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서문

은가루리나 2018. 7. 21. 10:40



예전에 쟝 삐에르 드 꼬사드의 저서로 간주되었던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예수회 도미니끄 살랭 신부에 의한 개정 신판



크리스투스 총서



DDB desclée de brouwer

BELLARMIN




예전에 쟝 삐에르 드 꼬사드의 저서로 간주되었던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예수회 도미니끄 살랭 신부에 의한 개정 신판




Collection Christus N° 90

Textes


DESCLÉE DE BROUWER



p.4



목차



서문......


 텍스트의 역사 ......

 사건과 “하느님의 명령”...

 “마음속에 새겨지는 복음”......

 “꼭꼭 숨어계신 미지의 하느님”...... 

 위기의 시대를 위한 신비주의 ...... 


제1장.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말씀하시고 계시며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   


제2장. 내맡김과 수동적 상태에서, 그리고 그 상태에 이르기 전에 역사하시는 방식 ...... 


제3장. 내맡김의 상태가 요구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내맡김의 다양한 효과들 ...... 


제4장. 동일한 주제의 연속 : 내맡김과 그것의 필요성 그리고 그것의 경이로움에 관하여 ...... 


제5장. 순수한 신앙 상태에 대하여 ...... 


제6장. 동일한 주제의 연속 : 순수한 신앙 상태에 대하여 또는 신적 활동에 내맡김에 관하여  ...... 


제7장. 하느님의 명령이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기를. 

각광받지 못하고 담담하게, 부지런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성화시키시는 몇몇 영혼들에게 비쳐지는 이 명령의 표면적 빈약함에 관하여 


제8장. 영혼의 성화 작업 속에서 그에게 맡겨진 몫의 일과, 

의무와 그 의무를 완수하는 충실성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 

그 밖의 일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 


제9장. 하느님의 탁월하신 뜻과 현 순간에 대하여 ......    


제10장. 영성의 모든 비밀은 

앞으로 행해야 하고 참아내야 할 모든 일을 위해 하느님의 거룩한 뜻과 결합함으로써,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다 ...... 


제11장.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긴 상태에서, 어둠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신앙 행위이다  ...... 




p.6



서문



사십년 전 미셸 올프 갈리아르 (Michel Olphe-Galliard) 신부가 

“크리스투스” 총서 (collection « Christus»)를 위해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L'Abandon à la Providence divine.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또는 ‘내맡김’으로 번역)을 개정 출판한 이후, 

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소개가 요청되었다. 


그리고 텍스트 자체도 수정과 주석을 필요로 했다. 

특히 텍스트에 대한 소개가 더 이상 꼬사드 연구의 현 상태에 부합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더 이상 쟝 삐에르 드 꼬사드 (Jean-Pierre de Caussade 1675-1751)를 

이 저서와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대다수 서간의 저자로 간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텍스트들의 가치가 손상된 것은 아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호머의 작품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에도 

이 작품들의 시적인 힘은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성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Saint Denys l'Aréopagite)가 

신비신학 (Théologie mystique)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독교 전통에 미친 이 저서의 영향력이나 작용을 조금도 없애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제2제정 이후 꼬사드의 작품이라고 간주되던 글들을 읽으며 자란 세대들은 

절대 착각의 희생양들이 아니다. 


내맡김에 대해 

“이 책은 내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필요한 책들 중 하나이다”라고 쓴 

드 푸꼬 (de Foucauld) 신부와 같은 이가 그러하다. 


또한 로마노 과르디니 (Romano Guardini)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Hans Urs von Balthasar)와 같은 신학자들이 그러하다. 


후자는 자신의 저서 영광과 십자가 제4권 (La Gloire et la Croix  t. IV)의 

여러 페이지를 이 개론서에 할애했다. 


그는 이 개론서 안에서 

“라인강변 신비가들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의 성 요한 (Jean de la Croix)을 거쳐 프랑스인들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모든 신비주의와 페늘롱 (Fénelon)의 사상이 

“놀랍기 그지없는 단순함으로 통일성을 이루며” 요약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p.7


텍스트의 역사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이 텍스트의 유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의 출판과 관련된 역사를 간략히 훑어봄으로써 

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1861년 기도의 사도직 (Apostolat de la Prière)

예수회 책임자인 앙리 라미에르 (Henri Ramière) 신부가 

자신이 직접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이라 이름 붙인 책을 출판했을 때, 

그는 자신보다 한 세기 전에 살았던 뚤루즈 지방 출신의 예수회 

“쟝 삐에르 꼬사드 신부 (R. P. Jean-Pierre Caussade. 이름에 ‘드’가 없음.)를 

이 글의 저자라 여겼다. 


꼬사드 신부는 1741년에 제1판이 발행되었으나 

신중함에서인지 조심스레 그 저자가 익명으로 남아있는 책, 

그러나 샹빠뉴 지방의 유명한 예수회 신학자 

뽈-가브리엘 앙뚜완느 (Paul-Gabriel Antoine) 신부에게 출판 허가가 주어졌던 

그 책의 발행에,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하여튼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책은 바로 

모 주교, 보쉬에씨의 교리에 의거하여 

여러 다른 기도의 상태들에 관해 대화 형식으로 된 영적 지침들 

(Instructions spirituelles en forme de dialogues sur les différents états 

d'oraison suivant la doctrine de M. Bossuet, évêque de Meaux. 

‘영적 지침’으로 줄여서 씀.) 이다.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17세기 말 귀용 (Guyon) 부인의 교리로 촉발된 “정적주의 논쟁”에서 

보쉬에와 페늘롱을 대립하게 만들었던 

영적 삶의 문제들에 대한 반향이라 할 수 있다. 


