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섭내 새 번역본

Re:하섭내 새 번역본 제5장/ 단순(單純)함

은가루리나 2018. 7. 8. 16:39

moowee 등급변경▼ 조회 259 추천 0  2017.11.30. 23:41



단순(單純)함
Simplicity


뭐야? 이 여자 나부랭이들!


온 땅이 한 가지 말을 썼다. 낱말도 같았다. …그들이 말하였다,
“도성을 건설하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드날리자.
그래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일을 피하자.” -창세기 11, 1-4


세상 나라에서는 왕들이 백성을 위에서 다스리고 권세 부리는 자들이 은인이라 불리지만,

그대들 사이에서 그래서는 아니 되오. -루가복음 22, 25-26


위의 두 구절을 제대로 읽었으면 이 글의 제목에 적힌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남자들,

그것도 중산층 이상 힘 있고 교양 있는 백인 남자들이 만든 말이에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무엇보다도

‘여자 나부랭이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을 내게 안겨주는군요.


우리 백인 남자들은 그동안 전체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모든 카드를 독점하고 질문도 만들고 해답도 만들었지요.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사람 몸을 취하셨던 아주 짧은 기간을 제외하곤 늘 그래왔습니다.

예수는 열두 남자를 제자로 삼아 어떻게 하면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존재할 것인지를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셨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남자들이 계속 탑을 쌓고 세상의 주인 행세를 해왔는데

들의 일에 ‘여자 나부랭이들’은 별 쓸모가 없었지요.
바로 그런 세상과 교회에서 내가 태어난 겁니다.


교회는 그동안 교권주의와 현상유지에 충실해왔고

따라서 예수의 분명하고 간단한 가르침을 믿는 건 관두고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했어요.


가난, 온유 또는 비폭력, 눈물, 정의, 자비, 마음의 순결, 평화 또는 화해

그리고 인내가 그분의 공개적인 가르침의 중심이었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 국가들이나 가톨릭 교구의 백인 남자들은
위의 여덟 가지가 복(福)의 내용이라고 가르친 예수를 따른다면서,

서로 지도자 되겠다고 야단들이올시다!


확실히,

힘 가진 그리스도교 남자들은 행복을 선택사항으로 보는 것 같아요.


따라서 세상이 힘을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으로 나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것이 세계의 좋은,적어도 상위계층에 더 좋은, 질서를 만들고 

 질서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행복한 거라고 보는 겁니다.


현실에 대한 이 중독성 견해를 ‘가부장제’(patriarchy)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아버지들의 다스림’이에요.


그것이 서양에서 가장 합리적인 체제의 바탕으로 전승되었지요.
가부장제의 견해로는 모든 인간관계가 우등과 열등의 틀에서 이루어지고

질서와 통제에 필요한 것은 지배세력이 조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자들, 성소수자들, 약하고 늙은 사람들은 “별 쓸모가 없기에”

사회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고 

그들이 억압을 당하는 것 또한 문제될 게 없어요.


하지만 이런 가부장제의 가장 고약한 점은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

모두의 영적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자기가 만든 그늘을 부인하는 힘 있는 자들은 대책 없이 팽창하고,

그 그늘에 덮여야 하는 힘없는 자들은 끝없이 수축되고, 

이렇게 둘 다 망실되는 거예요.


승자와 힘과 통제(두려움의 다른 얼굴인) 그리고 “능력이 정의다.”

또는 “힘으로 이루는 평화” 같은 

수상한 철학을 이상으로 삼는 세계관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가부장제입니다.


‘성공’(자기가 정한 기준에서)과 통제 없이는 가장의 설 자리가 없는 거예요.
이런 삶이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걸 보면 

얼마나 심한 중독에 빠져 있는지를 알 수 있지요.

여자들 가운데도 가부장제를 용인하고

남성 중심사회에 오히려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가부장제 언어는 

언제나 고상하고, 자유와 애국을 부르짖는 남성적 언어예요.
남자들(그리고 그들의 메아리인 여자들)은 항상 그 언어로 말하지요.


놀라운 점은 그들 모두가 여전히 그렇게 믿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다행히도 가난한 사람들, 억눌리고 변두리로 몰린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자기 내면의 종교적 본능을 신뢰하기 시작했어요.


그들 가운데는 한 걸음 나아가

힘 있는 자들의 체제를 불신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이들도 있지요.


