롯한 사회 경제적 상황과 삶의 중요한 얼개를 제공해 준 기독교가 여성들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다. 그러나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회와 교회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독립성과 권위를 자주 제한했다.


여성들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수도원에서 수녀원장을 비롯한 여성들이 상당한 권위를 누리거나 중요한 작품들을 배출해 내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영역에서 여성들이 지닐 수 있는 출구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남성과 여성 구도자들을 포괄하고 있던 이중수도원(double monastery)의 활동 영역은 종종 제한되었으며, 수녀원의 규모는 대개 작았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남성위주의 교회 권력이 여성들의 권위와 활동을 축소시켰다. 그들은 자주 여성을 위험한 존재로 간주했고, 여성을 위한 종교적 탈출구를 마련해 주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았다. 여성은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적지 않은 입회비나 지참금을 내야 했고, 수녀원이 종종 귀족과 부유층 여인들을 위한 도피처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람들은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수도원과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특히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사도적 삶’(vita apostolica)에 대한 열망, 전통적인 베네딕트 수도회와 상당한 차이를 두고 시작된 탁발수도회의 등장은 여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매력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다(Williams & Echols 103‐116; Bowie 9‐12).


사회생활에 있어서 여성이 상업에 종사하거나 남편의 사업을 대신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공식적인 권위는 여성들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유명한 여성 길드조직 안에서도 남성들이 중요한 결정권을 발휘하곤 했다. 여성들은 위험스럽고, 육체적이고, 음욕이 많고, 지적인 남성들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자들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결혼한 여성은 복종적이기를 요구 받았으며, 아내 구타는 어렵지 않게 용인되었다. 하류계층 여인들은 상업 활동을 하거나 독신으로 남아있기도 했지만, 상류계층 여성들은 결혼이나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12세기 들어 잦은 지역적 분쟁과 십자군을 이유로 프랑스, 독일, 특히 저지대(Low Countries)에서는 결혼적령기에 이른 여성의 숫자가 남자보다 월등히 많았다. 때문에 많은 여성들에게 결혼이라는 출구는 더욱 좁아져 버렸다. 여기에 길드의 각종 규칙과 사회적 통념은 귀족출신 여성들의 생계를 위한 사회적 경제적 활동마저 제한했다(Williams & Echols 15‐66; Bowie 5‐9). 그러면서도, ‘아내’와 ‘수녀’라는 두 가지 대안을 넘어서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은 종종 마녀, 이단, 혹은 사회 부적응자로 간주되었다.


12세기 후반에 이르러, ‘아내’와 ‘수녀’라는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용인된 두 가지 범주를 넘어선 대안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 구체화 되었다. 십자군의 전개, 순례문화의 발달, 사도적인 삶에 대한 새로운 갈구, 농촌배경의 봉건주의제도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한 화폐경제로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여성들에게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때 등장한 여성의 대표적인 종교적 몸부림이 베긴회(Beguines)다. 베긴회는 공인된 종교적 교단에 소속되지 않고서도 자발적인 가난, 청결, 종교적인 헌신의 삶을 살았던 여성들이다(Bowie 13‐45). 비록 많은 베긴들이 후에 이단으로 정죄를 받거나 포르테(M. Porete) 같이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지만, 베긴 운동은 당대의 다양한 종교적 운동, 인물, 사건들과 연결되면서 변화하는 시대의 새로운 종교적 지평을 잘 보여주었다. 12‐13세기의 격변하는 중세 기독교 여성들의 영성을 잘 보여주는 베긴회의 대표적인 여성들로는 하데위치(Hadewijch of Brabant), 베아트리스(Beatrice of Nazareth), 메히트힐트(Mechthild of Magdeburg), 그리고 마그리트(Marguerite of Porete) 등이 있다(Bowie 47‐125). 1250년경 프란시스코회 수사인 람프레히트(Lamprecht von Regensburg)는 다음과 같은 시적인 표현을 통해 당시 새롭게 등장한 베긴들의 종교적 활동을 묘사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시대에; 브라방(Brabant)과 베이에른(Bayern)의 땅에서; 여성들 가운데 예술(art/kunst)이 시작되었다; 주되신 하나님이여; 지혜로운 남자보다도 나이든 여인이 더 잘 이해하는; 이것이 어떤 예술이란 것입니까?”(Brunn  xiv).