페늘롱은 귀용 부인과 그녀의 내맡김의 영성, 

그리고 그녀의 사심 없는 사랑, 즉 “순수한 사랑”의 영성을 변호했다. 


영적 지침은, 보쉬에의 교리를 소개한다는 명목 하에, 

사실은 페늘롱과 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던 유죄 평결을 받은 

귀용 부인의 교리를 상술하고 있다. 




라미에르 신부가 출판한 원고는 프랑스 혁명의 풍파를 거친 것이었다. 

이 원고는 몽미라이으 시 (마른느 주) (Montmirail (Marne))에 위치한 

나자렛 부인들 (Dames de Nazareth)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는데, 

육필로 기재된 바에 따르면, 

파리 방문회 (Visitation de Paris) 제 3 수도원 소유였다. 


방문회 수녀들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고, 

왕정복고 하에서 나자렛 연구소를 창설한 두도빌 (Doudeauville) 공작부인이 

혁명기와 제정기 하에서 이 원고의 소유자였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머리말을 보면 

이것은 “한 성직자가 수도회 수녀원장에게 쓴 편지들”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게다가 우리는 표제지에서 

“저자는 예수회의 꼬사드 신부”라고 적힌 글을 읽을 수 있다. 


라미에르 신부는 이러한 정보들을 그저 단순하게 사실로 믿어버렸다. 



 p.8


        그렇지만 그는 

몽미라이으의 원고 본문에 약간의 순서를 잡아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가 보기에 필사자가 이 편지들을, 아니 이 발췌한 편지들을 

일관성 따윈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저 나열해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을 11장으로 나눈 것뿐만 아니라 

각 장에 붙여진 제목들도 그에게는 자의적인 것처럼 보였다. 


라미에르 신부는 서언(序言)에서 

“이 작품의 제목 자체

“완전한 구원의 참된 지혜를 발견케 하는 개론서 

(Traité où l'on découvre la vraie science de la perfection du salut)〕도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어떤 단서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 개론서의 교리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제목을 이 책에 붙임으로써, 

이 책을 그가 속한 전통, 

다시 말해 

성 프랑수아 드 살(saint François de Sales. ‘성 프란체스코 살레시오’로도 번역됨.) 의 뒤를 이어 

귀용 부인과 페늘롱이 적극 권장하던 “내맡김”의  전통에 전통 속에서 

이 책의 이름을 올리게 된다. 


특히 그는 자신에게 좀 더 “논리적”으로 보이는 순서일 뿐만 아니라,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은 독자들을 오류로 이끌 위험이 있는 

너무나 신비주의적인 성찰 안에 

“건전한 신학”이라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공인교리에 

어떻든 간에 좀 더 잘 부합하는 순서를 채택함으로써 

이 개론서를 구성하는 “사고들”을 재분배했다. 



사실, 같은 시기 이 원고에 대해 알고 있었던 

또 다른 예수회원인 일레르 (Hilaire) 신부는 

이 원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이 원고는 영적 지침을 쓴 저자의 작품일 리가 없고, 

가장 기만적인 조명주의(照明主義) (illuminisme)로부터 영감을 받은 

한 “영지주의자”의 작품이다. 


따라서 라미에르 신부는 텍스트를 세밀하게 분석하였고 분할하여 

그 텍스트의 소재를 두 “부분”, 

즉 모든 이들에게 권장할만한 내맡김의 “미덕”과 

예외적인 영혼들에게 운명처럼 지워진 적용되는

“수동성 passivité”을 특징으로 하는 내맡김의 “상태”로 구분하였다. 



몇몇 “불필요한 부분들”이나 “과장된 부분들”을 삭제하고 

몇 군데를 “땜질” 함으로써 

이 개론서는 드디어 “정적주의”(Quietism)라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끝으로 라미에르 신부의 서언은, 

전통적 교리의 시각에서 볼 때, 

개론서가 충분히 강조해주지 못하고 있던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것은 바로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한 신적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뒤에 나온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출판본들은 

꼬사드 신부의 것으로 여겨지는 편지들이 추가됨으로써 풍요로워졌을 것이고

양적으로 더 풍부해지고 

이로 인해 이 책의 분량은 최소한 세 배로 늘어났으며, 

사람들 머릿속에 

이 예수회원은 표현력이 풍부한 영적 작가였다는 확신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p.9


사실, 1730년과 1739년 사이, 

꼬사드 신부가 두 번에 걸쳐 사제직을 수행했던 도시인 

낭시에 자리한 방문회 수도원은 

라미에르 신부에게 

수도원의 고문서관에 꼬사드 신부의 다른 많은 편지들과 

이 편지들에서 보이는 것과 동일한 교리를 전개시켜 나간 소견서들이 

보관되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글들은 꼬사드 신부가 

이 수도원 수녀들이나 이 수도원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 앞으로 쓴 것이었다. 


물론 이것들은 원본이 아니었고 사본, 

다시 말해 게다가 사본의 사본이었다. 


그리고 라미에르 신부가 출판한 개론서를 구성하는 편지들의 수신인은

다름 아닌 로템부르그 수녀 (Mère de Rottembourg)로 보이는데, 

이 수녀는 꼬사드 신부가 그곳에 드나들던 시기에 수련수녀들 수련장이었다가 

뒤에 수도원장이 된다. 


라미에르 신부는 바로 이러한 시각을 따랐다.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제5판 (1867)은 꼬사드 신부의 편지 129통을 소개하고 있다 

(그 사이에 저자의 이름이 “쟝 삐에르 드 꼬사드 (Jean-Pierre de Caussade)가 됨). 