여러분은 그들을 오만하다고 또는 불손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용감하다고 또는 신앙심이 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느님이 판별하실 겁니다.
나는 할 수도 없지만 해서도 안 돼요. 기억해주십시오.


나는 지금 나와 남들을 통제하고 강화시킬 필요성을 포기하는 것에 대하여 

배우고 있는 중이올시다.


그동안 서양 문명권에서 왼쪽 뇌의 이성과 논리가

우리를 너무나 지배해왔기에 지금

우리는 차라리 본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봅니다.


인류 3분의 2가 굶주림으로,

실업자와 노숙자로 살아가는 현실에 오히려 만족하며

생각도 없이 군사무기를 개발하고 동시에 자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 세계를 평화롭게 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게 우리들이에요.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감추는 남자들의 위장술은 실로 끝이 없어 보입니다.
가부장제 논리는 

다만 체제와 현상유지(그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현실세계”)를

옹호하고 사랑하는 논리일 뿐이에요.


정말입니다. 내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

특히 정장을 갖춘 

예의바르고 점잖은 남자들한테서 주로 듣는 말이 이런 말이니까요.


“흥미롭게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신부님. 이걸 아셔야 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는 말입니다…”


체제를 옹호하는 신부들이 누구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그 체제의 원리에 따르지 않겠다는 신부들이에요.


예수가 하느님의 통치라고 부르신 새로운 체제를 선포하려면

그런 미움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둘씩 그룹을 지어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훈련시키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까

하느님께서 여자들을 보내어 우리를 도와주고 계신 거예요.


‘여자 나부랭이들’은

거의 모든 사회정의 문제 배후에 숨어있는 에너지입니다.


비폭력과 비무장을 지향하고

노숙자와 난민, 지구자원 고갈, 성폭력, 이익을 우상화하는

경제체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운동은
그것들 바닥에 깔려있는 힘의 정체가 폭로되지 않는 한 

막다른 골목을 넘지 못할 거예요.


놀랍게도 우리는 현 제도에 속한 힘 있는 엘리트들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재물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 못지않게 

변화에 반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국가나 정부는 최후의 적이 아니에요.


모든 제도의 지배층이 자기네 기득권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하지요.
그러므로 남자의 성품(male-ness) 자체는 문제될 것 없어요.
문제는 힘과 승리를 자랑으로 삼는 남성(male)입니다.


이런 바벨탑들은 너무 오래 남자들의 영혼을,

그 몸과 마음과 정신의 품위까지, 대가로 바치게 하였어요.


모든 피라미드가 희생의 피라미드입니다.
수십만 노예를 동원한 이집트 왕들의 무덤이든,

수많은 인명이 제물로 바쳐진 아스텍 신전이든 아니면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한 대도시 매머드 호텔이든,

아무튼 ‘특별한’ 몇을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희생된 거예요.


그 ‘특별한 존재들’이, 예수가 가르치신 대로,

불필요한 것으로 외면당하지 않고 

오히려 이상화(理想化)되거나 보호받을 때
우리는 그 힘의 파괴적이고 어두운 면을 보게 되는 거지요.


예수는 종교적 가치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대신

정직한 인간관계를 강화함으로써 권력층의 중심에 일격을 가하셨습니다.

 

그분은 피라미드 아닌 원탁(圓卓)을 세우셨어요.
당시 권력층이 그분을 용서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거룩한 성전의 붕괴를 선언하셨기 때문이지요.


“저 큰 건물을 보라는 거요?

돌 위에 돌 하나 얹혀있지 못하고 모두 무너질 것이오.”(마르코 13, 2)


종교적 신분에 따라서 경계가 나누어진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 아니라는 진실을 그분은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강도소굴”이라고 하시며 환전상들의 탁자를 둘러엎으셨지요.
그렇게 성전을 공격함으로써 유대교 최후의 탑을 공격하셨고

다시 한 번 진정한 종교의 기초를 놓으셨던 겁니다.


하지만 저 옛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첫 사제 아론은

그 뒤로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지금도 자기 몫의 일을 저렇게 감당하고 있지요.


신부들과 목사들은 뭐든지 자기 종교에 좋으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예수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거짓이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자기네 이름을 드날리고자 탑을 쌓는 사람들의 언어를 뒤섞어버리지요.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잘못 세울 때

그들을 흩어버리는 이례적인 하느님을 봅니다.


그런데 오순절의 하느님은 이 이야기를 뒤집어

서로 다른 언어들을 성령의 보편언어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지요.


