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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8 - 성화상 논쟁과 제2차 니체아 공의회

은가루리나 2018. 5. 28. 10:24


이해욱프란치스코60|등급변경▼ 조회 173 추천 0 2015.06.02. 22:24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8 - 성화상 논쟁과 제2차 니체아 공의회


흠숭과 공경 구별로 논쟁 해결

 



<사진말>

제2차 니체아 공의회가 개최된 니체아(현지명 이즈니크)의 소피아 성당.


[터키=김상재 기자]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으므로 

우상숭배를 초래하는 신상을 만들지 않는 유대 율법의 영향을 받았다.




자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물고기나 배와 같이 신자여부를 확인하는 암호나 간단한 상징물 

혹은 신앙교육을 위해 착한 목자, 어린 양과 같은 소박한 그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표현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 이후 영세자들이 늘어나자 

모든 이들에게 상징적인 표현만으로 신앙신비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보다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표현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이런 표현들은 예술적 시각에서 보다 교육의 도구로 이해됐고 

교부들은 설교를 진리를 얻어 듣는 도구로, 성화상은 보는 도구로 강조했다. 


이러한 성화상은 특히 동방지역을 중심으로 대중화 되기 시작했고 

6~7세기 경에는 교회, 수도원, 카타콤바, 개인 집 등에 그려졌다.



그러나 성화상이 대중화되면서 

병든 사람을 고쳐준다는 등의 미신적 관념이 도입되면서 

성물공경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성숙치 못한 성화상 공경의 풍습과 교의적인 충돌 등으로 

성화상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은 주로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고 

참된 인성을 부정하는 단성론자들에 의해 시작됐다.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형상은 

신성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므로 

성화상 공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에 빠질 수 있다는 논거였다.



이에 대해 692년 콘스탄티노플 제2차 트룰라눔 교회회의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성화상이 가능하다

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제국에서 

이 성화상 문제는 수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파괴운동으로 발전했다.



717년 즉위한 동로마의 레오3세 황제는 

성화상 공경에 대한 이러한 찬반 논의를 잘 알고 있었지만 

불안한 국내외 정치상황 때문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 이후 

성화상 공경 옹호자들이 자기와 적대 관계에 있던 

선대황제들의 옹호자였고 자신의 권위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726년 구약의 우상숭배 금지와 이슬람과 유대인들의 개종을 이유로 

성화상 파괴를 명령했다.



이는 단순히 교의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를 포함한 전 제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절대군주로서의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요소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동로마는 이슬람의 진출과 슬라브 민족의 남하를 막기 위해 

많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막대한 부를 필요로 했다. 


그러므로 광대한 토지와 면세권을 지니고 있으면서 

황제의 권위에 예속 되지 않는 수도원을 속박시켜 

국가 정책에 대한 수도원의 개입을 방어하는 동시에 

수도원의 수많은 재산을 차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화상 논쟁은 이제 교의적인 문제를 떠나 

황제의 전제정치로부터 벗어나려는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적 성격으로 양상이 변하게 된다.


전통신앙에 의해 배척된 단성론을 주창하던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레오의 조치를 받아들였지만 

대다수 성직자와 신자들은 레오를 반대했고 

그레고리오 2세 교황도 황제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제국 전체에 황제를 반대하는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레오 3세는 

730년 1월 17일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하고 

성화상 철거를 무력으로 강행했다.


그레고리오 2세 교황은 성화상 파괴 중지를 요구하며 

주교들이 결정해야할 교의적 문제에 간섭치 말 것을 명령했으며 

후임자 그레고리오 3세 교황도 로마 교회회의를 통해 

성화상 파괴, 비방, 제거 행위를 파문했다.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레오 3세는 교황을 체포하기 위해 함대를 보내기도 했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등지의 교회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이제 상황은 동서 제국의 극렬한 대립으로 치닫게 됐다.


성화상 논쟁은 

레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성화상 공경을 인정한 매부 아르타바도스의 반란을 경험한데 이어 

교황청과 프랑크 족의 동맹을 지켜 본 콘스탄티누스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754년 히에레이아에서 회의를 개최해 성화상 파괴를 재가했다.


