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귀용부인 (Madame Guyon / 1648-1717)

은가루리나 2018. 7. 24. 10:57


Re:Re:역사속의 여성 신비가들(2) ★신비신학


moowee 등급변경▼ 조회 23 추천 0 2015.12.19. 01:34



제 2 부 : 근대기의 여성 신비가 들 (15세기 - 18세기)




- 들어가기 전에 --



15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여성신비가 들의 여정이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만일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의 경우가 하나의 대표적인 보기가 될 수 있다면, 

그럼에도 여기에 제시되는 큰 영성가 들은 

하느님의 현존에 관한 그녀들의 개별적인 체험의 특성들로부터 형성된 

독창적인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이후 가장 창조적이고 과감한 신비가 들은 

여전히 매우 위협적인 정치적인 힘과 교회의 체제적인 권위에 부딪히게 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肉化의 마리아 

그리고 귀용부인(Madame Guyon)의 예를 고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경우는 

그녀의 수녀원(맨발의 가르멜)을 개혁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 가장 큰 고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가르멜 수녀원을 그의 원래 정신으로 수복하기 위한 의지를 통해서 시도된 개혁은 

본질적으로 엘리야 (2 R 2, 25)의 모방으로 특징 지워지고, 

이는 가난과 고독과 기도에 대한 사랑이다. 


전형적인 데레사적 정신인 기도와 자기포기는 

이 당시의 여성신비가들의 ‘정관적인 사유’를 강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로는 빠지의 마리-마들렌느(Marie-Madeleine de Pazzi), 

육화의 마리아(Marie de l'Incarnation), 귀용부인 등이다 : 

“우리는 기도하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머리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기도 말입니다.”


결국 누가 성녀 데레사보다 정관과 행위를 그토록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었겠는가 ? 

성녀 데레사의 예는 철학자 베르그송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큰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 


“완전한 신비주의는 행위이다”. 

신비적인 상태에 대해 가해지는 가능한 정신병리학적인 오해들로부터 잘 보호해주고 있는 이가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외 또 누가 있겠는가 ? 


이 점에 대해서 성녀 자신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나를 믿으세요, 마리아와 마르타는 모두 함께 주님을 환대하여야 합니다. 

이 두 자매들로부터 항상 배워야 합니다. 

드실 것을 드리지 않으면서, 주님을 잘못 맞이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의 누이가 마리아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언제나 주님의 발치아래 있는 마리아는 어떻게 주님께 마실 것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 


마리아의 음식, 그것은 영혼들이 스스로 구원되고 주님을 찬미하기를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하여 영혼들을 주님께 데려가는 그것입니다.


15 세기와 16 세기에 있어서 큰 두 이름이 이태리의 신비주의를 특징지우고 있다. 

성녀 제노바의 가타리나와 빠지의 마리-마들렌느이다. 


이들은 하나의 참된 신학적인 교의와 연옥(혹은 고성소)에 대한 교의를 처음 형성한 

놀라운 내적인 여정을 이루고 있는데, 

이 교의는 ‘성 프랑스와 드살’의 영성에로 이어지고 있다. 


가타리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하나의 ‘순수한 행위’이다. 

그녀의 모든 사유는 이러한 근본적인 사고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하느님의 신성과 순수성에 관한 고려는 그 함축된 의미들로 보아 

‘위-데니(Pseudo-Denys)’의 ‘지복적인 사랑(l'Amour béatifique)’에 대한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그녀의 신학적 사상에서 다른 한 핵심적인 사고는 ‘자유의지의 동의’이다. 

이 의지는 죄인을 회계하도록 하기 위한 동기로부터 은총에 요청되어지는 필연적인 동의의 의지이다. 


그의 선임자였던 가타리나 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는 빠지의 마리-마들렌느의 경우, 

당시 그녀의 저서들 중 그 어느 것도 불어로 번역이 되어있지 않았었다는 것은 

퍽 애석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특히 성령(Esprit Saint)에 관한 그녀의 기술들은 놀라운 행복감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그녀는 우리에게 하나의 보석을 전달해 주고 있는 듯 하다.



15 세기에서 18 세기 동안은, 

신비주의의 무게 중심이 눈에 뜨일 정도로 

북유럽 (독일, 네들란드, 영국 등)에서 지중해연안의 라틴국가들로 이동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16 세기의 스페인은 마치 탁월한 신비가 들의 고장처럼 보여진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이 이러한 변화의 한 중심인 1527 년부터 느껴지게 된다. 


