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거룩한 위탁>의 원저자(原著者)의 약력(略歷)

은가루리나 2017. 9. 14. 23:08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241 추천 0  2014.05.16. 19:29



원저자(原著者)의 약력(略歷)



「거룩한 위탁」의 저자인 「동.비딸.러오데」(Dom Vital Lehodey)신부는,

「트라피스트」수도원의 모원(母院)인,

「프랑스」「망슈」의 「브리게벡」(Briquebec)에 있는 

「은총의 성모의 수도원」의 전 대원장이며, 

50여년의 수도생활을 마치고, 지난 1948년 5월6일 예수 승천 대축일에 영면하였다,

그의 약력을 추려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1857년 12월17일 

「프랑스」의 「함비」(Hambye)에서 태어나 이튿날 영세하였다.

그가 소속하고 있던 교구는 6세기 이래,

성「분도」의 계율(戒律)을 지키는 수도생활이 한창 융성하고 있던,

참으로 그리스도교적 교구로서,

그는 그러한 교구에 태어난 것을 깊이 감사하고,

어린 시절의 추억의 하나로서,

매일 목격한 대미사와 만과(晩課)에는 

초만원을 이루는 참배자가 있었던 감명 깊은 인상을 들고 있다.


양친은 신앙이 두터운 사람이었는데, 가난한 집안이었다.

그가 네살 6개월 무렵 부친을 여의고, 두 형도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 밖에 없는 누이도 부친의 사후 몇달만에 사망하였다.

여덟살을 위로 세 아들을 돌봐야 할 모친은 

나날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굳센 여성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세 유아(幼兒)를 거느리고,

굳건히 궁핍과 피로를 극복하여 양육하였다.


그 견고한 신심은 유아의 눈에도 감명 깊은 것이었으며,

그 우아한 사랑도 자신의 자녀를 응석부리게 하지는 않았다.

그 강유겸전(剛柔兼全)한 가정교육은, 그의 올바른 성격을 형성하는 위에,

천주에 관하여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그의 집안은 끼니를 메꿀 수 없을 정도로 극빈하지는 않았지만,

한푼의 낭비도 허용되지 않는 여유 없는 생활이었다.


그는 동심(童心)에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곤 하였는데,

아직 청빈(淸貧)의 은혜를 모르는 시대로서는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훗날 겸손을 배우고 천대(賤待)을 사랑하며,

가난한 이에게 동정을 품게 되고,  

수도생활의 어려움에 견디기 위한 천주의 섭리적인 계획이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쉬이 천주께 생각을 향하게 하는 습관을 지닐 수 있었다.

일찌기 천주만을 바라는 마음에 지배되고 있었다.

공부를 좋아했지만, 특별히 교리와 복음서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였다.

집에 있었던 「프랑스」어 역 성경과 이웃 사람에게서 빌린 성인전은

특히 어린 시절의 그의 애독서였다.


1869년 7월, 열두살 때 첫 영성체를 하고, 깊은 감명과 인상을 받았다.

그후 축일마다 영성체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이듬해인 1870년 초에, 주임사제인 「기르강」신부는 

어린 그의 마음에 싹튼 성직에의 등경을 알아채고,

또는 그의 적성(適性)도 인정하여 「라띤」어 교수를 시작하였고,

격무(激務) 중에도 참된 아버지와 스승이 되어, 

그의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후일, 

이 착한 지도자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지녔으며,

그 사제없이는 성소(聖召)에 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1871년 11월에 「모르땅」의 소신학교 4학년에 편입되었다.

그의 재학은 1876년 6월까지 계속되었는데,

「빵보다도 굵직굵직한 바위밑둥이 많은 촌락」이라고 흔히 불리운

이 거암(巨巖), 삼림(森林), 「히이스」의 황무지(荒蕪地), 폭포(瀑布)들을 겸비하고 있는

장려(壯麗)한 자연의 대「파노라마」는 

그의 마음에 일찍기 고독은둔(孤獨隱遁)에의 사랑을 품게 하였다.