이러한 전제정치에 반대한 것은 거의 수도자들이었는데 

수도자들의 봉기는 박해와 처형으로 이어져 

많은 지방에서 수도자들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성화상 논쟁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열 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6세를 대신하여 섭정한 이레네 황후에 이르러서다. 


자신이 성화상 공경으로 추방당하기도 했던 이레네 황후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개최했으나 

반대파 군인들에 의해 해산됐고 

787년 가을에서야 니체아에서 공의회가 시작됐다.



제2차 니체아 공의회는 동서교회가 함께 한 마지막 공의회로 

성화상 논쟁을 흠숭과 공경으로 구별함으로써 해결했다. 


흠숭은 하느님께만 해당되고 공경은 피조물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상을 통해 

성화상 공경의 교의적 기반을 다진 한편 

이의 남용을 경계했다.



이외에도 공의회는 

한 수도원에 남녀수도자를 함께 두는 것을 금지했으며 

수도자나 성직자가 단독으로 여인과 식사하는 것을 금하는 등의 

22개 법규를 정했다.


성화상 논쟁이 공경 쪽으로 가닥을 잡음으로써 

수도원의 부흥시대를 가져왔고 황제에게 예속됐던 동방교회의 자율권이 커졌으며 

성화상 공경을 끝까지 지킨 로마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제국 전역과 교회 안에서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100여년에 걸친 논쟁은 지역간의 첨예한 대립을 가져와 

이후 동서교회의 골을 깊게했고 결국 동서교회가 분열하는 한 원인이 됐다.




[가톨릭신문, 2002년 1월 20일, 김상재 기자]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우상숭배와 성화상 공경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인류 역사에서 정복자들의 문화 파괴는 흔했다. 


리고 권력이 바뀔 때에 이전 권력자의 기념물을 없애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일들이(damnatio memoriae) 자주 벌어진다.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그랬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아프간의 탈레반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알려진 바미얀 계곡의 불상들을 파괴해 버렸다. 


이른바 종교개혁 시절에는 

프로테스탄트들이 감독관까지 임명해 가며 

가톨릭의 성화상을 조직적으로 파괴하였다. 


여기에서는 다만 8세기에 동방교회를 휩쓸었던 성화상 파괴와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를 간추려본다.

 



성화상 파괴



비잔틴 제국은 8세기에 이슬람 세력의 확장에서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았다. 

성화상 파괴 또한 제국의 강력한 적들에게 배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그리고 무슬림이든, 

모두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아 우상숭배를 배척한다. 


그렇지만 서방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고상을 비롯하여 성모님과 성인들의 성화상으로, 

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묘사하는 수많은 그림으로 

성당을 장식하였다. 


그렇다고 누구도 그 성화상을 예배한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동방의 수도자들은 뛰어난 성화상(이콘)을 만들고 

이를 기도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우상숭배 금지를 글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우기는 바오로파’가 

동방에 있었다.


인간 육신을 비롯하여 모든 물질은 다 나쁜 것이므로, 

성사도 십자가도 유해도 모든 성화상도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차별 성화상 파괴를 일삼는 이단자들이었다. 


이슬람의 칼리파들도 화상들을 파괴하며 

자기네 영토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를 요구하였다.



이슬람에서 성화상 파괴를 배웠다는 비잔틴 황제 레오 3세는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상 등으로 우상숭배를 하기 때문에 

무슬림과 유다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싫어할 뿐 아니라 

미신으로 제국의 분열을 부추긴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화상 파괴에 동조하였다. 


황제는 성화상 파괴를 제국과 교회 개혁의 한 수단으로 삼았다.



황제는 726년에 칙령으로 성화상 파괴를 명령하였다.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누스가 이에 항의하며 교황에게 탄원하자, 

황제는 그를 반역자로 몰아 쫓아냈다. 


민중의 신앙심을 억압하는 황제의 명령은 폭동으로 이어졌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처형되었다. 