이러한 영성적인 흐름은 내면성(intériorité)을 보다 강조하게 되면서, 

신앙의 외부적인 국면들에 대해 내면성에 우선권을 부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종교적 권위의 영향이 약화된다. 

16 세기의 스페인에 있어서 성서에로의 복귀는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기도(oraison)의 실천의 경우, 

이때까지는 수도자와 성직자들에게 보류되어있던 것이 평신도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17 세기 초에 성 프랑스와 드살과 함께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이시대의 첫 영성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서로 매우 다른 두 여인이 이 시기를 장식하고 있는데 

육화의 마리아(Marie de l’Incarnation)와 귀용부인이다. 


육화의 마리아의 삶은 

정화들로부터 사도직과 신비가로서의 행위에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것이다. 

카나다 퀘벡에서 알게된 엄청난 전율들 안에서, 

이 여인은 이러한 신성한 교감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지니지 않은 체 

신랑(Epoux)의 방에 고독하게 남아있었다.





귀용 부인의 경우, 3 가지 단죄 

-- 얀세니우스 (Jansénius, 1653), 몰리노스(Molinos, 1687), 

페넬롱(Fénelon, 1699)에 대한 --를 통해서 

혼란하였던 세기의 마지막 고뇌 안에 휩싸이고 말았다. 


교회로부터의 이러한 단죄에 대한 자료는 

깐피엘드(Canfield)의 베느와(Benoît), 쉬렝(Surin)등에 의해 

다양하게 제시되어지고 있다. 


페넬롱과 거의 유사하게 

귀용부인 역시 ‘정적주의(quiétisme)’로 의심받고 있었다. 



이 ‘정적주의’의 개념은 

스페인의 가톨릭 신학자 몰리노스(Molinos)에 의해 영감을 받은 ‘영성주의’ 인데, 

이는 ‘영혼의 평화’와 ‘성령에 대한 자기포기’라는 

두 가지 중심사고 위에서 형성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범상치 않은 여인의 저서를 읽는데는 신중한 해석이 요청되어진다. 

그러나 정적주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그녀의 정신적 사상은 매우 분명하기도 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전혀 행위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은총의 행위에 의존하여서만 행위 하여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페넬롱의 벗들은 그들의 사고들을 지키는데 열정적이었고, 

그래서 골방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하는 어려움을 감수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저작들은 

각기 그들만의 고유한 현실성과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고 말하자면,

‘정적주의’는 17 세기말 크리스챤 영성의 위기들 중의 하나를 말해주는 것이다.



근대시기의 여성 신비가들에 대한 간략한 이해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다양성 안에서 발견되는 이들의 통일성 일 것이다. 


하나의 동일한 영성적인 열정이 세기를 따라 저서들을 통하여 전파되는데, 

이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기쁨의 물결이 되고 있다. 


이 기쁨은 빠지의 마리-마들렌느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때 

완전히 요약되고 있는 그 기쁨이다 :


하느님은 슬픔에 찬 가슴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자유롭고, 기쁨에 찬 마음을 원하십니다.



티에리 고세트.






제 1 장 : 제노바의 가타리나 (Catherine de Gênes / 1477-1510)


“인간적인 모든 것이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우리들의 하느님에 의해 완전히 변모되었으며,

이는 연옥(purgatoire)의 업적임을 잘 이해 하십시오.”

-- 연옥의 삼위, 제 17 장 --



제 2 장 : 아빌라의 데레사 (Thérèse d'Avila / 1515-1582)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 인내의 효력 --



제 3 장 : 빠지의 마리-마들렌느 (Marie-Madeleine de Pazzi / 1566 - 1607)


“인간을 보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볼 수 없을 만큼, 

그리고 하느님을 보지 않고서는 인간을 볼 수 없을 만큼,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다.”

-- 전집, t. 1 --



제 4 장 : 육화의 마리아 (Marie de I'Incarnation / 1599-1672)


“나는 하느님 안에서 나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의 하느님에 대한, 전체적인 부적합성을 봅니다.

