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생활과 애덕(정무웅 신부님) ★영 성 4. 애덕과 계명 그리고 복음적 권고

은가루리나 2017. 5. 15. 08:37


Ⅱ. 합일과 애덕



애덕은 광의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사랑 속에 머무르는 상태이며 

협의로는 대신덕의 하나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또는 그분을 사랑하는 습관적 성향으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요한 14,15~16).


애덕이 행위로 드러날 때는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행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대상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일치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3. 애덕의 이중성



애덕의 완성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情). 

그리고 그 사랑의 충동에 의해 실천으로 나타난다. 


계명을 지키되  먼저 향주덕의 충동을 받아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실천적 사랑으로 열매 맺는 애덕 행위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 따른다. 




4. 애덕과 계명 그리고 복음적 권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덕은  

대신덕에 의한 계명 준수와  윤리덕에 의한 복음적 권고로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한다. 

완덕은 계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반드시 애덕으로 계명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서에서도  애덕에 의한 계명 준수의 중요성을 

“하느님을 사랑하라”(신명 6,5)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19,18)는 말씀을 합쳐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글은 이 두 계명에 달렸다”(미래 22,40)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웃 사랑을 하되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도록.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애덕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온전하게 결합시킨다. 

그리고 애덕은 모든 덕의 형상적 원리이자 감독자로서  완덕의 본질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완덕이 사랑의 계명, 

즉 애덕에 의한 계명 준수로써 이뤄진다는 이 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애덕 없는 계명 준수는  인간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며 

오히려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율법의 노예에서 구원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써 이루어지는데 (로마 4,24).

세례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는 애덕의 힘을 갖게 되어 

이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도  억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나 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이 주신 애덕으로 계명을 지키면 

자연히 자발적이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수계 생활을 할 수 있기에 

내적으로 기쁨과 평화가 충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초기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약하여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인간적 노력이 요구되지만, 

차츰 애덕이 성장하면서  자발적이며 기쁜 마음으로 이를 지키게 된다. 


이런 모습은 많은 성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편  완덕은 도구적으로는 복음적 권(청빈․정결․순명)에 있다. 

권고는 애덕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준다. 

즉 대신덕에 의한 계명 준수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피하게 해주는 도구로서 

궁극적으로는 애덕을 지향한다.


그러나

“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신명 6,5)는 마음을 지니고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실천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현세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계명 준수는 가능하다. 

여기에서 복음적 권고의 필요성이 나온다. 

완덕은  이차적으로는 

애덕에 확실하게 장애가 되는 것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복음적 권고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가난은 계명 준수를 방해하는 무질서한 소유욕에서 해방시켜 주는 도구이며, 

순명은 무질서한 지배욕에서 해방시켜 주며, 

정결은 무질서한 성욕에서 해방시켜 준다. 

여기서 무질서한 욕망이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만을 무작정 고집하려는 경향성을 말한다.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권고를 따라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장애물 제거는 자기 자신을 끊는 이탈과 포기의 행위로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끊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마태 16,24)

는 말씀과 같이 

애덕에 의한 계명과 함께 권고가 , 완덕에 나아가는 길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예수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끊어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피조물로부터의 이탈인 권고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집중하게 하는데 필요한 도구적 요소이며 

계명을 지키는 데 방해되는 것을 제거해 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합일에의 훌륭한 길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적 완덕은  

본질적으로는 애덕에 의한 계명 준수와  

도구적으로는 복음적 권고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완덕에로의 길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 되어라”(마태 5,48)와 같이 

세례 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보편적인 부르심이며 의무이다.


이와 같은 대신덕에 의한 계명 준수와 권고를 강하게 실천할수록 

성령의 은혜가 영혼에게 더욱 많이 전달되며 

이때 성령은 애덕을 더욱 활발히 완성시켜 나간다. 

왜냐하면 성령은 

애덕으로 하여금 더욱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하느님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향주덕으로 닦여져 맑을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많이 지닐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비춰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내리시는 까닭이니 

사랑이야말로 은혜가 오게 하는 길이요 원인이다”(산길Ⅱ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