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5 장 거룩한 위탁의 개념(槪念) (2) p.62

은가루리나 2017. 3. 14. 21:18

p.62



제 5 장  거룩한 위탁의 개념(槪念)  (2)



  그러므로 위탁에 있어서는, 

적어도 판단과 의지와의 무관심이 필요하다.

그 때 의지는,

천주는 모든 것이며, 피조물은 허무에 불과하다는 확신에 충만되어, 

만사에 있어 사랑하고 바라는 천주와,

자신을 목적에 이끄시는 천주의 거룩한 의지만을 보고,

또한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가 넓은 범위의 기호(嗜好)의 무관심을 획득하여

마치 천주를 목말라하는 영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세속과 그 환락(歡樂)과 지상(地上)의 재부(財富)와 명예와,

천주로부터 우리를 멀리하는 사물은 모두 싫어지고,

우리를 천주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은 모두 고난까지도 유쾌한 것이 되면,

거룩한 위탁의 실천은 얼마나 쉽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무관심은 병적(病的)인 무감각(無感覺)이거나 게으른 무관심도 아니며,

또한 고통을 향하여,「그대는 허무한 말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스토아」주의자와 같은 교만한 경멸(輕蔑)도 아니다.

그것은 의지(意志)의 이상한 정력(精力)이다.


즉,

의지는 이성(理性)과 신앙(信仰)에 강하게 비추어져 모든 사물에서 온전히 이탈하여

자기의 온전한 주(主)로서 완전한 자유로써 그 모든 세력을 모아,

천주와 그 거룩한 의지 위에 그것을 집중한다.


이렇게 하여 의지는 아무리 마음을 끄는 것이거나,

또는 싫게 여겨지는 것이라도,

피조물이라는 피조물에는 무엇하나 움직여지지 않고,

굳게 자신을 간직하여 모든 일을 기꺼이 맞이하며, 

행동하는 것도 행동하지 않는 것도

다만 섭리의 뜻이 제시하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거룩한 무관심의 상태에 있는 영혼은

천주의 의지 쪽에 언제라도 기울이려고 하면서 평형(平衡)을 유지하고 있는 저울이거나,

또는 어떠한 형태라도 주어지는대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재료(材料)이거나

또는 천주께서 뜻대로 붓을 내릴 수 있는 백지(白紙)와도 같다.


그것은 또한,

「고유의 형태를 가지지 않은 액체(液體)라고 비유할 수 있다.

액체의 형태는 담기는 그릇에 따라 다르다.

액체를 열가지 틀리는 그릇에 쏟으면,

각각 다른 형태를 그리고 부어지자 마자 즉시 받아들인다.」(「게」주교)


  그와 같은 영혼은

「마치 천주의 손 안에 있어, 그 영원한 임의의지에 의한

모든 인각(印刻)을 마찬가지로 받는 한 덩어리의 밀납(密蠟)」이나,

또는 「자신의 의지로는 아직 아무것도 바라거나 사랑하지도 않는 유아(幼兒)」

(「신애론」9편 4 및 13장) 처럼 

부드럽고 다루기 쉽다.


또는

「나는 당신 앞에 가축과 같았나이다.」(성영 72 . 22)

「가축은 그 기르는 주인이 명하는 일 가운데서 이러저러한 차별이나 선택등을 하지 않고,

때와 장소와, 사람과 짐과의 구별도 하지 않는다.

거리, 밭, 산, 골짜기, 어디서나 주인의 용무를 수행한다.

오른 쪽에로도 왼 쪽에로도 이끌려,

주인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라도 간다.

아침, 밤, 낮, 저녁 언제라도 용무를 수행할 각오를 하고있다.

어른과 아이의 구별 없이 구사(驅使)되는 대로 움직이며,

분뇨(糞尿)와 금괴(金塊) 자갈과 보석과의 여하를 불문하고, 불평없이 운반한다.」

(성「쥬르」저 「오주께 대한 인식과 사랑」3편 8장 8절)



  영혼의 상태가 그렇게까지 되면,

「천주의 의지는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의 자유스러움을 보고,

마치 주인이 없는 토지처럼 이를 점령해 버린다.

그러한 영혼에게 있어, 모든 것은 마찬가지로 선(善)하게 보인다.


