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

제 2편 거룩한 위탁의 기초 제 I장 이탈

은가루리나 2018. 4. 25. 21:38

제2편 거룩한 위탁과 기초


제1장 이탈 

제2장 섭리에 대한 신앙

제3장 섭리에 대한 신뢰

제4장 신뢰 계속 - 難問에 대한 해답

제5장 천주께 대한 사랑

제6장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제7장 聖主에 대한 모범



p.113



제二편 거룩한 위탁(委託)의 기초(基礎)




거룩한 위탁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미 단지 인종(忍從)과 같은 

천주의 의지에 대한 적합(適合)의 하나의 낮은 단계는 아니고、

사랑과 신뢰(信賴) 와 동심(童心}으로써 하는 위탁이며、

천주의 의지(意志)안에 우리의 의지를 온전히 융합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와 인간과의 의지를 이처럼 밀접하게 일치시키는 것이 

사랑의 특성이다。 


적합(適合)의 이 단계는 순수한 사랑의 매우 탁월한 활동이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오직 순수한 사랑에 사는 진보된 영혼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본서 제二 편 五장 참조)


그렇지만、이 단계는 완전한 이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사랑은 

여기에 섭리에 대한 신앙과 신뢰에 각별히 의뢰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우선 최초로 이탈(離脫J과 신앙(信仰)과 신뢰(信賴)에 관해서 말하고

이어 거룩한 위탁의 본질적 원리(本質的原理) 

즉 위탁의 근원인 사랑에 관하여 말하고서 이 편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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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二편 거룩한 위탁(委託)의 기초(基礎)


제 I장 이탈(離脫)  




완전한 적합(適合)에 있어 필요한 예비적조건(豫備的條件)은 

완전한 이탈이다。


왜냐 하면、 

만일 우리의 의지가 무엇인가에 강하게 애착하여

마치 풀이나 못으로 굳게 고착(固着)되어 있는 상태에 있다면

그 의지를 분리시켜 천주의 의지에 일치시켜야 할 적에는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지는 아무리 적게 애착하고 있어도 저항(抵抗)할 것이다


거기에 피하기 어려운 알력(軋轢)과 분열(分裂)이 야기되어

그래서 우리는 신속 및 용이한 적합(遍合)에서

특히 완전한 위탁(委託)에서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 이유에는 다음 두가지가 있다。



1. 거룩한 위탁은、

천주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두 이에 응하도록 미리서 각오하고

그 하시는 모든 것은 

이것을 사랑으로써 받아 들인다는 점에까지 도달한 바

우리의 의지와 천주의 의지와의 전체적 일치(全體的 一 致)이다


그것은 사건발생전(事件發生前)에 있어서는

평화와 신뢰에 충만한 대기(待機)이며

사건발생후(事件發生後)에 있어서는 

사랑이 깊은 어린이와 같은 복종(服從)이다


이러한 위탁에는 얼마나 깊은 이탈(離脫)이 예상(豫想) 되는지 

쉬이 이해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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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이탈은 뜻이 깊을만큼 보편적(普遍的)인 것이어야 한다。


대저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부유(富裕) 또는 빈곤(貧困)、질병(疾病) 또는 건강(健康) 

신심업(信心業)에 있어서의 위안(慰安) 또는 시련(試鍊)、

세인의 존경(尊敬) 또는 경멸(輕蔑)、

애모(愛慕) 또는 증오(僧惡)의 어느 것을 바라신다 하드라도、

천주께서 최고의 주권자(主權者)이신만큼、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처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천주께서는 그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서 

우리의 외적인 재보(財寶)、

육체와 정신과 호평(好評)과의 은혜 등을 

뜻대로 우리의 의견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더구나 대개는 뜻하지 않을 때에 

그런 것을 우리에게서 앗아가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우리의 의지가 

천주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써 받아 들이려는 각오를 

계속 가지기 위해서는 

항상 모든 종류의 선익(善益)、

즉 재산、친척、붕우(朋友)、건강、휴식、안락(安樂)、욕구(欲求)、

학식、위안、존경、애모 (愛慕) 등의 모든 것에서 

전연 이탈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사물과 그 밖에 이에 유사(類似)한 것에서 

의지는 항상 완전히 이탈하여、 

천주와 그 의지만을 탐구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각오만 있다면、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가 비록 예기(豫期)되지 않을 때라도、

또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든지、

우리는 곤란을 느끼지 않고 쾌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위탁에 도달하려고 바란다면、

극기(克己)、자아포기(自我抛棄)、희생의 정신、십자가의 사랑 등、

이름은 여하튼、

그리스도교적 제욕(制愁)을 각별히 중요시해야 한다。


이 길에 의해서 

완전한 이탈에 이르고、또한 거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견인지구(堅忍持久) 로써 최선을 다하여 

이를 수련(修練)할 필요가 있다。



「로트한」(Roothaan) 신부가 적절하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제욕(制愁)없이 무관심(無關心)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은 

전연 허사일 것이다。

왜냐 하면、

혹은 단지 제욕에 의해서만、흑은 특히 제욕에 의해서、

사람은 무관심이 되고、또한 그러한 행동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성「이냐시오」의 「심령수업」(心靈修業) 중 「기초적 묵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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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한 「러·고디에」(Le Gaudie)신부는 

다음과 같은 적절한 주의를 덧붙이고 있다.