성화상 파괴는 특히 수도원 문화의 파괴였고 수도자들에 대한 탄압이었다. 


성인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유해를 불태워 버렸다. 

모든 성화상이 치워진 동방의 성당들은 나뭇잎이나 열매로 장식되어 

마치 ‘야채 가게’처럼 보였다고 한다.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 아니다



당시 그레고리오 2세 교황(713-731년 재위)은 시노드를 소집하여 

성화상 파괴 명령을 이행하라는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황제가 로마에 직접 쳐들어가 

베드로상을 부숴버리고 교황을 체포하겠다는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는 

황제의 무지와 폭압을 비난하였다. 


교황은 이미 로마 공국의 통치자로서 황제와 맞설 수 있었다. 


사바 수도원에 있던 다마스쿠스의성 요한은 

성화상 공경을 강력히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는 이슬람 영토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



새 교황은 731년에 

로마 시노드를 소집하여 황제의 성화상 파괴에 항의하였다. 


새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아버지보다 더 포악한 성화상 파괴자였다. 


그는 754년에 자신을 추종하는 주교들만을 모아 

히에레이아에서 시노드를 열고 

성화상 파괴의 신학적 논거를 제시하였다. 

로마 사도좌를 비롯한 주요 총대주교좌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가 죽고 아들 레오 4세가 새 황제가 되었는데, 

그 황후 이레네는 확고한 성화 공경자였다. 


남편이 죽은 뒤 

이레네는 780년에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을 맡았다. 

황후는 성화 파괴를 종식시키려고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교황 아드리아노 1세도 동의하고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타라시우스가 

786년 8월에 그곳 사도들의 성당에서 공의회를 개회하였으나 

성화상 파괴자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공의회를 해산시켰다. 


황후 이레네가 이를 진압하고 주교들을 다시 불러 모아, 

이듬해 9월 24일부터 10월 23일까지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성경 말씀과 교부들의 가르침, 

그리고 기록되지 않는 거룩한 전통에 따라, 

성화상 공경의 정당성에 대한 신학적 논거를 제시하고, 

성화상 파괴 시노드(754년) 결정들을 낱낱이 무효화하였다. 


성화상 공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며, 

이는 원형에 대한 공경을 도와주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형상에 드리는 공경은 원형에 이른다.”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은 어떠한 물질로도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성화상 공경이 우상숭배라는 성화상 파괴자들의 주장에 맞서, 

강생하신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하느님의 신성을 물질로 보여주는 표상

이라고 하였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리를 옮겨 

황후 이레네와 어린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회기를 열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또한 이전 공의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하고, 

22가지의 규정을 발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이렇다. 


국가나 황제가 주교나 성직자를 임명하지 못한다. 

권력에 빌붙어 성직을 얻는 자는 신성 매매로 파문한다. 

그에게 영성체를 하는 사람도 파문한다. 

주교는 주교만이 서품할 수 있다. 

성인의 유해를 모시지 않은 성당을 축성할 수 없다. 

파괴된 수도원들을 복원한다.




성녀의 최후



이렇게 성화 파괴를 종식시킨 공로로 

동방교회에서는 황후 이레네를 성녀라고 한다. 


이레네는 아테네에서 자란 고아였다. 

그 미모가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눈에 띄어 황도로 왔다. 

이른바 ‘세자빈 간택’에서 뽑혔는지, 레오 4세와 혼인하여 황후가 되었다. 


성화상 파괴자인 남편 몰래 

성화를 깊이 간직하고 공경하였던 신심 깊은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의 세계는 냉혹하였다. 

아들을 앞세운 반대자들을 제압해가며 성녀도 폭군으로 변해 갔다. 

신하들에게 자신을 황후가 아니라 황제라고 부르도록 강요하였다. 

모반을 했다는 자기 아들의 두 눈알을 뽑아버리기도 하였다. 

그보다 한 세기 전에 중국을 다스렸던 측천무후 같았는지도 모른다. 

성녀는 마침내 권좌에서 쫓겨나 레스보스 섬에서 길쌈을 하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