자신이 무엇이건, 또 아무 것도 아니건,

위에 서서 명하든지 밑에 있어 복종하든지, 업신여김을 당하든지,

또는 잊혀지든지, 궁핍하든지, 궁핍하지 않든지, 한가하거나, 분주하거나,

혼자 있거나, 벗과 함께 있거나,

또한 그것이 어떠한 벗이든지, 

길이 멀리 보이거나, 겨우 발을 디뎌놓을 곳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거나, 

위로가 있거나, 무감각이거나 

또는 그 무미건조(無味乾燥)에 있어 유감을 당하든지, 강장(强壯)하든지, 

병든 몸으로 몇년동안이나 쇠약해 있든지, 무력(無力)하든지,

봉사하려고 온 수도원단체의 무거운 짐이 되든지, 

장수(長壽)하든지, 단명(短命)하든지, 빈사상태(瀕死狀態)에 있든지,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유쾌하고 만사는 선(善)하다.

그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일체를 바라고,

일체를 바라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케」주교)



(2)

거룩한 무관심은 천주의 손에 우리 전체의 인도(引導)를 가능케 하였는데,

이 사랑과 신뢰에 충만한 어린이와 같은 위탁은

거룩한 위탁의 적극적 요소(積極的要素)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원리(原理)이다.


그 의미(意味)와 범위(範圍)를 명확히 하는데는 

사건이 바야흐로 닥치려는 직전(直前)과

이미 도래한 때에 있어서의 심리학적(心理學的) 두가지 계기(契機)를 고찰하여야 한다,



  사건발생전(事件發生前)

사건이 예견(豫見)된 것인지 아닌지 불구하고,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의 설에 의하면

「그것은 단순한 일반적대기(一般的待機)」이며,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긴 유아(幼兒)처럼,

조용하게 기꺼이 천주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두 받으려는 신뢰에 충만한 마음가짐이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현명한 선견(先見)을 활동시키는 의무나 

스스로 지망(志望)하여 선택할 권리가 있겠는가.


이에 관해서는 이하의 장(障)에서 말하겠다.

그러나 아직 동 박사의 교설에 의하면,

자기의 광명에는 전연 신뢰를 두지 않고 천주에게만 사랑에 충만한 신뢰를 두고,

지상(地上)의 사물에 일체 무관심하게 된 영혼이 가장 바라는 태도는


「천주께서 결정을 보류하신 사물은

이것을 제멋대로 원하거나 바라거나 하지 않고,

도리어 천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좋도록 하시는대로,

바라시는 것도 행하시는 것도 천주께 맡겨드리는 것이다.」(「신애론」9편 14 및 15장)


  사건발생후(事件發生後)

즉 사건에 의해서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가 명백히 되었을 적에는 

영혼의「이 단순한 대기(待機)는 승락(承諾) 내지 동의(同意)로 변한다.」(동서 15장)


이와 같이 하여 

하나의 사건이 신적광명(神的光明)에 비추이고,

천주로부터의 것임을 알게 되면,

영혼은 즉시 열심으로써 이를 맞이하며, 

이에 강하게 애착(愛着)한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그러한 상태의 바탕이며,

또한 외관상(外觀上)의 무관심(無關心)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생명이 참으로 자아의 모든 것에서 물러나

그 전체를 거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만큼 생명은 거기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혼에 닿는 천주의 하나하나의 의지는 

얼핏 냉회고목(冷灰枯木)인 것같이 보이는 이 영혼의 골수까지도 감동시킨다.


마치 어머니에게 잠을 깨이게 되면 

반드시 바로 손을 어머니 쪽에 내미는 어린이와 같이 

이 영혼은 천주의 의지 하나하나에 미소하며,

그것을 경건한 애정으로 포옹하는 것이다.


그 온순(溫順)함은 활동적이며, 

그 무관심은 사랑에 충만한 것이다.

그와 같은 영혼의 천주께 대한 태도는 오직 한가지 생활한 『그렇습니다』라는 것이다.

그 한숨 한숨, 한걸음 한걸음은 천상의 『아멘』과 서로 합쳐

같은 박자로 울리는 뜨거운『아멘』이다. (「게」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