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신학

빙헨의 힐데가르트의 생애와 영성 그 가르침 - 정홍규 신부

은가루리나 2017. 4. 8. 02:43


▒ 중세 중기, 중부 라인의 여성 예언자


한 번도 교회에서 공적으로 성녀로 인정한 적이 없지만, 민중들은 그녀를 성녀라고 부른다. 21세기에 사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보수적인 12세기의 한 여성을 오늘날 그토록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중세 과도기를 살았던 그녀를 또 하나의 과도기인 현재와 어떤 관련성에서 현대인들이 찾을까? 아마도 힐데가르트가 남성이었다면 사태가 다르게 나아갔을런지도 모른다. 힐데가르트가 오늘날 갑자기 뜨는 것은 여성 생태주의나 여성영성의 시대적 흐름과 전혀 관계없다고 보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남긴 저서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그 안에서 종교와 의학, 예술이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힐데가르트의 시각은 젊은 세대의 우주-세계적 생활감각에 잘 들어맞을 뿐 아니라 통합을 추구하려는 최근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기도 한다. 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출발하여 독일의 중심을 흐르는, 독일의 젖줄인 라인강은 이미 고대 로마시대부터 상인들의 무역로가 되었고 중세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강의 고속도로였다. 강변을 따라 발달한 도시들 그리고 중세의 성과 로렐라이 언덕, 중간 중간 갈라져 흐르는 작은 강줄기를 따라 낮은 언덕에 그림처럼 이어지는 포도밭을 한 폭에 담고 있는 중부 라인이 시작되는 곳이 빙엔이다. 독특한 문화 와 전통을 지니고 유럽 남서부에 속하다가 북부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간 켈트족 거주지역의 북방 경계에 속하고 중세 중기 독일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가 하나를 이루던 폐쇄적인 세계관이 해체되기 시작하던 시기, 로마교회와 그리이스 교회가 단절되고, 교황권과 황제권이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고, 공공연히 널리 만연하던 극단적인 금욕의 수도원 쇄신운동이 교회가 세속의 지배세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교회쇄신을 촉구하던 시기,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11세기 말, 힐데가르트는 1098년에 지금의 독일 라인헤센 알제이 근처, 베머스하임이라는 한 작은 마을의 귀족가문에서 10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잦은 전쟁에 이어 십자군 전쟁으로 모든 면에서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이슬람 문화와 그리이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과 의학이 전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학문의 흐름이 시작되고 기술이 발전하지만 서민들은 굶주림과 영양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봉건영주들이 백성에게 지우는 과세는 점점 더 무거워져 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격동기속에 8살 어린 나이에 그녀는 마인쯔에서 남서쪽으로 25마일 가량 떨어진 디시보덴베르그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장 쥬타의 보호 아래 맡겨지면서 수녀, 수녀원장, 시인, 신비주의자, 작곡가,미술가,신학자.에언자,의사,설교가,정치가, 치유가, 자연주의자로서의 삶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극단적인 금욕과 육체는 죄의 근원이라 여겼던 그 시대에 사도 바오로는 여자는 공동체에서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43살이 되던 해 '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는 거스를 수 없는 음성과 비전에 따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생을 마친 81세까지 비전을 보고 전한 3권의 책과 77편의 시와 노래와 36 점의 그림, 보석치료와 자연치료에 관한 의학에 관한 책과 당시의 정치인들과 성직자, 신자, 백성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편지 등 대 저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2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우고 많은 이들을 치유하였다.


무슨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만 교황 그레고리 4세와 이노센트 4세가 그녀의 시성을 제안했고 글레멘스 22세가 뒤를 이어 시성작업을 추진하였으나 아직까지 승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일 지역교회 주교들의 합의로 1971년부터 전 독일어권에서 매년 9월 17일을 힐데가르트의 축일로 공식적으로 경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1664년부터 독일 마인쯔 교구 성무일도와 미사경본에 9월 17일을 힐데가르트의 축일로 지내기 시작했다. 1940년부터는 전 독일 성무일도와 미사경본에 힐데가르트의 축일을 올렸다.

 

 


 

▒ 힐데가르트가 우리 시대에 선사한 8 가지 선물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살려 보기 위하여 미국 오클랜드 창조영성 대학의 창설자인 매튜 폭스의 글 즉 우리 시대에 선사한 힐데가르트의 8 가지 선물을 정리하였다.


신비가이자 예언가로서 힐데가르트는 실천적인 신비가와 예언가가 되기를 원했으며 언제나 "유용성(有用性)"의 덕을 찬양하였다. 그녀의 대작 [De Operatione Dei]의 마지막 문장에서 힐데가르트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던 신자들의 유용성 때문이며, 하느님은 "무용성(無用性)을 파괴하는 분"이라고 한다. 힐데가르트는 유용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녀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작업에 어떤 암시를 준다. 그 하나는 그녀를 소개할 때 그림과 음악을 함께 싣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말처럼 "유용하게" 될 때까지 사람들의 정신과 종교 그리고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12세기의 한 수녀가 사색한 모든 것이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여행과 투쟁에 똑같은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9세기 이전의 한 신비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 당시에도 힐데가르트에 대해 듣거나 그녀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 중에서 많은 불만을 토로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유용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츠비팔텐의 베르톨드(Berthold of Zwiefalten) 수도원장은 힐데가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말에서 위안을 얻어 즐거운 마음이 되곤 하지만, 종종 말이 모호해서 이해하기 어려워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고 썼다.

 

 


우리 시대에 창조 중심의 영성적 전통의 부활은 빙겐의 힐데가르트에 대한 이해에 크나큰 도움을 줄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우리에게 베네딕도회의 수녀로서 자신의 체험에 충실한 그 영성적 전통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성 아오스딩 신학(Augustine Theology)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대를 살았지만, 힐데가르트는 타락과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창조 중심의 신학에 훨씬 많은 중점을 두었다. 자기성찰의 위대한 천재였던 성 아오스딩은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으나 힐데가르트에게 우주적 그리스도는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그녀가 지닌 우주적 정의감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그녀와 동시대인이었던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의 작품과 비교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피터 롬바르드의 작품은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하나의 기본서처럼 되어왔다. 신학이 타락과 구원의 관점에서만 영성에 접근하는 한 영성에 기여한 힐데가르트의 무한한 업적을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힐데가르트를 연구한다면 그녀의 작품에 드러난 창조 중심의 영성 전통의 26가지 주제와 네 개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듯이 이 주제들은 힐데가르트 신학에서 가장 "유용한" 통찰력을 이끌어낼 것이다. 필자는 졸저 [원복(原福, Original Blessing:분도출판사 번역)]과 [창조영성 Cration Spirituality: 푸른평화 번역]에서 이 길과 주제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 또는 창조 에너지, 축복, 겸손의 의미로서의 세속성, 우주, 신뢰,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 왕의 개인적 특성, 종말론의 실현, 우주적 환대, 비우기, 공허, 무, 신격화, 예술로서의 명상, 이미지의 신뢰, 변증법, 모성으로서의 하느님, 새로운 창조, 예언가적 소명에 대한 신뢰, 야훼의 가난한 이, 축복으로서의 자비, 에로스적(힐데가르트는 "질투하는"이라고도 한다) 정의로서의 자비 등이다. 이 주제들을 그녀의 작품에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힐데가르트의 신학을 우리 안에 육화되어 생명력을 지닌 "유용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구의 유산 안에 우뚝 솟은 몇몇 위대한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창조 중심의 전통이 다른 문제를 우리에게 제시하는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창조를 중심으로 삼았던 우리 선조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해석이나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힐데가르트의 해석자들은 타락과 구원의 신학이라는 구태의연한 범주에 갇혀 그녀가 지닌 예리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나는 힐데가르트가 창조 전통의 각 주제를 깊이 있게 발전시킨 신학의 풍요로움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에크하르트와의 많은 유사점을 발견하고는 무척 감동하였다. 그녀가 관심을 가졌던 주제가 이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작품에도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힐데가르트와 에크하르트는 남매 같은 신비적 예언가들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대해서는 그의 설교에 관해 쓴 나의 책 [진보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창조영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진심으로 나는 이 책을 두번 정도 정독할 것을 권한다. 힐데가르트에 대한 작업을 준비해온 나는 그녀를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누구보다 탁월한 서구의 여성 신학자로 간주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지닌 지성, 예술, 과학, 정치적 관심은 놀라울 정도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녀가 언젠가는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아빌라의 데레사의 뒤를 잇는 여성 교회 박사로 불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시대인들도 그랬지만 힐데가르트 자신도 스스로를 예언가로 생각했다. 예언가는 자신의 말과 행위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참다운 예언가는 문화와 인간의 정신 깊은 곳을 건드리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이 지닌 온전한 의미가 예언가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힐데가르트는 왜 예언가가 자신의 사명을 "그늘 속에서" 수행하는지, 그럼으로써 인류가 어떻게 예언가의 메시지와 신의 지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지를 설명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십자가의 요한이 자신의 시에 붙인 주석이 그 시에 담긴 진리를 다 드러내지 못하는 것처럼 힐데가르트가 자신이 받은 조명에 대해 붙인 주석도 그 조명의 이미지와 상징성의 깊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힐데가르트는 인간이 태어날 때 그 영혼에 들어오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불공(Fireball)"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어떻게 그녀가 이 단어의 충분한 효력에 대해 예견할 수 있었을까? 지난 십 년 사이에 이 사실을 20세기 과학이 입증하기 전에 누가 그 본래의 불공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안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자신의 일과 인문과학 지식에 대한 힐데가르트의 의도적인 한계는 오늘날 그녀의 조명에 대해 기도하고 명상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책임을 부여한다. 힐데가르트는 독자들에게 "나의 경고에 유의하고 이를 마음속에 받아들여 영혼의 기쁨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라"고 권한다.

 


힐데가르트는 동료 수녀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 편지에서 "나의 말을 절대 망각 속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사랑 안에서 여러분이 이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하고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힐데가르트를 잊는 것은 마지막이 그만큼 가까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빙겐의 힐데가르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서 그녀가 작곡한 음악이 팦 스타의 음악만큼 많이 팔리고 있으며, 그녀의 오페라가 여러 대륙에서 공연되고 있다. 독일어와 라틴어로 쓰여진 그녀의 책이 영어로 옮겨지고 있으며 신비주의가 담긴 그녀의 저술이 연구되고 기도에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작업과 삶이 연극화되고 있다. 힐데가르트가 받은 조명은 이제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유용하게 될 것이다. 힐데가르트의 삶과 영성의 이 놀라운 부활은 우리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녀가 오늘의 우리를 위해 남겨둔 힘찬 메시지는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힐데가르트는 서구 종교에 나타난 틈의 대부분을 메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틈은 우주와 우주적 그리스도를 신학 밖으로 내몰았으며, 인간이 지닌 신성과 창조성을 무시하였고, 모든 창조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억압하였으며, 민족과 사회에 대한 효과적이고 유용하며 실천적인 치유로부터 구원을 배제시켰고, 여성의 경험과 상상과 신학 방법을 무시하였으며, 창조 중심의 영성적 전통을 말살시키려 하였다.


이제 힐데가르트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선사하는 선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받아들이는 것에 인색한 현대의 우리에게 주어진 힐데가르트의 선물은 어림잡아 8가지가 된다.

 

 


 

살아 있던 시기에 이미 "라인지역의 시빌", "라인지역의 데보라"라고 알려졌던 12세기 중부 라인강변의 한 도시, 빙엔의 한 베네딕도회 수녀! 아직까지 성인으로 시성되지도 않았고 교회학자로 인정되지도 않았지만 독일어권 안에서는 공식적으로 축일을 기리고 성인으로 널리 공경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유해를 모시고 공경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이!