라미에르 신부가 또다시 기획한 제8판에서는 149통의 편지를 소개하고 있고, 

방문회 수녀들의 정기간행물인 성모 마리아 방문회 수녀들의 성년지(聖年誌)

(L'Année sainte des Religieuses de la Visitation Sainte Marie)에 발표된 연구 작업에 비추어 

그 편지 수신인들의 이름까지 공개하고 있다. 


라미에르 신부는 자신이 개론서에 한 것과 같은 동일한 “정리” 작업을 

편지들에 대해서도 했다고 밝혔다. 


편지들은 

내맡김의 “미덕”, 내맡김의 “상태”, 내맡김의 상태에 내재된 시련들을 중심으로 

“일곱 주요 항목 아래” 재분류되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들을 담고 있는 몇몇 편지들은 분리되어졌다.” 

라미에르 신부의 작품은 1934년에 22판까지 나올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예수회의 미셸 올프 갈리아르 (1900-1985) 신부는 

꼬사드의 글에 원래의 신선함을, 아니 그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육필 원고가 지닌 신선함을 회복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크리스투스” 총서에 두 권의 서간집 

(Jean Pierre de CAUSSADE, Lettres spirituelles, Desclée de Brouwer, t.1, 1961 ; t. 2, 1964.) 과 

원 상태 그대로의 몽미라이으 원고

 (Jean Pierre de CAUSSADE, L'Abandon à la Providence divine, Desclée de Brouwer, 1966.) 

분리해서 출판했다. 



끝으로 그는 그 자신이 꼬사드가 쓴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원고이자, 

앙뚜완 신부와 로마 가톨릭 검열관들이 개입하기 이전 

영적 지침 제2권의 최초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원고를 

마음의 기도에 관한 개론 

(Jean Pierre de CAUSSADE, 

Traité sur l'oraison du coeur. Instructions spirituelles, Desclée de Brouwer 1981〕. 

이 작품은 ‘영적 지침’ 2권의 최초 상태와 최종 상태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이라는 제목 하에 출판했다. 



이 원고는 낭시에 있는 흐퓌즈 (Refuge. 피난처라는 뜻 (역자 주)) 수도원의 소유였다. 


이 원고는 최종 텍스트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귀용 부인의 교리, 

특히 그녀의 저서 

기도를 하는 매우 짧고 쉬운 방법 (Moyen court et très facile de faire oraison)이 

끼친 영향을 잘 보여 주었다.


p.10


        이 출판본들과 병행하여 미셸 올프 갈리아르가 출판한 연구서들은 

예수회원이자 살레시오회 수도사며 페늘롱주의자, 게다가 또 귀용주의자인 

쟝 삐에르 드 꼬사드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강화시켜주었는데, 

18세기에는 이런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다음 자료 참조. 

M. OLPHE-GALLIARD, « Le P. Jean-Pierre de Caussade, directeur d'âmes »,

Revue d'Ascétique et de Mystique, 19 (1938), p. 394-417 et 20 (1939), p. 50-82 ;

« L'Abandon à la Providence divine et la tradition salésienne », 

Revue d'Ascétique et de Mystique, 38 (1962), p. 324-353. .)


예로써 

밀레(Milley) 신부 (1668-1720)와 그루 Grou)신부 (1731-1803)를 들 수 있다.



꼬사드 신부는 단지, 신중함이나 겸손함 때문에, 

앙뚜완 신부 뒤에 숨어 잘 나서지 않는 영적 지침의 저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을 쓰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로렌느 지방뿐만 아니라 남프랑스에서의 그의 엄청난 영적 위광은 

사람들로부터 제공받은, 

그를 둘러싼 주변 정황이 상세히 묘사된 서한들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렇지만 해가 지남에 따라, 

올프 갈리아르에 의해 구축된 그의 이미지가 다소 퇴색되었을 것이다 

퇴색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 자체가 미스테리한 존재였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역사적 자료들을 보면, 

그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1675년 께르시 (Quercy)에서 출생했다. 

그의 이름은 꼬사드인가, 드 꼬사드인가? 


예수회 목록에서, 그의 이름의 소사(小辭) ‘드’는 

낭시에서의 두 번째 체류 이후에야 비로소 (비규칙적)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이 목록들을 보면, 이 신학 박사가 일단 그의 본고장에서 꼴레쥬 

(역자 주 : 이 당시 꼴레쥬(collège)는 현재의 중학교를 가리키는 꼴레쥬와 달리, 

중고등학교 과정을 다 포함한 중등교육 기관이다. 

간단히 말해, 꼴레쥬는 초등교육과 대학교육의 중간 과정을 맡고 있다.)에 속한 사람, 


즉 교사 혹은 학생 감독이었고, 

그의 상급자들은 그가 한 곳에 오래 머물도록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으며, 

그에 관한 보고서에서 그의 판단력 결핍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가끔 분별력이 없다 (prudentia aliquando indiscreta).)


1720년부터 꼬사드 신부는 

끌레르몽 페랑, 생 풀루르, 르 쀠 (Clermont-Ferrand, Saint-Flour, Le Puy)에서 

영성 혹은 설교 사목에 전념한다. 


1724년에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예수회가 있는 샹빠뉴 지방과 보베 (Champagne, Beauvais)시에서 

설교사와 도시 선교사로서 머물게 된다. (p.11)


1730년과 1731년 낭시에서의 첫 체류시, 

그는 바로 이런 자격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예전에 뽕 따 무쏭 (Pont-à-Mousson)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앙뚜완 신부는 

이 두 해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그곳에 있었다).


