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42 p.205-212 제 3편 제 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 에 있어서의 위탁 제 2 절 공적 및 사적 재화①

은가루리나 2018. 9. 14. 20:26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一、질병(疾病)、기근(鐵鐘)、홍수(洪水)、폭풍、

그 밖에 이러한 재해(災害) 안에 섭리의 손을 보는 것은 쉽다。


二、재난(災難)이 우리 위에、

우리의 가족 또는 수도원 위에 닥쳐올 경우에도、

우리는 거의 위와 마찬가지로 행동하여야 한다. 


 제3절 부귀와 빈천

 제4절 장소와 환경




p.205



제三편 위탁 (委託) 의 대상 (對象)


제  장 

외부적 선(善)과 악(惡) - 행(幸)과 불행(不幸)- 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제 二 절 공적(公的) 및 사적(私的) 재화(災禍) 




우리는 먼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재화(災禍.),즉 전쟁(戰爭), 질병(疾病)、기근(鐵鐘)、

그 밖에 천주의 분노에 기인하는 모든 재난(災難)에 있어 나타나는 

천주의 의지에 자신을 적합시켜야 한다。


불행이 우리 자신 및 근친자(近親者) 위에 닥쳐올 때에도、

마찬가지로 하여야 한다。 


거기에 이르는 큰 비결은、

무슨 일이거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통회와 겸손의 마음으로써 지극히 높은 분의 결정하심을 흠숭하며、

그리고 어떠한 재화가 닥쳐올 때라도

그것이 

무한히 현명하신 자부(慈父)로서의 천주의 섭리의 손에 있어、

국민 또는 개개의 영혼에 있어 

혁신(革新)과 구원과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면、

천주께서 그것을 결코 보내시거나、허락하지 않으신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천주의 섭리의 손은、

다른 길을 걷는다면 필경 멸망했을 많은 영혼을 

고난의 길에 의해서 천국에 인도하신다。


얼마나 많은 죄인이 

고난의 험악한 길에 의해서 천주께 되돌아 가고、

이전의 죄악을 버려、

참된 통회의 마음을 간직하고 죽음에 임하였는가。


후일 천국에서 영광의 자리를 점하게 될 얼마나 많은 신자가、

이 구원(救援)의 시련이 없었다면、

지옥의 불 가운데서 영원히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인가! 


우리가 소위 

천재(天災), 천벌(天罰)이라고 부르는 것도 흔히 탁월한 은총、

천주의 자비의 뚜렷한 증명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로드리게스」신부「그리스도교적 완덕」八편 二二장)



우리는 

모든 일을 이 신앙의 넓은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습관을 지니도록 하자。


그렇게 한다면、

현세에서 야기되는 어떠한 일도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할 수는 없고、

우리의 영혼의 평화와 섭리에 대한 신뢰、

두터운 복종을 동요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러나 아래에 

사회 전체의 불행을 비롯하여 다소 상세히 말하겠다。




p.206



一、 질병(疾病)、기근(鐵鐘)、홍수(洪水)、폭풍、

그 밖에 이러한 재해(災害) 안에 섭리의 손을 보는 것은 쉽다。


그것은、

자연계(自然界)의 무감각한 원소는 거스르는 일이 없으며、

항상 그 창조주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장 악마적인 악의에서 오는 박해、

또는 위세(威勢)룰 떨칠 수 있는 전란(戰亂) 안에 

어떻게 섭리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말한 것처럼 

거기에도 천주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선인과 악인 위에、또는 지옥의 도당인 악마의 배후에까지、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좌우하시는 최고의 지배자、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제 一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군주(君主)의 정책(政策), 장군(將軍)의 명령、병사의 복종、

박해자의 은밀한 간계(奸計) 

그리고 부하에 의해서 행하여지는 그 실행、

거기에서 야기되는 황폐(荒廢)함과 고뇌 등은 

모두 그 가장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천주께서 예견하는 것이며、

그 섭리의 계획에 있어 배합(配合)되고、결정된 것이다。


인간의 악의(惡意)와 천주의 성성(聖性)과의 사이에는 

미묘한 협력(協力)이 성립되는 것이다。




무한히 거룩하신 분은 악을 미워하시는 것을 막을 수 없으시다。


그렇다고는 하나、

인간의 자유의지의 자유로운 사용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일이 없도록 

그것을 참으신다。

그러나 때가 오면、그 불변의 정의(正義)는 각자에게 셈을 요구하신다。


즉 

영원성(水遠性)을 가지지 않는 가족 및 국민에게는 이미 현세에 있어、

개인 개인에게는 현세 또는 내세에 있어서이다。


그때까지 천주께서는 각기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사람들의 선의와 거룩한 업(業)을 

