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기도

은가루리나 2018. 9. 4. 10:42



1. 생애(하)


루페르츠베르크에서 힐데가르트가 저술한 성 루페르트의 전기를 보면 그곳으로 수녀원을 옮긴 의미가 잘 나타난다. 영주의 가계인 성 루페르트는 한 때 고행의 순례길을 떠났으나 이러한 뜻을 내재화하여 삶 속에 구현하리라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당시 교통의 연결점이며 많은 이들의 교류지인 나에강 어구 루페르츠베르크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건물들과 성전을 짓고 자비로 이 지역을 다스려 문화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였다. 일찍 과부가 된 성 루페르트의 어머니 마르타가 자신의 출신을 생각지 않고 청빈한 삶을 택해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고 기도와 단식으로 생활하며 모범을 보임으로써 아들에게 그러한 신앙을 새겨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루페르츠베르크로 수녀원을 옮긴 의의는 곧 교류의 중심지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자선과 덕으로 생활하는 독립적인 수녀회로서 자리매김하며 비전에 충실하게 자신의 예언자적인 소명을 이루어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의 빙엔과 루페르츠베르크는 중세 중심도시들을 이어주는 교통로였던 라인강과 나에강이 만나는 곳, 그리고 중부 라인으로부터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육로가 교차되는 곳. 라인강의 지형적 조건으로 육로와 수로를 바꾸는 중간 정류지가 되는 곳이었다. 힐데가르트가 옮길 당시 루페르츠베르크는 폐허가 된 상태였으나 빙엔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적인 도시이고 특히 무역이 발달한 곳이었다. 반면에 힐데가르트가 옮기기까지는 종교공동체들은 적은 편이었다. 남자수도원에 속한 여성공동체가 몇 있었을 뿐 독립된 여성 수도원은 없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의 수녀원이 옮기는 시기가 수녀회가 많이 설립되던 시기여서 그 즈음에 이 부근에 9개의 수녀원이 설립됐다. 대부분 아우구스티노회 소속이었다. 그 중에는 오래 유지되는 곳도 있고 쇠퇴하는 곳도 있어서 힐데가르트는 1165년 라인 강 건너 편 아이빙엔의 옛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 건물에 제 2의 수녀원을 세웠다. 이전의 수녀원이 귀족출신들만 받아들였던 데에 비해 이 곳은 귀족출신이 아닌 다른 이들도 받아들였다.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은 당시 귀족들과 고위성직자들의 방문지이고 묵어가는 곳이었다. 그 중에는 고위 정치가들만이 아니라 오랜 기간 오리엔트를 여행하고 아라비아 의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던 세네카(Ceneca)와 콘스탄틴 아프리카노(Konstantinus Africanus)도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이들을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또 비전에 근거해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전했다. '하느님의 소리'에 자신의 권위를 두고, 곧 '하느님의 나팔소리'에 근거해서 교황과 황제, 주교들과 백작들, 남녀 수도원장들, 그리고 동료 수녀들과 수사들에게 서신으로 때론 설교여행으로 직접 들은 말씀을 전했다. 어느 누가 감히 천상의 소리에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힐데가르트는 정치적인 사건들에 관여하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교황과 사제권의 우선에, 자신의 권력만을 믿는 황제에게 반대해서, 신분구분을 무시하고 평등화하려는 개혁수도원에 반대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그러나 또 한 편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도 나섰다. 수 백 통의 서신을 보냈다. 




수도원과 관련해서 갈등이 있을 때에도 서신과 함께 오고 가는 사람들을 전달자로 해서 더 구체적으로 의견을 전하도록 하여 관철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수녀원인 루페르트 수녀원에 당시 통용하던 수도원 재산 관리인을 두도록 하는 것에 반대하여 예외적으로 마인쯔 주교의 보호하에 들어가도록 했고 1178년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 수녀원안에 교회에서 파문당한 청년을 묻어준 것과 관련해서 마인쯔 교구에서 성무제한조치가 내렸을 때에도 결국 대주교 스스로 그 조치를 해제하도록 관철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나 선함이 깃들어 있다는 전제하에 우주와 자연, 인간 모든 창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으며, 몸과 영혼도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자신의 신학에 따라 몸과 영혼, 자연과 사회 어느 것에도 관심을 제한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심과 질문에 대화하고 소화하고 답하면서 지식의 폭을 넓히고 깊게 했다. 또한 이런 폭과 깊이가 그녀의 비전에 다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요일에 수녀들이 신부처럼 긴 비단옷에 머리를 풀고 황금관을 쓰고 제단에 나아가도록 하기도 했다. 당시 새로이 대두하던 '그리스도의 신부론'의 구현형태였다. 노래 외에 성악극을 작곡하여 수녀원에서 공연하게 했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새끼들을 낳아 키우는 동물의 세계를 깊이 관찰, 분석하며 여성과 남성의 성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1179년 9월 17일, 비전에 바탕을 두었던 특별한 삶과 같이 둘러선 수녀들에게 특별한 표징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정홍규 신부(대구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