마치 내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 기도에 관한 담화들 중에서 --






제 5 장 : 귀용부인 (Madame Guyon / 1648-1717)



“한가하게 거주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을 활기차게 하실 하느님의 성령에 의하여 행위 하는 것입니다.”

-- 간단한 방법 (Le Moyen court), 제 21 장 --




몽타르지(Montargis)의 한 귀족집안에서 1648년 4 월 13 일에 태어나 

후일 ‘귀용 부인’이 될 ‘쟌느’는 

어린 시절을 수녀원에서 아주 허약한 건강으로 보냈었다. 


1655년부터 아직 일곱 살 계집아이에 불과한 쟌느에게 

하나의 열렬한 ‘내적인 삶’에 대한 갈망이 나타났으며, 

12 살 되든 해인 1660년경에 

몽타르지의 ‘성모방문 수녀원’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그의 부모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664년에 부모들의 권유로 

당시 부자로 소문이 난 그 지방의 귀용(Guyon)영주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결혼생활동안 다섯 자녀가 태어나게 되고, 

그중 두 명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귀용부인의 기도와 피정에 대한 매력은, 

이에 대해 적대적이고 경멸적인 귀족집안의 분위기 안에서 

조심스레 조금씩 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든 해인 1676년부터, 

그녀는 자신의 참된 소명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녀의 영성적인 삶의 여정은 열악한 조건과 수많은 장애들을 극복하면서 

보다 더욱 그녀의 실존 깊숙이 뿌리내리게 된다. 


그녀의 ‘신비적 수동성(passivité mystique)’에 관한 이론 때문에 

그녀는 ‘정적주의(quiétisme)’로 의심을 받게되고, 

1688년부터는 여러 번 감금당하게 된다. 


1695년에서 1703년 사이에 

그녀는 5 년 동안이나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다. 

멩트농(Maintenon)부인의 압력 하에서 보쉬에(Bossuet)가 

그녀의 단죄 받음의 근원이었다. 



1688년에 귀용부인은 페네롱(Férelon)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의 영성적인 특성은, 그녀의 열성적인 진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귀용부인의 석방을 위한 페네롱의 

수많은 노력과 변호는 아무런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녀의 감금 이전에 이미 그녀는 정적주의자들 사이의 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그녀의 감금시기 동안에 개신교 목사였던 삐에르 프와레(Pierre Poiret)는 

그녀의 명성을 창조한 장본인이었다. 


1717년 6월 9일, 

열정적이고 깨끗한 하나의 영성적인 여정의 정상에서 귀용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영성의 근원들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이었다. 

제노바의 가타리나, 성 프랑스와 드살, 쟌드 생시몽(Jean de saint Samson),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의 영성에 영향을 미친 저자들이다. 


귀용부인의 정관적인 사유는 

‘내적인 고요’와 ‘신성한 본질 안에서의 완전한 자기소멸’로서 

대표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 소개되는 그녀의 저서들의 발췌본은 

『크리스챤적, 영적 서간들(Lettres chrétiennes et spirituelles)』(런던, 1767)과 

『내적인 삶을 위한 조언들

(Quelques conseils pour la vie intérieure)』(Fischbacher, 날짜불명)에서 

발췌된 것이다.






편지 82 : 내면을 잘 가꾸기 위해서는, 

기도 안에서, 독서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위 하시도록 

우리자신의 행위들과 수고들을 없이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신성한 말씀입니다.




I. 부인, 몇 가지 점에 관하여 당신에게 편지를 써보내기로 약속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나 스스로를 아주 조금밖에 정리하지 못했으며, 

또한 내가 가장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고 마는 나의 성격을 고백합니다. 


이미 얼마 전에 나는 부인에게서 

부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내적인 삶의 씨앗이 있음을 통찰하였습니다. 


나는 이 씨앗이 자라고 굳건히 될 수 있도록 

당신에게 이를 보여주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 씨앗은, 마치 아직은 전혀 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 한 꽃의 씨앗처럼, 

만일 이 꽃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싶게 소멸해 버릴 수 있는 그러한 것입니다. 


이는 건조한 겨울에도 자립할 수 있는 생명의 원리이며 

숨겨진 체로 거주하는 것입니다. 



부인, 이는 당신 영혼의 내밀한 곳에 존재합니다. 