2. “베긴들로 불리는 저속한 여인들”(Mulieres vulgariter dictae beguinae): 베긴회의 역사




여성을 위한 대안적 종교운동으로 시작한 ‘beguines’는 1170‐1175년 경 오늘날 벨기에인 브라방(Brabant)의 리에쥐(Liège) 교구에서 시작했는데, 베긴이라는 이름은 사제였던 ‘Lambert le Begue’(the Stammerer)라는 사람을 따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Bowie 12). 베긴에 상응하는 남성공동체(beghards)를 직접 만들기도 했던 Lambert le Begue는 당대 여성을 경멸하거나 소홀히 여긴 그 시대의 입장과는 달리 ‘종교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여성들을 격려했다. ‘Beguines’라는 명칭은 “거룩한 여인들” 혹은 “종교적이고 경건한 여인들”을 뜻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단,’ ‘말더듬이’(stammerer), 또는 ‘베긴들이라 불리는 저속한 여인들’(mulieres vulgariter dictae beguinae)이라는 폄하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Brunn, 41; Bowie 13 McDonnell 431).1) 초기단계의 대표적인 베긴으로 마리아(Mary of Oignies, d. 1213)를 들 수 있는데, 그녀는 교회의 내적인 타락을 비판하면서도 당시 발흥하기 시작하던 이단에 대하여도 강력히 반대했다. 베긴 공동체는 점차 유럽전역에 급속히 확장하여 13세기 중반에 절정에 다다른다(McDonnell 409).


12세기 후반 새로운 종교적 열망과 함께 표출된 여러 종교적 흐름 중에서 베긴회가 급속히 확장된 배경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다. 우선, 베긴회가 가진 특유의 유연성 때문이다. 베긴회는 단 한 번의 서원으로 여성의 일생을 봉쇄수도원 속에 묶어 두지 않았으며, 결혼 가능성을 완벽하게 거부하지도 않았다. 이와 함께 여성 스스로가 가진 자발성과 자율권에 대한 강조도 중요한 동인이었다. 여성들의 자발적인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한 베긴회는 기존 수녀원처럼 남성성직자의 감독이나 기존 교회의 위계서열에 얽매이지 않았다. 베긴회에는 설립자, 통치자, 규칙서, 특정교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토대 위에서 북부유럽에 산재하던 베긴회를 조직적으로 감독하거나 통제할 사람과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베긴회의 유연성과 자발성은 그들이 가진 다양한 직업에서도 잘 드러난다.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상황 내에서 ‘지참금’이나 ‘땅’에 의존하지 않았던 베긴회는, 이제 막 발흥하던 13세기 도회지 생활과 관련된 일들을 수행했다. 아이를 돌보는 것, 젖 먹이기, 길쌈, 양조일, 가내 수공업 같은 스스로의 노동력을 사용해 생계를 유지했다. 지역에 따른 베긴 공동체의 다양성과 자율성이 이들의 역사를 기술하거나 체계적인 분석을 하는 과정에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공동체로서 그들이 가진 유연성과 자발성은 베긴 공동체의 종교적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 준다.


벨기에를 중심으로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베긴회의 발전과정은 네 가지 단계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베긴들은 자신이나 부모의 집을 떠나지 않고 “개종자”(conversae)로 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 이들은 서원으로 속박을 당하지 않으며, 자신의 재물이나 경제적 토대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둘째 단계로, 13세기 접어들면서 베긴회는 어느 정도의 규율을 가진 연합체로 발전했다. 일군의 여성 상급자들로 구성된 위원회와 함께 가장 상층부에 속한 ‘여주인’(mistress, magistra, clerical beguine)이 등장해 베긴 그룹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삶과 신앙을 지도했다. 셋째, 병원 등을 중심으로 한 구제와 봉사 기관의 등장과 함께 ‘분리된 베긴회’(beguinae clausae) 구역이 등장했는데, 베긴들은 점차 이 주변에 몰려 살기 시작했다. 이는 베긴회의 역사가 깊어 가면서, 나이 든 공동체 구성원을 보살펴야 하는 현실적 필요를 반영해 주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홀로 사는 여성이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는 자선기관으로 베긴회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넷째로, 13세기 후반 베긴회는 “beguinage”라는 베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큰 베긴 공동체의 경우 특정한 교구로 지정되기도 하는 등, 점차 이전에 수도원이 행했던 독립적인 공동생활 단위를 갖추게 되었다. 맥도날(McDonnell)은 ‘도시 속의 도시’인 베긴 공동체인 ‘베기나쥐’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가장 큰 베기나쥐(beguinage)는 교회, 공동묘지, 병원, 공공 광장, 그리고 보다 젊은 자매들과 학생들을 위한 수녀원들(convents)과 연결된 거리들과 길목들, 나이든 사람들이나 부유한 거주민들을 위한 개인들의 집으로 구성되었다. 강(Ghent)의 ‘큰 베기나쥐’(Great Beguinage)는 벽과 도시 둘레에 해자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14세기 초반에는 두개의 교회, 18개의 수녀원, 100여 개가 넘는 집, 양조장, 병원 등이 있었다. (McDonnell 479)




이처럼 한 세기 동안 급속하게 발전한 베긴회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한 소규모 단체에서 연대와 연합을 강조한 단체로, 그리고 유연성을 가진 단체에서 제도화된 단체로 발전해 나갔다.


