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43 p.212-217 제 3편 제 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 에 있어서의 위탁 제 2 절 공적 및 사적 재화②

은가루리나 2018. 9. 14. 22:15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一、질병(疾病)、기근(鐵鐘)、홍수(洪水)、폭풍、

그 밖에 이러한 재해(災害) 안에 섭리의 손을 보는 것은 쉽다。


二、재난(災難)이 우리 위에、

우리의 가족 또는 수도원 위에 닥쳐올 경우에도、

우리는 거의 위와 마찬가지로 행동하여야 한다. 


 제3절 부귀와 빈천

 제4절 장소와 환경




p.212



二、 재난(災難)이 우리 위에、

우리의 가족 또는 수도원 위에 닥쳐올 경우에도、

우리는 거의 위와 마찬가지로 행동하여야 한다. 


그러한 재난 가운데 있어서도 천주만을 

더구나 사람들의 영혼의 행복을 배려하시는 

어진 아버지신 천주만을 우러러 보도록 힘쓰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재난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아직 몇해 더 살았다면、

혹은 대죄 중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저 질병 때에、

나의 인내가 그토록 부족하였기 때문에 

아직도 三○년이나 四○년 동안 더 살아서 공로를 쌓아야 한다。


나의 영원한 구령은 

그토록 눈물의 원인이었던 저 굴욕(屈辱)에 달려 있었다。

만일 저 돈을 잃지 않았더라면、나의 영혼은 멸망했을 것이 틀림 없다。


어째서 우리는 불평할 수 있겠는가。

천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역할을 맡고 계시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불안 속에 있는가! 


아、만일 천주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계획을 보다 잘 깨닫는다면、

우리는 외관상 가혹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있어서도 

천주를 찬미하리라。


효애(孝愛)에서 나오는 위탁은 우리의 공로를 더하게 하고、

우리를 평화안에 머물게 하며 천주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위에 흔히 성공의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p.213


「방문희(訪問會)」가 생긴지 겨우 二개월 후에、

「샹딸」의 성녀 「요안나」는 죽옴을 면할 수 없을 정도의 중병에 걸렸는데、

그것은 「즈네브」의 거룩한 주교에게 있어 커다란 시련이었다。


왜냐 하면、

그는 이 사업이 천주의 뜻에 의한 것이며、

가장 커다란 선익(善益)을 반드시 세상에 초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자가 넘어진다면、

양떼가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주께서는 아마도 우리의 첫 걸음으로 만족하게 여기신다。

천주께서는 우리가 여정(旅程)을 전부 걷기에는 

아직도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천주께서 기대하신 것은 참으로 이 위탁의 행위 뿐이었다。


얼마 후、천주께서는 거룩한 창립자를 회복시키시어、

오랜 세월의 건강을 주셨다。(「성 프란치스 꼬·살레시오 전」五편)



창립 당초의 신고(辛苦)、회원모집(會員募集)의 곤란、

사망자、탈회자(脫會者)、분리(分離)、 모반(謀叛) 둥의 속출、

극도의 궁핍、외부로부터의 박해、관권(官權)의 귀찮은 간섭 등등、

성「알퐁소·리고리오」가 그 수도회의 창립에 있어 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가장 맹렬한 폭풍우의 한 복판에 있어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또한 인력의 최선을 다하여、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는 것만을 오직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하늘의 계획은、경건한 창립자가 완전한 모범이 되어、

그 수도회는 성인의 못자리가 되는 것에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유서 깊은 수도회의 시조 (始祖)가、

가난하게 살으시고、모욕을 당하시며、박해를 받으셨던、

천주신 구세주의 모습을 닮는다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 것이었겠는가。」

(「베르트」신부「성인전」六편 九장) 



p.214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의 하나는、우리와 친근한 이의 죽음이다。


「즈네브」의 유화한 성 주교는 어머니의 사망 후、

「샹딸」의 성녀 「요안나」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그 계획이 거룩하시고、선하시며、그리고 사랑하여야 할 

지극히 높으신 섭리를 

어떤 일에 있어서나、어디에 있어서나、 흠숭해야 되지 않겠읍니까。


그러므로 

이제 나의 지극히 사랑하올 어머님을 이 비참한 현세에서 걷우시어、

그리고 내가 굳게 희망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당신곁에, 그 오른 손 안에 두신다는 것은 섭리에 합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께서 지극히 선하시고、그 자비하심은 영원하시다는 것을 

공언(公言)합시다。


천주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은 올바르시며、

그 모든 결정은 공평(公平)하시고、

그 뜻은 항상 거룩하시며、

그 명령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매우 애정이 깊은 아들이었던 성인은、

그의 모친의 서거에 극히 심한 비통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 타격을 주신 분이 천주시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불만을 드러내는 일도, 불평하는 말도 감히 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누이의 사망 후、

몹시 그것을 슬퍼하고 있던「샹딸」의 성녀「요안나」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p.215


「천주께서 우리를 채쩍질하시는 것을 감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위에 또한 천주께서 당신이 좋다고 여기시는 곳에 있어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것에 동의(同意)하여야 합니다。


선택은 단지 천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은 천주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여、원하오니、

제거하시는 바도、『만일』도 『그러나』도 예외도 제한도 없고、

당신의 뜻이 아버지 위에、어머니 위에 딸 위에 

만사에 있어 도처에서 이루어지시기를! 