그 악의나 죄과(罪過)와 마찬가지로 이용하시려는 생각이시다。


이와 같이 하여、

인간의 혼란(混亂)까지도 천주의 섭리의 질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



p.207


인간 편에는 비난해야 할 많은 일이 있겠지만、

천주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반드시 심판하시리라。


그러나 천주의 섭리의 편에서는、


「모든 것은 바르고 모든 것은 현명하며、

모든 것은 좋고、 모든 것은 곧으며、

모든 것은 찬양해야 할 목적을 지향하고、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무한히 사랑하여야 할 종국의 결과에 도달한다



폭군 『네로는 

괴물(怪物)이었지만、많은 순교자를 나게 하였다。


디오글레시아노』황제는 

박해의 광포(狂暴)를 극도에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그것은 

반동(反動) 및 콘스탄틴』황제의 즉위(卽位)의 준비가 되었다。


이단자아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그 천주성을 빼앗으려는 악마의 탈바꿈이었는데 

그는 성교회에 이 천주성에 관한 교의(敎義)룰 결정하도록 촉구하였다. 


만족(蠻族)은 

오래된 세계 즉

로마』제국에 침입하여 유혈(流血)의 참상을 야기시켰는데、

그것으로써 도리어 그리스도교화될 민족을 복음을 위하여 준비하였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회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유럽』을 구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모든 것을 뒤엎었다。

그러나 그것을 기회로 하여 

저항을 부득이하게 된 그리스도교적 사회 안에 

발랄(凝刺)한 생기와 생명이 부활한 것이다.」

(「드 . 슈르몽」신부「섭리」一 편八장)



p.208


박해의 시대에는 악마가 날뛰며、

또한 의인(義人)이 구박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악인의 그러한 승리는 무엇 때문인가、

성교회의 그러한 패배는 무엇 때문인가、

대중의 그처럼의 부패는 무엇 때문인가、

국민을 멸망케 하는 불신앙(不信仰)의 정부는 왜 존재하는가。 


선량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냉담에 떨어져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선(善) 위에 악(惡)이 세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동 三편 二장) 



왜? 


그것은 천주께서 

공로와 벌의 조건인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존중하시는 이상 

그러한 것을 보류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악인을 회두시키시고、

잠든 이를 불러 일으키시며、

냉담한 이를 다시 뜨겁게 하시고、

의인을 지키시기 위하여 적절한 때라고 생각하셨을 적에 

죄의 세계 위에 널리 전란(戰亂)이 발발하는 것을 허락하시리라。


그리고 일단 재화(災禍)가 나타나자、

음침한 침묵은 세상을 뒤덮고、정치(政治)는 침묵하며、

신앙은 각성하고、교회는 사람으로 가득 찬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천주를 잊고 있었지만、

이제는 천주께서 일체의 사건의 지배자(支配者)심을 상기하게 된다。

사람은 어째서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폭풍을 일게 한 사람은 

그것을 좌우할 수도、

스스로 그 소용돌이 안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그러나 천주 자신이 바라실 때에 

모든 것을 완전히 시정할 권리를 보류하시면서、

갑의 선견(先見)、을의 무사려(無思慮), 

빈틈없는 함정과 교묘하게 계획된 모책(謀策)、

용기와 위업(偉業)、

죄과(罪過)와 악의(惡意)와 범죄(犯罪)까지도 이용하신다。


만사는 국민 위에、가족 위에、개인 위에、

화(禍}의 채찍질을 가하시기 위하여 천주께서 이용하신다。


천주께서는 

그것이 당신의 목적에 유용한 범위에 있어서만 그것을 행하시며、

즉 사람이 겸손되이 무릎을 끓을 때에는 

천주께서는 기꺼이 어루만지신다。


그렇지만 만일 최초의 날의 좋은 인상이 사라지고 

또는 언제까지나 완강하게 눈을 닫고 

마음에 통회의 정을 일으키지 않을 적에、

전란(戰亂)이 연장되고 

아마도 그 위에 다른 재화(災禍)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감히 불평할 권리가 있겠는가。