이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당신이 세상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당신의 모든 본성적인 경향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무언가를 상기시키는 그것이며, 

이는 독서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스스로 자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는 당신을 내적으로 강하게 해주는 것이며, 

당신으로 하여금 보다싶게 묵상과 관상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또한 보다 자주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삶이 충분히 가꾸어졌을 때는 

보다 수월하게 고독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그런데 당신의 경우엔, 너무나 잘 하려고 하면서 

오히려 이 내적인 씨앗을 꽃피지 못하게 하고 맙니다. 


당신은 마치 땅에 씨앗을 심고는 쉬지 않고 일하는 부지런한 일꾼이 

철에 맞지 않게 일하면서 

씨앗이 싹트고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것처럼 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내적인 열매들을 산출할 하느님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고요 중에 이 씨앗이 싹트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당신은 이를 정 반대로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씨앗이 우선 내면에서 싹트고있는 것을 보는 대신에, 

이것이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멈춤 없이 뒤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씨앗이 심겨진 주위를 파 해치면서 

이 씨앗이 뿌리내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 할 때에 

만일 당신의 상상력으로부터 근심하지 않고 

당신의 내면 속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으며 

당신자신 속에 주의 깊게 머무신다면, 

당신은 이 내면 속에 숨어있는 것이 조금씩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하나의 평화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3. 따라서 당신의 정신에게 사고하도록 의무 지우거나, 

당신이 잘 사유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방식으로 추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가 수 차례 말한바 있는 

이 실체로부터 당신의 내면을 성장케 하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이러한 것은 당신의 독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독서를 하고있을 때, 어느 한 순간 강한 어떠한 것을 통하여 

당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될 때는 

당신이 읽으신 것을 적용하거나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단순하게 이 내면으로 물러나 그 안에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부인이 하느님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면서 관심을 가지는 이 세부적인 것들은 

오히려 부인께서 맛보시는 ‘성사’의 기쁨을 제거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성한 단순함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이 충만해지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리고 일단 한번 이 충만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당신은 당신자신의 내면에 하나의 보석을 가지게 될 것이며, 

이 보석은 당신이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께서 부인에게 이 보석을 주실 때, 

부인께서 부인의 마음을 충만하게 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이 보석이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있는지 그 맛이 어떠한지

 또 그 향기는 어떠한지를 검토하면서 스스로 즐기고자 한다면, 

당신은 이 보석을 어쩔 수없이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에 비추어 결국 내가 부인에게 말하고자하는 것은 

당신의 내면이 하느님으로부터 채워지도록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을 이해하는 그 만큼 

당신이 진보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머무시는 것에 참으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이나 미래 어느 날 행해질 제 일들을 미리 보시고자하는 

부인의 열정적인 기질로부터 오는 자연적인 행위들을 잊어버리십시오. 

하나의 효과적인 시도는 오래 걸리는 법입니다.



4. 자기 자신과 싸워야하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주인이 되시도록 내버려두는 것, 

이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몇 년씩 걸립니다. 


당신의 내면이 성장하도록 유념하십시오. 

이를 통해서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결함들을 교정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내면적인 삶의 노력들을 통하여 당신의 민첩함이 높이 오르고자 원할 때, 

어느 순간 갑자기 우울증이 멈출 것이며, 조금씩 감소해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당신은 당신자신에 대한 무한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인내심이 없이는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코 용기를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길고 먼 길에 대해서 결코 지루해 하시지 마시고, 

하느님께서 이를 인내하시는 것처럼,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맛보고 있으며, 

당신정신의 거북함은 

당신마음의 성사의 자유(la liberté de l'onction)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 크리스챤적, 영적 서간들 --




편지 170 : 완전히 정화된 믿음 안에서 매순간 하느님께 의탁하며, 

매순간 하느님의 섭리를 통해서 인도되기 위해 자신을 놓아두어야 합니다.


왜 하느님께서 이러한 길로 인도하시는지 알고자 하지 않고, 

미래를 알려고도 하지 말며,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따르듯이 

그렇게 우리자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여야 합니다. 


어떠한 안전함의 보장도 가지고자 원치 말며, 

우리들 자신의 시도들을 하느님께 완전히 포기합시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하느님께 의탁하였을 때, 

하느님은 섭리의 기적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확실함 들을 원한다면, 

그때, 우리는 오류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위해서, 모든 확실한 보증들을 잊어버립시다. 