어려서부터 허약하고 자주 병으로 고생하였지만 81세가 되도록 장수하면서 넓은 분야에 걸쳐 많은 글을 남겼다. 중세의 어떤 여성도 자신의 이름으로 이만큼 많은 공적인 글을 남기고 공적으로 활동하였던 이, 그리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렇게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비전을 보았으나 43세에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쓰라"는 천상의 소리를 듣고 비전을 기록하기 시작하여 81세까지 3권의 신학저술과 2권의 자연학 및 치료에 관한 책, 그 안에 57곡의 노래와 음악극, 70여 편의 시와 성 디지보트, 성 루페르트, 성 마르틴의 전기, 성 베네딕트 규율 및 성 아타나시오의 삼위일체에 대한 글 설명, 복음서 주해, 38가지 신학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 등의 글과 수 백 통의 서신을 남겼다. 49세 때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가 그녀의 비전을 믿을 만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전 유럽으로 이름이 알려진 후 '하느님의 소리'에 권위를 두고 수녀원의 생활 및 운영으로부터 세상 정치적인 일들에까지 자신이 보고 들은 비전을 관철해나갔다. 스스로 예언자로서 규정하고 서신으로만이 아니라 설교여행을 하면서까지 교황과 황제, 주교들과 백작들, 남녀 수도원장들, 그리고 동료 수녀들과 수사들에게 들은 말씀을 전하고 필요한 경우엔 기꺼이 맞섰다. 적 그리스도들이 나타나는 종말론적인 시기라는 신학적인 흐름이 거세게 일던 때, 대립과 깊은 변화의 시기에 당시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과 능력, 교회와 국가의 권력자들에 대해 기꺼이 맞서고자 했던 그녀의 용기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녀 고유한 방식으로 반기를 들었다. 상황에 대해 차근차근 짚어 설명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자신에게 그 일을 하도록 이끄는 하느님의 뜻에 의거해서 말했다.

 

 


13세기, 신비적인 것보다는 이성적으로 묻고 논증하고 결정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스콜라 철학과 엄격한 대학 중심의 교육이 자리잡으면서 이러한 틀을 벗어난 힐데가르트의 자연과학적인 저술과 신학-우주론적인 비전의 저술들은 곧 관심을 잃었다. 오히려 전체 저술과 신학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 예언자적인 역할로서 교회의 부패와 카타르 종파의 활동 등 당시의 새로운 종교상황과 운동들에 대해 보낸 서한들만을 발췌하여 힐데가르트 사후 태동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꼬 수도회의 두 탁발 수도회에 대한 기존 수도회와 재속 사제들의 반감을 확증해주는 예언으로 각색해서 다시 쓰여진 글들이 널리 전해져서 힐데가르트의 비전에 대한 불신과 오해를 낳게 하였다. 당시 있었던 시성추진 움직임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마인쯔 교구에서 계속 추진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이렇게 당시 대학의 신학, 철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15세기, 고대의 문화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인문주의 시대에 들어서서야 힐데가르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 지역 성인으로 공경 받기 시작하였고, 19-20세기에 들어서면서 지역을 넘어서서, 그리고 1940년에는 로마 전례 성성에서 허락하여 독일 전체에서 축일을 지내게 되었고 1971년에는 전 독일어권에서 축일을 지내게 되었다.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다양한 분야에서 빙엔의 힐데가르트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대안 의학으로서 치료법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보석과 향료요법 등에 대한 밀교적, 신비주의적인 새로운 영성적 움직임에서의 관심,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보는 여성운동 흐름에서의 관심,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생태학적인 영성을 찾는 생태학적인 관심, 그리고 나아가서는 예언자적인 목소리와 풍부한 상징성을 보는 종교일치운동과 사회운동에서의 관심 등. 독일과 독일어권에서만이 아니라 영어권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위대한 독일인"(Hermann Heimpel)으로 "첫 번째 위대한 여성 신학자"로 나아가서는 "12세기 학문의 전위(前衛)"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한 편으로는 이렇게 힐데가르트에 대한 관심이 보편화되고 대중화되면서, 13세기 탁발 수도원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 특정한 관심에 따라 텍스트 일부만을 떼어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나 상업주의적인 붐으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신학과 영성적으로, 또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힐데가르트의 원래 의도를 좀 더 정확히 보는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전 저작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또 힐데가르트 사후 각색된 저술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총체적인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의 삶과 가르침을 신학/영성, 음악, 자연학 및 치료법 등 분야별로 역사적인 배경아래에서 다시 해석하고 오늘에 다시 투영하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음악과 그림을 도구로 하여 창조와 치유의 새로운 전례를 만들고, 그 삶의 자리를 돌아보고 체험하는 순례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개인, 가족, 단체를 위한 피정 프로그램과 일상 피정을 위한 성서묵상, 명상 등 사목, 영성 프로그램들도 개발했다.


1998년 탄생 900주년을 경축하면서 이렇게 축적된 연구의 성과들이 출간되고 개별적, 지역적 연구들을 묶는 종합하고 묶는 인터넷 연결망이 구성되었다.


힐데가르트의 영성과 저술은 그 삶의 자리, 그가 살았던 시대, 지역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새로운 연구 성과의 기반 위에서 생애와 영성, 저술을 살펴보고 이런 영성적인 면을 담고 오늘날 적용되고 있는 힐데가르트 치료법에 대해 살펴본다.

 

 

 


 

 

세계화라는 문화자본주의의 물결을 타고 거대한 다국적 시장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한쪽(20%)은 호황을 누리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80%)의 빈곤이나 기근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유전자 조작(GMO) 식품, DNA 칩이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같은 기술발전과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것 같다. 에너지나 식량문제 그리고 세계 기상이변과 역병이 날이 갈수록 지구촌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지구 생태계의 위기가 나타나면서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영적으로 새로운 방향과 창조적 비전을 찾으려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긍정적인 점은 이 지구가 정보 하이웨이 인터넷을 통해서 지구 전체를 "외적으로" 신경화하면 할수록 떼이야르 샤르뎅 신부님의 비전처럼 사람들은 더욱 더 "내적으로" 영성화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사회와 생태와 인간의 삶을 연결시킬 수 있는 전일적인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대적 징표나 변화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시대, 중세에 대한 관심 특히 12세기 힐데가르트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오늘날 상당히 높아졌다.


힐데가르트가 살았던 그 당시 중세는 시대를 가르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감겨 있었고, 힐데가르트의 영성은 그 이후의 주된 흐름에서 밀려있었을 뿐만 아니라 힐데가르트의 많은 글과 노래와 그림이 거의 9세기 동안 응달에 묻혀 있었다. 늦게나마 다양하고 풍부하게 오늘날 그녀의 영성을 우리의 실제 삶에 끌어 당겨 보려 한다. 물론 많은 부분이 21세기의 현대인에겐 낯선 12세기의 세계와 가치관을 담고 있고, 또 그와 결합된 상징과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 영성과 접근법이 현대의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관건이 되고 있다.

현재에 시사하는 영성적인 틀과 내용들을 살펴본다.

 

 


힐데가르트 영성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으로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를 모든 것을 주재하는 초월적인 하느님, 그러나 창조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 안에서 서로 연대하여 이어가도록 일깨우는 잠재력, 사랑으로 작용함을 전하는 사랑의 영성, 사랑의 신학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서 그 분이 이 세상 삶에서 겪은 고통과 수난을 강조하게 되고, 그것이 우선적으로 이 세상을 죄악시하였던 경향, 그리고 인간의 죄과 때문에 그 구원을 위하여 수난을 당했다는 것이 또한 경건한 신앙생활에서 '개인적인 죄과'를 몰아치는 경향에 대비해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한 분이 창조에 담아준 사랑을 강조한다.


삼위일체의 신앙에 근거해서 영과 초월적인 것만이 아니라 창조의 모든 것, 온 우주 안에 당신의 숨결, 신성이 잠재해 있음을 전한다. 삼위가 하나이듯이 모든 것이 홀로 떨어져 머물지 않고 서로 일치하여 작용하기를 열정적으로 바라는 사랑, 한 처음에 창조의 근원이었고 또 육화의 원인으로 사랑을 구현하였던 이 사랑은 또한 다양한 형태로 만물 안에서 작용하며 전체 안에서 개별 창조물이, 또한 창조 전체가 완성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창조의 완성을 향하는 것이 도덕적인 의무나 보속이 아니라 대화이며 기쁨이다. 그리고 어떤 상태에서도 사랑으로 다시 일깨워지는 것, 이성으로만이 아니라 감각으로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다양한 형태로 이렇게 잠재되어 있는 신성을 깨닫고 작용하도록 일깨워지는 것이 곧 은총이다.

 


창조를 통해서 창조주를 볼 수 있고, 영혼, 이성만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통해서 창조주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을 힐데가르트는 실제로 색과 소리와 상징으로 통찰하고 설명했다.


인간과 우주, 이 모든 세계에 공통되게 맥이 뛰게 하는 것이 녹색의 생명력(viriditas)이다.


태양으로부터 생성되는 푸르름이 태양빛과 수분을 담아 색을 바꾸어가며 열매를 맺듯이 하느님의 사랑의 힘이 배어있는 이 푸르름은 자연과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에서 생명을 낳고 키우고 열매맺게 한다. 이것은 곧 창조주의 사랑으로 정해 준 전체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고 인정하며 전체와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힐데가르트에게선 덕(德)도 푸르다. 덕은 단순히 도덕적인 면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서 전체와의 연결, 전체 창조를 완성하는 구원과 관련된다. 그래서 이렇게 전체 질서와 내적인 질서를 연결하고 균형 있게 유지하도록 하도록 세고 재고 달아서 적당한 정도를 찾는 것과 이를 지혜롭게 구분하는 식별이 가장 중요한 덕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하고 적당한 정도를 찾아 푸른 생명력에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곧 건강이다.


창조는 '조화의 교향곡'이라는 것이 모든 창조물이 원 음향인 창조주의 숨길을 나누어 받았고 교향곡을 이루는 하나의 음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서 각자 고유의 음을 알아내고 스스로 울려 전체 화음에 자리잡도록 하는 것, 음악은 이 원래의 근원을 기억해서 영혼을 울려 이 전체 안에서 자신을 쇄신하도록 함으로써 영혼을 치유하고 몸을 치유한다.

 

 

 


 

힐데가르트가 남긴 저서의 "원(原) 자필본(自筆本)"은 없다. 현재 전해오는 저서들은 모두 필사본(筆寫本)이다. 이 중 일부는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의 필사실(筆寫室: Scriptorium)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전해져오는 필사본들에서 "원본일 가능성이 가장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 비판적인 편집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거나 막 이루어졌다. 1956년 마리안네 쉬라더(Marianne Schrader)와 아델군디스 휘어쾨터(Adelgundis F hrk tter)의 공저 "성녀 빙엔의 힐데가르트 저서의 신빙성(Echtheit)"이 첫 번째 비판적인 연구였다.) Marianne Schrader, Adelgundis F?rk?ter, Die Echtheit des Schrifttums der heiligen Hildegard von Bingen. Quellenkritische Untersuchungen. B?lau, K?n/Graz 1956 (Archiv f? Kulturgeschichte, Beih. 6)


이들은 필적비교방식을 통해서 "루페르츠베르크 채색 스키비아스 코덱스(인쇄하거나 복사한 책이 아니라 손으로 옮겨 쓴 책으로 고사본(古寫本), 필사본(筆寫本)이라는 뜻. 이 글에서는 이 필사본을 원본으로 해서 다시 필사한 책들과 구분하기 위해 '코덱스'라고 발음대로 표기하였다. : Rupertsberger illuminierte Scivias- Codex) Scivias : 독일어로는 길의 조명(照明: Wisse die Wege)으로 번역되어 있다.)가 12세기 후반(2/3 시기, 곧 1166년 이후)에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 필사실에서 제작되었음을 밝혔다. 힐데가르트가 필사하는 이에게 세부사항을 직접 알려주고 지시하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코덱스에는 힐데가르트가 본 비전을 금색, 은색 및 불투명한 초벌 안료로 그려 표현하는 35개의 그림들이 들어 있다. 1632년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이 파괴될 때까지 루페르츠베르크 채색 코덱스도 "대형 코덱스(소위 "대형 코덱스: Riesencodex"라고 일컫는 이 필사본에는 힐데가르트의 신학적인 저술들과 서신들이 포함되어 있다.")와 같이 이 수녀원에 보관되어 있다가 다행히 손실되지 않고 아이빙엔으로 옮겨졌다. 1802년 아이빙엔 수녀원이 세속화로 해체될 때 후에 나사우 도서관이라 불리는 곳으로 다시 옮겨졌다. 이 곳 도서관에서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이 책들을 보게 되었다. 그 중 특히 괴테가 이 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라인, 마인 지역의 예술과 유물에 대하여 (?er Kunst und Altertum in den Rhein- und Main-Gegend, Altertum und Kunst 1, Cotta 1816) 참조 .