혹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천주의 계명을 전연 업신여기고 

나라들은 멸망하고、

많은 이가 지옥의 구렁에로 속속 달려가는 편이 

과연 좋다고 하겠는가。


p.209


그런데、

그처럼 인자하신 천주 안에 그러한 엄격함이 있음을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만일 그 것에 놀란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천주의 권라가 얼마나 무시되고 

그 사랑이 얼마나 모욕되고 있는가。


또한 그 은총의 무량하심과 우리의 악의의 극도、

영원한 행복의 환희와 끝없는 지옥의 혹독한 벌을 

조금도 깨닫지 않았음이 틀림 없으리라。



한히 인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성부께서는 약점을 보이시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가 영원한 구령올 요구하도록 우리를 사랑하신다


지상의 모든 번영(繁榮)이 

만일 우리로 하여금 

무관심과 망각의 동면상태(冬眠狀態)에 빠지게 하여 

그리고 우리가 멸망의 구렁에서만 눈뜨게 된다면、

그 번영은 오히려 최악의 재화(災禍)이다。


이에 반하여、

가장 무서운 재난, 

비록 그것이 아무리 오랜 세월에 걸치는 것이라도、 

영원한 지옥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천주로부터의 커다란 애련(哀憐)의 표시이며、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 대가로 천주의 정의를 어루만지고、

지옥을 피하며、천국에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있어 행운(幸運)이다。


참으로 이것은 하늘에 계신 성부의 계획이시다。

벌하시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우리가 자신이 수행하여야 할 임무와 자기의 참된 이익을 망각하고 

억지로 천주의 벌을 자초 (自招)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천주께서 우리를 교정(橋正)하실 때에、이에 반항한다면、

그것은 더구나 큰 잘못이다。


여하튼 천주께서는 엄벌을 내리시는데 성급하지 않으시다。


그것을 피하시기 위하여 

천주께서는 오랜 동안 우리를 위협하시고、

또한 매우 인내하시기까지 하시는데、

신앙이 약한 이는 그것에 놀라고 

악인은 그것을 들어 모독의 말까지 입에 담기에 이른다。


그러나、

천주는 최고 심판자로서 그 질서를 확립시키시고、

모든 영혼의 아버지 및 구세주로서、

그들을 엄격한 수단으로 구원(救援)의 길에 되돌아 오게 하실 날이 

드디어 올 것이다。


왜냐 하면、

이러한 영혼은 천주의 유화(柔和)한 수단을 

어디까지나 완강하게 거부하여 

이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p.210


천주로부터의 재화(災禍)는 어떤 이에게는 시련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벌이 되며、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는 갱신(更新)의 온총을 초래한다。


이것을 깨닫고、이것을 선용(善用)하는 이는 복되도다。



「드· 고사드」신부는 말한다。


「이러한 재화(災禍)는 

많은 이에게 있어서는 구령에 인도할 채찍이지만 

그것은 또한 동시에 다른 이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멸망에로 인도하는 채찍일 수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렇지만、그것은 멸망하는 이의 죄、

그리고 극히 커다란 죄에만 기인하는 것이리라。


참으로、

피할 수 없는 것같은 일을 선덕(善德)의 기회로 삼는 것보다 

더욱 이치에 맞고 또한 쉬운 일이 그밖에 또 있겠는가


무익하게 또는 죄가 되도록 

우리를 지상의 보잘것없는 재보(財寶)에서 때놓으려는 뜻에서만 

우리를 벌하시는 

어지신 아버지인 천주의 손에 대하여 왜 반항하는가。


천주의 분노까지도 그 애련하심에 유래하며、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것은 죄에서 돌이키시고、

또한 구하시기 위해서이다。


현명한 외과의(外科醫)처럼、천주께서는 생명을 보존하시고、

신체의 다른 부분을 돕기 위하여 부패한 살에、

생생한 곳에까지「메스」를 가하시는 것이다。」

(「드 . 고사드」신부「위탁」四장 및 「서간」三)



p 211


재화(災禍) 안에 있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너희는 천주의 강의(强毅)하신 팔밑에 스스로 너희를 낮출지니라。」