더우기 그 소신학교는 

성「비딸」이 그 누이인 성녀「아드리아나」를 위하여 건설한

「브란슈」대 수도원 안에서 경영되었고,

촌락에서 떨어진 큰 폭포수가 요란한 소리를 내려 부딪치는 거암(巨巖)이 솟아 있는 등,

한폭의 그림과 같은 선경(仙境)을 이루는 적막하고 고독한 환경에 싸여 있었다.


이어 대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직에 고유한 연학(硏學)에 몰두했는데,

그것은 훌륭한 「까떼드랄」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이며,

(이것은 「도민고」회 수도자의 기도소였다)

경건한 교사의 지도아래 거룩한 학문에 면려하였다.

4년간의 재학시대는, 그의 생애중 가장 훌륭한 부분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1876년 성탄 대축일에 사제복(司祭服)을 입었다.

그의 신품의 하품(下品)을 제외하고 

상품(上品)은 모두 항상 이 예수 성탄 축일에 받았다.

1880년 12월 18일,

영세한지 23회째의 기념일에 그는 거룩한 사제성품을 받고,

첫 미사를 주의 성탄 대축일에 봉헌하였다.


「모르땅」소신학교장인「지로」신부에게 면회하러 간 것은 

첫 미사 후 며칠만이었는데,

그는 거기서 6년 반 나머지의 날을 보좌신부로서 지냈다.

그 후 

성 「바오로.글란비르」의 성당에 임명되어 3년 동안 사목(司牧)을 맡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에 10년간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 동안 이미 수도생활에의 강한 희망이, 자신의 구령을 보다 안전하게 하고,

자신을 성화(聖化)하려는 희망과 더불어 그의 마음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전에 읽은 바 있는 「달레」신부의 「교회전사」(敎會全史) 가운데의 

11.12세기에 있어서의 수도생활의 혁신(革新)에 관한 기사(記事)가 

그로 하여금 이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하는데 힘이 되었다.


특히 성 「비딸」의 생애는 그에게 큰 감화를 주었는데,

그는 후일 이 성인을 자기 수도생활의 보호성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직 천주의 성의(聖意)는 명백하지 않았다.


성「바오로.글란비르」에 있어서의 마지막 해에

그의 숙원(宿願)은 천주의 명백한 소리로서 그의 마음에 울렸다.

이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그러나 강력한 동경(憧憬)은 도처에,

고해소 안에까지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이제야 주의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를 신중하게 규명하여

확정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는 천주의 성의(聖意)를 알 수 있는 하나의 표적을 간구하였다.

그리하여  성소(聖召)의 내적(內的)인 소리는 더욱 더 명백해져 갔다.


그래서, 그는 어떤 수도생활을 택할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성「분도」회냐, 「트라피스트」회냐, 그는 두 수도회를 찾아가 알아봤다.

성「분도」회는 연학(硏學)의 생활의 매력으로써「로오데」신부의 마음을 끌었으나,

「트라피스트」는 엄격한 생활과 성「분도」의 계율(戒律)의 완전한 준수(遵守)가

한층 신부의 마음을 매혹하였다.


그는 서슴치 않고 후자를 택하였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신부는 부랴부랴 「브리게벡」의 「은총의 성모의 수도원」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수도원에 가까이 가면서 그는 거룩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으며,

스스로 성인이 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은

더구나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주여, 당신께서 나에게 50년의 수도생활을 하게 하신다면,

나는 반드시 성인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속삭였다.



그가 수도원에 도착한 것은 1890년 7월 25일이었다.

객실에서 3일간을 지내고서, 28일에 원내(院內)에 들어갔다.

다음 달 성모 몽소승천 축일에 「거룩한 생활의 의복」을 받고,

성모의 보호 아래 수련기(修鍊期)를 시작하였다.


열심한 수련을 마치고, 1892년 8월20일 성「벨라도」축일에 규정(規定)된

단식유기서원(單式有期誓願)을 발하였다.