「계명을 지키는 위에、

부(富)와 외적선익(外的善益)을 부러 멸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우기 명성이나 모든 영예(榮譽)를 경멸한다는 것은 

그것보다도 더욱 곤란하다. 

더구나 생명이나 신체나 자기의 의지 등을 무시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곤란한 것은、

자신의 자연적인 은혜도、위안도、

영적기호 (靈的嗜好)도、선덕(善德)도、

끝으로 은총도 천국의 영광까지도 

천주의 의지와 그 영광만에 예속(諫屬)시키는 일이다。」

(「러·고디에」저 「영적생활에 있어서의 완덕」1 부 一 편 一 四장)




그러므로、거룩한 위탁에의 길은 길고、또한 매우 험준하다。


그러한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영혼은 적으며、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적합(適合)、혹은 단지 체념(諦念), 

인종(忍從)의 중도(中途)의 단계에 머무는 것도 그러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은 완전한 위탁을 좋아하지만 

그러나 그것에 상응(相應)한 대가(代價)를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천주께서 오로지 보시는 것은 빈 그릇을 그 은혜로 채우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을 요하는데 

불행하게도 사람은 그릇을 충분히 공허하게 하지 않는다


거기에 성「프란치스꼬 . 살레시오」가 깊이 음미한、

「똘레르」의 아름다운 말이 적응된다。


어떤 사람이 「뜰레르」에게、

어디에 있어 천주를 찾아냈느냐고 물었을 때에、

그는「나를 버린 곳에서 천주를 찾아냈고、

나를 찾아낸 곳에서 천주를 잃었다」라고 대답하였다。

(「성 프란치스꼬 . 살레시오의 정신」三.五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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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모든 양식(樣式)의 자아포기 가운데서、

각별히 곤란한 그리고 필요불가결한 두가지, 

즉 순명과 겸손에 관해서 주의를 촉구하고 싶다。


자부심(自負心)과 자아집착(自我執着)과는

본성이 궁박(窮迫)할 적에 발견하는 최후의 피난처이며

영혼의 진보와 평화의 최대의 장애물 (障碍物)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자신 외의 일체의 것,

즉 외적재보 (外的財寶)나 육신상의 은혜를 희생한 후에까지도 아직

오만(傲慢)과 자의(自意)의 이중의 사슬에 얽매어 있는 일이 

너무나도 자주 있다



그러므로、우리를 완전히 해방하기 위해서는

순명과 겸손의 두가지 불가분한 자매덕(姉妹德)에 호소하여야 한다


난사(難事)와 역경(逆境)과 굴욕(屈辱) 안에 있어 

자연(自然)을 침묵시키면서 

인내로써 무슨 일에나、또한 언제라도 순명을 다하고

자의(自意)를 이탈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열심히 노력하는 이는 얼마나 행복한가



허다한 굴욕과 궁박의 복판에 있어 만족하고

명해진 모든 일에 있어

자기를 악하고 보잘것 없는 종으로 간주하며

그리고 진심으로 

자기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낮은

가장 비천한 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는 이의 행복은 더우기 어떠하랴

(성 「분도」의 계율七· 11、三、四、六、七 참조)


영혼이 순명과 겸손에 극히 견고해졌을 때에는 

그것 자체로써 

덕의 부족에 기인하는 많은 충동(衝動)을 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고통은 자주 그와 같은 영혼을 습격할 것이다


물론

그 영혼은 그것에 대하여 무감각(無感覺)으로 있지는 않으나

이것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는 각오는 이미 소유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겸손 그 자체에 의해서 

완전한 위탁에 대한 준비가 있어 그것에 기울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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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영혼은 

항상 과거의 죄를 여러 가지로 의식하면서도、

그처럼 순결했던 「젤뜨루다. 마리아」동정과 같이、

당신에게 당연히 돌려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무한한 정의(正義)이신 이를 흠숭하면서、

자신의 죄의 벌을 감사로써 받아들인다。


그러한 영혼은 시련이 닥칠 때 마다、

「나는 보속을 위하여 고통을 받아야 할 영혼입니다. 

주여、감사하나이다。

더구나 이것은 아직도 내가 받아야 할 모든 것은 아니나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일 자기들의 나약함을 두리지 않는다면、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리라。


「주여、

당신께 대한 보상을 다하기 위하여 나에게 더욱 고통을 주소서。

끊임없이 주소서」라고. 