 

 


 


 

힐데가르트 폰 빙엔, 이는 지난 10년 간 그 어떤 이름보다 세인의 주목을 강렬하게 끌었던 이름이다. 그녀의 웅장했던 삶이 이제야 비로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힐데가르트의 정신적 유산들을 많이 그리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이빙엔(Eibingen)의 성 힐데가르트 수녀원의 수녀님들이지만, 의학사가인 Heinrich Schipperges에 의해서도 그녀의 많은 (신학적, 의학적) 저서들은 번역, 해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힐데가르트의 자연 치료에 관한 의학서들을 실행에 옮기는 의사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치유와 건강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가치로 되고 있는 만큼, 힐데가르트의 자연 치료는 특히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오늘 날 의료 수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전대 미문의 높이까지 도달해 있다: 〔현대의〕 의학과 약학은 병을 탐구, 진단, 치료하는데 대단히 높은 수준의 전문 지식을 획득하여 과거의 여러 잔혹한 전염병을 이겨내고 또 여러 훌륭한 약품들을 많이 계발시켰다. 우리는 그들의 이 빛나는 공로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훌륭한 현대 의학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는 마음을 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일까? 현대 의학은 병의 외적 징후들만을 기계적으로 다루고 의사와 환자간의 인격적, 개인적, 직접적 만남을 점점 더 의료 장치를 매개로 한 간접적, 익명적 만남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더군다나 고도로 효율적인 약조차 바람직하지 않는, 심지어는 심각한 부작용까지 유발시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한편에서는 자연 치료법에 대한 호감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극동 아시아의 지혜에 근거한 여러 가지 자연 치료법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알아 가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보라.)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 대체 치료법이 조롱거리로 취급되고 비 과학적이라고 무시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식물 안에 내재하고 있는 치유력에 관해 탐구하고 있는 과학도 있다. 그것은 식물 안에 치유력이 있는지 실험실에서 탐구하고 때로는 참으로 치유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 치료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 의사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힐데가르트와 만나면서 이 여러 다른 입장들이 팽팽하게 대립해 있는 긴장의 장, 그 핵심 속으로 뛰어 들게 된다. 그리고 나는 힐데가르트에 의해 좋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면 소위 "힐데가르트 바람"은 이미 오래 전에 잠잠해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분명히 말해 둘 것이 있다. 성 힐데가르트의 치유법은 여러 가지 자연 치료 요법들 중의 하나로 간단히 자리 매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 전체의 치유이다. 그런데 이 "전체적 치유" 란 오늘 날은 거의 유행어가 되다시피한 개념이다. 우리는 이 전체적 치유라는 말을 들으면 유사 치료(Homoeopathie)에서 행하는 자연 〔재료들〕에 의한 치유 방법이나 정신 신체 의학의 이해 방식 같은 것을 주로 생각한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에 있어서는 글자 그대로 전체적 인간이 문제된다: 자연과 결부되어 있으며, 또 신체-영혼이라는 구조로 이루어진 채, 생명의 근원인 신에 의존해 있는 인간 전체.〔즉 전체적 맥락에서 조명된 인간.〕또 힐데가르트의 치유론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적 구원론, 치유론이다. 따라서 그녀의 치유론에 입각한 세계및 인간 이해는 다른 문화권의 전통적 치유 방식과도, 순수 자연과학에 근거한 의학과도 다르다.


지난 세기동안 우리의 사회와 삶의 방식에 막중한 영향을 끼친 것은 소위 정밀한 자연 과학 들 이였다. 물질적 세계는 아주 발전되었고 또 전문화되었다. 우리는 인간 정신이 얼마나 놀랄만한 업적을 낳을 수 있는지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양한 방식의 삶이, 그럼으로써 인간 자체가 심각한 위험에 빠져들고 있음을 고통스럽게 인지해야 했다. 이 위험 현상은 특히 환경과 의학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과학적으로 면밀하게 근거 지워진 영양에 관한 여러 이론들이 쏙쏙 쏟아져 나오고, 위생 관념 및 대비책이 널리 유포되며, 기막히게 효과적인 약품들이 계속해서 소비되고 있는데도 우리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알레르기와 문명병들은 계속해서 증가일로에 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이 시스템 자체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의료 행위 배후에는 대체 어떤 인간 이해가 도사리고 있는가? 〔인간에 관한 어떤 이해 방식이 이런 의료 행위를 배태해 낸 것일까?〕인간은 과연 개개 부분들의 합에, 즉 임의적으로 교환•대체 가능한, 한 유기적 생명체 전부를 함께 고려하지 않고도 그것만 따로 떼어서 취급할 수 있는 〔독립된〕개개 부분들의 총체에 불과한가?


전체성에 대한 요구가, 즉 개개 부분들이 아니라 인격 전체가 치유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때 어려운 점은 인간의 본질적 핵심이란 유물론적 사유 방식이나 그 사유 방식에 근거한 (오늘 날 통용되고 있는) 방법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생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이 본질적 핵심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영혼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세기 Virchow 교수가 "그리도 많은 사체를 해부해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영혼을 찾을 수 없었다"라고 말한 후, 오늘 날 더 더욱 논란이 되고 있는 개념이다.


현대 자연 과학의 자식인 심리학조차 그의 방법으로는 지성, 감정, 충동, 태도 등의 영혼의 외적 현상만을 기술하고 시험할 수 있을 뿐이지 영혼의 본질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한다. Max Thuerkauf 라는 유명한 물리학 교수의 말처럼 정밀한 자연 과학은 자연 중에서 측정 가능한 것만을 확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측정 가능한 것, 그것은 자연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유물론적 일면적 고찰 방식에 인간 삶의 본질적 측면에 속하는 영적인 것이 아주 결핍해 있음을 느낀다.


이제 힐데가르트의 통찰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그녀에 있어서 치유란 단순히 병적 증세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치유함이다. 즉 하느님이 생각하신, 〔 원하신〕 그대로의 그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을 바라면서 살도록 창조된 인간, 세계의 요소들로 빚어졌기에 자연에 의존적이면서도 정신의 숨결로 살고 있기에 이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 인간은 이처럼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건강하게 살면서 자기 자신을 활발하게 실현시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은〔이 근원적 모습으로부터〕추락하고 분리되어 약해진 존재이기에(destitutio) 하느님의 도움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육체만 또는 영혼만 건강하거나 병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즉 〕인격으로서 건강하거나 또는 병이 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격으로서 즉 육체와 영혼의 생명체적 통일성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하고 또 〔그런 통일체적 존재로서〕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힐데가르트는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로서 하나의 완결된 세계상(像)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의 커다란 연관 관계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 날 우리들이 전문화, 세분화작업에 점점 몰두함에 따라 잊어 가고 있는 것이다.


초기 중세에 살았던 이 여인이 현대인의 마음을 끄는 점이 바로 이 점에 있으리라. 그녀의 메시지는 그때 그때마다의 사회 구조와 정신적 조류들을 넘어 서는 〔보편적이고〕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보는 자였고 예언자였으며 신비가였다. 그녀를 일컫는 그 밖의 다른 지칭들은 - 독일 최초의 여의사, 자연 치료가. 신학자, 정치가, 시인, 음악가 등 - 오직 이 배경에서만 올바로 자리 매김 될 수 있다.


비전, 너무도 아주 독특하여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 조차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는 그 비전을 통해 힐데가르트는 생명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그림과 상징으로 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아니, 알려 주어야 하는〕"하느님의 나팔"이라 지칭하였다. 그녀는 모든 피조물의 - 생명체나 무생명체나 - "내적 본질"을 보았다. 돌 속에서도 보았고, 동식물 속에서도 보았으며, 인간 속에서도 보았다. 그들 모두는 하나 같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힐데가르트 사유가 왜 그토록 현대인의 마음을, 생명의 모든 영역이 점점 세분화•전문화되어감에 따라 생의 방향과 중심 마침내는 자기 자신마저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의 마음을 강렬히 매혹하고 있는지 여기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으리라.


그녀는 어떠한 인간학적, 신학적 이론 체계도 확립하지 않았다; 그녀가 본 인간은 항상 구체적 인간 이였다. 즉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장엄한 능력을 가진 동시에 고통과 어려움을 또한 겪고 있는 인간 이였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 특유의 강점으로 보이는 하나의 관조 방식에 주목할 수 있다: 여성은 생명을 계속 전승해주고 있기에 생명에 특히 가까이 있다. 그녀의 관심의 핵은 〔죽은 사물이 아니라〕 인간에로, 인격에로 향한다. 또 그녀에게는 정신적•육체적 모성이 살고 있기에 생명은 아주 친숙하다. 반면에 남성에게는 사물적 세계를 형성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제 2차 바티칸 회의의 폐회식때 여성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공표되었다: "이제 때가 오고 있다. 아니, 때는 이미 왔다. 여성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야 할 때가, 여성이 사회 속에서 지금껏 소유할 수 없었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자신을 실현시키며 힘을 획득해야 할 때가. 그러므로 복음의 정신으로 충만한 여성들은 이 순간, 인류가 전대 미문의 깊은 변화를 의식하고 있는 이 순간, 인류가 그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큰 공헌을 할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도 힐데가르트가 오늘 우리에게 막 행사하기 시작한 영향력을 보고 있다.


힐데가르트는 남성들에게도 이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가질 것을 간절히 그리고 끊임없이 권유했다: 그녀는 Matthaeus von Lothringen 공작에게 "그대의 할 일은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것이지 노예를 훈육하는 일이 아닙니다" 라고 경고한 바 있다. 또 어떤 남성에게는 "어디서거나 한 생명을 만나게 되거든, 그 생명을 보살피시요"라고 말한적도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경종을 울려주는 사람으로서 힐데가르트를 필요로 한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 생명이 다양한 방식으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다. 삶이 - 인간다운 삶, 신이 원하는 삶 - 다시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모성과 인간성에 대한 성찰이 아주 불가피하다. 힐데가르트는 생명과 인간을 섬긴다. 그녀는 그녀를 찾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충심 어린 충고를 주었고 정신적•육체적 질환을 치유해 주었으며 또 양심을 일깨워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권력층 남성들에게조차 따끔한 경고의 말을 자주 주면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생생하게 환기시켜 주었다.