서원을 발한 이튿날, 대원장(大院長)인 「제르망」신부는

새로운 서원자인 그를 부원장(副院長)으로 임명하고,

수사와 손님들의 고해신부로 삼았다.


1년 2개월 후, 즉 1893년 10월 19일, 대원장「제르망」신부가 서거하였는데,

그 장례식이 끝난 이튿날, 그는 임시원장(臨時院長)으로 지명되었다.


수련자로부터 바로 임시원장에!

그는 자신의 영적교양(靈的敎養)을 완성할 필요를 느껴, 

대품(大品)을 받았을 무렵부터 이미 「성인의 연구」에 깊이 파 들어가 

이의 수득(修得)에 면려해왔지만,

이제 더 한층 수덕신학의 지식을 넓히고, 또한 깊게 할 필요를 통감하였다.

「나는 수도원의 생활을 근본부터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신비신학(神泌神學)에 관해서는

말하자면 무지(無知)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따라서 후의 그의 생활은,

영적생활의 비결을 근본적으로 탐구하는것,

「시또」회의 소명(召命)의 정신에 따라

수도원 생활의 의무에 자기를 훈련하는 것에 바쳐졌다.


그는 성「분도」의 계율(戒律) 「시또」회의 관례서(慣例書),

그밖의 회칙 연구에 몰두하고, 

관상(觀想)안에 영혼을 확립하기 위하여,

자신에 대하여 부단의 경계를 하고 천주와의 끊임 없는 일치에 전심하며,

성가대에 있어서의 성무, 경건한 독서, 개인적 기도, 손 일, 육체적 고행등,

회칙이 하루를 빈틈없이 짜 놓은 모든 세밀한 점에 이르기까지,

더욱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임시원장의 자리에 취임한지 약 2년이 경과하였다.

모원(母院)의 대원장인 「호우제느」신부는, 시기가 이르렀다고 여겨,

대원장의 선거를 생각하고, 성좌(聖座)의 허가를 받아,

「러오데」신부의 공식서원(公式誓願)을 기다렸다.



1895년 7월7일, 그는 공식서원을 발하고,

이튿날 대원장 선거에서 정식으로 대원장에 당선되었으며,

8월1일 「제르망」주교에 의하여 그의 축성식(祝聖式)이 거행되고,

이제 「은총의 성모의 수도원」의 으뜸으로서의 중임(重任)을 맡게 되었다.


그후 34년 동안, 1929년, 건강상의 이유로 그 직을 사임할 때까지,

안으로는, 열심히 자신의 성화(聖和)와 수도자의 양성, 도야(陶冶)에 진력하고,

밖으로는 원장총회(院長總會)등의 중요한 성무(聖務)를 수행하며 

겨를 없는 일과를 보냈다.


그의 내적생활에 관해서는 여기에 자상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수도원의 장상이라는 중직(重職)에 있어 부딪치는 모든 것 안에서,

높은 성덕의 길에 정진(精進)하였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그가 「거룩한 위탁」의 길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 것은,

영해 예수께 대한 특별한 신심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각별히 회칙(會則)의 깊은 연구고찰과 묵상에의 몰입(沒入)에 의해서 

영적 유아(靈的幼兒)의 길이 완덕에의 극히 단순(單純)하고 유효(有效)하며, 

안전(安全)하고 또한 확실(確實)한 길이라는데 

투철(透徹)했던 것에 의했을 것이다.


그가 

성「분도」의 계율(戒律)과 「시또」회의 회칙(會則)의 연구 안에서 찾아낸 것은,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근본을 이루는 겸손

수도생활의 기초인 순명,

공동생활의 토대를 이루는 형제애(兄弟愛)의 세가지 덕이었다.


자기의 완전한 포기(抛棄), 

천주와 장상(長上)과 동료 수도자 앞에, 또는 자신의 눈에도 

자기를 온전히 작은 자로 되게 하기 위하여  특히 유효한 것은,

이러한 세가지 덕을 관용한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스스로 체험하였다.