꼬사드는 방문회 수도원과 그와 연결된 수녀원들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이 첫 체류를 보면, 

그가 쓴 것으로 짐작되는 몇몇 한담강연문과 영성 지도용 서신들을 제외하고는 

그의 특별한 위광을 보여주는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1731년에 그를 그의 본고장에,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알비 (Albi) 신학교에 다시 불러들인 것일까? 


그 어디에도 경솔한 설교 때문이라는 가정을 뒷받침해줄 근거가 없다. 

2년 동안 낭시를 떠났던 꼬사드는 다시 이 도시로 돌아와 6년을 머무르게 된다. 


그는 1733년 대림절과 그 다음에 오는 사순절에 

로렌느 궁정 조신들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는데, 

그를 “드 라 꼬사드 신부 (P. de la Caussade)”라고 명명하고 있는 회계 문서들이 

이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예수회 팸플릿들에 따르면, 

그는 1737년에 

그가 원장을 맡게 되는 낭시의 영성수련원에 피정자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로렌느 지방의 도시 선교에 참여한다. 


1739년에 그는 자신의 본고장으로 아주 돌아와, 

페르피냥 꼴레쥬 교장직 

(1741년 페르피냥, 낭시, 뚤루즈, 리용에서 영적 지침이 출판된다)을, 

그리고 그 뒤에 알비 꼴레쥬 교장직 (1742년)을 맡는다. 


1747년 뚤루즈 신학교에 은거한 그는 1751년에 그곳에서 선종한다.




        보다시피, 

이 전기적 자료에는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이 앞으로 맞게 될 

예외적 특별한 행운을 점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그의 인물 됨됨이가 녹아 들어간 녹아 있는 칙칙한 잿빛 분위기로부터 

꼬사드란 인물을 끌어내 줄 끄집어 낼 어떤 특기할만한 문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확인된 사실들과 여타 다른 이유들로 인해 

그때까지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던 자료들을 지난 수년간 재검토하게 되었다. 


라미에르 신부에 의해 구축되고 올프 갈리아르 신부에 의해 강화된 

주요한 영적 저술가로서의 꼬사드의 이미지는 이런 재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을 필두로, 

앞으로는 확신을 가지고 

그를 뭔가 대단한 작품의 저자로 여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p.12


        우선, 

꼬사드를 이 개론서의 작가로 간주하기에는 

이 개론서의 문체나 영감이 원본으로 간주되는 편지들이나 

마음의 기도에 관한 개론서 (Traité de l'oraison du coeur)의 글쓰기와 

너무 대조를 이룬다. 


물론 거기에 나온 교리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개론서가 지닌 풍부한 표현은 

다른 글들이 보여주는 간결함과 뚜렷이 구분된다. 


올프 갈리아르 자신도 만년에 이 점을 인정했다. 

1979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뚤루즈 가톨릭 연구소의 교회 문학지 (Bulletin de Littérature Ecclésiastique)에 

실린 심화 연구 작업을 통해 

우리는 제1장은 드 꼬사드 신부의 편지 한 통을 복사한 것이나, 

그 뒤를 잇는 장들은 

귀용 부인의 필치와 비슷한 필치를 지닌 저술가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Jean Pierre de CAUSSADE, 

Traité sur l'oraison du coeur. Instructions spirituelles, Desclée de Brouwer 〔1981〕, 

Introduction, p. 44, n. 17. P. Olphe-Galliard의 연구 논문, 

« Le P. Jean-Pierre de Caussade et Madame Guyon », 

Bulletin de Littérature Ecclésiastique, t. 82/1, janvier 1981, p. 25-54.)


” 그는 사망하기 일 년 전 그의 마지막 저서에서,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첫 장에서 조차도 

“위험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설프게 몇 군데를 고쳐 씀으로써 

꼬사드 신부의 사상이 왜곡 (고해신부들 역할의 명백한 상대화, 그리고 예를 들어, 

수태고지는 다른 사건들 중에서 영적 사건으로 간주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이다.)"

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의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서언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든 간에, 

그 뒤에 나오는 개론서의 글은 

드 꼬사드 신부의 서간체로 쓰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낭시 방문회 수녀들의 영적 지도자였던 그의 사려 깊은 온건함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귀용 부인으로 대표되는 신비주의적 흐름의 영향을 받은 작가의 글과 관계가 있다. 

(M. Olphe-Galliard, 

Théologie mystique en France au XVIII siècle : le Père de Caussade, Beauchesne, 1984, p. 187.)




       사실은 개론서 전체가 익명의 귀용 부인풍의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 


쟈끄 가죄 (Jacques Gagey) 신부는 

꼬사드의 서로 다른 원고들을 처음부터 다시 완전히 재검토하면서, 

라미에르 신부와 교류했었던 낭시 방문회 문서 담당 수녀인 

페르벨 (soeur Fervel) 수녀의 편지를 

안시 방문회 수도원 고문서 보관소에 새롭게 정리해 넣었다.에서 발견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그녀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신앙심의 발로에서, 

라미에르 신부로 하여금 

꼬사드 신부가 로템부르그 수녀원장에게 보낸 일단의 편지들이 내맡김이며, 

그녀가 그에게 전해준 수도원 소유의 많은 편지 사본들의 저자가 

꼬사드라고 믿게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알 수 있다. 