(베드루 전서5 .6)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것은 천주시며、

그 깨달을 수 없는 계획도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며、

가장 부조화(不調和)스럽게 보이는 사건까지도 

선(善)에 유익하게 하시는 길을 알으신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여、

효애(孝愛)의 복종으로써 섭리에 스스로를 맡기는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자기 한 개인에 관계되는 일에 관해서는、

천주 성부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


즉 천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바라신다면、

아무런 위험에 위협을 당하고 있지 않을 적에 

우리를 당신 곁에 부르실 수 있음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위험에 임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를 쉬이 구하실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를 시험하시기를 바라시드라도 

그 거룩하신 이름은 항상 찬미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때와 경우에 따라、

우리의 신분이 허락하는 한、최선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한다。


「폭풍우의 때는 폭풍우의 때다。

뱃사람은 그것에 무관하고 일한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하자。


미쳐 날뛰는 큰 파도 안에 삼켜지지 않고 

섭리의 바위에 의지하면서 이렇게 말하자。


『아、나의 주여、나는 당신을 흠숭하고 찬미하나이다。

나는 기꺼이 시련을 받고 어떠한 천후(天候)라도 감수하오며、

평화 안에 머물러 있겠나이다』」라고. 

 (「드·슈르몽」신부 「섭리」二편 一一 장)



⑶ 

따라서 우리는 기도하고 더욱 기도하며、

항구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하자、찾자、싸우자、애원하자、

만일 천주의 성의(聖音心)시라면이란 조건으로 화(禍)롤 멈추시도록、

또한 절대적으로는 

혹심한 시련 가운데서 멸망하는 영혼의 수가 가급적 적도록、

모든 이가 통회와 겸손의 마음으로써 천주께 되돌아가도록、

성인이 보다 많이 배출되도록、

사람들이 성교회의 소리에 더욱 충실히 따르도록、

천주께 배반하는 이가 적어지도록 

끊임없이 천주께 간구하자



「단식과 함께 행하여진 기도는 특히 탁월한 것이며、

애긍 시사는 천주의 애련하심을 초래케 하는 것이므로」(도비아 .12. 8-19) 


재난을 당하는 날이야말로 

다른 어떤 때보다도 모든 의무에 대한 충실함을 새롭게 하고 

의무로서 해야 할 희생에 더욱 약간의 고행(苦行)을 덧붙여 

하늘의 정당한 노여움을 풀도록 해야 할 때다。


왜냐 하면、

재난(災難)은 일반적으로 죄의 벌이며、

그런 것이 보편적이고 두려운 것일수록 

더욱 죄악의 파도가 천주의 의노(義怒)룰 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생활을 개선(改善)하고、

분노하시는 주、성부께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배가(倍加)시키는 사랑과 충성을 바치고 

우리의 근친자(近親者) 및 죄의 책임이 있는 세상을 위해서는 

속죄(腹罪)와 배상(賠償)의 제물을 아낌 없이 바치는 것외에 

훌륭한 길은 없다。



p.212



二、 재난(災難)이 우리 위에、

우리의 가족 또는 수도원 위에 닥쳐올 경우에도、

우리는 거의 위와 마찬가지로 행동하여야 한다. 


그러한 재난 가운데 있어서도 천주만을 

더구나 사람들의 영혼의 행복을 배려하시는 

어진 아버지신 천주만을 우러러 보도록 힘쓰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재난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아직 몇해 더 살았다면、

혹은 대죄 중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저 질병 때에、

나의 인내가 그토록 부족하였기 때문에 

아직도 三○년이나 四○년 동안 더 살아서 공로를 쌓아야 한다。


나의 영원한 구령은 

그토록 눈물의 원인이었던 저 굴욕(屈辱) 에 달려 있었다。

만일 저 돈을 잃지 않았더라면、

나의 영혼은 멸망했을 것이 틀림 없다。


어째서 우리는 불평할 수 있겠는가。


천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역할을 맡고 계시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불안 속에 있는가! 