“우리가 시방 하느님의 큰 역사하심을 전하는 저들의 말을

각자 자기 방언으로 듣고 있지 않는가?”(사도행전 2, 11).


교제의 원탁, 나라들 사이의 네트워크, 인류의 형제자매관계가

성령으로 태어난 새로운 사람들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이신 하느님(God the Spirit)이

우리가 그들한테서 “태어나는” 여성의 이미지로 나타나시는 것

(요한복음 3, 5-8)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에요.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직후 참되고 정직한 공동체의 출현을 우리는 보지요.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가진 것과 재물을 팔아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눠 주었다.”(사도행전 2, 44-45).


하지만 인류역사에서 그것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가난 서약으로 그것을 시도해봅니다만

통제와 소유를 필요로 하는 가부장들은
정직한 인간관계보다 탑과 대성당과 계급의 서열을 더 좋아했지요.


어디 그 목록을 한 번 열거해볼까요?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주교대리, 신부, 부제, 집사, 집사대리, 축마신부,

시종, 설교자 그리고 수위. 너무 비꼬는 것처럼 들렸으면 용서하십시오.


하느님의 명예에 연관된 문제라 일부러 좀 과장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성적 통찰(feminine insight)은 예수의 영을 다시 찾는 것,

그동안 억압당했던 진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관련된 거예요.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정치적 대변혁,

다른 눈으로 읽히는 복음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실현될

교회구조의 변형을 잉태한 어머니 자궁 같은 겁니다.


그리스도가 처음 세상에 오실 때도 어머니 자궁을 빌리셨지요.
가톨릭이 마리아를 높이 기려 여신(女神)의 역할을 맡긴 것은 

우연한 조작이 아니에요.


나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균형 맞추기 위하여 물려받은 유산인지,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부장제의 위장(僞裝)인지,
안에서 부정되는 여성에 대한 연민인지 아니면 성령의 역사인지 잘 모르지만,
논리와 신학을 이기는 본능(instinct)의 압도하는 예(例)인 건 

사실이라고 봅니다.


가부장적인 로마교회에서 

마리아가 몸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신 분으로 고백되고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과 보호 아래
“흠 없는 잉태”의 어머니라고 불린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그분이

“하늘과 땅의 여왕”으로 관을 머리에 쓰신 것을 축하까지 하지요.
그것을 나는 모두 인정합니다만 둘 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건 아니에요.


이 남성적인 교회가 그토록 여성적이고

모든 예식에서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놀랄 일이올시다!


그런데 그 건강한 본능이 우리 남자들을 섬기고

우리는 그들을 “여자 나부랭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남자 분들한테는 미안한 얘깁니다만 우리 가톨릭은 늘 그래왔어요.
그리고 그것을 정통이라 여기며 자랑스러워했지요.
그것은 새롭거나 진보적이거나 위험한 무엇이 아니에요.


아주 오래 되었고 지극히 보수적이고 마리아나 팔복만큼이나 전통적인 것입니다.

여성의 통찰은 완고한 가부장적 유대 사회에서 매우 다르게 처신한

남성 예수의 가르침을 잘 설명해주지요.


마리아처럼 교회도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루가복음 2, 19) 곰곰 생각 중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단, 예수가 어머니 뱃속에서 그러셨듯이, 세상에 출현할 준비를 모두 마칠 때까지.

예수가 여성의 몸으로 세상에 오시어 비폭력을 행사하셨더라도

말씀이신 아버지의 성육신으로서 손색은 없으셨을 거예요.


하지만 그분이 여자로 태어나셨다면

하느님의 신성한 계시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하셨을 겁니다.


세상이 처음부터 여자들에게 양육하고 용서하고 치유하고

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비우고 참고 견딜 것을 기대하며 요구하고 있었으니까요.


예수가 여자였다면 그 하신 일들이 별로 의미 없었겠지요.

여자들은 원래 그런 존재들이니까 말입니다.


여자들은 난폭한 남성사회(간음, 성폭행, 강간, 이혼에 대한 편파적 태도를 미루어)에서

비폭력적이기를 기대 받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남성들이나 현행제도들이나

국가들에 비폭력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은 세상에 남자 몸으로 오셔야 했던 거예요.
불행히도 우리는 예수의 이름과 형상을 남성 리더십을 고양하는 데 활용하면서
피라미드 형식의 국가와 교회에서 통하기 어렵고 수상하기까지 한

그분의 대부분 가르침은 거절하고 있지요.