그녀가 라미에르 신부를 이렇게 착각하도록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그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먼저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꼬사드가 이 작품의 저자라는 주장을 확증해 줄 신빙성 있는 증거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몽미라이으 원고에서 발견되는 꼬사드에 대한 언급 자체도 

논거의 증거로서의 가치를 지니기에는 너무 빈약한 방증이다.


p.13


        결국, 쟈끄 가죄가 보여주었듯이, 

우리는 단지 서른두 개의 일련의 편지들만이 꼬사드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편지들은 

그가 1731년부터 아직까지 신원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로렌 지방의 한 부인 앞으로 보낸 것이다. 


우리는 이 부인이 

자신의 영적 지도 신부가 남프랑스로의 복귀 명령을 받고 돌아간 것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있으며, 

꼬사드가 다시 낭시로 파견되도록 

자신의 지방 상관을 상대로 뭔가 일을 꾸미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꼬사드는 그녀에게 체념을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신의 섭리에 맡길 것을 권고한다. 


성령이야말로 진정한 인도자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를 대신할 영적 지도자 없이 그 부인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인의 기도가, 아니면 그녀의 술책이 통했다. 통했는지, 


꼬사드가 꼬사드는 1733년에 6년 임기로 다시 낭시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파견되었다. 



꼬사드식 작법의 거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인 이 편지들, 

지칠 줄 모르고 텍스트들을 베끼고 또 베끼기를 거듭하던 필사자들이, 

진정한 선의에서, 

이 텍스트들에 가하는 “수정”과 “개선” 작업을 용케도 피할 수 있었던 

이 일련의 편지들에 나타나는 문체는 개론서의 서정성과 대척점을 이룬다. 




        만일 이 개론서가 꼬사드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 책의 저자란 말인가? 


쟈끄 가죄는 그것은 바로 꼬사드의 지도를 받은, 

익명의 “로렌느 지방 부인”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죄는 박사 연구 논문을 목적으로 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다음의 저서에서 요약했다 :

(L'Abandon à la Providence divine d'une dame lorraine au XVIIIe siècle, 

suivi des Lettres spirituelles de Jean-Pierre Caussade à cette dame. 

Édition critique du Traité où l'on découvre la vraie science de la perfection 

du salut et des écrits spirituels de Jean-Pierre Caussade présentée 

par Jacques Gagey, Éditions Jérôme Millon, 2001.)  



그러나 그의 논거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작가가 여자임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꼬사드가 이 부인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상당한 수준의 웅변술과 성서적, 영적 교양을 갖추고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기에는 

그녀가 그다지 자신을 “내맡기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작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종교인인지 세속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유념하지 않고, 

다만 그가 방문회에서, 특히 꼬사드가 그곳을 빈번히 드나들던 시기에 

낭시의 방문회 수도원에서 매우 높이 평가 받고 있었던 

귀용 부인의 영성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사실 우리는 페늘롱이 유죄 판결을 받은 후, 

그와 귀용 부인의 영성이 

영성 지도에 대한 비밀 유지와 원고의 비밀스러운 유포를 통해 

영혼들을 계속해서 양육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p.14


낭시의 방문회 수도원은 이 영성의 특혜를 누리는 온상 중 하나였다 

(참조. J. LE BRUN, 

Les opuscules spirituelles de Bossuet. Recherches sur la tradition nancéienne, 

Université de Nancy, 1970.) 



귀용 부인과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사실, 1734년 낭시에서 선종한 바쏭삐에르 수녀 (Mère de Bassompierre)는 

1718년부터 1724년까지 모( Meaux) 방문회 수도원의 수녀원장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수도원에 

귀용 부인이 1695년 1월부터 7월까지 보쉬에의 조사를 받기 위해 체류했었다. 


귀용 부인은 그곳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로 방문회 수녀회에 지속적으로 깊은 감명을 주었다. 


따라서 낭시의 방문회 수도원이, 적어도 바쏭삐에르 수녀를 통해, 

귀용 부인에게서 영감을 받은 모든 문학의 생산, 

혹은 재생산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로렌느 지방 부인”에게 서른두 통의 편지를 쓴 당사자이자 

앙뚜완 신부가 영적 지침을 작성하는데 협력자로서 활동했던 

역사상 실재 인물인 꼬사드는 이 영성과의 유사성을 보여주었다. 


1748년 영적 지침 제2판의 일러두기에서 

그의 이름이 앙뚜완 신부 이름 옆에 나란히 나타난 이후, 

성모 방문회 수녀들의 마음속에는 

그를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의 저자로 간주하고픈 유혹이 생겨났다. 

그가 “작가”, 즉 “권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겼고, 

그가 “작가”, 즉 “권위자”가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은, 

성모 방문회 창설자인 프랑수아 드 살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는 데다, 

특히 그루 신부에게 영감을 주고, 

19세기에는 게 주교 (Mgr Gay)와 리지유의 소화 데레사로 대변되는 

소위 내맡김 또는 어린이 영성을 불어넣어주게 될, 

귀용주의적 전통의 놀라운 후예처럼 보인다. 


쟈끄 가죄가 강조하듯, 

이 텍스트는 일직선으로 곧게 나아가며, 

완벽하게 일관성을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사고는 잇따른 물결에 의해 발전해 나간다. 


이 작품은 무종교가 판을 치기 시작하고, 

프랑스 혁명뿐만 아니라 19세기와 20세기에 기독교가 헤치고 나아가야 할 

엄청난 시련들이 준비되어지고 있던 시기에 쓰여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뭔가 예감과도 같은 것이 

하느님 섭리의 내맡김을, 

특히 그 책의 마지막 장들을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 이 책이 출현했을 때,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이 이 책에 갈채를 보낸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교리의 개요를 통해 

우리는 이 책 속에서 역경의 시대에 필요한 영성을 찾아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p.15


사건과 “하느님의 명령 ” 



        “하느님의 명령으로 매 순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에게 가장 거룩하고, 가장 좋은 것이며,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현 순간에 이 명령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제7장)




        내맡김과 현 순간 (현 순간에 내맡김)의 영성은 

개론서를 써내려가는 동안 줄곧 재확인되고 있는 이 가정,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이 신앙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순간들”의 연속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사건”에 대한 훌륭한 정의) “하느님의 명령”이 발현된 것이다 

(물론 죄는 제외이지만, 죄의 결과들은 그렇지 않다 포함된다). 