베긴회의 이러한 시도에 대한 기존 성직자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베긴회 초기단계에서 성직자들은 청빈, 청결, 봉사와 섬김에 기초한 사도적 삶에 대한 베긴회의 헌신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성직자와 남성 수도사들에게 여성들이 쉽게 접근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베긴들에 대한 사목적 측면을 담당한 교단들(시스터시안, 프란시스코회, 도미니크회)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시스터시안들의 경우 베긴회를 감독할 의향은 있다고 말했지만 사목적인 보호를 해 줄 생각은 할 수 없었다(McDonnell 112‐117). 벨기에의 일부 도미니크회 수사들은 베긴회와 어울리는 것에 대하여 지속적인 경고를 받았고, 도미니크회의 사역이 (베긴회를 포함하는) 사목 현장보다는 이단들에 대항한 설교나 논쟁을 통한 지적 투쟁이라는 것을 상기 받고는 했다(McDonnell 187‐204).2)


베긴회는 상당 기간 동안 로마 교황청에 의해 용인되었지만, 성직자들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증과 제도권 기독교의 기득권에 대한 집착 등의 이유로 결코 공인된 조직이 될 수 없었다. 베긴 초기역사에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로마교황청의 입장은 점차 악화되어 13세기 중반 이후에는 급격하게 부정적으로 변했다.// 우선, 1215년에 제4차 라테란 회의가 새로운 종교적 교단의 설립을 금지시킨 것도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비록 추기경 비트리의 쟈끄(Jacques of Vitry)가 베긴회에 우호적이었고, 1233년에 내려진 Gloriam virginalem이라는 교황의 칙령이 베긴회를 포용해 주었지만, 13세기 중반 이후 베긴회에 대한 입장은 크게 악화되었다. 1236년 베긴회에 속한 알레이디스(Aleydis)가 이단으로 처형당했고, 1274년 리옹회의(Council of Lyons)는 새로운 교단출현을 금지하는 기존 칙령을 재확인했다. 서원을 강요하지 않고 살던 베긴회의 여성 공동체가 큰 문제를 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엔 회의(Council of Vienne, 1311‐1312)는 베긴회를 명확하게 금지대상으로 포함시켰다. 이듬해에 베긴회의 재산은 몰수당했고, 베긴 여성들은 강제로 결혼하도록 조처를 당했다. 1318년에 콜론(Cologne)의 주교는 “모든 베긴 연합체들의 해체와 교황이 공인한 교단으로의 통합”을 명령했다(Southern 330‐331).3) 물론 교황 요한 22세와 같이 베긴들에게 여전히 호의적인 경우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상황은 불리해져 갔다. 1421년 교황 마틴 5세(Martin V)는 “콜론의 대주교가 규정한 규칙서 없이 종교라는 외투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무리 작은 수녀원이라도 뒤져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Southern 331). 물론 이 시기에 대다수의 베긴회들이 이미 경제적 권리가 거의 박탈당한 때였다. 그리고 이러한 풍파 속에서 살아남은 베긴들은 종교개혁과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면서 와해되었다. 보위(Bowie)의 조사에 따르면, 1969년 벨기에에 11곳, 화란의 두 곳에 베긴 공동체가 남아 있었다(Bowie 20).






3. Vita apostolica에서 Minnemystik까지: 베긴회의 영성




13세기 여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베긴회의 등장배경과 그들이 발전시킨 영성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을 보여주는 개념은 ‘사도적인 삶’(vita apostolica)이다. 여기서 ‘사도적인 삶’이란 원시 기독교(primitive Christianity)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영혼의 열망을 회복시키고, 단순한 삶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개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적 삶’은  자유(liberty), 청빈(poverty), 단순함(simplicity)에 그 이상을 담아낼 수 있다(Brunn xvi). 동시에 왈덴시안(Waldensians), 롤라드(Lollards), 카타르(Cathars) 등을 통해 표출된 새로운 종교적 열정, 기존 수도원의 개혁에 대한 갈망, 그리고 탁발수도회의 등장은 ‘사도적 삶’으로 대변되는 당대의 종교적인 정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당대의 혼란한 시대적 특이성 때문에 대부분의 종교적 운동은 보다 묵시적이고 극단적인 경우로 표출되었다.4) 베긴회를 비롯한 사람들의 종교적 요구, 특히 이들의 자발적인 청빈요구는 성직자들의 탐욕과 성직매매, 부패, 부에 대한 교회의 지나친 관심과 날카롭게 대치되었다. 당연히 제도권 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흐름이 자신들을 책망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다. 이 시기에 새로운 종교적 열망을 표출한 자들 중 많은 수가 제도권 기독교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당하고 박해를 받았다는 것이 이를 웅변적으로 설명해 준다.