아、물론 나는 

그들이 더 살기를 바라고 기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딸이여、천주를 향하여

『이것을 남기시고、저것을 걷우소서』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대에게는 네명의 아이와、한 사람의 의부(義父) 와 

그처럼 사랑하고 있는 한 사람의 형제、

그 위에 한 사람의 영혼상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러한 분들은 모두 그대에게 있어 극히 친근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천주의 뜻이시므로 도리에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령 천주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모두 빼앗아 가셨다 하드라도、

아직 천주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대에게 있어 충분하지 않겠읍니까。

그리고 그대의 생각에 의해서도 그것은 전부가 아니겠읍니까。

우리들이 천주만 소유하고 있다면、그것으로 넉넉하지 않겠읍니까」 

라고(「서간」四三一、四五八) 


그런데 죽음은 잠시의 이별에 불과하다。


거룩한 생애 후의 행복한 

임종과 천주의 곁에 있어서의 영원한 재회(再會)、

그것이 유일한 중요사(重要事)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천주께서는 우리 자신에 있어서도 

우리 친척에 있어서도 

죽음의 가장 적당한 시기와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신가。




성 「알퐁소」는 말한다。


「사람이 친척이나、벗의 죽음에 있어 다소 눈물을 흘린다해도 

그것은 허용되는 인간의 나약함이다。

그렇지만 격심한 비통에 몸을 잠기게 한다는 것은

덕의 부족과 천주께 대한 사랑의 부족이다。


그렇다고 훌륭한 수녀들이 

양친、그 밖에 각별히 사랑하고 있는 이를 잃었을 때에는 

결코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그것이 천주의 뜻이다』라고 속삭이며 

인종(忍從)하여 평온함을 잃지 않고、

기도와 영성체를 더 자주 하여、 

이러한 친밀한 영혼을 위하여 빈다。


그것은 천주와 더욱 더 친밀히 일치하여 후일 천국에 있어 

함께 다시 볼 수 있다는 거룩한 희망에 의하여 

자신을 위안시키기 위해서다。(「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정배」一二편 二·六)



p.216


성「벨나도」는 사랑하는 형제의 한 사람을 잃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죽음이란 

자연에 대하여 지불해야 할 공물(貢物)、만인에게 부과된 부채(負債)、

우리의 상태에 필연적인 것、전능하신 분의 명령、

의(正義)의심판자의 판결(判決), 

두려워해야 할 천주로부터의 화(禍)、

주의 성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여、

신앙의 전력을 다하여 마음의 정(情)에 저항하였다。


나는 자신의 눈물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마음의 비통함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억제할수록 더욱 더 혹심한 것이 되었다.. 

나는 지고 말았다。


나는 이것을 고백하는 나의 비탄(悲嘆)이 얼마나 올바른 것인가、

얼마나 충실한 벗이 나를 버리고 갔는가、


나의 벗이 얼마만큼 조심성이 깊으며、

근면하고 우화하며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대들은 잘 알고 있다。


누가 그이처럼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가。

그이처럼 나에게 있어 필요한 이는 누구였던가。


몸이 약할 때에 나를 잘 지탱해 주었다。

담력이 작을 때에 나를 용기로 북돋아 주었다。

태만하고 소홀함에 흐를 때에 나를 잘 격려해 주었다。

망각하기 쉽고 조심성이 없을 때에는 나에게 잘 충고해 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혈연(血緣)에서라기 보다도、

오히려 정신의 친화성(親和性)과 

심정의 조화(調和)와 성격의 화합(和合)으로써 

결합되어 있었다。


우리 둘의 영혼은 하나로 되어 있었다。

같은 타격이 우리들의 영혼에 가해지고、반은 천국에 옮겨졌으 며, 

다른 반은 지상에 남겨졌다。 p.217


참으로 나의 『제랄드』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즉 그는 혈육에 의해서는 나의 형제、

서원(誓願)에 의해서는 나의 아들、

경건한 마음씨에 의해서는 나의 아버지、

정신에 의해서는 별개의 나、

애정에 있어서는 나의 친우(親友)였다。 


그러한 그는 나를 떠나 버렸다。

나는 이 타격으로 상처를 입고 있다。


영혼의 밑바닥에까지 나는 울고 있지만、

나에게 타격을 주신 손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의 말은 비애에 넘치고 있지만、그것은 불평이 아니다。


나는 동일한 선고(宣告)가 각자의 몫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벌을、다른 한 사람에게는 보수의 관을 주신 것을 

인정하고 있다。


유화하시고 정의이신 주께서는 

당신의 종인 『제랄드』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나에게는 그 정의의 무거움을 느끼게 하셨다。


주여、당신은 나에게 제랄드』를 주시고、또한 걷우셨도다。

나는 그를 뻬앗겼기에 통곡하나이다。

그러나、나는 그를 당신 에게서 받은 것을 잊지 않으오며、

그와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음을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당신은 자신의 위탁물(委託物)을 청구하시고、

당신의 소유를 되찾아 가셨도다。


나의 눈물은 내가 더 말함을 방해하나이다。

주여、나의 눈물에 한도(限度)와 끝이 있게 하소서。」

(「아가에 관한 설교」一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