“명령”이라는 이 용어는 

그 시대의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표상 체계를 구성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개론서에서 이 단어는 바로 두 번째 문장에서부터 나타나는데, 

이것은 보통 하느님께서 목표로 삼으시는 것에 있어서의 

그분의 자애로우신 의도 (그분의 “계획”), 

즉 너무나 자주 감추어져 있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당혹스럽게 발현되는 

그분의 뜻을 가리킨다. 


개론서 역시 귀용주의의 특징인 단순화를 배려하면서 

이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 


“하느님의 명령, 하느님의 원의(願意),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활동, 은총,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동일한 것입니다......” (제7장). 


17세기 이래 영적이고 종교적인 담화에서 점점 더 빈번히 쓰이게 된 한 단어가 

“이 모든 것”을 잘 요약해주고 있는데, 

그 단어는 바로 신의 섭리이다.




        개론서는 우리에게 신의 명령에 따랐던 한 시기 전체를 참조케 한다. 

그것은 바로 계몽주의 시대에 있었던 세계에 대한 표상인데, 

이것은 6세기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가 가졌던 세계에 대한 표상이고, 

귀용 부인에 이르기까지 신비주의 전통이 계속 영속시켜왔던 그 표상이다. 


“하느님의 활동은 우주를 가득 채우고, 

모든 피조물에 스며들며, 피조물 위를 떠돕니다. 


피조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하느님의 활동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활동은 피조물을 선행하고, 피조물을 동행하며, 

피조물을 뒤따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활동이 일으키는 파도에 실려 가도록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제1장). 


귀용 부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개론서에 매우 빈번히 나타나는 이 신비주의적 담화의 표식인 

“~하기만 하면 된다”, “~만이 중요하다”와 같은 표현들은 

신앙심 깊은 영혼들이 지녀야 할 태도를 명확히 규정해준다. 


이 태도는 “단순”하고 “쉽다”. 


그저 자신의 “사회적 신분상의 의무”와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들을 완수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맞서는 것으로 충분하다. 


“왕들과 그의 대신들, 교회와 세상의 우두머리들, 성직자들, 군인들, 부르주아들 등, 

한마디로 말해 모든 인간들이 

이 드높은 거룩함에 얼마나 쉽게 다다를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그들에게는 그저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들의 사회적 처지에 따른 단순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그에 결부된 십자가를 순순히 껴안고, 

그들이 구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로 하여금 행하고 참아내게 만드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제1장). 


디오니시우스에게서처럼, 위계질서는 여기서 사회질서가 되는데, 

이 위계질서는 

이미 그 자체로서 신적 활동의 특권적 벡터인 신적 질서를 반영한다. 


신적 활동은 문자 그대로 피조물을 감싼다. 

저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가장 물질적인 은유를 사용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하는 대로 맡기십시오. 


모든 것이 여러분을 인도하고,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여러분을 지탱합니다. 


모든 것이 깃발이고, 가마이며, 안락한 수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길이고, 모든 것이 신성한 흙이며, 공기이고, 물입니다. 

그분의 활동은 그 구성요소들보다 더 폭넓게 펼쳐져 있고, 더 많이 존재합니다. 


그분은 여러분들의 전 감각을 통해 여러분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제9장) 


여기에서 어떻게 디오니시우스보다 끌로델을 더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를 신비주의, 

예를 들어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가 (Cantique spirituel)에 나타나는 신비주의와 

어떻게든 연결시켜 보려 할 때, 

그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p.16


“마음에 새겨지는 복음”   



        이 개론서가 전통적 신비주의 회(會)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프랑수아 드 살의 용어를 차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하느님의 뜻이 발현되는 두 가지 방식 간의 근본적인 구분 속에 또한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은 

일반적으로 모든 기독교인에게 부과되는 계명과 의무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상태”, 

즉 그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각 사람에게 부과되는 계명과 의무를 통해 알 수 있다. 


프랑수아 드 살에게 있어 하느님과 교회의 계명, 그리고 사회적 신분상의 의무는 

명백히 통고(通告)된, “명시적인 하느님의 뜻”을 나타낸다 

(신애론, 제8권 Traité de l'Amour de Dieu, livre VIII). 


내맡김은 

“결과와 원인 그리고 이유에 대한 어떠한 숙고나 반성, 검토를 함이 없이 

그분의 명시적인 뜻에 따라 현재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에게는, 

마치 이 세상에 하느님과 이 절박한 의무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순수한 의무를 향해 단순 소박하게 나아가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 순간은 사막과도 같으며, 

단순한 영혼은 거기에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만을 향유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는 일에만 전념합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방치되고 망각되고 섭리에 맡겨집니다.” (제2장)


라고 말하고 있다.


p.17


        반면, 여전히 프랑수아 드 살의 구분을 따라 (제9권), 개론서에서 

“원의(願意)로서의 절대적인 뜻”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 발현되는 모습은 

그다지 분명하지가 않다. 