베긴회는 바로 이 같은 ‘사도적 삶’이라는 이상에 의해 크게 확산되었다. 이들 역시 점차 공동생활을 하였지만 최소한의 행정 기구만을 갖추고, 단순성과 자유라는 자신들의 핵심적 가르침을 소중하게 발전시켰다. 이들은 가난을 매우 매력적으로 보았으며, 육체적인 노동을 겸손과 사도적인 빈곤정신을 고취시키며 궁핍한 사람들을 섬기는 중요한 봉사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초기 베긴회에 많았던 부유한 계층 출신들에게 그들이 획일적으로 가난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검소한 삶에 대한 그들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들의 자유와 함께 균형 잡힌 삶을 강조했다. 그래서 너무 부유하거나 너무 검소하게 사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이들은 세속사회의 부유함과 현란함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지 않았다(Bowie 24).


‘사도적 삶’에 기초한 베긴들은 이단의 박멸을 비롯한 ‘영혼’(soul)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마리아(Mary of Oignies)는 카타르에 대항한 십자군을 열렬히 지지했다(Brunn xviii; McDonnell 415‐416). 영혼에 대한 베긴들의 열정은 설교를 비롯한 다양한 저작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제도권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설교를 했으며 자신들의 저작을 유통시켰다. 저작활동과 함께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평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의사전달을 할 수 있는 자국어(vernacular)를 사용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당대 기독교의 공식적 언어인 라틴어는 신경, 칙령, 전통을 담아 공식적으로 교육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라틴어 사용은 서방교회를 통일시키고, ‘정통기독교’를 유지해가는 중요한 가늠자였다. 그래서 제도권교회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의 사용이 이단들이나 경건하지 못한 자들에게 기독교에 반대되는 신념을 퍼뜨리는 도구로 사용될 것을 우려했다. 여기에 베긴회를 비롯한 새로운 종교적 지도자들은 자국어를 사용함으로 라틴어를 주로 하던 제도권에 ‘본문’(text)과 ‘언어’(vernacular)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5)


자유와 청빈에 기초한 사도적인 삶과 자국어로서의 설교와 작품 활동에 이어 베긴회는 성찬과 성례전적 언어사용을 향한 강력한 애착을 보여준다. 베아트리스(Beatrice of Nazareth)는 드라마적인 구성으로 성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녀의 성찬에 대한 열망은 피 흘림과 육체적인 붕괴(physical annihilation)를 야기하기도 했다(Bowie 27; McDonnell 314‐315). 중요한 점은 베긴회가 전체적으로 성찬의 빈도를 높이자고 요구했다는 점이다. 중세 기독교에서 일반인들은 일 년에 한번, 종교적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평균 일 년에 세 번 성찬에 참여했다. 그러나 베긴회는 매주 한번 혹은 더 빈번히 성찬을 받기를 주장했다. 이런 측면에서 Corpus Christi 축일이 리에쥐(Liège)교구에서 시작된 것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6) 


이러한 사도적인 ‘삶에 대한 강조’는 베긴 여성들의 신비주의적인 경험과 수사학적인 언어사용을 통한 신과의 직접적인 연결과 교제로 발전했다. 철저히 개인적인 신비적 경험에 의존해서, 이들은 개개인의 영혼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연결, 하나 됨을 나타내는 수많은 알레고리와 메타포를 사용했는데, 특별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이 ‘사랑’ 개념은 베긴들의 ‘사랑에 기초한 신비주의’(love mysticism, Minnemystik)로 발전했다. Minnemystik은 당대 발전하던 궁정의 사랑이야기(courtly love)와 시스터시안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 가르침이 베긴이라는 여성 종교인들의 능숙한 언어사용 가운데 절묘한 결합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들은 ‘궁정의 사랑이야기’라는 세속문학의 형태와 이미지 위에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라는 종교적 주제를 여성적이고 성적인 메타포를 통해 창조적으로 연결하였다. 동시에 베긴들은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를 신학적 담론이 아닌 개인의 신비적 경험에 기초하여 새로운 문학적 형태로 재해석해 내었다. 예를 들어, 메히트힐트(Mechthild)와 마그리트(Marguerite)는 어거스틴(Augustine)의 자서전 스타일을 본받아 영혼과 사랑의 대화라는 형태를 취해 글을 썼다. 흥미롭게도 독일어와 화란어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여성형을 띄고 있다. Minne라는 신학적이고 상징적인 단어의 우산 아래서 베긴의 신비주의적인 저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여성적 메타포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사랑’을 담고 있는 신비적인 하나님 이미지를 역동성과 신선함을 지닌 자국어(vernacular)로 드러내 주었다.7) 이 같은 역동적인 ‘사랑’ 개념은 베긴 저자들에 의해 신학적으로 더욱 깊은 경지에 이른다.8)