참으로 그분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 ‘현실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의도적으로 예수를 우리 종교체제에 맞는 모양으로 바꿨고

그 결과 인간의 악을 다루는 그분의 독특하고 혁명적인 전술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전쟁, 탐욕, 개인과 집단 에고의 끝없는 변덕과 망상에 대하여

도무지 속수무책인 우리 자신을 보게 되었지요.


이 모든 것이 누가 특히 나쁘고 못돼서 일어난 결과는 아니지만

악의 깊이와 위장술을 보여줍니다.


힘은 그 자체로 잘못된 건 아니에요.
그러나 매우 위험한 것이라서 

내 생각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그것을 다룰 수 있어요.


‘힘’은 성경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기도 한데,

모두에게 다양한 은사로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쓸 때 가장 효과적이지요.


오순절에 성령은 “모두에게”(사도행전 2, 1) 내려와

저마다 자기 안에 있는 은사를 알아보고 확인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진정한 권위예요.


그것은 내가 보기에 누가 알아주기 전에 스스로 입증되는 힘 같습니다.

인류 역사는 오늘 이 시대에 균형 잃은 남성 의식을 시켜서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를 우리에게 선물했지요.


하지만 둘 다 인류를 위한 공동선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둘 다 희생 위에 세워진 피라미드로서 진실과 정의의 순환을 두려워하지요.


우리는 예수가 로마제국의 권력구조를 모델로 삼아

당신의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코자 하셨다는 기록을 신약성경에서 볼 수 없어요.


나아가 어부 베드로 이야기에서

의심하고 서투르고 실수하고 부인하고 도망가는 모습 말고

신통한 기대를 품게 할 만한 무엇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을 고백하고 장차 있을 교회와 계급의 이미지를 미리 보여주기도 하지요.
예수는 그런 베드로를 사랑하시어 나약하고 부서진 그를 당신 교회의 기초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고 주류에 속하지도 못하고 정통성도 없고

심지어 죄인이기도 한 자들과 기꺼이 일하시겠다는 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가장(家長)들이 원치도 않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가부장제는 오류를 범할 수 없는 교황과 공손하고 쓸 만한 대중이 필요합니다.


권력에 대한 사랑은 설명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자들을 먹여 기를 여력이 없어요.

‘아버지들’(fathers)의 배타적인 규범은 공동체와 정의를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유식한 사제들만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구원론 차원에 묶어두었지요.


굶주린 백만 대중은 그보다 좀 더 나은(better) 하느님을 모실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가 아셨던 ‘아버지’(Father)를 모실 자격이 있단 말이에요.


놀랍게도 예수가 아셨던 하느님은 대부분 문화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미지와 가깝습니다.


루가복음 15장의 타락한 아들 이야기에서 예수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부르신 ‘어머니 같은 아버지’의 성품을 완벽하게 보여주십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네 가부장과 완전 반대되는 행동양식을 보여주고,

쓸모와 업적을 중시하는 세속의 관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맏아들을 거절하지요.


게다가 자기한테서 떠나겠다는 둘째아들을 용납할 뿐 아니라

비용까지 대줍니다! 

아들이 큰 실수를 저지른 뒤에도 가정의 질서를 회복하고
잘못에 합당한 벌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요.


둘째가 집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하는 것이

마치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밟아야 하는 과정으로 묘사되지요.

아버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부서지기 쉬운 상호관계를 지킵니다.


스리 산드라 슈나이더는 말했지요.
“이 신종(新種) 아버지는 우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여 복종을 강요하거나

우리의 반역을 벌주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고,

우리의 소외를 안타까워하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며

우리의 보잘것없는 사랑을 선물로 받아주신다. …


하느님은 큰아들을,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은총의 모험보다 안전한 법과 질서를 더 좋아하는 당신의 제자들을 가르치고자 하신다.”


그녀는 아찔한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를 강제하지 않는 하느님의 그 힘을 

하느님한테서 받아 그대로 쓰는 인간이 별로 없다.”
이 모든 ‘여자 나부랭이들’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존재들일 뿐 아니라

회심할 인간의 절반이요 구원받을 인간의 절반이고
하느님의 예술작품을 완성할 인간의 절반이에요.


이 신비가 요한묵시록 12장의

“뱃속에 아이를 가져서 해산의 진통 때문에 괴로워 울다가”
자기 때가 오기까지 광야에 피신한 여인한테서 잘 묘사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이 그때일까요? 그렇다고 나는 봅니다.