그리고, 영혼의 그러한 태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영적 유아(靈的幼兒)의 그것이며,

그것은 

스스로 천주의 어전에 유아가 되어 행동하는 사랑과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오주의 성탄 축일은 그의 신품과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데,

어린 예수께서 그의 생활에 들어온 것은,

그 공식서원(公式誓願)의 묵상에 있어서이며,

미구에 그의 생활전체를 점유(占有)하게 되었다.


어린 예수님은 

유화(柔和), 겸손(謙遜), 자비(慈悲), 친절(親切), 인내(忍耐), 위탁(委託)등의 

마음이 끌리는 모범으로서 그에게 나타나시고,

동시에 무구(無垢), 순박(淳朴), 온화(溫和), 미(美), 선량(善良) 사랑등의

천주성의 모든 덕의 관상(觀想)에 오르기 위한 길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이 어린 예수께서는, 그 벗을 어리광부리게는 하지 않으셨다.

그를 용서 없이 엄하게 다루시고,

묵상 중에 배워 얻은 거룩한 위탁을 실천으로써 훨씬 잘 배우게 하셨다.


그가 오랜 과거의 생활에 있어 최대의 은혜로서 

끊임없이 감사 안에 회상한 것은

「이 어린 예수님이 그렇게도 상쾌하고 감미로운, 그러나 단호한 손으로써 

자기를 보다 작은자, 당신의 모습, 

말하자면 당신의 몸의 키와 같은 정도로 될 때까지 

작은 자로 하시도록 작용하셨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의 저술에 관하여 말해 둔다.

그는 수도원의 관리(管理)라고 하는 다망한 가운데서 

본서거룩한 위탁을 비롯하여

「묵상의 각가지 길」과  「시또 수도회 지도서」를 저술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수도생활의 안내서라고도 말할 수 있는 「지도서」는

수도자로 하여금 소명(召命)의 길에 자신을 연마시키고,

회의 정신에 침윤(浸潤)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시또」회에는 종래 국부적인 내용의 안내서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1869년 간행된 지도서를 보기까지는 종합적인 통일된 저작은 없었다.

그 저서는 내용의 풍부함과 신심의 감동에 충만되고 있는 점으로 

우수한 것이었으나, 아직 완벽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1900년의 원장총회(院長總會)는 그에게 이를 완성하기를 위촉하였다.


그는 

「시또」초대의 성인들의 전통에 보다 잘 적합하도록 미비한 점을 보충하고,

정신을 갱신(更新)하였으며, 

막심한 노고를 기울여 거의 전면목(全面目)을 일신하였다.

그는 몇년에 걸쳐 이를 완성하고 

1908년의 원장총회는 이것을 찬양하며 인가하였다.



1906년에 그가 간행한 「묵상의 각가지 길」은,

실은 지도서의 보충 완결이며, 

관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묵상,

특히 관상에 관한 실천적 방면을 대폭적으로 가미한 저작이다.

그것은 그의 15년 동안의 연구와 체험의 성과이며, 

신비적 묵상, 즉 관상에 대해서는

성녀 대「데레사」, 십자가의 성「요왕」,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의 

세 권위자와,

「뿔랭」과 「소도르」신부의 저작의 연구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 밖에 그는 무수한 서신의 왕래로써 가장 핵심(核心)을 찌른

온건한 교지(敎旨)를 애써 피력하였는데,

그의 신비적 묵상에 관한 견해는 해가 거듭됨에 따라 원숙하여,

그 일면은 본서 「거룩한 위탁」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 길 및 신비적 길에 있어서의 영혼의 각가지 상태」가 그것이다.



본서「거룩한 위탁」은 1918년에 출판되었다.


그 내용은 그 자신의 체험에 의해서 뒷받침된 극히 원숙한 저술이다.

「본서 안에는 내가 자신의 경험에 의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그는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가 세 저서 가운데서 가장 애호한 것은 이 「거룩한 위탁」이며,

본서의 저술에 있어, 주께서 특별한 도우심을 내리신 것을 감사함과 아울러,

많은 영혼이 이 사랑과 신뢰와의 길을 걸어.

주의 어전에 이르는 것은 그의 평소의 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