4. “나이 들고 세월에 지친 자매”: 막데부르크의 메히트힐트




베긴들의 활동과 사상을 엿볼 때 메히트힐트는 몇 가지 이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부유한 가문 출신인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베긴회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작품동기와 신학적 주제 역시 

베긴들을 포함한 당대 여성들의 새로운 신학적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당대의 대표적인 베긴들이 모여 있던 헬프타(Helfta) 공동체에 

영적이고 문학적인 동기를 불어넣어 준 계기가 

바로 풍상의 세월을 겪은 메히트힐트의 등장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메히트힐트의 삶과 작품을 중심으로 

베긴 여성의 종교성의 한 면을 고찰해 보겠다.


메히트힐트는 1210년경(c.1208 ~)에 색슨지역(Saxony)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1282년경(1282/1294)에 아이스레벤(Eisleben) 근처의 헬프타에서 죽었다. 

그녀는 12살 때 처음 성령의 방문을 받으면서 

신에 대한 직접적인 영감을 경험했으며, 이후 매일 매일 성령의 방문을 받는다.

‘귀향’(exile)을 가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1230년경에 고향을 떠나 막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베긴회에 합류했고, 

이곳에서 도미니크회 수도사의 지도 아래 기도를 포함한 극심한 고행훈련을 받았다(IV,2). 

이 과정에서 천상의 영감들과 무아경적인 비전이 빈번히 내려왔다. 


1250년경, 자신의 고백자 헨리(Heinrich of Halle)의 제안을 따라 

비록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입으로부터 나온

(out of God’s heart and mouth)비전을 꾸준히 기록하기 시작했다(IV: 2). 

그녀에게 어린 시절부터 흘러내린 영감과 비전은 Flowing Light of the Godhead에 담겨져 있다. 

그녀는 1250년에 이 작품을 기록하기 시작해 

1264년까지 전 6권을 막데부르크에서 마쳤고, 제7권은 헬프타에서 완성했다.9)


메히트힐트는 끊이지 않는 의심과 핍박의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1270년경 시스터시안에 속한 헬프타 수녀원에 들어가 자신의 남은 생애를 보냈다. 

늙고 지친 그녀는 이곳 수녀원장 게르트루드(Gertrude of Hackeborn)와 

하케본의 메히트힐트(Mechthild of Hackeborn), 

그리고 또 다른 게르트루드(Gertrude the Great)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VII: 21). 

수녀원장 게르트루드의 지도력 아래 왕성하게 발전한 헬프타는 

이 무렵 시스터시안의 학문적 중심지가 되었다.10) 

이곳에서는 남성들을 위한 교육에 뒤지지 않은 7학(7 liberal arts)에 기초한 

교양교육, 성경, 그리고 교부적 전승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학문적이고 종교적 중심지로 성장한 헬프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히트힐트가 도착하던 시기까지만 해도 어떤 저작들이 나오지는 않았다. 

학문적이고 종교적으로 잘 가꾸어진 헬프타가 

메히트힐트의 등장으로 베긴들의 중요한 작품들을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Bynum 170‐262; Finnegan 1991; Petroff 211).




메히트힐트의 작품과 관련해 

우리는 중세 여성들의 작품 활동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두 가지 질문을 대할 수 있다. 

첫째는 정규교육도 받지 않고 여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그녀가 

어떻게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강하게 발언을 하고 

당대 가장 빼어난 성직자들을 비판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다. 

둘째는 그녀가 어떠한 권위로 저술을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양된 의식이나 인식이 글 전체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특별한 의식을 지녔음은 분명하고 

이는 그녀 저작의 첫머리에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I: preface).


Flowing Light를 관통하는 주제나 문학기교를 찾기는 쉽지 않다. 