이 뜻은 “명시적인 뜻”에 비해 

역경, 병, 사고, 당혹스러운 상황, 또는 참사와 같이 예견할 수 없고, 

대개 유감스러우며, 

어쨌든 간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존재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수동적 태도를 유지하고 

하느님의 원의에 의존하는 것”, 

다시 말해서 “무심함” 가운데, 자아를 추구함이 없이, 

성령에 고분고분히 순종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때 하느님이 드러내 보이시는 것은, 

“알 수 없는 그분의 뜻, 

우연과 조우에 대한, 말하자면 모험에 대한 그분의 뜻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이것을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수행해야 하는 명백한 의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뜻과 구별하기 위해, 

순수한 섭리로서의 하느님의 뜻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제2장)


하나의 반복적인 이미지가 

하느님 뜻을 나타내는 이 두 가지 표현 형태에 반향을 보이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뜻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과 역사라는 

두 “책”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신비로 가득 차 있으며, 

세상 사건들 속에서 실현된 그분의 말씀 역시 그에 못지않게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은 정말로 봉인돼 있습니다. 

이 두 책 속에 있는 문자는 사람을 죽입니다.” (제9장) 



내맡김은 이 두 개의 글에 대한 공통의 해석학적 열쇠이다. 

이 해석학은 경험을 통해서만 습득된다.


이것은 “실험적 지식” (쉬랭 Surin)이라 칭할 수 있는 신비주의가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 필두격인 것이 바로 신학적 지식에 대한 경멸이다. 


“우리는 절대로 이나 역사에 대한 호기심어린 탐구를 통해 

신학에 박식하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것을 부풀리는 무용하고도 혼란스러운 지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은 시시각각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얻으시고자 하셨던 

바로 그러한 실험적 지식을 우리 안에 형성시킵니다.” (제9장)   p.18



마찬가지로 두 번째 책인 역사도, 

영혼들이 하느님의 활동에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기만 한다면, 

생명의 책이 되고 

첫 번째 책의 속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일 영혼들이 이 성령의 활동에 일치할 줄 안다면, 

그들의 삶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이 활동을, 

먹물과 종이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계속해서 써내려나가는 

일련의 거룩한 책들이 될 것입니다. [...] 


따라서 신약의 속편은 지금 행동과 고난에 의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영혼들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뒤를 잇고 있는데, 

이는 정경(正經)을 써내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신적 활동의 역사(歷史)를 계속해나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들 삶의 매 순간은 이 역사의 각 음절과 문장을 구성하며, 

신적 활동은 바로 이 음절과 문장을 통해 생생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제9장)



사실 자신을 내맡긴 영혼들이 자신들 안에서 계속해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 자체이다. 


“우리는 신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오로지 우리의 마음속에만 복음을 적어 내려가고 계십니다. 

성인들의 모든 행위들과 모든 순간들은 성령이 써내려가는 복음입니다. 


거룩한 영혼들은 종이이며,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행위들은 먹물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활동이라는 펜을 사용하여 살아있는 복음을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복음이 이 삶이라는 인쇄기에서 빠져 나와 출판이 되는 영광의 날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11장) 


그때가 되면 

늘 조명주의라고 의심받아온 신비주의적 담화의 전형적인 두 유형의 영혼 간의 차이, 

즉 “하느님 안에 사는” 영혼들과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살고 계시는” 영혼들 간의 차이가 나타날 것이다. 


달리 말해서, 

한 쪽은 자신의 신뢰를 “실천”에, 자신의 발전을 미덕에 두는 “독실한 영혼”이고, 

또 다른 한쪽은 

“덕으로 포장된 길들을 애써 취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보다는 

까닭도 순서도 없이 자신을 이끄는 신랑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긴 채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제11장) 

내맡긴 영혼이다.



p.19


“꼭꼭 숨어계신 미지의 하느님”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가만히 놔두고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를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것이 바로 보편 성경이며 관습법입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모든 신의 도구들의 쉽고도 분명한 고유 활동입니다. 

이것이 내맡김의 유일한 비밀입니다. 


그러나 비밀이 아닌 비밀이고, 기술(技術)이 아닌 기술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곧게 뻗은 길입니다.” (제11장) 


계율은, 수도원에서든 세속에서든, 

평범한 삶의 추이 속에서 따르기 쉬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현 순간은 항상 하느님의 명령을 선포하는 사자(使者)와도 같으며, 

마음은 항상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합니다.” (제9장)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이 항상 이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분명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 개인, 한 공동체, 한 국가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혹은 일련의 사건들이, 

은밀하게 혹은 격렬하게, 일어날 때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이 개론서가 가장 고집스럽게 전개해나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상황이다. 


마치 내맡긴 삶의 통상적인 분위기가 신앙의 어둠이기나 한 것처럼. 

개론서는 

아레오파기타가 오로지 암흑의 형태로서만 나타나는 

하느님의 빛에 대해서 한 말이나 

또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밤에 대해서 쓴 글에 대해 과감히 응대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중심이십니다. 

그것은 암흑의 심연이며, 

그 심연은, 그 밑바닥에서부터,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 위로 퍼져 나갑니다. 


그분의 모든 말씀과 그분의 모든 업적은 말하자면 

한층 더 어두컴컴한 태양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흐릿한 빛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육안을 뜨고 태양과 빛살을 바라보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사업을 바라보는 우리의 영안은 감겨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암흑은 빛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식은 무지가 되며, 

우리는 보지 않음으로써 보지 않으면서 보게 됩니다. 


성경은 훨씬 더 난해하신 하느님의 난해한 말씀입니다. 