헤아리지 말고,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자 하지 않은 체 길을 갑시다. 


일 하느님께서 우리가 길을 잃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이는 의심할 것 없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일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치 배가 물위를 가듯이 그렇게 가야 합니다. 

이 배는 자신의 앞이나 뒤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를 않습니다. 

걷기 전에 그 어떤 것도 원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쳐갈 그 어떤 장소에도 오래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들 각자 모두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진리의 새로운 길을 어느 날 엔가 마련하실 것입니다. 


이는 매우 확실한 신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있어서만 우리의 믿음을 가장 확실하게 인지할 수가 있으며, 

하느님의 의지를 감각적인 방식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을 

전혀 원치 않는 우리들의 포기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의지를 분명히 알고자 하는 이 원의를 잊어버립시다.




편지 171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근심을 가지지 않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순수한 포기 :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완전히 순수하고 벌거벗은 모습을 원하십니다. 

이 지상의 삶에서부터 하느님에게 일치된 영혼들...



1. 나는 당신에게, 당신에게 일어날 그 어떤 것도 보류하는 것 없이, 

완전히 하느님께 투신할 수 있도록 간청합니다. 


우리자신으로 하여금 근원도 없이 

우리자신을 상실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보류된 것들에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바깥 그 어떤 것에서도 우리들의 묘약을 찾고자 하지 않는 지조와 굳건함,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당신의 그 어떤 것도 제외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멀리 당신을 데려가고자 원하신다면, 

당신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너무 자주 바라보고자 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느 순간 나는 당신에게 

영성적인 삶에 대한 옛 습관들에 대해서 써보내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끼었고, 

당신에게 이를 주의 깊게 잃어보실 것을 청합니다. 

당신은 어디를 통하여, 

어떠한 영성적인 특별함에 이를 수 있는 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나 자신의 그것과 아주 유사한 영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매개체 없이 발견하였고, 

이는 나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나를 전혀 섭섭지 않게 하였음을 믿게 하였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어떠한 실수를 허락하게 하셨다면 

이는 오직 당신스스로가 당신을 정화할 수 있도록 하는 기쁨을 위해서만 그렇게 하셨으며 

나아가 당신에게 어떠한 도움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일종의 질투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신이 그리 많은 댓가를 치르지도 않고 

하느님께 도달한 것의 한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당신은 하느님에게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비참함 가운데에 던지시거나 영광의 관 위로 들어올리시거나 

이는 더 이상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관심을 가져야 할 유일한 일은 

더 이상 당신자신을 (하느님 없이) 스스로 다시 취하지 않는 것이며, 

사람들이 당신을 심연 속에 던지는지 영광의 관 위로 들어올리는지를 바라보지 않으면서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홀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당신에게 아직 여전히 포기해야할 것이 발견된다면 

오직 이를 위해서만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고유한 이익들은 더 이상 당신에게 관심 밖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든 세상에서 살게 하시든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당신에게 중요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때보다도 당신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실상 당신의 지반이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이 유일한 진리가 아닌 것은 모두 던져버리신 것이며 

또 던져버리실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 스스로에 있어, 그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 크리스챤적 영적 서간들 --




편지 260 : 거의 모든 크리스챤들이 현실적인 삶에서 

내적인 것 (영성적인 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



당신이 나에게 

“왜 거의 모든 크리스챤들이, 이 내적인 것(영성적인 것)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가 ?” 

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크리스챤의 외관만을 지니고 있으며 

그 실재를 지니고 있지 않은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부분은 ‘내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내적인 부분(내면)을 통해서 

우리 크리스챤들의 원리인 그분의 계획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며, 

이 원리를 통해서 그리고 이 원리 안에서 

우리가 ‘크리스챤’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외적인 것에만 집착한다면 

그리스도가 그토록 많은 노력과 함께 

참된 크리스챤이 되게 할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참된 크리스챤이 되게 할 것들은 

우리자신에 대한 포기 정신적인 가난 매일의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이 걸어간 길을 통해서 우리도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이 어떠한 길을 걸었습니까 ? 