메히트힐트가 신학적인 주제로부터 개인적인 경험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인이 취할 수 있는 대부분의 문학적 장르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이러한 문학적 구성은 종교적인 경험을 보여주는 현상학이었으며, 

당대의 전문적 신학자들(‘lettered’)의 작품과 좋은 대조를 이루며 

오히려 메히트힐트의 문학적 독특성과 신학적 통찰력을 더 잘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경험에 기초한 실존적 태도가 

신학적 담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학적 작업에도 중요한 기준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내가 나의 신체의 모든 부분에서 성령의 힘을 느끼면서, 

그것을 나의 영혼의 눈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나의 영원한 영혼이 가진 귀로 듣지 않는다면, 

나는 기록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기록할 수도 없을 것이다”(IV:13; cf. V: 12).


길고 짧은 일련의 시로 구성된 Flowing Light는 사이사이에 리듬이 들어간 산문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보아 비전, 찬송, 설교 등을 담은 종교적인 장르, 궁정의 사랑이야기와 

은유적인 대화 등을 나타내는 궁정풍 장르, 자서전과 드라마 등을 담은 여타 장르로 구분할 수 있다

(Tobin 10).11) 

그녀는 이처럼 다양한 문학적 기교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사색하고 재구성했던 것이다. 

동시에 토빈(Tobin)의 지적처럼, 

그녀는 다음과 같은 풍부한 이미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하나님과 관련해 그녀는 ‘흘러내림’(flowing)과 ‘’의 이미지를 발전시켰다. 

하나님은 사랑을 비롯한 각종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쏟아 부으시며’(outpouring), 

우리 눈을 아찔하게 하는 이 하나님과 천사로부터 빛난다. 

그녀의 초자연적인 대상들에 대한 논의는 구원의 역사를 담아내는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사랑과 영혼, 동물과 집, 수녀원과 왕관에 대한 갖가지 이미지들은 은유적 대화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메히트힐트가 하나님으로부터 Flowing Light의 권위를 찾듯이, 

몇 가지 신학적인 주제는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등장한다. 

본인은 이중 갱신과 개혁, 서정적인 기교 속에 나타난 카리스마적인 신학, 사랑과 영혼, 

그리고 신으로부터 물러남(estrangement from God) 같은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Flowing Light는 그녀의 교회 안에서의 개혁과 예리한 선지자적인 비평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는 

교회의 분열, 성직매매, 지적인 추구가 야기한 황량함과 메마름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모델이 되었다. 

특히 성직자와 세속권력에 대한 비판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던 도미니크회 교단과 

심지어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자기 동료들에 대한 비평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이런 비평적 메시지는 

그녀로 하여금 성직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박해 받고, 조롱당하며, 의심을 받게 만들었다(III,8; VII,41).12) 

성직자의 교정과 변화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저작 첫머리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내가 전령으로서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여기에 함께 보내는 이 책은, 

한편으로 나쁜 책이고 또 한편으로는 좋은 책입니다. 

왜냐하면 기둥들이 무너진다면, 건물들이 서 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I: preface). 

여기서 기둥들은 성직자들과 수도원 교단들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메히트힐트는 성당의 사제들을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괴팍한 염소들로 비유하면서, 

성직자 전반을 책망했다.




저주 있으리라. 거룩한 기독교의 왕관이 얼마나 많이 훼손되었는가! 

당신으로부터 보석들이 떨어져 나왔는데, 

왜냐하면 당신이 거룩한 기독교인의 신앙을 갉아먹고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금은 육체의 냄새나는 웅덩이 속에서 색이 바래졌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초라하며 참된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순결은 탐욕이라는 음탕한 불 가운데서 타 버렸습니다. 

당신의 겸손은 당신의 육체라는 늪 속에 묻혀 있습니다. 

당신의 진실함은 이 세상의 거짓말 가운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소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덕으로 이루어진 당신의 만발한 꽃은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버렸습니다(VI: 21).




교적 갱신과 변화에 대한 그녀의 글은 인간에게 영혼의 말씀을 전해주는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 

메히트힐트는 종종 

자신의 예언자적 언명에 대한 베긴공동체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반박에 대하여 하나님께 탄원했다. 

