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41 p.198-204 제 3편 제 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 에 있어서의 위탁

은가루리나 2018. 9. 7. 15:38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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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三편 위탁 (委託) 의 대상 (對象)


제  장 

외부적 선(善)과 악(惡) - 행(幸)과 불행(不幸)- 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 一 절 순경(順境) 및 역경(逆境)




나는 우선 가장 일반적인 것、

우리 자신 및 우리와 친밀한 사람들(가족、수도단체 등)에 있어서의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에 관한 고찰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우리는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의 어느 것도 선용(善用)할 수 있고、

악용(惡用)할 수도 있다


과연 우리는 현자(賢者)의 벗인가、또는 어리석은 이의 벗인가。


천주께서는 우리를 어느 때에는 행운(幸運) 안에、

또는 어느 때에는 불운(不運) 안에、

세상을 살아가게 하실 의향이신가

또는 거의 항상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힌대로 버려두실 의향이신가。


이러한 일에 관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따라서 가장 현명한 길은、

거룩한 무관심 안에 자신을 확고히 세우고、

조용히 천주의 뜻을 대기(待機)하며、

사랑에 충만된 신뢰로써 그것을 받아들이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영적 선익(靈的善益)을 거기에서 이끌어내는 것이다。




생활한 신앙의 빛에 비추어 본다면、

순경(順境)은 우리의 눈에 섭리의 영원한 미소(微笑)로서 반영(反映)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꺼이 마음을 천주 성부께 대한 감사와 사랑과 신뢰에 열어드리고、

새로운 사랑의 증거는 우리의 입에서 즐거운 감사를 외치게 하리라。


천주의 관인(寬仁)하심의 덕택으로、

우리는 자기보다도 행복하지 못한 형제들을 위로하고、

그로써 우리와 함께 

그들로 하여금 모든 은혜를 주시는 주(主)가 되시는 천주를 찬미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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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슬프도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참으로 지당하다。



「순경은 관능(官能)을 기쁘게 하고 이성(理性)을 흐리게 하는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순경은 부지중(不知中)에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드디어 은혜에만 애착시켜서 그 은주(恩主)를 잊게 한다。」

 (성「프란치스꼬·살래시오」의 「정신」 一○편二) 



더구나 순경은 

거의 무의식중에 생활의 엄숙함을 점차로 잃게하여、

안일(安逸)을 구하게 하고、냉담의 소로(小路)를 걷게 한다。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히겠다고 맹세한 이가 

순경을 바라며、

지상의 행복을 급급(汲汲)하게 추구하고、

다만 그것에만 마음을 애착시키며、

역경의 가시에 찔릴 적에는 당황하여 천주께 도움을 청하며、

거기에서 구원되려고 서두르는 것을 보고 

우리는 놀랄지 모르겠다。 


그러나

「복음서는、그리스도교적 행복이 

빈곤、멸시、고통、눈물、박해 둥의 안에만 있다고 설파한다。

철학자까지도、

순경은 참된 덕의 계모이며、

역경은 그 친모(親母) 라고 가르치고 있다.」 (동서、一五편三五)




그러므로 영속적(永續的)인 순경은 많은 경우 하나의 함정이다。


참으로 영적(靈的)인 사람은

순경이 오주에게도 성인들에게도 

결코 그처럼 미소를 던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여 

오히려 순경에 불안을 느끼게 되며、

현세에서는 쾌락이 더욱 적어지기를 바라게 되는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것은、

천주의 품에 안기면서、동시에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나、역경은 우리에게 보다 확실한 길을 개척해 준다。


충실하고 배려 깊은 벗이신 천주께서는、

우리를 해치려는 것과 같은 순경은 이를 우리에게서 제거하시고 

그 거룩한 사랑과 양립(兩立) 할 수 없는 것 같은 정을 

끊어버리시기 위하여、

역경의 칼을 이용하신다。


천주께서는 때로는 궁핍、때로는 고난으로써 

보다 빠르게、보다 확실하게、우리를 쾌락에서 떼시며、

이 불행한 현세에서 영원한 피안(彼岸)에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끌어당기신다。


이것이야말로 이탈의 최선의 학교이다。



역경은 또한、이 세상에서의 연옥이며、

사후(死後)의 그것에 비한다면 그처럼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는 하나、

극히 유효하다。


왜냐 하면、

천주께서는 같은 죄에 이중(二童)으로 벌하시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천주께서는 우리를 고난의 도가니에 던지시어、