힐데가르트의 웅장한 업적을 볼 때 그녀의 몸이 허약했다는 것, 그래서 자주 병에 시달렸다는 것을 우리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녀는 몸과 영혼이 얼마나 불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병고를 통해〕몸소 자주 체험하였다: 정신적, 영혼적 어려움이 어떻게 육체를 병들게 할 수 있으며, 거꾸로 약한 몸이 어떻게 영혼을 방해하는지를. 그럼에도 이 여성은 대체 어디로부터 힘을 얻어 그 엄청난 작품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그녀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 안에서 살았다. 그녀가 빛으로 그리고 불같은 사랑으로 경험한 하느님, 모든 "녹색의 생명력"을, 우리 인간을 노쇠해서까지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주는 "녹색의 생명력"을 샘솟게 하는 근원적 생명인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나는 이 책에서 성 힐데가르트의 사유를 이해해 보려 한다.


그녀는 "병이란 생명력의 결핍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이 생명력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우리에게 생명력과 건강함 그리고 치유가 주어지는 여러 차원을 조명해 보고 싶다. 그 차원이란 첫번째로는 순수 생물학적 자연적 차원을, 두번째로는 인간 속의 신체적-영혼적 상호 관계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모든 생명력의 근원 즉 신 자체를 의미한다.


나의 이 비범한 탐구 여행에 독자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초대하면서...

 

 


 

보물을 들어올리거나 파도치는 물살들을 평화로이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보물들을 찾아 깊이 파야한다. 하지만 인간애보다 더 심원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Profunditas est homo et cor eius abyssus"- 찬미가 시인인 Nova Vulgata는 깊이를 알수 없는 것은 인간이고 그의 마음은 끝이 없고 심원하다고 말했다.


위대한 성인의 심혼도 그러할까요?

힐데가르트는 여러면에서 타고난 성품을 가진 성녀였다. 물론 사람들은 그녀를 수십년전에 “지식과 신성을 지닌 12세기의 기적”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녀가 살았던 시대를 넘어서서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까지 정신적 삶의 지혜로운 스승, 자애로운 대수도원장, 예언자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영원한 생명으로의 안내자로서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정열적인 자연연구가로서, 치료술에 정통한 의사로서그리고 치료사로서의 그녀의 지식들은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예언자는 모든 인간들의 자비를 확신했고, 동시에 하느님의 신비를 찬양했다. 하느님이 주신자연과 기적의 선물은 항상 보물을 에워싸고 심원하게 드러내는 그녀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힐데가르트의 첫 번째 작품인 “Scivias"는 말하자면 그림으로 보는 교리교육으로 제시되고 있다. ”생활공덕의 서적“은 -Liber Vitae Meritorum"- 성인의 도덕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마지막 3개의 위대한 신학 작품에는 - ”Lieber Divinorum Operum", " - 말하자면 자연철학이 담겨져 있다.


나는 이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우주를 포괄하는 힐데가르트의 세 개의 위대한 비전작품들속에 “생명빛의 그림자”의 비전을 기록할 때 그녀의 심장과 펜으로부터 솟아나왔던 진실로 순수하고 감성적이며 정직한 성인의 기도문을 모아보았다.


이 전집들의 보완으로 나는 힐데가르트의 시적인 아름다움과 힘으로 형성된 각각의 주제영역이 절정점인 기도문으로 정리된 “성령의 거문고‘의 “노래하는 기도”를 첨가했다. 또한 가극(오페레타)과 축제극은 - 특별한 기회와 그녀의 유명한 발신편지의 기도문에서 자주 저작했다 - 이러한 아주 가치있는 기도문들의 주옥을 담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수호자의 기도가 들어 있는 이 책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일상속에서 용기와 격려를 주고, 모든 위치에서 진심으로 하느님께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며, 열애와 찬미, 청원하고 감사안에서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성베네딕도 수녀회의 Philippa Rath 수녀님의 글을 번역•편집 한 글 입니다.)


마리온 그래핀 된호프(Marion Graefin Doenhoff, 1909-2002,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저항가, 차이트 주간지의 편집자)는 "차이트(Zeit)"지에 다음과 같은 아주 주목할 만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초월적•종교적 세계로부터〕현세적 세계로의 해방, 새로운 진보와 새로운 기대의 충족 그리고 권력 증대에 대한 쉼 없는 노력은 〔결국에는 삶의〕의미의 빈곤•고독• 소외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이제야 점점 드러나고 있다. 전반적 세속화, 즉 인간을 형이상학적 근원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오직 세속의 일에만 온 마음을 쓰게 하는 철저한 세속성은 ...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가치로서 그리 오래 우리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즉 그리 오래 유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의 말은 참으로 경청할만한데, 이는 "성장의 한계"나 (포스트) 모던적•세속적 사회의 그늘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악의 뿌리를 생생하게 환기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그의 삶•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는 일견 모든 전통에서 해방된 듯 보이나 실은 어디로 가야할 지, 어디 발붙여야 할 지 모르는 체 이리 저리 공허하게 떠돌고 있을 뿐이다. 부초처럼. - 삶의 의미를 목마르게 찾아서 그러나 결국에는 자기만의 골방에서 한 걸음도 내 딛으려 하지 않으면서.


현대에 관한 마리온 된호프의 분석은 냉정하면서도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한 번 둘러보면 이 분석은 우리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힐데가르트는 900년 전에 "하느님의 창조 작업"이라는 대작에서 동시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 그대 인간이여, 옛날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 그 분, 시간의 저편에 계시는 그 분의 말씀에 귀를 잘 기울어라. 자기의 창조주를 향해 마음을 열고‘당신이야말로 저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그는 사랑의 불씨를 당기는 사람이다. 일체의 생명과 일체의 선을 분만하는 사랑의 불씨를. ... 우리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므로〔어느 주인을 섬길지 끊임없이 새롭게〕선택해야 한다. 하느님 아닌 다른 무엇을 섬기는 자는 자기 자신만을 볼 수 있을 뿐이어서, ... 다른 존재자를 섬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과 그 분의 의지를 알아채고 그 분을 섬기는 자는 태양처럼 빛나서 진리의 빛 속을 걷게 되리라."


힐데가르트의 말은 마리온 된호프의 말과 다르나 마리온 된호프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힐데가르트가 살던 시기로부터 다시 한 번 6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보자. 600년경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오랜 체험을 거쳐 수도자를 위한 삶의 계율을 집필한, 서양 수도자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 성인인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그는 계명의 서언에서 형제 자매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을 간곡한 마음으로 쓰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하느님의 빛을 잘 주시하면서 이 경고의 음성이 우리를 어디로 초대하려 하는지 귀를 잘 기울여 보자: 그대들이 오늘 〔하느님의〕말씀을 들으면 부디 마음의 문을 닫아걸지 말아라 ... 그대들이여, 아직 생명의 빛이 그대를 품고 있는 한 〔하느님의 말씀을 쫓아 힘껏〕달려라."


성 베네딕도의 말은 또 다시 아주 다르나 내용상으로는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서로 다른 시기에 살았던 이 세 사람의 예언자적 경고의 말속에는 모종의 공통성이 있다. 하나는 그들 모두 사회적 변혁의 시기, 종교적 전환의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가치관, 전통적 삶의 양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한 시기. 어떤 가치관에 따라 살아야 할 지, 아니, 무엇이, 어떤 삶이 보다 가치 있는 삶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시기. 정말이지 삶의 방향도, 지반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시기. 그럼에도, 아니, 그럴수록 영원한 것을, 신뢰할만한 지반을 더 더욱 갈급하게 찾게 되는 시기.


또 다른 하나는 그들 모두 초월자를 가리킬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에게,‘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그의 광증에 (이 광증은 아마 모든 시기의 인간에게 공통된 점이리라.) 넘어설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만 돌아서서 회개할 것을 간곡히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의 타협도 불허하는 아주 분명한 음성으로. 그리고 마침내 가치와 길을 밝혀주는 다른 대안을, 충만한 삶으로 이끌어줄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어떤 시기이던 그 시기만의 예언자를, 즉 지금 울리고 있는 이 시간의 종소리가 무엇을 알리고 있는지를 말해 주어야 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어떤 예언자들의 말은 그들만의 시대를 넘어서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기도 한다. 누르시아의 베네딕도와 힐데가르트가 바로 그런 예언자들이다. 그들은 말과 모범적 삶의 방식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길을 밝혀 주고 있다. 그들 둘 다 시대의 거대한 조류를 거슬릴 수 있고 또 세계를 참된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 베네딕도는 삶의 계율을 보여 줌으로써 서양 문명 전체에 핵심적 가치들을 전수해 주었고, 힐데가르트는 이 베네딕트의 정신 안에서 살면서 그 정신을 독특한 방법으로 새로 조명하여 전수하였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이 베네딕도 정신이 어떤 정신인지,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공부해 볼만한 하겠다. 우리는 이를 통해 어쩌면 마리온 된호프가 앞에서 제기한 우리 시대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점을 찾는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우리 인간의 본성이 품고 있는 것들, 그것들은 유감스럽게도 서로 일치와 조화가 아니라 부조화와 모순 관계 속에 있다. 서로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모순 덩어리, 거대한 활화산 같은 카오스, 청각을 잃게 할 만큼 큰 소란. 그러나 이 엄청난 소음 속에서도 그 소음에 묻히지 않는, 결코 묻힐 수 없는 소음보다 ‘큰’음성이 하나 있다. 귀를 막아도 들려 올만큼 또렷하고 단호한 음성. 그것은 어떤 경우에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어떤 경우에든 선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준엄한 명령이다. 기적!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매 순간 새로이 탄생되고 있는 것인가?


중세의 한 수녀이자 신학자인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책『삶의 공덕에 관한 책』(Liber Vitae Meritorum)에서 이 문제를 곰곰이 묻고 대답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 내면에서 팽팽한 긴장•적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을 즉 선과 악을 35개의 항목으로 각각 나누고, 그것들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가를 인상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우리 인간 스스로의 내면에 살고 있는, 그래서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서로 대립되는 성향들에 관한 그림. 힐데가르트는 우리의 개개 성향•행위들을 고결함과 비루함으로,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구분하고 보여 주면서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을 그녀가 얼마나 잘, 정성껏 보고 있었는지 커다란 놀라움으로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비겁함이라는 악과 신의 승리라는 선에 대해 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비겁한 사람, 그는 토끼 귀가 달려 있는 인간의 머리를 한 겁에 완전히 질려 있는 벌레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누구의 마음도 다치게 하지 않고 누구의 마음에나 다 들고자 작정한 사람이다. 늘 당신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읊조리는 사람. 그렇지 않다면 끝에 가서는 손해볼 것이 틀림없기에 말이다. 비겁한 사람은 말한다: "차라리 권력 있고 부유한 사람에게 아첨할 것이야. 성인이나 가난한 사람 따위에는 관심 가질 필요 없어. 그들은 어차피 내게 아무 이득도 줄 수 없으니까 말이야 ... 그들이 선한 일을 하건 악한 일을 하건 나는 못본척 할 것이야 ... 내게는 어쨌거나 살 집이 있어. 〔내가 살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집을 어떤 경우에든 지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 뿐이야〕." 이 비겁한 사람의 말에 '하느님의 승리'는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더러운 잿더미안에서 뒹굴고 있는 삶을 좋아하지 않아."


또 다른 예로 힐데가르트는 냉담함이라는 악과 자비라는 선을 대립시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먼저 냉담한 마음의 말이다: "내가 존재하도록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런데 왜 내가 그 무엇을 위해, 그 누구를 위해 걱정을 하고 또 애를 써야 하지? ...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 그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한 하느님이야. 하느님이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해. ... 나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겠지만 선행도 베풀지 않겠어. 〔슬퍼하는 자를 보고〕늘 동정해야 한다면 ... 〔맙소사,〕 모든 기쁜 음성에, 모든 슬픈 음성에 일일이 답해야 한다면 도대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지?"