제도권 교회에 의해 지속적으로 박해를 당하고, 

메히트힐트의 예언적 저주를 견디지 못한 자신의 베긴 공동체에 의해 버림을 받은 

나이 들고 지친 그녀는 제6권에서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호라. 사랑하는 주님이여,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교활함과 악을 가지고 나의 영예를 오래 전에 빛바래게 한 사람들이 달리고 던지고 쏘아대는 

나뭇가지나 목표물 같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의 육체를 지닌 이 땅 위에 내가 서 있어야 합니까?(VI,38; cf. VI,38; VII,63)13)




자기 저작의 최종적 권위를 하나님에게 두었던 메히트힐트는 

서정적 운율을 통해 카리스마적인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녀는 서정적 표현을 통해 우주적이고 상징적인 비전 속에서 세계의 기원을 찾았는데, 

하늘의 시작과 타락에서 시작해 

그리스도, 마리아, 교회를 통한 구원의 순서를 따라 

종말에 대한 다양한 묘사에까지 나아간다. 

특히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들은 성스러운 역사로서 과거와 현재를 담아내고 있다. 

그녀는 이처럼 

세계의 기원에서 종말에 이르는 거대한 신학적 주제와 구원의 역사를 잘 다듬어 내었다(II: 19; III: 9).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광대한 신학적 구조가 

어거스틴(Augustine)에서 아빌라의 테레사(Avila of Teresa)에 이어지는 

지적인 논의의 전통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메히트힐트의 상상력이 풍부한 비전 (imaginative visions)속에서 산출되었다는 것이다.


Flowing Light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장르와 주제를 

봉건적이고 성스러운 중세 사회를 궁정이야기와 개인의 신앙적 이야기로 연결시키고 있다. 

비록 궁정의 사랑이야기에서 그 형태를 가져왔다고는 해도, 

사랑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이미지를 더했다. 

그녀는 많은 교부들, 버나드와 윌리암(William of St. Thierry)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가서의 이미지에 크게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사랑경험, 

인내심을 갖고 사랑을 ‘넘쳐흐르게’(overflowing) 하는 자신의 독특한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랑을 위해 죽는 자는 하나님 안에 묻혀져야 한다”(I: 3).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은 인간 안에 열망(desire, Verlangen)을 심어 주면서, 

마지막 단계(역설적으로 근원적인 단계)로 돌아가야 할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위한 영혼의 사랑과 절묘하게 만나고 있다

(I: 2; IV: 2; II: 24).


히트힐트의 사랑 개념이 보다 풍부하게 신학적 옷을 입는 것은 

‘영혼’과 ‘하나님 안에 있는 근본적 존재에로의 영혼의 회귀’ 개념이다. 

이 같은 존귀하고 자긍심을 느끼는 영혼은 

귀부인이 제시한 모든 시련을 감당해 내는 중세의 기사처럼, 

하나님이 부여한 모든 시련을 감당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풍상을 넘어 새로운 갈망, 원시적인 상태로의 회귀를 갈망하게 하는 힘의 근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빛처럼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했으며, 

마치 어거스틴이 고백록(The Confessions)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인생은 이 땅에서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고향에 대해 끝없는 향수를 느낀다(I: 44; VI: 31). 

그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유출되었기 때문에(VI: 29), 

그녀는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과 심지어 인간 내부의 모든 덕성들(virtues)을 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존재가 시작되었기에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벌거벗음’(shameless nakedness)을 

다시금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I: 44). 

이러한 ‘벌거벗음’의 이미지는 

성적이미지, 결혼이미지, 그리고 부부이미지와 연결되어 등장한다(I: 9,22; II: 3,22; IV: 14; VII: 1).14) 

그녀는 이처럼 성스러운 성경이 갖고 있는 에로티시즘(eroticism)을 

영혼과 하나님의 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과 개인들 사이에 어떠한 매개도 허락하지 않은 채 

‘하나님 안에서 녹아지는 것’(to be melted in God)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다음 구절에서 정점에 이른다:

“너의 옷을 벗어라… 어떤 것도 그들 사이에 올 수 없다. 

그리고서, 양쪽 모두가 바라는 축복 받은 고요함이 그들에게 온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맡기고, 그리고 그는 그녀 자신을 그에게 맡긴다”(I: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하지만 알지는 못하는 맹목적인 거룩한 자들”은 

사랑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는 못하는 자들이다(I: 2,21). 

왜냐하면 사랑은 그에 상응하는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랑과 영혼의 회귀개념과 함께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물러남’(estrangement from God)의 개념이다. 

‘포기의 신비주의’(mysticism of abandonment)라 불리는 ‘물러남’ 개념은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 

“사랑의 본질은 첫째로 달콤함 가운데서 흐르고, 

그리고 나서 그녀는 지식 속에서 부유하게 되고, 

그리고 셋째로 그녀는 거부되기를 요구하고 바란다”(VI: 20). 

영혼이 ‘최초의 실재’로 돌아가 하나님 같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소멸’(annihilated)되어야 한다. 