하느님의 아이를 낙태시킬 따름인 제국과 회사들,

펜타곤과 피라미드에 온 세계가 지쳐 있어요.


서양은 모든 인종, 성(性), 경제(특권과 소유!) 분야에서 시민 해방운동과 부닥치고,
교회 안에도 교회가 힘과 통제를 근거한 시스템과

주체적이고 불법적으로 결혼한 데 대한 두려움을 인식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지요.


여인이 광야 피난처에서 나오는 중인데 

그리로 돌아갈 가능성은 이제 거의 없어요.

우리 가운데는 그녀의 선물을 미리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룩한 아이의 지혜’(the Holy Child Wisdom)가 우리들 가운데 있고,

전망이 밝아오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어요.


확실히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 이 ‘여자 나부랭이’가 아주 중요해요.


여기 이 백인 사제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내가 아는 하느님은 너무 남성적이고 너무 작아요.
그래서 나는 여자와 어떻게 싸울 것인지 그 방법을 모릅니다.


내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여인(Her)을 사랑하고 그 여인의 선물을 받아 확인하고

그 여인이 본디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춘 전체임을 이해하는 거예요.


순수한 신앙은 싸우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무엇입니다.
지금 나는 여성이기도 한 하느님과 약혼하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확실히는 몰라요.


남자와 다투는 게임의 법칙은 웬만큼 알겠는데 여자와 다투는 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내가 결혼하지 않은 몸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겠지요.


하느님의 어머니 얼굴

나는 삼위일체를 믿지만,

우리가 하느님 어머니 얼굴을 찾아야 한다는 크리스타 물라크의 말에도 동의합니다.


성령을 여성으로 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도 되고 자연스럽다고 나는 생각해요.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하느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힘은

그것이 친밀하고 피차 부서지기 쉽게 여리고 대화에 아무 막힘이 없다는 점에서
여성적인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런 품성들이 물론 남자한테도 적용될 수 있지만

대부분 사회에서는 여성 전용으로 통하지요.


나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기도 중에 하느님의 어머니 얼굴을 본 사람들이 언제나 있어왔다고 믿습니다.

중세기 마리아 숭배나 그 뒤에 일어난 성심(聖心) 숭배도 그 중 하나라 하겠어요.


그러나 어쨌든 그동안

우리의 하느님 상(像)이 지나치게 남성적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나는 우리가 하느님의 여성 얼굴을 숭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봐요.


창세기는 그 점을 분명하게 말하지요.
우리는 남성이면서 여성인 하느님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존재예요.


이런 근거로 볼 때

하느님이 인간은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들이 그분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음은 분명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러니까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를 포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그늘

예수는 자주 안타깝게 말씀하셨지요.
“사람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소.”


당신이 언제 어디서나 소수자들 편에 선다는 것이 그분한테는 당연한 일이었어요.
당신의 공동체가 항상 적은 양떼로 남으리라는 것을 그분은 아셨지요.


누가 뭐래도 세계 전역에서 개인의 존엄에 대한 각성이 커지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 못할 사실이에요.


권력, 독재, 억압에 대한 불신도 마찬가지로 커지고 있지요.

하지만 이 나라는 여전히 힘의 신화 위에 서 있고

그 힘의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미국은 자기가 만든 그늘을 알고 인정해야 해요.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그늘과의 전쟁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너무 빨리 잊었어요.


마리아와 마돈나 콤플렉스

우리가 마리아를 한 인간으로 존재케 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봅니다.


가톨릭인 우리는 지나치게 그 반대 방향으로 표류해왔지요.
마리아를 우리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자세를 본받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럴 때 그분이 교회와 구원을 위하여 생생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를 떠받들고 그래서 오히려 그와의 진정한 관계를 가로막을 수 있어요.


어떤 여인을 대상으로 그럴 때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마돈나 콤플렉스’라고 부르지요.
우리는 마리아를 높은 대(臺)에 모셔놓고

그분을 가서 닿을 수도 본받을 수도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마리아를 민초들 차원에서 해방을 위하여 투쟁한 여인으로 보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아요.


그분이 그렇게 한 것은 물론 생명-보다-크신 하느님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나자렛의 한 가난한 여인의 신분으로 하신 거지요.


그래서 나는 마리아를

하느님에 의하여 선택된 한 ‘여인’으로 사랑하자는 말씀을 시방 드리고 있는 겁니다.


- 리처드 로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