침묵을 통해서 피정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성실한 삶을 통해서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우리들의 ‘길’이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를 자기포기의 좁은 길로 인도하시고자 그 길을 직접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그분이 우리들의 진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빛 안에서 빛날 수 있도록 해야하며, 

거짓 빛들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참된 삶이 아닌 다른 모든 삶들, 

즉 아담이나 카인의 삶을 던져버리고 그분의 삶을 취할 수 있도록 

그분은 우리들의 수준에서 삶을 취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삶이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자립하면서, 

그분은 곧 우리들의 삶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상태, 파괴의 상태, 전복의 상태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직, 낡은 인간의 삶을 의복처럼 걸치고 있을 때 뿐 입니다. 

이 낡은 인간의 삶은, 우리가 원할 때는 언제나 치워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삶 역시 정신화(영성화) 된 것이며, 

마치 우리의 영혼과 반죽이 된 것과 같은 그러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고통들 시련들 그리고 유혹들을 유발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들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이 낡은 인간의 삶을 떠날 때에만 

우리들 크리스챤의 삶인 그리스도의 삶을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낡은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십시오” 라고 

성 바오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 


보십시오 바로 이것이 크리스챤의 삶에서 첫 머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그 자신에게 생명을 가지고 있었으니 만큼, 

이 생명은 다른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오직 장애물들이 제거되어진 이들에게만 전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자신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며,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잃은 자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취한 우리의 고유한 삶에서 벗어나는 한도 내에서 

이 빛의 삶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이 빛의 삶을 가지기 위해서 창조되었고, 

이 빛의 삶이 우리들의 참된 삶이 될 것입니다. 


뱀이 그의 사악한 입김으로 오류에 빠지게 하기전의 아담의 삶은, 

참된 생명인 그리스도의 삶의 한 모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죄이후 주님께서는 그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

-- 크리스챤적 영적 서간들 --




많은 사람들이 “내적인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외적인 일들로부터 떠나야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통해서 

그들의 내적인 삶에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내적인 삶과 반대되는 어떠한 외적인 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외적인 일들을 포기해야 하거나 세상을 등져야할 어떠한 필연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내적인 것을 외적인 세상에 방산 하고자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 내적인 삶 --



주님께서 ‘쉬지 않고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분은 하나의 불가능한 것을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송기도’나 ‘묵상기도’ 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결코 끊임없이 지속되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행해질 수 있으며, 

그 무엇도 이를 중단시킬 수 없는 하나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지속적인 마음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가져다주는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사람들은 이를 자주 

우리자신에게서 우리자신의 노력 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하곤 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 내적인 삶 --




사람들은 ‘정관을 위해서 행위하지 말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은총의 움직임들에 의하여 행동하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자신에게 거주하며, 

우리자신에게 생기를 줄 성령을 통해 움직이도록 자신을 배려하여야만 합니다. 

-- 기도(Oraison) --



기도(Oraison)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이 기도를 상실한다면, 

우리는 우리자신의 진리를 다만 우리자신만으로 선포해버리게 될 것입니다. 

-- 기도(Oraison) --




침묵은 하느님께서 우리자신에게 행위 하실 수 있도록 자유를 드리는 것이며, 

이는 우리자신에게 하느님의 의지와 그 순수한 사랑을 각인하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침묵에로 초대하실 때, 우리는 대화를 중단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하실 때에는, 

말해야 할 것들을 찾으려 하지말고,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말을 하도록 합시다. -- 기도(Oraison) --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되지 않고는 내면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입니다. 


자연적으로 우리자신인 것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자신이 되어지는 것은 바로 이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에 평화와 고요를 주는 것은 바로 이 기도이며 

우리들의 의무들을 완전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바로 이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모든 사건들에 대하여 공정한 정신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역시 이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완전히 하느님의 의지에 일치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눈에 보이지 않게 이끌며, 

감각적으로 유쾌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 기도(Oraison) --




세상을 이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이탈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 자신으로부터의 이탈 --



하느님과의 평화는 

전체적인 재 교정(désappropriation)을 통해서만 완전하게 됩니다. 

이 평화는 우리자신의 평화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의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 자신으로부터의 이탈 --




사람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세요. 

람들에게 한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한탄해야할 분은 오직 하느님 뿐 이십니다. -- 몇가지 사유들 --



미래에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불행한 사태는 가급적 보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영혼이나 육체를 어둡게 할 하나의 ‘우울함’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반면 명랑함은 우리들의 마음을 넓혀줍니다. -- 몇가지 사유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