바로 이때가 하나님과 함께 있지만 영혼은 고독(solitude of soul)을 느끼는 때이다. 

비록 이 ‘소멸과 포기의 과정’은 인간의 영혼마저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지만, 

이러한 ‘소멸’‘물러남’이 있어야만 진정한 실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떤 것도 나에게 좋게 느껴지지 않는데. 나는 놀랍게도 죽어 있는 것이다.”

(I: 28; II: 2; IV: 12) 

“루시퍼의 꼬리 밑”(Under Lucifer’s tail)을 지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데까지 낮아지는 

이와 같은 “가라앉은 겸손”(sinking humility)을 통해서만 

성숙한 신적인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V: 4). 

그래서 메히트힐트는 육체적 죽음을 맞으면서 

하늘에서 그녀의 사랑하는 자와의 합일을 바라며 

여전히 그녀가 “사랑 안에서 사랑하고 싶어 죽을 것”이라 간구하고 있다(VII: 21). 

그녀의 이러한 설명은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inaccessible God) 개념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신은 피조물을 넘어서 접근할 수 없는 영원성 안에 거하시는 분이라는 개념은 

디오니시우스(Dionysius)로부터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에 이르기까지 

주로 신‐플라톤주의적인 개념 아래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전통적인 신학적 이해 구조라는 족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던 메히트힐트는 

자신의 독특한 경험과 비전에 의존하여 

피조물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상승(ascension)사랑의 비행(flight of Love)을 그려 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차갑게’(cold)”되는 것이다(V: 4).






5. 결론: 하나님의 작은 아씨들




지난 30여 년간 빠른 속도로 증가해 온 중세기독교의 여성 연구는 중세에도 많은 여성 작가와 사상가들이 있었다는 것 이상을 보여 주었다. 로렘이 타당성 있게 보여 주었듯이, 중세 여성 신학자들은 남성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신학적 작품과 활동의 결과들을 남겼다(Rorem 2003). 특별히 교회가 타락해서 위기에 처한 전환기에 여성들의 활동은 더욱 돋보였다. 12세기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종교적상황의 변화 가운데서도 프란시스와 도미니크를 중심으로 한 탁발수도회의 등장과 함께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그룹이 ‘사도적 삶’을 강조한 여성종교 공동체였던 베긴회였다.


일생동안 지켜야 할 서원을 하거나 특정한 교단에 속하지 않고서도 

단순성과 청빈과 자유라는 정신에 기초해 종교생활을 영위했던 그룹이 베긴회다. 

이들은 이로서 ‘아내’와 ‘수녀’ 외에 출구가 없었던 많은 여성들에게 

세속사회와 봉쇄적 종교생활사이 가운데에 하나의 대안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베긴이라 불리는 저속한 여성들”이라는 놀림과 박해를 받고 

많은 이들이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지만, 

베긴 공동체는 ‘사도적 삶’(vita apostolica)을 희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율과 자유와 청빈과 섬김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당대 유행하던 궁정풍의 사랑이야기 형태를 수용하여 이를 기독교 하나님과 신앙에 접목시켜 

‘사랑에 기초한 신비주의’(love mysticism)를 산출해 내었다. 

카타르(Cathars)의 여인들처럼, 베긴 여성들은 역사 속에서 행복한 결말을 맛보지 못했다. 

스콜라사상이 가장 크게 발전해 나가고 있던 바로 그 시대에 

베긴들은 학문과 지적인 논리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기록하기를 원했다

에크하르트의 용어를 빌리면, 이들은 ‘lesemeister’가 아니라 ‘lebemeister’였다. 

우리가 고찰했던 막데부르크의 메히트힐트는 

바로 베긴의 인생유전의 한 면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중세스콜라 사상이 전성기를 이루던 13세기의 여성 메히트힐트의 일생은 

베긴공동체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늙은 몸을 이끌고 헬프타에 도착해 보낸 10여년의 세월을 제외하고는 수많은 사람들 

― 특히 제도권의 남성기독교인 ― 에 의해 의심과 핍박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Flowing Light of the Godhead는 

교회의 갱신과 변화에 대한 그녀의 예언자적 열정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구원사적 여정을 서정적 운율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또한 사랑과 영혼, 인간이 원래 출발했던 근본적인 실재를 찾아 나서는 영혼의 회귀에 대한 묘사는 

인간의 근본적인 종교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적표현 속에서 은유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무엇보다 신학과 영적인 경험을 조합해 내었다. 

메히트힐트를 비롯한 베긴 신비주의 여성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에크하르트나 뤼스부뢰크(Ruysbroeck)의 

보다 체계화된 신비주의 저술과 신학이 발전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