냉담한 사람,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일에만, 자기의 평화로움에만 관심 있을 뿐 타자에 대해서는 얼음장같이 무관심하다. 힐데가르트는 이 무관심한 사람의 일견 정당한 인생관을 지극히 아름다운 시적 비유로써 단호하게 거부한다. 자비로움의 입을 빌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뜨거운 연대감을 느끼고 그들의 상처를 기꺼이 치유해주려는 마음으로 가득한 자비로운 사람의 입을 빌려서 말이다: "풀들도 꽃을 피워 서로 향기를 나누어주고 있지 않으냐? 돌 한 덩어리조차 그의 광채를 다른 존재자에게 비추어 주고 있지 않느냐?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이처럼 다른 존재자를〕 사랑하면서 포옹하려는 근원적 충동을 갖고 있단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났고, 하느님에 의해 살고 있으며, 하느님의 힘으로 호흡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리고 매 순간 매 순간, 하느님과의 관계에 의해 삶의 영양분과 생명수를 받고 있다. 어린애들을 보라! 그들은 전적으로 부모에 의존해 있는 그들의 삶을 축복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향유하고 있다. 그들은 부모를 보고 기뻐하고, 그들에게 의존하고, 또 그들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성숙한 사람 또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이란 혼자의 힘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행복은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물처럼 받을 수 있을 뿐이라는 이 아름다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종교에서보다 친구들간의 관계에서나 또 다른 인간 관계에서 먼저 경험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귀한 선물이 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너무도 환희로와 마음을 활짝 열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영혼은 이때 하느님이 어떻게 자신을 창조하셨는지를, 그래서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게 된다. 그래, 영혼은 그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그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게 된다.


하느님의 창조 작업, 그것은 완벽하게 사랑의 행위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그분께서는 자비로운 사랑으로 아래를 굽어 보셨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그래서 강한 호의감으로 서로 맺어져 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께서 당신의 형상에 따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으신 인간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신다. 단, 우리 인간이 자유롭고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의 근원을,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도, 아니면 거부하고 냉담할 수도 있는 자유를 우리 인간에게 주셨다. 이러한 자유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어떤 의지력도 없는 꼭두각시, 모조품뿐일 것이다 - 그러나 누가 자동 인형으로부터 사랑 받고 싶어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노예 소유자가 아니시므로 노예를 창조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이가 자유롭기를, 또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 사람 자신으로 머물러 있기를 소망한다 - 물론 사랑은 이러한 이유로 항상 상처받을 수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무력으로써 사랑을 강요할 수 없고 또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빈 공간, 하느님께서 손 댈 수 없는 빈 공간이 생겨나게 된다: 하느님의 근원적 사랑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가능성, 사랑 받음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사랑에 냉담할 가능성. 그대와 나를 말하는 대신 끊임없이 나, 나, 나만을 말할 수 있는 자유. 왜 나는 나의 일 아닌, 나의 안락한 삶과 관계되어 있는 일이 아닌 다른 무엇에 마음을 써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눈물 따위를 왜 씻어 주어야 하는가?


굳이 종교적 의미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우리는 이 냉담한 사람의 호언장담 속에서 근원 망각증을, 인색하고 초라하게 자기 자신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근원 상실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힘이 그 힘을 주신 분에게로 다가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 분으로부터 멀어져 가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빛 속에서 깨어났을 때 나를 잊어 버렸다." 자기의 빛(지성)과 힘에 도취됨, 그것은 곧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림이다. 하느님을 떠나 오로지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존재하려는 시도는 그러나 모두 끝없는 어둠으로,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인간은, 인간의 삶은, 오로지 내적으로 지탱 받고 있기에 지탱되고 있다. 진정한 지탱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받침대, 그것은 지탱되어 지고 있음에, 떠 받혀지고 있음에, 곧 사랑 받고 있음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이렇게 강하고 그리고 따스하게 안겨져 있는 것이다. 즉 사랑 받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 포옹. 달리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근원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 근원은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다 그분께서 주신 선물이다.


하느님에로 향하는 길, 그것은 힐데가르트에 의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만 염려하는 삶을 떠나, 근원으로, 근원적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힐데가르트 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은 『삶의 공덕에 관한 책』(Liber Vitae Meritorum)의 핵심이기도 하다. 선(덕)의 인도를 받는 사람, 그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의 근원으로부터의 음성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진정한 영상이다. 반면에 모든 악은 하느님 (근원)에 대해 전연 알고 싶어하지 않고 자족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음성에 귀를 막는 사람의 태도, 즉 하느님을 거부하는 태도에서 연유된다. 여기에서 책임져야 할 일로부터의 도피, 선행을 선택•결행함에 있어서의 우유부단함, 근원을 늘 새롭게 의식하면서 인내심 있게 생을 구축•영위해나가야 할 과제로부터의 도피라는 죄가 발생되는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선악의 영향력이 단순한 개인적 영역을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우주적 영역으로까지 미친다고 본다. 즉 한 개인의 선행 또는 악행은 그 개인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우주적으로도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로 향할 때, 그래서 우리 마음이 맑아질 때, 그때 바싹 말라 있던 모든 것들은 다시 푸르게 되리라. 모든 낱알과 포도 알은 바로 이 비밀스러운 힘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계의, 이 생태계의 생명을 우리 인간에게 맡겨셨다. 이 생태계의 생명줄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 세계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존재로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이다. 힐데가르트의 표현을 빌면 "인간은 이 세계의 신이다." "하늘과 땅은 영원한 자연 법칙에 묶여져 있고, 모든 동물들은 본능에 묶여 있지만, 인간만은 오로지 인간만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선과 악에 관해 알기 때문이다."

 

 


 

비전과 비저너리, 이것은 원래 종교적 영역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영상을 통해 초감각적 계시의 세계를 관람할 수 있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비저너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비전 곧 은폐된 무엇(진리)이 드러나는 일은 그런데 대개 꿈이나 망아적 상태에서 일어난다.


비전과 신비가는 비단 서양 문화권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모든 문화권에서도 보여지는 현상으로, 소위 자연 종교에 있어서는 핵심적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비전의 내용 및 그것에 대한 해석은 그때 그때마다의 종교적•사회적 배경에 따라 달라진다.


중세의 비전 체험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 당시 비전 현상은 아주 중요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무엇보다 성서 때문이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를 보면 비전은 아주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예언자들은,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마저 비전을 보고 있다. 비전을 통해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계시하시어 당신의 뜻을 실천하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이 비전을 하느님의 계시로 확실하게 믿어 다른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등 돌리는 당시의 지배 사조에 항거할 것을 단호하게 선택하도록 것이다. 중세 시대의 신비가는 자기가 본 비전이 악마의 소행으로, 사탄의 사악한 속임수로 간주되지 않는 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경고한다. 물론 이 비전의 정당성에 관해서는 개개의 경우들마다 다 검증 받아야 하지만 말이다.

 

 


1) 비전의 유형


중세 시대에는 두 가지 유형의 비전을 볼 수 있다. 초기 중세에서 중기 중세에 이르는 시기까지는 비전 체험을 한 사람은 주로 남성들 이였다. 불현듯 지옥이나 연옥 또는 천국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수

사들이 자주 있었다. 이 놀랄만한 체험을 겪은 후 그들은 모두 완전히 새로운 삶, 아주 경건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런데 12세기 중엽, 즉 힐데가르트가 보고들은 비전을 쓰기 시작할 무렵쯤에 새로운 유형의 비전이 등장했다. 이런 비전을 본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었는데, 그녀들은 기도를 통해 비전을 체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녀들 비전의 구심점은 피안의 장소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같은 상징적 장소였다. 또 이 비전의 핵심적 내용은 특정한 사람들, 특히 예수와의 만남이었다. 그녀들은 예수를 그녀들의 신랑처럼, 그녀들 자신을 예수의 신부처럼 생각하였다. 이런 비전을 우리는 신부-신비라고 말하고 있다.

 


2) 그 외의 유명한 신비가


피안의 여행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단테(+1321)의 『신곡』이다. 단테는 그 전의 긴 문학적 전통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단테의 신곡은 문학적 허구라 할 수 있지만 그의 선구자들의 저서는 자기들의 종교적인 직접적 체험에 근거하여 집필된 것들이다. 그들이 쓴 저서들 대개는 그러나 몇몇 전문가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알고 있는 신비가들은 다음과 같다.

Elisabeth von Schoenau(+1164): 힐데가르트의 제자로 성녀 우술라 전설을 본 까닭으로 우술라 숭배를 전파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침 신비가 이다.


Joachim von Fiore(+1202): 역사를 예언가적 입장에서 해석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그의 영향력은 헤겔, 셀링 철학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보여진다.

 

 

 


 


 

사람들은 우주론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거창하다고 생각하고 과학자나 물리학자들이나 하는 짓거리로만 알고 있다. 지금까지 우주론은 주로 종교에서 다루어왔고 신화로써 우리에게 해명되었다. 창조신화라든가, 단군신화, 인디언 호피 신화 등이 마치 황당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보통 우주론은 창조와 우주진화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이다. 지금까지 창조에 대한 지식은 주로 신화나 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대표적인 신화가 성서에 등장하는 창조이야기이다. (구약 창세기 1: 1-31) 이 신화는 피라미드나 삼각형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인간중심, 신중심의 신화이다. 주로 서양의 구 우주론이었다. 갈릴레오 이전의 우주론이다. 이 우주론은 하느님은 초월하고 인간은 자연 위에 분리되었고, 그래서 인간은 지구를 정복하고,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은 물질 덩어리이고, 그것도 계층적인 사다리였다. 생명중심이 아닌 인간중심, 결국 이 우주론은 공해와 지구의 파괴, 생태계의 위기를 낳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구 우주론은 건강과 우주론을 분리하였다. 토마스 베리는 이런 우주론을 병리적인 우주론- 진보의 패러다임에 대한 중독성과 그로 인해 파생된 문화적인 자폐성-을 비판했다.


신우주론은 우주발생이다. 우주는 빅뱅으로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중이다. 유기적이면서 영적이고 과학적이면서 종교적이다. 이 우주는 단일한 에너지 사건이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는 하느님의 중요한 계시이며,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정의했다. 신비주의와 과학의 만남이다. 우주론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우주의 탄생, 발달 그리고 운명에 대한 연구이다. 현대 칼 세이건, 중세의 단테 그리고 스티븐 호킹은 위대한 우주론자 이다. 16세기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 사건에서 보듯이 종교는 과학을 추방해 버렸고, 과학은 종교를 기피해 버렸다. 이 둘 다 병들어 버린 것이다. 과학은 빅뱅이론을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지만 이 기원은 누가? 왜? 이 설명은 과학이 할 수가 없다. 우주론은 과학적이면서 종교적이다.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우리의 신우주론은 우주의 근원과 역사를 진화, 발전적, 회귀될 수 없는 우주 진화적인 과정으로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다시 우리가 색다르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건강과 우주론을 연계하고 있다.

최근에 일반인의 우주여행과 화성탐사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인식들은 우리가 태양계의 일부로 존재함을 더욱 절감하고 있다. 드디어 우주론에 대한 연구는 우선적으로 사색을 통해 탐구하는 데서 이제 경험적인 형태로 변하고 있다. 우주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우리의 믿음을 생생하게 하고 우주 안에 인간의 위치와 우주의 파노라마 안에 하느님의 위치를 신선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서구의 문제는 구 우주론의 믿음을 살면서 새로운 우주론의 지식과 인식과 동양의 우주론과 영성을 어찌할 줄을 몰라 당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교는 우주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토마스 베리의 우주신학을 들을 필요가 있다.

 

 


 

   원초의 섬광

      130억년 전:

우주가 신비의 에너지로 시작.

기원적 우주활동이 중력, 강한 핵작용, 약한 핵작용, 그리고 전자 상호작용으로 진화함.