아、만일 천주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계획을 보다 잘 깨닫는다면、

우리는 외관상 가혹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있어서도 

천주를 찬미하리라。


이 효애(孝愛)에서 나오는 위탁은 우리의 공로를 더하게 하고、

우리를 평화안에 머물게 하며 천주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위에 흔히 성공의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p.213


「방문희(訪問會)」가 생긴지 겨우 二개월 후에、

「샹딸」의 성녀 「요안나」는 

죽옴을 면할 수 없을 정도의 중병에 걸렸는데、

그것은 「즈네브」의 거룩한 주교에게 있어 커다란 시련이었다。


왜냐 하면、

그는 이 사업이 천주의 뜻에 의한 것이며、

가장 커다란 선익(善益)을 반드시 세상에 초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자가 넘어진다면、

양떼가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주께서는 아마도 우리의 첫 걸음으로 만족하게 여기신다。

천주께서는 우리가 여정(旅程)을 전부 걷기에는 

아직도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천주께서 기대하신 것은 참으로 이 위탁의 행위 뿐이었다。


얼마 후、천주께서는 거룩한 창립자를 회복시키시어、

오랜 세월의 건강을 주셨다。(「성 프란치스 꼬·살레시오 전」五편)



창립 당초의 신고(辛苦)、회원모집(會員募集)의 곤란、

사망자、탈회자(脫會者)、분리(分離)、 모반(謀叛) 둥의 속출、

극도의 궁핍、외부로부터의 박해、관권(官權)의 귀찮은 간섭 등등、

성「알퐁소·리고리오」가 그 수도회의 창립에 있어 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가장 맹렬한 폭풍우의 한 복판에 있어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또한 인력의 최선을 다하여、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는 것만을 오직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하늘의 계획은、경건한 창립자가 완전한 모범이 되어、

그 수도회는 성인의 못자리가 되는 것에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유서 깊은 수도회의 시조 (始祖)가、

가난하게 살으시고、모욕을 당하시며、박해를 받으셨던、

천주신 구세주의 모습을 닮는다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 것이었겠는가。」

(「베르트」신부「성인전」六편 九장) 



p.214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의 하나는、우리와 친근한 이의 죽음이다。


「즈네브」의 유화한 성 주교는 어머니의 사망 후、

「샹딸」의 성녀 「요안나」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그 계획이 거룩하시고、 선하시며、그리고 사랑하여야 할 

지극히 높으신 섭리를 

어떤 일에 있어서나、어디에 있어서나、 흠숭해야 되지 않겠읍니까。


그러므로 

이제 나의 지극히 사랑하올 어머님을 이 비참한 현세에서 걷우시어、

그리고 내가 굳게 희망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당신곁에, 그 오른 손 안에 두신다는 것은 섭리에 합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께서 지극히 선하시고、그 자비하심은 영원하시다는 것을 

공언(公言)합시다。


천주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은 올바르시며、

그 모든 결정은 공평(公平)하시고、

그 뜻은 항상 거룩하시며、

그 명령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매우 애정이 깊은 아들이었던 성인은、

그의 모친의 서거에 극히 심한 비통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 타격을 주신 분이 천주시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불만을 드러내는 일도, 불평하는 말도 감히 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누이의 사망 후、

몹시 그것을 슬퍼하고 있던「샹딸」의 성녀「요안나」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p.215


「천주께서 우리를 채쩍질하시는 것을 감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위에 또한 천주께서 당신이 좋다고 여기시는 곳에 있어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것에 동의(同意)하여야 합니다。


선택은 단지 천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은 천주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여、원하오니、

제거하시는 바도、『만일』도 『그러나』도 예외도 제한도 없고、

당신의 뜻이 

아버지 위에、어머니 위에 딸 위에 만사에 있어 도처에서 이루어지시기를! 


아、물론 나는 

그들이 더 살기를 바라고 기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딸이여、천주를 향하여

『이것을 남기시고、저것을 걷우소서』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대에게는 네명의 아이와、한 사람의 의부(義父) 와 

그처럼 사랑하고 있는 한 사람의 형제、

그 위에 한 사람의 영혼상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러한 분들은 모두 그대에게 있어 극히 친근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천주의 뜻이시므로 도리에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령 천주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모두 빼앗아 가셨다 하드라도、

아직 천주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대에게 있어 충분하지 않겠읍니까。


그리고 그대의 생각에 의해서도 그것은 전부가 아니겠읍니까。


우리들이 천주만 소유하고 있다면、그것으로 넉넉하지 않겠읍니까」 

라고(「서간」四三一、四五八) 


