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Re 영성생활과 애덕(정무웅 신부님) ★영 성

은가루리나 2017. 5. 4. 18:40


I. 들어가는 말


인류 역사는 탐욕과 갈등의 역사이다.

탐욕과 갈등의 원인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갈등의 분열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의 모든 불안과 절망의 궁극적이고도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하느님을 다시 찾아 화해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신약에 와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거처하시는 분이 되었으며 

그분의 현존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는 그분의 궁전이 되었다



동시에 우리를 당신 모습과 같이 변화시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감정과 지성 의지를  당신의 뜻에 맞추어 사는 존재가 되도록 하셨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만남이고 합일이다.





Ⅱ. 합일과 애덕


애덕은 광의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사랑 속에 머무르는 상태이며 

협의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또는 그분을 사랑하는 습관적 성향으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1. 사랑의 본질


하느님은 인간이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을 베푸시는데 

이 신적 사랑에 대한 응답이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 즉 애덕이다.


이 모두의 ★주도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 모두의 주도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전자는  하느님 자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고, 

후자는  ★하느님이 인간을 움직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세례 때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성화 은총에는 애덕이 함께 주어지는데 

이 애덕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을 목적으로 한다.



2. 애덕과 자연덕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하느님이 행위자이고  후자는 인간이 행위자이며

후자, 인간적인 행위로 이끌어 주는 덕이 자연 윤리덕이다.


애덕은 모든 덕의 형상으로서 

그 자연덕들의 행위를 명령하고  그들을 궁극적 초자연적 목적에로 이끌어 가며 

그 행위자는 하느님이다. 


자연덕이 애덕과 함께 있을 때 초자연적 덕이 된다.


초자연덕은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 감성과 자연적 매력 때문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자연덕에 애덕이 첨가되면  초자연적 덕이 되고, 

자연적 사랑에 애덕이 첨가되면 초자연적 사랑이 된다. 

그러므로  애덕은 모든 덕의 형상적 원리이며 

이 애덕의 동기는 하느님의 무한한 선성이다.




3. 애덕의 이중성


애덕에는 정(情)의 사랑과 실천적 사랑이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동으로 이어질 때  사랑은 완성된다. 

따라서 행동을 통해 그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실천적 사랑으로 열매 맺는 애덕 행위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 따른다. 



특은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로서 

받는 당사자의 혜택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선익을 위해 

즉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기 위해’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하느님과 일치시키기 위해 공동체에 주신 것이다. 


따라서 애덕 없는 특은의 사용은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거나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쓰일 수 있기에 

애덕 없는 특은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4. 애덕과 계명 그리고 복음적 권고


완덕은 계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반드시 애덕으로 계명을 실천하여야 한다


애덕 없는 계명 준수는  인간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며 

오히려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율법의 노예에서 구원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세례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는 애덕의 힘을 갖게 되어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도  억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나 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마목정의 마음을 지니고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실천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현세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계명 준수는 가능하다. 



예수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끊어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피조물로부터의 이탈인 권고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집중하게 하는데 필요한 도구적 요소이며 

계명을 지키는 데 방해되는 것을 제거해 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합일에의 훌륭한 길인 것이다. 



완덕에로의 길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 되어라”와 같이 

세례 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보편적인 부르심이며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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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애덕과 정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되는 피조물에 대한 이탈과 포기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탈과 포기인 정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충만하게 하는 기도를 통해 완성되므로 

정화와 기도는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1. 정화와 기도


마목정에 대한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사랑은 

우리를 유혹하는 감각적인 피조물에 대한 집착과 애착으로부터 이탈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과 피조물(주인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주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재물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물 자체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이탈이다. 

이것이 곧 정화이다.


계명 실천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의 부족 때문이다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이다. 



피조물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맛과 그에 대한 애착을 끊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욕에서 해방되고 마음이 고요해지며, 

이렇게 비워진 마음 안에 비로소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영혼의 능력에는 지성과 기억과 의지가 있는데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이 능력들을 정화시키는 것이며, 

이때 인간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인 의지는 애덕에 의해 정화된다.



인간의 의지ㆍ욕구ㆍ뜻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피조물을 사랑하기를 중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인 의지를 오롯이 하느님께만 집중시킴으로 

순수하게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도록 

피조물 자체에 대한 모든 애착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2. 정화의 수덕적인 면


정화의 수덕적인 면이란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영혼 자신이 주도적으로 

피조물에 대한 모든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이탈을 실천하는 능동적 정화를 말하며, 

이런 비움은 하느님과 합일을 목적으로 한다.