시대적 사건들은 

이 꼭꼭 숨어계신 미지의 동일하신 하느님의 난해한 말씀입니다.” (제9장)



        개론서는 오로지 자신의 하느님만을 찾아 헤매는 

그런 내맡긴 영혼을 감싸고 있는 이 어둠에 대한 긴 변주들을 보여준다. 


“신앙의 삶은 하느님을 변장시키고, 하느님의 모습을 훼손하며, 하느님을 파괴하고, 

다시 말해 하느님을 소멸시켜버리는 것을 꿰뚫고 나가 

오로지 하느님만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제9장) 



양탄자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저자의 확신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 천의 뒷면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작업을 요하는 

아주 멋진 양탄자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직공은 자신이 수놓는 바늘땀과 바늘만을 볼 뿐이지만, 

이 모든 한 땀 한 땀이 차례차례로 다 채워져 나가면서 

훌륭한 문양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 문양들은, 양탄자 각 부분들에 대한 작업이 끝난 후, 

밝은 대낮에 이 아름다운 앞면을 전시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그러나 작업을 하는 동안, 

이 모든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 


영혼이 아주 단순하고 잘 감추어졌으며, 

매우 비밀스러운 데다 외양상 꽤 멸시당할 만한 자신의 보잘것없는 일에 

전념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자수와 색채를 곁들임으로써 

그 일을 더욱더 다양화하고 아름답게 하며 풍요롭게 만드십니다.” (제7장) 


리지유의 소화 데레사는 이 글을 부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p.20


위기의 시대를 위한 신비주의



    우리는 내맡김의 개론서가 

17세기에도 여전히 공공연하게 표현될 수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의 신비주의적 전통의 연속선상에 얼마나 잘 놓이는지를 놓여 있는지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특히 19세기말부터 우리 동시대인들에게까지 이르는 가톨릭 신자들이 

왜 이 작은 개론서에서 

그들의 영적 삶에 필요한 원천을 발견했고 또 발견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사실상 거기에는, 근대의 여명기에 시작되었고 

20세기 전반을 통하여 뚜렷해진 위기, 

그 위기의 시대를 위한 신비주의가 그려지고 있다.




    세상이 하느님으로 충만하고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하던 그런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파스칼은 자연과 우주의 조화에 의해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자유사상가들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제 하느님은 “마음 안”에, “영혼의 성” 안에 숨어계시고, 

내적 경험을 통해 당신을 만나도록 하신다. 


그때 나타나시는 분은 더 이상 공간이나 사회적 질서에 대한 주관자가 아니시다. 

이것들에 대한 환상이 이제는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숨어 계신 하느님께 남아 있는 것은 역사나 사건들과 같은 시간뿐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부터는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해독하는 것 자체가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서구 교회의 분열, 종교 전쟁들로 인한 트라우마, 

후일 “비종교”의 대두, 

프랑스 혁명, 정교분리를 둘러싼 싸움, 

프랑스에서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 세계적 갈등들, 

적색 페스트인 공산주의와 갈색 페스트인 나치주의, 

현대 사회 안에서의 교회의 점차적인 소외가 의미를 혼란에 빠뜨리고 

점점 더 신앙적인 시각에 호소하고 있다. 


하느님의 현존을 더 이상 역사 속에서 읽어낼 수 없을 때, 

하느님을 신봉하고자 하는 신앙심 깊은 영혼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현 순간뿐이다


두께가 없는 이 순간, 끊임없이 빠져 달아나는 이 순간,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절대로 우리에게 잡히지 않으시는 (“나를 건드리지 마라!”), 

우리에게 당신의 등만을 보여주시는 그분을 경외할 수 있다. 


17세기부터 하느님을 “섭리”로서 표현하는 일과 

“내맡김”과 상관관계에 있는 태도가 

종교적이고 영적인 담화 속에서 점차적으로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섭리자인 하느님의 전통적인 모습이 

역사적 사건의 흐름 속에 점점 덜 나타나게 된 반면, 

점점 더 순수한 신앙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항상 그렇듯이 입소문을 만들어내는 것은 부재(不在)이다.




    물론 우리의 동시대인들은 

더 이상 섭리라는 단어의 사용을 감행하지 않는다단어를 감히 사용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민주적인 사회에서 

하느님의 부재와 제도화된 종교 형태들의 와해는 

정말이지 너무 대대적인데다 확실히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이것은 신자들이, 

그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내맡김의 개론서가 말하고 있는 하느님을 신봉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 하느님은 당연히 민족들과 친족들, 그리고 개인들의 역사 속에서 

더 이상 분명하게 당신의 활동을 보여주시지 않는 그런 분이시고, 

더 이상 “대물림”되지 않는 그런 분이시다. 


그러나 이 하느님은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할 때 그분의 눈에 숨어 계신 것처럼 보였듯 

(신비주의적 전통에서처럼 개론서에서 특별히 다루어지고 있는 모습), 

당신의 모습을 감추고 계신 사건 속에 여전히 현존하고 계시는 그런 분이시다. 


이 신앙인들의 하느님은 사람들이 죽음을 선포했던 우상이 아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겸손하고 신비로운 그런 신이시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고 “포기하고”, “단념하기”를 권고하시면서도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역사에 대한 참여는 면제해 주시지 않는 그런 분이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영적 혹은 신비주의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특별한 느낌을 추구하거나, 놀라운 표징들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신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게 명백하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히브리 11.1.)

순수한 믿음은 내맡김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개론서는 책의 끝부분에서 이 믿음의 효력에 대해 몇 자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한 영혼이 믿음이라는 이 예지를 부여받으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우주만물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영혼의 눈앞에서 끊임없이 써내려가는 

살아있는 글입니다. 

흘러가는 모든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룩한 이야기입니다.” (제1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