그런데 죽음은 잠시의 이별에 불과하다。


거룩한 생애 후의 행복한 

임종과 천주의 곁에 있어서의 영원한 재회(再會)、

그것이 유일한 중요사(重要事)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천주께서는 우리 자신에 있어서도 

우리 친척에 있어서도 

죽음의 가장 적당한 시기와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신가。




성 「알퐁소」는 말한다。


「사람이 친척이나、벗의 죽음에 있어 다소 눈물을 흘린다해도 

그것은 허용되는 인간의 나약함이다。

그렇지만 격심한 비통에 몸을 잠기게 한다는 것은

덕의 부족과 천주께 대한 사랑의 부족이다。


그렇다고 훌륭한 수녀들이 

양친、그 밖에 각별히 사랑하고 있는 이를 잃었을 때에는 

결코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그것이 천주의 뜻이다』라고 속삭이며 

인종(忍從)하여 평온함을 잃지 않고、

기도와 영성체를 더 자주 하여、 

이러한 친밀한 영혼을 위하여 빈다。


그것은 천주와 더욱 더 친밀히 일치하여 후일 천국에 있어 

함께 다시 볼 수 있다는 거룩한 희망에 의하여 

자신을 위안시키기 위해서다。(「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정배」一二편 二·六)



p.216


성「벨나도」는 사랑하는 형제의 한 사람을 잃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죽음이란 

자연에 대하여 지불해야 할 공물(貢物)、

만인에게 부과된 부채(負債)、

우리의 상태에 필연적인 것、

전능하신 분의 명령、

의(正義)의심판자의 판결(判決), 

두려워해야 할 천주로부터의 화(禍)、

즉 주의 성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여、

신앙의 전력을 다하여 마음의 정(情)에 저항하였다。


나는 자신의 눈물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마음의 비통함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억제할수록 더욱 더 혹심한 것이 되었다.. 

나는 지고 말았다。


나는 이것을 고백하는 나의 비탄(悲嘆)이 얼마나 올바른 것인가、

얼마나 충실한 벗이 나를 버리고 갔는가、


나의 벗이 얼마만큼 조심성이 깊으며、

근면하고 우화하며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대들은 잘 알고 있다。


누가 그이처럼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가。

그이처럼 나에게 있어 필요한 이는 누구였던가。


몸이 약할 때에 나를 잘 지탱해 주었다。

담력이 작을 때에 나를 용기로 북돋아 주었다。

태만하고 소홀함에 흐를 때에 나를 잘 격려해 주었다。

망각하기 쉽고 조심성이 없을 때에는 나에게 잘 충고해 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혈연(血緣)에서라기 보다도、

오히려 

정신의 친화성(親和性)과 심정의 조화(調和)와 성격의 화합(和合)으로써 

결합되어 있었다。


우리 둘의 영혼은 하나로 되어 있었다。


같은 타격이 우리들의 영혼에 가해지고、반은 천국에 옮겨졌으 며, 

다른 반은 지상에 남겨졌다。


p.217


참으로 나의 『제랄드』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즉 그는 혈육에 의해서는 나의 형제、

서원(誓願)에 의해서는 나의 아들、

경건한 마음씨에 의해서는 나의 아버지、

정신에 의해서는 별개의 나、

애정에 있어서는 나의 친우(親友)였다。 


그러한 그는 나를 떠나 버렸다。

나는 이 타격으로 상처를 입고 있다。


영혼의 밑바닥에까지 나는 울고 있지만、

나에게 타격을 주신 손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의 말은 비애에 넘치고 있지만、

그것은 불평이 아니다。


나는 동일한 선고(宣告)가 각자의 몫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벌을、다른 한 사람에게는 보수의 관을 주신 것을 

인정하고 있다。


유화하시고 정의이신 주께서는 

당신의 종인 『제랄드』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나에게는 그 정의의 무거움을 느끼게 하셨다。


주여、당신은 나에게 제랄드』를 주시고、또한 걷우셨도다。

나는 그를 뻬앗겼기에 통곡하나이다。


그러나、나는 그를 당신 에게서 받은 것을 잊지 않으오며、

그와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음을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당신은 자신의 위탁물(委託物)을 청구하시고、

당신의 소유를 되찾아 가셨도다。


나의 눈물은 내가 더 말함을 방해하나이다。

주여、나의 눈물에 한도(限度)와 끝이 있게 하소서。」

(「아가에 관한 설교」一六)