그리고 만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나쁜 경향을 반성하고 

극히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산란케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직도 고통을 당하고 또한 멸시를 받아야 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하여、

자신에게 죽는 기회를 오히려 행운(幸運)처럼 기꺼이 맞이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고통을 잊고、천주께 가한 모욕만을 생각 하고는、

「잼마·갈가니」와 같이 이렇게 말한다。


「아、가련한 예수여、나 당신을 너무나도 괴롭혀 드렸나이다。

그러하오나 관대히 여기시어 나의 곁에 돌아오소서」라고.

 (「잼마·갈가니」 一五) 또는 「젤뜨루다·마리아」동정과 함께、



「나에게있어 모든 내적(內的)인 고통보다도 괴로운 것、 

참된 고문(拷問)에도 비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가한 모욕、

그이에게 짊어지게 한 고통이다」(「한 신비자」二二)라고 말하자。


이처럼 광명에 충만하고 있는 영혼은 

무죄하고 유덕(有德)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한히 거룩하신 분의 어전에 나아가는데

만만 부당한 자임을 인정하고、

주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불타는 일념(一 念)에서 

가장 괴로운 정화(淨化)도 감수한다。


거기에 겸손이 얼마나 순명을 쉽게 하는가

또는 얼마나 거룩한 위탁에 마음을 준비시키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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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하여、

영혼이 순명과 겸손에 아직 불완전하다면

그 때문에 허다한 곤란을 초래하고

이것을 기꺼이 맞이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것이다。


또한 시련이 천주편으로부터 혹은 인간편으로부터 온다 하드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 당연한 그리고 필요한 것이라고 깨닫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희생자와 같이 가장하거나、반항하거나、불만을 품거나 할 것이다。

그래서 천주의 은혜를 시련과 마찬가지로 남용함이 된다。



께서는 「잴뜨루다·마리아」동정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겸손은、

마치 물이 꽃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은총에 충만된 영혼에 있어서는 불가결한 것이다。


영혼이 꽃이 피어 그 아름다움과 신선(新鮮)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겸손에 젖고、끊임없이 이 은혜의 물에 잠겨 있어야 한다。


햇빛의 열에만 쬔다면 오래지 않아 시들어 죽어버릴 것이다」

(「젤뜨루다 . 마리아 전」 一九장)




영해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온전한 랑과 신뢰의 「영적유아(靈的幼兒)의 길」을 

찬양해 마지 않았는데、

성녀는 당연히 겸손으로써 그 토대로 삼았다。


그 모범과 그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천주를 사랑하며、

많은 작은 희생을 바치고、어린이와 같이 천주의 팔에 자신을 맡기고 

그러기 위하여 어린이와 같이 순명하고 겸손한 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녀는 스스로 다른 수녀들의 작은 종이 되어、

누구의 차별도 없이 모든 이에게 따르도록 노력하고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것만을 두렵게 여겼다。


교만하여 스스로 자만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낮추어 

누구에게도 무시(無視)되고、

모든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며、


어린 예수님에게도 

하찮은 장난감처럼 항상 작은 이가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자서전」六、八、二、三 기타 참조)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자아(自我)에 죽고、

특히 얼마만한 겸손이 필요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천주께서 그다지도 관대(寬大)하고 겸손한 영혼의 영광을 현양하시어、

이 성녀를 현대의 위대한 신비자로 삼으신 것은 

결코 늘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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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주교는 이 영적유아(靈的幼兒)의 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이것은 얼마나 완전한 길이랴! 

이것은 고통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욱 완전한 것이다。


왜냐 하면、

진실로 마음 고요히 작은 이가 되는 것보다、

커다란 희생을 인간에게 부과시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교만은 일곱가지 죄원(罪源)의 괴수(魁首)이며、

모든 욕망의 근원이고、

태고(太古)의 뱀이 인간계(人間界) 에 쏟아 넣은 독(毒)이다。


유아(幼兒)로서의 정신은 고행(苦行)의 정신보다도

보다 확실하게 이 오만(傲慢)의 뱀의 숨을 근절시킨다。


인간은 고통과 싸울 때에 쉬이 자기 자신을 찾아내어、

자신을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감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참으로 유아가 되어 있다면

자애심(自愛心)은 절망할 것이다。


이 거룩한 유아의 길의 과실을 아무리 압착(壓拷)하드라도

스며나오는 것은、

위탁 외에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유아는 조금도 거절하지 않으며

거스르지 않고 자신을 남에게 맡긴다。

유아는 무엇을 알고、무엇을 할 수 있으며、무엇을 이해하고 있겠는가

무엇을 알고、무엇을 이해하며、무엇을 할 수 있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겠는가


유아는 전연 남의 뜻대로 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얼마나 신중하게 유아를 다루고 얼마나 그를 애무할 것인가。


그런데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이를 마찬가지로 과연 다룰 수 있겠는가.」

(「게」주교 「위탁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