마치 불속의 황금처럼 정화(淨化)하신 후、

당신에게 맞갖은 것이라고 보신다면、

번제(潘祭)의 희생과 같이 우리를 기꺼이 받으신다。(지서3· 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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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은 황금의 광산(鑛山) 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가장 훌륭한 덕과 무한한 공로를 파낼 수 있다。




「예로니모나달리스」신부는 어느날 성「이냐시오」를 향하여、

완덕(完德)과 천국(天國)에 이르는 가장 가깝고 확실한 길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적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각가지 많은 역경을 감수하는 것이다」

라고、성인은 대답하였다。


오직 하나의 커다란 역경이라도 우리를 천국에 인도하는 것이다。

더구나 허다한 역경은 보다 신속하게、보다 높은 곳에 우리를 이끈다。




과연、「발다살알바레스」신부에 의하면、


「신앙이 풍부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고난은 

천주께서 그들을 그 어전에 보다 신속하게 끌어 당기시기 위하여 보내시는 

역마(驛馬)이며、

또한 보다 훌륭한 선덕에 오르게 하시기 위하여 내려주시는 

사다리와도 같은 것이다。


무서운 우박으로 포도원이 해를 받았을 때、

그 주인의 고심은 동정할만 하지만、

그러나 그 우박의 한알 한알이 황금이었다면、

이 주인의 고심은 이치에 맞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인내심이 강한 영혼 위에 퍼붓는 우박과도 같은 치욕、

그 밖의 고뇌는 참으로 황금인 것이다。


그러한 영혼이 역경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잃는 것보다도 무한히 탁월하다。

천국은 시련을 당하는 이、 고통을 겪는 이、모욕을 당하는 이의 왕국이다。」 

(「듀뽑」신부「발타살*알바레스 전」四○、四 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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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은 성덕에의 최단(最短)의 지름길이다。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에 의하면、

모욕、경멸、질병、궁핍、유혹、그 밖에 이러한 종류의 모든 간난(艱難)은、

우리의 악한 경향과 정욕의 방종함을 근본적으로 억제하는데는 

불가결(不可缺)의 것이며、

주께서 우리를 신적일치(神的一致) 로 준비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그리고 성 「이냐시오」에 의하면、

「천주에의 사랑을 자아내고 그것을 간직케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나무보다도 적절한 나무는 없다。」 



성 「알퐁소」도 이에 덧붙여 말한다. 


「성인들의 학문은 끊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데 있다。

그것은 신속한 자기성화(自己聖化)의 수단이다」라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一장)






성인들의 생애에 있어、우리를 가장 감동시키는 것은、

아마도 천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특수한 은총과、

그들을 유명하게 한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우리가 특히 착안해야 할 일은 천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허다한 병약(病弱)、건조(乾燥)、고독(孤獨)、적적함、박해、

모든 종류의 간난(艱難)、또한 이 기나긴 순교에 있어서의 

그들의 용감한 견인(堅忍)이다。


참으로 그들이 성인이 된 것은 특히 이러한 것에 의해서다· 


과감하게도 주를 열애한 그들은、

자기도 역시 주와 같이 가난한 자、고통을 받는 자、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아버지신 천주께서는 그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더불어、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가장 깊이 사랑한 이는 가장 많이 고통을 당한 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들이 가장 고통을 당한 것은 

가장 높은 완덕에 이르렀던 만년(晩年) 무렵이었다。


「천주께 가납된 이었기에、

그들은 시련에 부딪치지 않으면 안되었다。」(도비아12.13) 


말하자면、그 고난은 

그들의 과거의 노고의 보수이며、그 성덕을 완성시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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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십자가 위에 생애를 보내고、열애하는 주와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성「분도」처럼、그들도 또한 모두 

「세상의 칭찬보다는 오히려 업신여김을、

시대의 총아(寵兒)가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노고에 힘을 다할 것을 택하였다。」

(「대 성 그레고리오)「성 분도 전」二장)




복자「수소」(Suso, Heinrich) 는 끊임없는 시련에 있어 예외로서 

순간적인 소강상태(小康狀態)에 놓여졌을 적에、

그의 영적 딸이었던 수녀들을 향하여 이렇게 한탄하며 말하였다。


「나는 일이 잘 되지나 않는가 하고 매우 걱정하고 있읍니다。

왜냐 하면、

이미 네 주간이나 누구에게서도 공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께서 이미 나를 돌보시지 않는가 하고 걱정하고 있읍니다」라고. 