1) 감각의 능동적 정화


무질서한 맛에 대한 전적인 이탈과 포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따름


예수의 모습을 닮으려면  예수가 그렇게 했듯이 

우리도 아버지께 대한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자신의 뜻을 포기해야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따름은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삶이며, 

그러기에 대덕은 정화의 원천이 된다.



-감각들의 정화


-자연욕들에 대한 정화


-자애심으로부터 정화


하느님과의 합일은 

자신을 위해 어느 하나도 남김이 없는 완전한 포기를 요구한다. 




2) 영혼의 능동적 정화


영혼을 정화한다는 것은 이 기능들로 하여금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관심을 돌려 

이제는 온통 하느님께 집중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화는 신덕․망덕․애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성은 신덕을 통해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고, 

기억은 망덕을 통해 하느님만을 원하게 되며, 

의지는 애덕을 통해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의 정화는 신망애 3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성의 정화


지성의 정화는 지성이 하느님을 인식하기 위해 

지금까지 습득한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신덕이 하느님께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만이 인간의 논리적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다.


지성은 신덕을 통해 정화되어 하느님을 직관하게 된다.




기억의 밤


기억의 정화는 망덕의 훈련을 통해서 완성된다. 

다른 모든 인식에 대한 기억을 비우고 

무한히 사랑스럽고도 행복한 하느님께 대한 기억을 우리 영혼에 채움으로써 

우리 안에 하느님을 향한 강력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기대와 바람을 기억 안에 가득 채우려면 

잡다한 모든 기억들을 비워야 한다.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기억의 정화를 통해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열망이 생긴다.




의지의 정화


의지를 정화시키는 것은 

하느님과 피조물 중 피조물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것


의지가 정화되어 

세상의 그 어떤 복락도 거부하고  하느님만을 오로지 사랑하게 되는 영혼은 

그의 사랑이 극에 달하여 

형제 안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고, 

하느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사랑하셨던  바로 그 선성으로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고, 

우리의 행복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이 자체로 존경과 사랑을 받으실 분이기에  당신을 사랑 할 수 있고,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뜻, 의지를 실천함으로써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


애덕에 의해 정화된 영혼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들 안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기쁨과 그분의 영광만을 찾게 되고 

이로써 하느님과 합일에 이르게 한다




3. 정화의 신비적인 면



1) 감각의 수동적 정화


1) 감각의 수동적 정화

감각의 수동적 정화란, 

영혼이 피조물에 대한 모든 애착을 스스로 정화시키고 

오로지 믿음 안에서만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실천할 때, 

하느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당신 친히 영혼을 정회시키러 오시어, 

영혼을 매우 고통스런 상태에 빠뜨려  인내력을 가혹하게 시험하는 

깊고 집요한, 무미건조한 상태를 말한다.



2) 주부적 관상

하느님께서 무미건조함을 통해 영혼을 인도하시는 것


3) 영의 수동적 정화


자신이 영 안에서만은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 받고 있다는 
위안적 의식 안에서 
평화와 위로를 느끼고 있었다. 

이에 하느님은 그 안에 안주하려는 영혼에게 
하느님 외에는 어떤 것에도 사랑을 두지 못하도록 
일말의 애착조차 모두 끊어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 받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한 의식마저 영혼에게서 빼앗아 버림으로 
그 영혼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위로마저 제거시켜 
순수하게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하기 위한 참기 어려운 고통을 허락한다.

영의 수동적 밤은 주부적(注賦的) 관상 안에서 일어나며, 
감각의 밤을 통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정화를 완성시키는 시기이며 
참기 어려운 고통이 동반되는 극히 고통스런 시기이다.



4.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


완덕이란 비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을 십자가의 성 요한은 무(Nada)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무(Nada)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과 합일에 이른다. 

그런데 이 무(Nada)는 하느님을 모셔드리기 위한 비움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피조물로부터 이탈인 무(Nada)는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한 비움이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비움이다.


자신의 포기는 하느님 사랑의 외적 표출이며 

하느님이 인간 영혼 안에 거주하시기 위한 필연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자연히 애덕을 통해 

그 안에 그리스도의 채움(Pleroma)이 이루어진다. 


즉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무(Nada)를 만들고 

이 비움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성을 드러내며 

이 부움에 의해 완전한합일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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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결어


채움이 목적이라면 비움은 수단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비움이 목적이라면 

가톨릭은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비움을 말한다. 


완전한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해서는 

자신 안에 한 점의 티끌이나 애착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로 채워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 성 요한이 말하는 정화란 

비움과 함께 동시에 애덕이 증가하는 장소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망은 

그만큼 피조물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비움을 전제로 함으로써 

비움과 애덕은 동시에 일어나는 정화 안에서의 현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