일초의 일백만 분의 일이 지나기 전에, 입자들이 안정됨

최초의 몇 분 사이에 원시적 핵이 형성됨

우주가 투명해짐에 따라 수소와 헬륨이 발생함

은하가 탄생하기 위한 씨가 뿌려짐  

     은하와 초신성  

      100-10억년 전

우주가 은하성운들로 부서짐

원시별들 등장

최초의 요소들이 이 별들 속에서 빚어짐

최초의 초신성이 2-3세대 별들이 등장하게 함.

작은 은하들을 잡아먹음으로서 거대한 은하가 등장  

     태양계  

      50억년 전: 은하수 은하의 오리온 팔 부분에 원반형 성운이 떠돎.

46억년 전: 티아메트가 초신성이 됨.

45억년 전: 태양 탄생

45억5천만년 전: 행성 형성; 지구에 대기, 대양, 그리고 대지가 생김.

30억년 전: 달과 수성의 지질활동 동결

10억년 전: 화성의 지질활동 동결  

     살아있는 지구 (시생대)  

      40억년 전: 최초의 원시핵생물인 Aries 등장

39억년 전: 프로메테우스가 광합성 창안함.

25억년 전: 대륙이 안정됨

23억년 전: 최초의 빙하기

20억년 전: 프로스페로가 산호를 다룰 줄 알게 되어 번창함.  

     진핵생물 (원생대)  

      20억년 전: 최초의 진핵생물 세포 Vikengla가 개발됨

10억년 전: Kronos가 종속영양을 발견함

10억년 전: Sappho가 성을 통한 생식 창안함.

7억년 전: 최초의 다세포 생물인 Argos 가 등장

6억년 전: 중우주(mesocosm): 해파리, 바다조름 (sea pen), 편형동물 (flat worm)

5억7천만년 전: 캄브리아기 멸종: 종의 80-90%가 제거됨.  

     식물과 동물 (현생누대 이온)  

      고생대:

캄브리기:

5억5천만년 전: 삼엽충, 대합, 그리고 고둥에 의해 조개껍질이 개발됨.  

     오르도비스기:  

      5억1천만년 전: 척추동물

4억4천만년 전: 오르도비스기 대재앙.  

     실루리아기:  

      4억2천5백만년 전: 턱뼈가 있는 물고기 등장

4억2천5백만년 전: 카파네우스 해안으로 진출

4억1천5백만년 전; 지느러미 발생  

     데본기:  

      3억9천5백만년 전: 곤충

3억8천만년: 허파가 물고기에 등장

3억7천만년 전: 데본기 대재앙: 석송류가 목세포 개발; 최초의 나무; 척추동물 해안 진출; 수륙양서동물  

     석탄기:  

      3억5천만년 전: 침엽수에 의한 Land-worthy seeds(모르겠음.)

3억3천만년 전: 곤충들에 날개 등장

3억1천3백만년 전: 파충류 등장, land-worthy 알 (모르겠음.)  

     페름기;  

      2억5천6백만년 전: 수형류 (Therapsids), 온혈 파충류

2억4천5백만년 전: 페름기 멸종; 75-95의 모든 종이 제거됨.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2억3천5백만년 전: 공룡 등장, 꽃 분포

2억2천만년 전: 판게아 (Pangaea, 초거대 대륙) 완성

2억2천6백만년 전: 최초의 포유동물

2억1천만년 전: 대서양 탄생, 판게아 분리  

     쥬라기:  

      1억5천만년 전: 조류  

     백악기:  

      1억2천5백만년 전: 유대류 포유동물 (Marsupial mammals)

1억1천4백만년 전: 태반류 (Placental) 포유동물

7천만년 전: 영장류 등장

6천7백만년 전: 중생대 멸종.  

     신생대;  

      팔레오세 (Paleocene)

5천5백만년 전: 설치류, 박쥐, 초기 고래, 초기원숭이, 초기 말  

     에오세 (Eocene)  

      4천만년 전: 각종 포유동물 체제들 완성

3천7백만년 전: 우주로 인한 파급효과: 에오세 대재앙  

     올리고세 (Oligocene)  

      3천6백만년 전: 원숭이 (monkey)

3천5백만년 전: 초기 고양이와 개

3천만년 전: 최초의 원숭이 (ape)

2천5백만년 전: 고래가 시대를 통틀어 해양에서 가장 거대한 동물이 됨. 육식동물들이 바다로 진출하여 물개가 됨.  

     마이오세 (Miocene)  

      2천4백만년 전: 풀이 대지 전역으로 번짐

2천만년 전: Monkey와 Ape가 분리됨.

1천9백만년 전: 초기 영양(羊)

1천5백만년 전: 우주로 인한 파급효과: 마이오세 대재앙

1천2백만년 전: 긴팔원숭이 (gibbons)

1천1백만년 전: 풀 뜯어먹는 짐승 급증

1천만년 전: 오랑우탄

9백만년 전: 고릴라

8백만년 전: 현대고양이

7백만년 전: 코끼리

6백만년 전: 현대 개(dogs)  

     플라이오세 (선신세. Pliocene)  

      5백만년 전: 침팬지, 인간(hominids); 오스트랄로피테우스 아파렌시스

4백50만년 전: 현대판 낙타, 곰, 그리고 돼지

4백만년 전: 개코원숭이 (baboons)

3백70만년 전: 현대판 말(horses)

3백50만년 전: 초기 소 (cattle)

3백30만년 전: 현대 빙하기 시작

2백60만년 전: 최초의 인간 (humans): 호모하빌리스

1백80만년 전: 현대판 큰 고양이류, 들소, 양, 멧돼지  

     홍적세 (Pleistocene)  

      1백50만년 전: 수렵인: 호모 이렉투스

1백만년 전: 포유동물 절정

73만년 전: 우주로 인한 파급효과: 홍적세 대재앙

7십만년 전: 갈색 곰 (혹은 큰곰이라고도 함. 번역자주. brown bear)

65만년 전: 늑대

50만년 전: 라마

30만년 전: 원시 호모 사피엔스(이성적 인간.)

20만년 전: 동굴 곰, 염소, 현대판 소(cattle)

15만년 전: 울리 맘모스 (Wooly mammoth)

12만년 전: 살쾡이 (wildcats)

7만2천년 전: 북극 곰  

     인간 등장.  

      구석기 초반

2백60만년 전: 최초의 인간, 호모하빌리스, 석기도구

1백50만년 전: 호모이렉투스, 수렵

50만년 전: 의복, 오두막, 불, 손도끼

20만년 전: 원시 호모사피언스  

     구석기 중반  

     

10만년 전: 제례를 갖춘 매장

 

 

   

 구석기 말경

 

     

4만년 전: 현대판 호모사피언스, 언어, 오스트랄리아 점유

3만5천년 전: 아메리카 점유

 

   

 오리냐크 문화기 (Aurignacian)

 

     

3만2천년 전: 악기

 

   

 그라베트 문화기 (Gravettian)

 

     

2만년 전: 창, 화살, 활

 

   

 마들렌 문화기 (Magdalenian)

 

     

1만8천년 전: 동굴 벽화

 

 

   

 신석기 부락

 

 

     

1만2천년 전: 개 길들임

1만7백년 전: 염소와 양이 중동지역에서 길들여짐.

1만6백년 전: 중동지역에 정착 이루어짐. 보리와 밀이 중동에서 경작됨.

1만년 전: 북아메리카에서 개가 길들여짐

9천년 전: 동남 아시아에 정착이 이루어짐. 쌀 재배, 물소, 돼지, 그리고 닭이 길들여짐. 채색도자기.

8천8백년 전; 소 떼가 중동에서 길들여짐.

8천5백년 전; 아메리카에서 정착이 이루어짐. 옥수수, 호박, 고추, 콩이 경작됨. 중동에서 직조 시작

8천년 전; 중동에서 관개시설 시작. 예리고의 인구가 2천명에 도달함.

7천5백년 전; 하수나 (Hassuna) 문화, 중국 북쪽에서 조 경작

7천년 전; 카탈 후유크의 인구가 5천명에 도달

6천4백년 전; 동부 유럽에서 말이 길들여짐

5천3백년 전; 안데스에서 도자기

5천년 전; 초기 유럽인 정착, 박과 열매, 호박, 면, 아마란서스, 그리고 퀴닌이 안데스에서 재배, 낙타와 조랑말이 중동에서 길들여짐. 인도에서 코끼리가 길들여짐.

4천5백년 전; 안데스에서 땅콩 재배

3천5백년 전; 세계 인구가 5백만에서 1천만 정도에 도달함.

 

 

   

 고대 문명기

 

 

     

서기전 3천5백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 문명, 바퀴와 설형문자

서기전 3천3백년; 장기 전쟁

서기전 3천년; 이집트 나일 문명, 기술 진보

서기전 2천8백년; 인더스 강변의 인더스 계곡 문명

서기전 2천1백년; 크레타에서 미노아 문명

서기전 2천년; 유럽에서 거석 구조물

서기전 1천7백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초기의 알파벳이 기원됨. 산스크리트 어를 쓰는 아리아-베다 인들이 인도에 진입함.

서기전 1천5백25년; 중국 북쪽에 상(shang)왕조

서기전 1천2백년; 그리스 정착.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대탈출, 일신교

서기전 1천1백년; 중부 아메리카에서 올메크 문명

서기전 7백년; 호머

서기전 6백28년; 조러아스터

서기전 6백년; 그리스 철학 시작

서기전 5백60년; 중국의 공자, 인도의 부처

서기전 5백50년; 페르시아 제국

서기전 5백9년; 로마공화국 설립

서기전 4백50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서기전 3백27년; 알렉산더가 인더스 계곡 침공함

서기전 2백60년; 아쇼카왕(Asoka) 아래 인도 통일

서기전 2백21년; 진시황제 제국이 중국 통일

서기전 1백50년; Chang Ch'ien이 박트리아로 가는 경로 개척

서기전 31년; 시저대왕치하의 로마제국

서기전 4년; 예수

서기 64년; 중국에서 불교

서기 100년; 세계 인구 3억에 도달.

서기 300년; 고대 마야 문명

서기 4백10년; 로마제국 멸망

서기 6백50년; 모슬람 제국

서기 7백32년; 모슬람의 유럽진출이 프랑스에 있는 프와티에(Poitiers)에서 저지됨.

서기 800년; 유럽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 왕조 르네상스, 중세기 문명 시작

서기 9백년; 톨텍 제국

서기 9백25년; 아라비아 숫자

서기 1천년; 이슬람 학문

서기 1천95년; 십자군 원정

서기 1천2백년; 잉카 제국

서기 1천2백11년; 징기스칸 치하의 몽고제국 시작

서기 1천2백71년; 마르코 폴로 여정 시작

서기 1천3백20년; 아즈텍 제국

서기 1천3백47년; 흑사병, 유럽인구 격감

서기 1천4백33년; Cheng Ho가 인도양 페르시아 만까지의 항해 완성

서기 1천4백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제국(Osman Turk Empire)에게 멸망함

서기 1천4백92년; 콜롬버스가 아메리카로 항해함

서기 1천5백년; 세계 인구가 4억-5억에 도달함

서기 1천6백7년; 북아메리카에 영국인정착이 제임스 타운에서 시작됨.

 

 

   

 국가 등장.

 

 

     

서기 1천6백년; 영국의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설립

서기 1천6백23년; 일본 고립정책

서기 1천7백57년; 영국의 인도 지배

서기 1천7백76년; 아메리카 혁명

서기 1천7백89년; 프랑스 혁명

서기 1천8백41년;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5개 무역항 설립

서기 1천8백54년; 페리가 일본으로 하여금 서방무역에 개방케 함.

서기 1천8백84년; 유럽열강이 아프리카를 유럽식민지들로 쪼갬.