그가 이렇게 말하고 난 잠시 후에 한 사람이 들어와서、

가장 세력 있는 박해자들이 .맹세코 그를 없애려고 하고 있음을 알렸다。


「수소」는 비로소 그 말에 아연실색 (啞然失色)하여 

「왜 나는 죽음을 당하여야 합니까」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당신이 많은 사람돌을 개종(改宗)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천주께서 찬미 받아지이다…」...


그리고、그는 기쁨에 충만되어、살창벽에 돌아와서는、

「자、자매들이여、용기를 내시요、천주께서는 나를 돌보셨읍니다。

아직 나를 잊지 않으셨읍니다」라고 말하였다。

(「복자 헨리꼬 .수소 전」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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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통에 부딪치면、「주여、이제 충분합니다」라고 속삭인다。



성녀「마리아·막달레나, 보스텔」은 

이와는 반대로 항상 이렇게 되풀이 하였다。


「주여、더욱 고통을! 더욱 고통을! 

십자가여 오너라、나 너를 안으리라。

나의 천주여、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께서 우리를 비천하게 하심은 우리를 한층 높이시기 위함이로소이다。」 


시련이 닥쳐올 적에、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또 하나의 십자가를! 

주께 감사하나이다。

주는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는 도다。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보다 커다란 보수를 주시기 위함이로다。J

(「동 성녀 전」一三、三○장)




가장 비통한 경우에 있어 영해 예수의 성너「데레사J는 

언니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그토록 커다란 고통을 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것 때문에 주를 찬미하는 데는 영원도 부족할 것입니다。


주는 가장 위대한 성인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 은혜를 넘칠만큼 채워 주십니다. 


고난과 굴욕과는 성인을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시련은 파내야 할 황금의 광산입니다。


많은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바칩시다。」

(「서간」三、四)




위에 말한 바에서 

성 「알퐁소」와 함께 이렇게 결론을 지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순경(順境)에 있을 때、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을 때에、

천주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 하면、천주께서 그 종의 충성을 시험하시고、

알맹이와 쭉정이를 가려내시는 것은、

순경에 의해서가 아니라、역경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즉 고통 가운데 있어 겸손하고、

천주의 뜻에 인종(忍從)하는 이는 천국으로 예정된 알맹이고、

이에 반하여 스스로 자랑하며、

인내하지 않고 천주를 떠나는 이는 지옥에 떨어져야 할 쭉정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인내하여 짊어지기를 거부하는 이는 멸망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一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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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예수의 곁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같은 고통이 

한사람을 성인으로、다른 이를 영원히 버림받은 자로 하였다。 




우리는 단지 인내와 인종(忍從)으로써 뿐 아니라、

사랑과 신뢰와 효애(孝愛)로써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에는 두가지 일、

즉 신앙의 정신과 겸손이 특히 커다란 힘이 된다。


비록 우리가 조금이라도 본성(本性)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본성은 역경을 당하면 항상 반항하리라。


그러나、본성의 소리를 침묵시켜 천주의 말씀만을 듣게 된다면、

오래지 않아 예언자 「다위」왕과 함께 

「나는 묵묵하고 내 입을 열지 않사오니、

이는 당신이 행하셨기 때문이로소이다」(성영38.10) 

라고 말하기에 이를 것이다。




오만한 자는 

쉬이 남이 자신을 불의(不義)하게 대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천주의 길이 고통스러울 적에는、

그것이 그러한 사람을 놀라게 하고 당황케 한다。


겸손한 이는、이에 반하여、

자신의 비참함과 죄를 깊이 자각하고 있으므로、

천주를 그 엄격하심에 있어서까지도 이렇게 찬미 한다。


「주여、나는 당신의 심판의 올바르심을 흠숭하나이다。

당신은 나를 관대히 다루시므로、 

나는 당신의 자비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는 당신께서 내게 맞갖는 것보다도 

훨씬 가볍게 벌하시기 때문이로소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고통의 약이 필요하오며、

당신이 나에게 보내시는 간난(艱難)이야말로、

실로 나의 필요에 가장 적절히 응하는 것이로소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