서기 1천9백14년; 제1차 세계대전

서기 1천9백17년; 공산주의가 러시아 장악

서기 1천9백19년; 국제연맹

서기 1천9백39년; 제2차 세계대전

서기 1천9백45년; 최초의 수소폭탄이 히로시마에서 폭발함. 유엔 설립

서기 1천9백82년; 세계 자연 헌장(World Charter for Nature)

서기 1천9백91년; 소련연맹 해체

서기 1천9백92년; 환경과 개발에 관한 유엔 총회

 

 

   

 현대의 계시

 

 

     

서기 1천5백43년; 코페르니쿠스 혁명

서기 1천6백9년; 케플러가 태양주변을 도는 행성들의 타원형 운동 발견

서기 1천6백9년; 갈릴레오가 자연현상 관측에 있어서 정밀한 측정을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서 경험적 관측형태를 정립함.

서기 1천6백20년; 베이컨(Bacon, Francis)이 현대학문의 실용주의 오리엔테이션을 장려함

서기 1천6백37년; 데카르트가 자연계를 다루는 수학적 형식을 정립하고 물리적 세계와 정신을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분리함.

서기 1천6백87년; 뉴턴이 우주에 대한 현대적 관점을 설명함.

서기 1천7백49년; 뷔퐁(Buffon, Georges Louis Leclerc de)이 지구의 나이에 대해 재 고찰함.

서기 1천7백50년; 린네(Carolus Linaeus)가 현대적인 생물 분류학 시스템을 마련함.

서기 1천7백55년; 칸트가 천상의 구체들과 태양계 형성 이론을 제시함.

서기 1천7백95년; 허턴(James Hutton)이 지구의 지질형성과 생명은 시간을 거슬러 추적해 볼 수 있음을 발견함.

서기 1천8백9년; 장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가 생명이 하위형태에서 고등형태로 진화하는 연속과정을 추적해 냄.

서기 1천8백27년; 뀌비에 (Baron Georges Cuvier)가 동물분류의 기초를 설정함.

서기 1천8백30년; 라이엘경(Sir Charles Lyell)이 지구의 구조를 설명해 냄.

서기 1천8백59년; 다윈이 자연의 선택 이론을 발표하고 생명의 발전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놓음.

서기 1천9백5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시간, 공간, 움직임, 물질, 그리고 에너지에 대한 우리의 기초적인 이해를 바꾸어 놓음.

서기 1천9백27년;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우리의 지식 개념을 원자 차원에서 변경시킴.

서기 1천9백29년; 허블(Edwin Hubble)이 우리가 팽창하는 우주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내 놓음.

서기 1천9백50년; 베테(Hans Albrecht Bethe)가 별이 진화한 방식을 설명해 냄.

서기 1천9백62년; 카슨(Rachel Carson)이 현대의 살충제가 자연계에 미치는 영향을 폭로함.

서기 1천9백65년: 윌슨과 펜지어스(Robert Wilson and Arno Penzias)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증거를 발견함.

 

 

 

 

 


 

우리는 새로운 우주론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비관적인 시대에 어떤 방법으로 낙관적인 전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를 절망케 하고 냉소케 하는 것들에 둘러 쌓여 있다. 상상하기 힘든 폭력과 무지와 우리에게 파멸을 안겨줄 수 있는 거대하고 무서운 암흑상태를 우리는 매일 겪고 보고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경우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소망이 있고, 사랑스런 그 무엇이 우리 안에 꿈틀거린다. 결점도 있고 실패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생존해야 할 이유와 책임감 그리고 생존해 나갈 방법을 창조할 능력이 내재되었음을 우린 믿는다.


우주론을 사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양심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육식을 문제삼는 것은 영양이나 비만의 관점이 아니다. 이 우주 안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생명체인 수백 마리의 동물들에게 잔인하고 체계적인 고통을 안겨주는 시스템을 통해 생산하는 고기를 먹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문제이다. 동물은 우리의 친구이고 그 나름대로 창조의 얼과 넋이 있다.


늘어나는 육식을 위한 식당을 보라. 채식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생명체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연민이다. 여성해방에서 동물해방이다.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과 종 차별주의에 대해 깊이 경청해야 할 것이다. 동물도 윤리의 대상으로 고려해야 한다. 고기 한 점을 먹을 때마다 동물들이 그 마지막 순간에 겪은 공포와 불안을 우리는 상상할 수가 있을까? 그런 고기를 먹었을 때 인간의 몸이 어떻게 될까?


미국병에 걸린 사람들은 존 로빈스가 지은 그 유명한 책 "음식혁명" 그리고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에릭 슬로서 의 "패스트푸드의 제국",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이 특효약이 될 것이다. 스스로 심고 만들어서 요리를 소박하게 해 먹는 것이 이 지구를 위한 식사법이고 행복하고 자연스런 삶이다. 각자 요리 책을 만들고 약초를 심고 간단하고 소박하게 채식으로 지내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병장수의 삶이다. 요리와 정원 가꾸기 혹은 텃밭 가꾸기는 기본 덕목이 될 것이다. 특히 지천에 갈려있는 약초학교를 여는 것도 좋은 대안이다. 이것은 또한 지속 가능한 생존의 도구가 될 것이다. 고작 대안이 채식이냐 하고 실망할지 모른다.


또 한가지는 걷기이다. 우주 걷기이다. 걷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메터퍼이다. 우리는 걷기를 통해서 침팬지로부터 더 진화되었다. 우리가 걸음마를 배우면서 성장하였듯이 이제 다시 걷기를 배워야 한다. 걷는 것은 기본이다. 이 기본을 망각하였다. 편리함 속에 스피드 속에 우리가 갇혀 버렸다. 모든 성인병도 기본적인 신체활동인 걷기를 거부한 데에서 발생한다. 걷는 것은 인간적이고 걸으면서 사색한다. 그리고 함께 웃고 새소리를 듣는다. 걸을 때에 우린 땅에 소속감을 느낀다. 느긋하게 걸을 때 우주의 기운을 느끼고 지혜를 찾아가는 인생의 만다라가 보일 것이다.


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변화될 필요가 있다. 이제 향은 단순한 향이 아니다. 치료와 명상으로써의 향이다. 요즈음 아로마테라피가 인기가 좋은 것은 후각만큼 직접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 향기를 맡게되면 이 향기는 limbisches System(림비세 시스템) 에 도달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흥미롭게도 분노나 기쁨, 성, 조화감, 동정, 증오, 슬픔, 도망가고 싶은 본능이나 기쁨 같은 근본적인 감정본능을 조정하는 중심부가 놓여있다.


림비세 시스템은 발생학적으로 봤을 때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성장(발육)기능을 하는 뇌의 가장 오래된 부분에 속한다. 말하자면 호흡이나, 심장기능, 생식(번식), 면역기능, 혈압, 식욕, 소화, 배설 같은 기능을 말한다.

태초에 동물과 인간은 후각에 의존하였다. 왜냐면 냄새를 맡으면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를 통하여 사냥감(먹이)의 냄새를 알 수 있었고, 날씨변화를 예견할 수 있었으며 불이 타는 방향을 감지할 수 있었으며, 성적인 파트너나 적까지 알아챌 수 있었다. 매혹적인 꽃향기가 유혹하지 않는다면 어찌 곤충들이 복숭아를 발견할 수 있으며 수컷 봄비나비들은 촉수를 통하여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암컷나비들과의 교미냄새를 맡는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수천 만 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이러한 후각기능을 상실하였다. 아토피성 피부병과 천식은 오히려 화학 약보다는 향이 좋지 않을까?


다음은 자연석(보석)을 이용한 치료법이다. 보석치료는 식생활-전환요법, 금식, 식물성 약재의 사용 등과 함께 주축을 이루는 자연치료법의 하나이다. 돌(원석(原石))과 보석이 갖는 마법의 효능을 이용한 민속요법은 이미 고대로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보석은 인간사의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마법용, 치료용, 호신용, 부적 또는 주물로 사용되어 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자스피스(벽옥), 경주 신라시대에는 옥석, 에메랄드 또는 크리소프라스 등의 보석이 의식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심지어는 신이 보석에서 태어난 것으로 믿기도 했다.


이렇듯 자연석을 통한 치료의 역사가 인류발달의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질병치료의 효과에 대해서는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트 만큼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또 실험해 본 사람은 없었다. 오늘날 보석치료는 힐데가르트-의학의 중요한 요소인 한편, 대안의학의 인기 있는 한 분야이기도 하다. 약 20가지의 보석과 준보석을 중심으로 치료법은 설명되어진다. 그 중에는 다이아몬드나 에메랄드 또는 루비 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석들도 있다.


성녀 힐데가르트는 보석을 구체적인 질병 치료에 사용하였다. 보석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성분을 지니고 있어 이를 통해 치료효과를 발하고 그 다음에 착용자 신체내의 에너지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힐데가르트의 인식은 그녀의 서술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보석의 에너지 파장(波長)은 피부와의 접촉을 통해 착용자의 에너지(氣) 흐름에 작용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보석은 부정적인 힘 또는 에너지에 대항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보석의 치료효과는 일종의 에너지-장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즉 보석의 에너지가 만드는 장이 인간의 생명에너지를 감싸고 신체의 모든 부분에 그 파장을 전달하여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고, 결함이 있는 부분은 치유해주는 것이다.


보석은 그 색깔을 통해서도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이는 특히 신체-아우라(Aura Soma)와 색(色)-치료(Theraphie)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색이란 기본적이며 총체적인 체험이다: 화가 나서 얼굴이 뻘게진다던가 질투로 새파랗게 된다던가 하는 표현은 이미 물리학에서 말하는 훨씬 그 이상의 것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색을 이용하는 하는 치료의 효과도 새로운 게 아니다. 색 치료는 의학에서도 아직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알레르기, 만성질병, 정신질환적인 병들을 성공적으로 치료하는 그런 효과를 내고있다.


오관을 통한 지구체험이며 우주체험이다. 맛, 냄새, 시각, 촉각을 열고 자신의 존재의 핵에 들어갈 때 우주의 핵도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는 청각이다. 소리를 통한 체험이다. 명상음악을 통해 마음의 본향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 늘고 있는 이유는 우리 주위에 고요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차 공해, 휴대폰 등등 고요함이 없다. 불교의 범패, 그레고리안 성가, 힐데가르트 음악은 명상음악의 원조이다. 소리를 통한 치료는 자연의 에너지와 인간 사이의 조율을 염두에 둔다.


이제 건강은 단순히 보신하는 것은 아니다. 잘먹고 비싼 영양을 취하는 정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인간 중심적이다. 특히 육식의 문제가 그러하다. 건강이란 개념도 질병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다. 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예방으로서의 지구와 관계를 증진시키는 일이다. 인간건강의 목적으로 지구를 착취하는 일은 결국 인간을 병들게 만들 것이다. 우린 유기체인 지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관을 열고 다시 우주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이 우주 안에는 우연히 일어난 것도 없고 우연히 생긴 것도 없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돌이 우주를 들어 올리며 나를 들어 올린다. 마른 나무 가지 안에도 잠자는 불이 들어 있다.

 

 


 

난 이 우주에 원죄의 피가 흐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이 피가 흐른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은하수와 태양계 그리고 물이 존재하는 이 지구가 탄생했을까? 우린 이 우주를 신령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때문에 바위에도 나무에도 물 한 사발에도 우리 조상들은 빌고 또 빌었다. 그들이 현대 물리학이나 과학적 진화론을 알 리가 만무하다. 이 우주는 힘이 있고 선하고 넘치는 에너지와 진화와 창조의 힘이 있다고 브리이언 스윔은 우리에게 말한다.. 이 우주가 악하다면 공룡의 멸망으로 끝장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공룡이 사라진 다음의 새의 진화로 공룡은 우리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숲에 별 기운을 뿌리는 7000 마리의 새와 800000 마리의 다른 곤충들, 40000 마리의 척추동물들이 어떻게 탄생했을까? DNA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명탄생의 조건인 물, 탄소, 에너지의 흐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과연 이 우주가 죄 많고 악하고 악마적인 요소가 있다면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에 내재된 life form과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 안에 있는 의식의 축제가 이루어질 수가 있었을까? 우리가 이 우주 안에서 체험하는 폭력과 두려움 그리고 상실과 죽음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이 우주야말로 기본 달력이고, 리듬이고, 원성사이다. 이 우주는 우리의 기본 만다라이다.


흔히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지 표지로 통해서 구원을 가져 주는 것들이라고 정의한다. 문제는 초월 ( 보이지 않는 것) 과 내재 ( 보이지는 것)를 구분한 것이다. 초월과 내재를 분리시켰다. 내재는 악하고 죄 많고 신령하지 않고, 영성이 없다고 단죄해 버렸다. 초월에 비추임을 받아서만 내재는 의미가 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초월과 내재가 하나라고 믿었다. 이 우주는 신령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범신론이든, 인격신이든, 자연신이든, 유일신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현대 우주론이 밝힌 것처럼 모든 물질에 주체와 개성 그리고 통교로 우주에 참여한다면 구태여 구원을 받기 위해서 7 가지 은혜만 받아야 하는가? 그것도 일생의 한 두 번 말이다. 칼 라너 라는 신학자조차도 구원 따로 은총 따로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일상의 성사이다. 일상에서 우린 아우라를 체험할 수 있고, 초월성과 신성를 느낄 수 있다. 옛날처럼 특별한 성인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성인이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신비주의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신비주의자이다.


성사론은 죄의 문제이다. 인간은 원죄로 사악하고 죄 많기 때문에 성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죄과에 집중하는 경건성은 12세기 힐데가르트 시대에서 서서히 전염되기 시작했다. 성사란 미사 때에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성사는 매일 매일의 축제이다. 삼라만상 안에 존재하는 신령한 기운, 그 내면성, 역사와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 우주리듬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이 성사라고 생각한다. 이 우주가 가장 기본 성사라면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사이다. 삼라만상이 성사이다. 규소와 석회도, 꽃도, 별 기운을 모으는 나무도 그리고 지렁이도 성사이다. 7 가지가 아니라 수천 가지 그리고 이 우주가 탄생한 그때부터 성사가 시작되었다. 이 우주는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대로 생각을 가지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하나 씩 하나 씩 진화시켰다. 척추동물의 역사가 그러하다. 은하수도 성사이고 보이는 모든 것, 인간 그리고 인간을 넘어서 인간 아닌 모든 것이 성사이다.


사물 안에 살아 움직이는 기를 느끼는 것 한마디로 자연 은총이다. pagan이야말로 성사이다. 자연이야말로 은총이다. 창조야말로 은총이다. 라틴어 은총이라는 단어 gratia라는 말은 thanks라는 말이다. 영어의 은총이라는 단어 grace는 graceful 즉 감사라는 말이다. 은총의식은 창조된 것에 대한 감사이다. 14세기의 마이스터 엨가르트는 아주 단순하게 " 자연은 은총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의 문제는, 현대의 모든 프로젝트는 과거의 신 중심이거나 왕 중심시대의 다이야몬드나 피라밋처럼 맨 꼭대기에 새로운 신과 왕인 개인주의을 놓고 제 3세계와 자연을 새로운 식민지를 구축한 것이다. 그것이 윂패드 기술이든지 WTO나 IMF나 NAFTA, 자유시장이나 쑈핑 몰이든지 간에 새로운 식민주의, 새로운 피라밋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피라밋을 교회도, 교육도, 경제도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가 기본 성사인 것이다. 과연 서양의 그리스교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그렇다면 pagan 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에라도 가야한다. 하느님은 인간만을 구원하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물질덩어리(stuff) 자체로 보면 자연은 더욱 황폐해져 갈 수 밖 에 없다. 은총과 자연의 분리가 이런 세상으로 만들어간 것이다. 자연의 초월성과 신령한 기운과 내면성을 배척해 버린 결과이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기술에서 첨단 과학에서, 컴퓨터 게임, 비데오 사운드, SF 영화, 사이비 아트, 디지털 영상, 자동차에서 그들이 잃어버린 아우라를 찾고 구축하려는 같다.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현대화된 맨하튼 42가를 찾는 것은 그런 것들이, 사이비 신비주의들이 복합적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누가 자연과 은총의 분리를 조장했는가? pagan 영성이 그랬는가? pagan 즉 쌍것 영성은 은총과 자연, 창조와 감사를 분리하지 않았다. 문제는 서구신학이다. 4 세기에 성 아오스딩은 우리에게 원죄라는 용어를 주었을 뿐 아니라 은총으로부터 자연을 분리시켰다. 은총은 저 위에서, 자연은 저 밑으로 이 이원론은 서양 종교에 거의 1600년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은총과 자연의 분리는 결국 자연파괴 즉 모친살해로 이어졌다. 생태학적 위기의 뿌리는 은총으로부터 자연의 분리이다. 이러한 분리는 마침내 은총의 위기로 나아갔다. 인간중심주의 제도적인 교회는 성직계급에 의해서 은총을 배급하고 뿌리는 은총 배급의 신학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중세의 마녀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된다. 그런데 세계 최대의 종파인 가톨릭과 대부분 서유럽의 개신교 발상지인 유럽인들이 신앙에 등을 돌림에 따라 교회나 성당이 갈수록 텅 비어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은총론의 위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위기는 교회의 위기이다. 교회는 교회가 지구의 교회가 되도록, 새로운 우주 이야기를 교회를 해석해 주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된다. 새로운 언어, 상징, 전례들을 개발해야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노력하는 생태영성은 자연과 은총을 다시 하나로 연결하려는 작업이다. 12세기의 힐데가르트, 13세기 초에 프란치스꼬, 14 세기의 엨가르트의 영성은 아오스딩의 은총론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작업을 20세기말에 하신 분이 떼이야르 사르뎅신부이다. . 자연과 은총의 분리는 결국 생태계의 위기를 야기시켰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은총으로부터 자연의 분리를 만든 신학이 생태계 위기의 기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위기에 처한 그리스교 영성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은총론의 위기라고 본다. 이 위기는 초월의 위기이며, 신비의 위기이다. 제도적인 교회의 위기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 창조에 대한 실수는 그 결과 신에 대한 실수로 귀착된다 " 고 말했다. 누군가가 신을 한 쪽으로만 몰아 부셨다. pagan 영성이 과연 우리에게 균형을 잡아 줄 수 있고 병든 서양문화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은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은총은 선물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축복이고 그리고 원복이다. 누가 이 우주를 우리에게 주었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가? 원 은총은 무엇인가? 130억 년에 탄생한 이 우주, 이 속에 심겨진 음양의 법칙은 선물이고 감사이다. 은총의식은 감사의식이다. 감사함은 이 우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응답이다. 영어로 graceful, thankful, beautiful 의미는 서로 통한다고 본다. 이 응답이 무엇인가 ? 춤이고 노래이다. 은총에 대한 응답은 축제이고 전례이고 찬가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새로운 전례이다. 서양의 전례는 죽어있다. 죄와 구원으로 행한 인간중심주의 전례이니 사람들의 마음에 닿아 오지 못한다.


자연이 은총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찬미가는 그 힘을 잃었다. 신령이 없고 신명이 없다. 인간의 죄는 은총을 모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찬미가 아니라 한탄이고 속죄의 노래이고 죄인의 노래이다. 현대의 서양노래는 디지털 같은 대중복제예술이나 퇴폐적 감각주의이다. 예술에는 얼이 없는 듯 하다. 예들 들어 우드스톡 축제는 얼이 담겨 있지 않다. 공자는 " 인간은 시로써 일어나고 예로써 서며 음악으로 완성된다" 고 말했다.


미사와 우리 나라 굿이라든가 탈춤의 마당 판과 비교해 보면 이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미사는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다. 고딕식 사각형의 구조이다. 초월적 은총론 때문에 눈은 앞이나 위를 향한다. 앞의 신자들을 보고 사제는 혼자서 미사를 지내면서. 여러 사람을 상대한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평화의 인사를 빼고는 서로 볼 수도 없다. 귀족주의이거나 엘리트주의이다. 야외미사를 제외하고는 하늘과 땅, 안팎을 볼 수도 없고 일방으로 미사를 보고 지낸다. 마치 극장식구조이다. 연극이든 영화이든 오페라든 마찬가지이다. 모니타나 컴퓨터 스크린을 마치 혼자서 두둘기는 사람처럼 그런 구조가 미사이다. 이것은 바로 죄와 은총 그리고 성사론의 구조에서 나온다.


그러나 흑인 영가에는 얼이 있고 사람을 뭉치게 하는 힘이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춤을 출 때 혼자서 춤을 추는 일은 절대 없다. 여럿이 함께 모여 음악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하나의 음악에 춤은 가지가지이다. 독창을 하는 일은 없다. 여럿이 장단을 맞추고 선창이 있으면 후창이 따라 나온다. 음악은 하나인데 춤을 멋대로 이다. 난장판은 무질서의 질서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춤 마당에 나와서는 추장이나 평민이나 남녀노소, 위아래 구분 없이 춤을 춘다. 그리하여 일체감을 느낀다. 서양의 이원론적 구조에서는 이런 축제가 나올 수가 없다. 아프리카 사람은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일원적인 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춤을 추는 축제를 통하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20 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춤을 추는 몸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춤을 출 때 발목, 어깨 , 엉덩이에 나무 열매와 조개 껍질을 달고 춘다. 그래서 춤은 우주를 닮아 있다. 춤은 우주의 춤을 재현하고 있다. 악기도 자연에서 나온다. 바가지, 조개 껍질, 돌, 동물의 뿔이나 가죽, 나무 열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영국의 캠브리치 대학의 생화학교수인 루퍼트 쉐드락은 은총을 열림, 관계, 축복으로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굿판을 체험해 보면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굿판이 익으면 주체와 객체, 앞과 뒤,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사라진다. 난장판이 된다 구조는 극장식이 아닌 원이나 마당이다. 눈은 앞이나 하늘 위만 아니라 서로 향한다. 우리의 몸은 온갖 춤사위로 우주적 에너지로 가득찬다. 루퍼트는 지적하기를 한마디로 형태 공명(morphic resonance)의 장을 이룬다고 말한다. 은총의 대한 우리의 응답은 가슴을 쥐어뜯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굿판처럼 마당 판처럼 시너지가 일어나는 전례이다. 영혼만이 아니다. 몸으로, 오감으로 온 몸과 온 영혼으로 동서남북, 너와 나, 주체와 객체, 하늘과 땅 그리고 마당에 개나 소, 밤하늘의 별, 인간과 비인간이 모드 활짝 열리고, 분리를 극복하는 그리하여 감동, 탈아, 협동, 통합, 창조성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실존적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새 은총론에 입각한 전례의 모습인 것이다. 축제로써의 전례를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는 참으로 중요한 도전이고 과제이다.


우주론이 요청된다. 모든 것은 은총이고 선물이다는 우주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은 범재은총이다. 물방울도 은총이고 무기물도 은총이다. 자연과 분리된 은총을, 다시 자연도 은총임을 불러오는 것이다. 자연은 은총이다. 이러한 은총론은 죄나 악, 고통과 속죄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정 반대이다. 아프리카인들이 슬플 때에도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처럼, 한 많은 사람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처럼, 번뇌 속에 피는 우담바라 같은 우주꽃처럼 우리 한국인은 가장 슬플 때 웃었던 것처럼 죄보다 은총이 우선한다.







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 정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